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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에게 진상' 고통 주던 나무가 자녀 대학 보내는 나무로
북한에 감귤 보내며 남북교류 한 몫 … 고유 품종 개발 시급

[※ 편집자 주 = 제주에는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생성된 독특한 문화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세대가 바뀌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독특한 문화와 함께 제주의 정체성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고 불안합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후진적이고 변방의 문화에 불과하다며 천대받았던 제주문화.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속에서 피폐해진 정신을 치유하고 환경과 더불어 공존하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제주문화가 재조명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라는 우리말은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란 뜻 외에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 또는 '하다가 그친 것을 계속해서'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제주문화를 돌아보고 새롭게 계승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제주문화가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계승해 나갈 방법을 고민합니다.]

 

 

제주를 대표하는 상징물 하면 돌하르방, 해녀, 한라산, 조랑말 등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또 하나 '감귤' 역시 빼놓을 수 없다.

 

2022 제주감귤박람회가 지난 10일 개막, 전시·학술·문화·체험 행사 등을 통해 제주 감귤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

 

감귤이 제주의 역사, 문화,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감귤을 알면 제주가 보인다.

 

◇ 임금께 진상했던 제주 감귤

 

전 세계적으로 아열대 또는 열대 기후에서 자라는 감귤의 원산지는 인도 북동부와 중국 남부로 알려졌다.

 

특히 중국은 감귤 재배 역사가 가장 오래된 나라로, 문헌상으로는 기원전 300∼4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감귤을 재배했을까.

 

제주 감귤에 대한 기록은 '고려사'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전부터 감귤이 재배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 문주왕 2년(476년) 4월에 탐라국에서 방물을 바치자 왕이 기뻐하여 사자에게 은솔이라는 벼슬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탐라에서 바친 공물에 귤이 포함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사'에는 고려 문종 6년(1052년)에 '탐라국에서 해마다 바치는 귤의 정량을 100포로 개정 결정한다'고 돼 있어 감귤을 재배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제주 감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조선시대 들어 제주 감귤은 해마다 나라에 바치는 주요 공물로 관리됐다.

 

매년 제주도의 특산물인 감귤이 진상돼 올라올 때 임금은 성균관 유생의 학문을 권장하기 위해 감귤을 하사하며 특별한 과거시험인 '황감제'(黃柑製)를 열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관에서 감귤 과수원을 직접 운영했고, 진상하는 감귤의 종류도 유자, 당유자, 감자, 산귤, 청귤, 담금귤, 석금귤, 동정귤 등 다양했다.

 

많은 감귤원이 조성됐음에도 나라에 바치는 귤의 수량을 맞추기 어려워지자 지방관리들은 일반 백성들에게 감귤 공납을 강요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관에서는 민가에 있는 귤나무를 일일이 조사해 관리했는데, 귤이 열리자마자 그 수를 장부에 기록했다가 나중에 그 수량만큼 공납하도록 귤나무 소유자에게 부과했다. 수확시기까지 과실이 해충 또는 비바람에 상해 못쓰게 되더라도 무조건 수량을 채우도록 강요했다.

 

민가에서는 귤나무가 오히려 '고통을 주는 나무'라 해서 귤나무에 더운물을 끼얹고 고사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 고통을 주는 나무가 '대학나무'로

 

농민들은 자신에게 '이득'이 아닌 '고통'을 주는 감귤 재배에 관심이 없었다.

 

일본 강점기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조선 말기에서 일제시대에 이르는 혼란기에 새로운 감귤 품종들이 제주에 들어왔다. 

 

온주감귤이 들어온 것.

 

온주(溫州)는 중국 절강성 남동부 해안에 있는 항구도시로, 이 지역에서 유래된 감귤을 온주감귤이라 일컫는다. 일본에서도 '온슈미캉'이라고 하는데 오래전에 온주감귤이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고 있다.

 

개량종으로서의 온주감귤이 제주에 도입된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조선 말기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박영효가 1907년(융희 원년) 9월부터 제주로 유배, 이후 3년 동안 머물면서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온주감귤 과수를 구남천(지금의 제주 구남동 일대)에 심어 관리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현재 그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1911년 프랑스 출신 에밀리 타케(한국명 엄택기) 신부가 일본에서 온주감귤 15그루를 들여와 서귀포시 서홍동 홍로성당에 심었다. 당시 온주감귤 중 1그루가 최근까지 살아남았지만, 2019년 4월 고사했다.

 

에밀리 타케 신부가 들여온 귤나무가 제주에서 주로 재배하는 온주감귤의 시초로 보는 의견이 많았다.

 

지난 2011년 제주에서 온주감귤 재배 10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려 했지만, 결국 백지화됐다.

