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잃어버린 우산 비는 그쳤고 난 우산을 폈다 “아무리 부정한다 해도 돈을, 돈벌이를 무시할 순 없었지. 하지만 아빠가 이것을 시작하면서 돈보다는 시간을, 내 시간을 돈보다는 더 소중히 여겨 오로지 내 시간만을 즐겨보자 했지만 말이다. 진짜 그랬다. 오십 평생 살아왔지만 정작 나를 위해서 쓴 날들이 며칠이나 될까 돌이켜 꼽아봤지. 대학부터 내가 가고 싶었던 미대는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 아빠가 지레 짐작해서 포기하긴 했지만... 할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셨을 때 자식들을 모아 놓고 뭐라 하셨는지 아니? 배운 게 없어서 사업에 실패했다고 하셨어. 그러니까 우리 보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시더구나. 할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신 때는 아빠가 중학교 2학년이었거든. 나는 아버지,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지? 배운 게 없어 실패했다는 그 말씀을 늘 새겨야 했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잊지 못했단다. 그래서 결정한 과가 경제학이었지. 아빠가 고등학생이 되어도 할아버지는 다시 사업을 일으켜 세우지 못하고 결국 아빠가 고3될 무렵 다 포기하셔야 했어. 어린 나이에 아빠는 경제학과에 가서 공부해 아버지 사업을 다시 이어갈 수 있게 해드려야지 했는데. 그러나 막상
10. 타타타 삶의 의외성 더 신날 수 있지 이래서 손님들이 끊이지 않는구나 하며 아버지의 가게에 대한 의구심이 조금씩 풀려간다. 다른 유능한 사업가들처럼, 굳이 유능하지 않더라도 사업을 시작하는 누구에게나 해당사항이 되겠지만, 철저한 사전 계획을 세우고 냉정한 시장조사를 끝내고 이에 적절한 구체적 사업구상으로 이어지는 마케팅전략과 같은 비스무리한 것조차도 갖고 있지 못한 사람이 바로 내 아버지가 아니던가. 전단지를 뿌린다거나 하다못해 동네 생활정보지에다가 광고를 내며 홍보하는 일조차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사람이 역시 내 아버지가 아니던가. 비즈니스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사람이 바로 내 아버지다. 하지만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어떤 일이든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며 방심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일은 없다. 곁에서 보면 성실하다, 솔직하다, 우직하다, 한 마디로 말하면 꾸밈이 없다고 할까 가식이 없다고나 할까, 하여튼 거짓은 없는 것 같다. 이래서 남들에게 말짱말짱하게 보여 손해를 보는 일도 종종 있지만, 이를 테면 이사할 때마다 복덕방 말을 너무 믿어 늘 복잡한 일에 엮이곤 했다. 아버지는 이럴 때마다, “이 아빠가 생각이 모자라
9. 먼 훗날 그의 먼 훗날 꼭 이루어지길 그는 아버지 또래라고 했지만 거의 반백에 몸도 수척하여 나이가 더 들어보였다. 늘 혼자 카페를 찾았다. 꼭 <먼 훗날>을 아버지에게 부탁하곤 했다. 그의 집은 제주도 남원도, 그 너머 서귀포나 제주시도 아니었다. 서울이었고 서울 동쪽 끝자락의 천호동도 지나야 있다고 했다. 그 먼 길을 밟아 이곳까지 자주 왔다. 정확히 말하면, 카페는 그가 가는 길목일 뿐이다. 물영아리 오름 정상의 습지분화구에서 한참 머문 뒤 찾는 곳이 바로「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였다. 아버지와 나는 쉬는 월요일, 자전거를 타고 비좁은 간선도로 남조로 남원에서 물영아리를 지나 교래리까지 다녀오곤 한다. 목 하나만큼은 족히 더 큰 아들을 여전히 허리춤 키의 초등학생으로 아직도 여기고 있어서 자전거를 차도로 달릴 때면 언제나 나를 앞세운다. 뒤에서 안전을 봐주겠다는 것이다. 이젠 컸으니 자리를 바꾸자 해도, 이젠 내가 아버지를 지켜줘야 한다며, 아버지 얼굴 앞에 내 어깨를 으쓱해보여도 아버지는 끄덕도 안 했다. “앞 서거라. 내가 뒤에서 쫓아가마.” 그렇게 해서 도착한 마을수호신 팽목 앞. 자전거를 받쳐 놓고 아버지
6. 목로주점2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양주는, 사오겠다던 양주는? 어어, 손이 놀고 계시네. 저 손에 뭐 잡혀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동조를 구하듯 역시 거드름을 피며 옆 동료들을 둘러보고 또 역시 두 명 다 고개를 아까처럼 꼭두각시이듯 끄덕거리고 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이만 하시죠.” 노래가 그쳤고 기타가 멈췄다.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르던 동렬이가 다가왔다. “소주 안 사왔어? 소주 사러 간다고 나가지 않았던가? 그래에, 맥주만 마시고 있으니까 싱겁더라구. 우리도 이런데 젊은이들이야 더 어떻겠어. 어이 젊은이들, 우리랑 같이 한잔 합시다. 이 친구가 콱 막혀가지고 고집불통이거든.” 그 불량스러운 사내는 금세 히죽해 가지고는, “그렇죠? 싱겁죠? 라이브카페가 뭡니까? 마시고 즐기자는 거 아녜요? 오늘 같은 밤 무엇을 하나, 뭐 이렇게 지르며 마시자고 차린 게 라이브 아니겠어요? 그래야 돈도 벌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과는 다르게 친구분께서는 탁 트이셨네, 트였어!” 이러면서 조릿조릿해 하는 아버지의 빈 손을 두 눈으로 훑는다. &ld
8. 찔레꽃 네겐 어릴 적 한 번 더 남았네 “아빠, 정말 의외거든? 아빠가 이런 카페를 차린다는 게, 차렸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질 않아. 아빠는 장사나 사업에는 절대 적성이 맞지 않는다고 나는 장담하는데. 그렇잖아. 아빠는 자기의 작은 이익은 남들의 손해로 인해 얻는 것이라고 믿고 있잖아. 아빠가 어릴 적부터 나한테, ‘내게 이익이 되는 일은 남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늘 잊지 말고 명심하라’고 얼마나 얘기했어. 그런데 고등학교 때 배운 경제학에선 다르더라. 기업은 이윤추구가 목적이고 이윤추구로 인해 사회전체의 경제도 더불어 발전하게 된다는 거지. 하지만, 아빠는 이와는 반대생각이잖아. 내가 덜 먹더라도 남엣것을 내 것으로 할 순 없다, 이게 아빠의 경제학지론 아닌가? 아무튼, 아빠가 이런 걸 차렸다는 게 지금도 내 머리를 갸우뚱하게 한단 말야.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켜봤는데, 또 하나 의외는, 여전히 아빠는 돈 버는 데는 거의 연연하지 않더라. 이러면서도 손해 안 보고 4년 넘게 이걸 유지하고 있는 걸 보면 신기함을 넘어 신비할 정도라니까. 내 아빠한테 내가 모르는 이런 점이 있었던가 하고 입이 절로 쩌
7. 나는 행복한 사람 꾸벅 이 아래 구두닦입니다 “바누아투라고 들어봤나? 난 처음 들어본 곳인데 그 나라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하는구먼. 남태평양에 있는 섬나라라는데, 1인당 국민소득으로는 2천 달러도 채 안 되니 극빈국에 속하지만 행복지수는 세계 1위라 이 말이지.” 구두를 옆으로 밀어놓자 구두닦이가 이를 받아들었다. “죄송합니다만, 옆에 꿰맨 실이 풀리는지 벌어지려고 하는데 이것도 좀 수선해줄 수 있나요? 하도 오래 신어서 새 것으로 바꿀 때도 됐지만 아직......” 자기가 고칠 수 있는지 보겠다며 구두닦이는 아주머니에게서 운동화를 건네받았다. “더 신어도 되겠는 걸요? 제가 더 꼼꼼히 만져보겠습니다.” 닦을 구두와 꿰맬 운동화를 제 가슴팍에 받아들고 구두닦이가 다른 자리로 옮겨가고 있었다. “저도 들었어요. 뉴질랜드 옆에 있는 섬이라지요? 그곳 사람들의 사진들도 보았는데 검게 그을린 얼굴로 웃는 모습이 행복해보이긴 하더군요. 그런데 전 이런 생각을 해봤어요. 문명이라는 것을 몰라서, 세상물정에 때 묻지 않아서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지요.