 

 

제주에서 삼국시대부터 감귤을 재배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도 일본에서 들여온 온주감귤을 부각하는 행사를 열 경우 제주 감귤의 뿌리가 일본으로 잘못 알려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에도 제주 4·3, 6·25 전쟁 등 사회 혼란이 이어지면서 상품성 있는 감귤생산은 이뤄지지 않았고 감귤은 거의 야생화됐다.

 

그러나 1960년대 들어 감귤은 제주에서 진가를 인정받게 된다.

 

감귤값이 점차 비싸게 형성되면서 감귤 재배 농가가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1964년 2월에는 연두순시차 제주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감귤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라는 특별지시를 도지사에게 내린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제주도는 여건이 달라 전국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식량 증산' 대신 수익성 높은 감귤을 적극 장려하라"고 지시하자 1965년 '감귤증산 5개년 계획'이 수립됐고 감귤 재배는 급성장했다.

 

당시 일본산 감귤 묘목이 들어온 데 이어 '감귤 제주 이루자!'는 구호 아래 감귤 증산대회가 열리고 '결혼 기념 감귤 심기 운동'까지 생겨나면서 학교에서도 소득작물로 감귤을 심었다.

 

1964년에 110㏊에 불과했던 재배 면적이 10년 후인 1974년에는 9천923㏊에 달하며 90배라는 초고속 성장을 했다.

 

이듬해인 1975년에는 재배 면적이 1만㏊를 넘어섰고 농가 수입은 146억원대에 이르렀다.

 

감귤은 1960∼1970년대 다른 농작물에 비해 수입이 월등히 높아 집 정원에 몇 그루만 심으면 자녀의 학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고 해서 '대학나무'로 불리는 등 제주의 주요 농산물로 자리 잡았다.

 

 

◇ 남북교류 한몫…제주 감귤 위기도

 

감귤 재배 면적은 계속해서 늘어났고, 재배되는 감귤 품종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다양해졌다.

 

1987년에는 서귀포 농장에서 온주밀감 하우스 재배가 성공을 거둬 1998년에는 하우스 감귤 재배면적이 553.9㏊까지 늘어 감귤의 연중 생산체계가 확립됐다.

 

이어 감귤은 간식거리 외에도 감귤주스, 감귤꽃 향수, 감귤식초, 감귤초콜릿 등 다양한 제품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일당 3000∼400천원을 받고 감귤가공공장에서 감귤 껍질을 까는 부업이 여학생과 부녀자들 사이에 인기를 끌었다.

 

또 공장에서 버린 감귤 껍질을 한약재 상인들이 인수해 부녀자들에게 월 10만원씩 주기로 하고 햇볕에 말리는 일도 성행했다.

 

제주 감귤아가씨도 등장했다.

 

1981년부터 제주 감귤의 구매력을 높이기 위해 제주 감귤아가씨 진·선·미를 뽑아 전국 주요 도시에 친선 사절로 파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주감귤아가씨 선발대회는 외모지상주의를 조장하고 청소년들에게 잘못된 성 가치관을 갖게 한다는 이유로 지난 2006년 폐지됐다.

 

1989년에는 감귤이 대풍작을 거둬 가격이 폭락하자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에서 재배농가를 위해 국내선 모든 탑승객에게 감귤을 제공하는 일도 있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청견, 진지향, 한라봉 등 온주감귤보다 크고 당도가 높은 만감류가 도입되면서 품종은 더욱 다양화됐다.

 

감귤은 남북교류에도 큰 역할을 했다.

 

1999년 1월 20일 제주산 감귤 100t이 북한에 보내졌다.

 

제주항에서 농민과 도민 300여명이 크레인에 의해 선적되는 감귤컨테이너를 보며 태극기를 흔들었고, 이는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북한에 물품지원을 한 첫 사례였다.

 

인도적 차원의 감귤 보내기 사업은 1999년부터 2010년까지 12년간 이어졌다.

 

북한은 2002년 5월 제주도민 255명을 시작으로 2007년까지 4차례에 걸쳐 제주도민을 초청하는 등 감귤 보내기 사업이 남북 교류와 화해에 한몫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감귤보내기 사업은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사태로 중단, 지금까지 재개되지 못하고 있다.

 

감귤은 오렌지 등 감귤류 수입개방과 품질 저하로 위기를 맞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감귤 재배 면적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고, 2010년대 들어서는 타지역에서도 감귤 재배를 시작하면서 감귤이 제주의 전매특허라는 일반 상식은 깨졌다.

 

남쪽 지방에서 주로 나는 귤의 생산지가 하우스 감귤 등으로 점차 북상하면서 최근에는 중부 지방인 경기도에서도 본격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게다가 현재 제주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감귤이 일본품종인 점도 문제다.

 

제주가 감귤의 특산지로서 과거의 영광을 계속해서 이어가기 위해서는 현재의 노하우를 살려 더욱 맛있는 감귤을 생산하기 위한 품종 개발이 시급하다는 주문이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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