6. 목로주점~1 1인 만원은 넘지 않기로 함 아버지 가게-라이브카페라고 말하긴 아직도 계면쩍다-에서 일한 지 한 달이 되었다. “하나 있는 아들, 부려먹기만 했는데 오늘 우리도 한 잔 할까?” 언제나 이 말이 나오나 했는데, 한 달이라니. 사실 바쁘긴 했다. 비비대기칠 정도는 아니지만, 그 동안 손님이 적지만은 않다는 걸 일 주일 만에 알아챘으며 또 꾸준히 찾아주는 단골고객을 꽤 많이 확보하고 있다는 것도 보름쯤 지나면서 역시 알아차렸다. 아버지 일을 도와주면서 읽지 못한 책들, 특히 1920년대 이후의 우리나라 소설들을 일 중간에 짬 내서 읽을 요량으로 소설 한 권을 챙겨 들고 나갔지만 그게 생각처럼 여의치가 않았다. 일이 많아서다. 손님이 끊이질 않아서다. 손님도 많고 벌이가 된다는 게 도대체 믿겨지질 않는다. 내가 봐도 돈 버는 데에는 수완이라고는 동네 개구쟁이 코 밑에 묻은 코딱지만큼도 없는 아버지가 어떤 방법으로 이런 엄청난 성공을 할 수 있었을까? 사실 성공이라고 내가 말은 하지만, 적자도 감수하겠다던 시작이었기에 적자를 추월해 저축도 조금 한다고 하니 결코 실패는 아니지만 또 성공이랄 것도 없다. 그러나, 아버지 말마따나
5. 꿈의 대화 우리 세상을 둘이서 만들자 어느 것 하나 수월한 일이 없었다. 사람이 몇 해 몸을 들이지 않던 집이라 전기도 끊기고 물도 나오지 않았다. 전기는 전화국에 신청하기만 하면 곧 설치가 가능하다고 했지만, 문제는 물이었다. 시내와 같은 수도는 상상할 수도 없다. 언덕 아랫마을 사람들도 지하수를 이용하는데 이곳은 아랫마을보다도 더 오지였다. 주인이 살던 몇 년 전만 해도 지하에서 전기모터로 물을 끌어 썼다 했다. 벌써 세월이 지나 지하 웅덩이는 이미 오염돼 썩어 있었다. 그나마도 불법이었다. 그러나 물은 절대로 필요했다. 지하를 파려니 경비가 만만치 않았다. 지대가 높아 깊이 파야 할 것이라며 지하수개발업자는 양손에 은색빛이 반짝이는 젓가락 같은 쇠붙이를 들고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물길을 찾기가 힘들겠다고 했다. 마당의 이곳저곳을 그 쇠막대를 앞세워 돌아다니더니 물은 있긴 한데 깊이 파야겠다고 했다. 그가 멈춰 선 곳에서 손에 들고 있던 은빛 쇠막대기가 핑그르르 돌았다. 자기가 서 있는 곳을 파면 된다고 하면서 또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30m 깊이까지 파서 나오면 다행이지만 나오지 않을 경우 대공, 즉 더 굵은 파이프를 심
4. 아름다운 것들 마당 한켠에 느티나무하나 요즘 뉴스를 보면 참으로 무서운 존재가 인간이라며 섬뜩한 두려움을 넘어 치떨리는 공포마저 들지만, 그래도 인간의 손길은 아름답다는 믿음을 카페 앞마당의 느티나무 한 그루가 갖게 해준다. 느티나무는 원래 없었다. 다 허물어져가는 시골집을 어디부터 고쳐나가야 하나, 아버지는 고민으로부터 보수를 시작해야 했다. 주인도 거들떠보지 않던 허술하기 짝이 없는 버려진 집을 단지 고쳐서 써도 된다는 이 한 마디에 성큼 그 집을 떠안긴 했지만 사실 손을 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보면 볼수록 엄두가 나질 않았다. 평생 직장만 다닌 아버지는 무엇을 고치는 데는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이러니 경험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해야 했다. 하고 싶은 일을 꼭 일 년만이라도 하자 하여 발을 들인 자발적인 선택이지 않았던가. 막막해서 그저 바라만 보고 있던 사흘째, 메모지와 연필을 들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돈은 가장 적게 들인다. 둘째, 이러니 모든 일은 손수 내가 다한다. 셋째, 가능한 한 부시지 않고 현재 상태를 유지한다. 넷째, 내부는 깨끗이 치우고 외부는 부분 부분 나무로 덧대되, 시골돌담집을 도시카페로는
3.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참자 하지마 웃어 더 웃자구 가게에 나온 지 일주일쯤 지나자 벌써 낯익은 얼굴이 몇이나 됐다. 처음엔 아버지 친구들인 줄 알았다. 나이도 엇비슷한 중년의 남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게를 열기 전 알고 지내던 친구는 아니었단다.「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정말 어설픈 라이브카페에서 처음 인연을 시작했으니「나는 서툴다 고로 존재한다」가 맺어준 친구라고 하면 적절한 표현이 될 것 같다. 카페를 열기 전 몇 년째 빈 채로 버려지다시피 한 헌 집을 혼자 새로 꾸미느라 힘도 들었겠지만 문제는 카페를 열고 난 뒤였다. 아버지는 모든 일을 혼자 다 해야 했지만 이는 단순한 육체적 노동, 나아가 운동쯤으로 여기니 오히려 견딜 수가 있었다. 그러나 손님의 반응은 아버지의 낙천적인 성격을 감당할 순 없었는가 보다. 아버지를 '또라이'로 본 것이지만 사실 아버지 자신 외엔 누구든 그렇게 볼 게 분명했다. 아들인 나도 그러할진대. 아들이 아버지를 분석하자면, 아버지가 낙천적인 사고를 하고 또 그에 걸맞게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수없이 들어왔던 소위 우리집 가훈에서 비롯된다. ‘시간을
2. 홀로 아리랑 동업 하려다 의만 상하겠다 내 기억으로는 아마 카페를 열기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4년 전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일기에 적힌 날짜도 내 기억과 엇비슷했다. 아버지는 마냥 쉴 수만은 없다며 여기저기 가게를 알아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메일로 내게, ‘아들만 없다면 난 더 쉬어도 되는데...’ 라며 잠시 나를 우울하게 했다. 옹종해져 답했다. ‘이 아들, 돌아갈까요?’ 아버지는 계산을 해본 게다. 따져본 게다. ‘그냥 거기 있거라. 여기 와도 그 돈은 써얄 테니까. 남들 다 해주는 것, 안 해 줄 수도 없고.’ ▲ 커피로 그린 그림, 좋을 호(好). 그림=오동명 사교육비, 그러니까 과외비를 염려한 게 분명하다. 이런 뒤 서울의 아파트를 팔고 훌쩍, 정말 뜬금없이, 유일한 가족인 나와 상의 한 번 없이 제주도로 이사했다. 팔고 이사 간 후 서울의 아파트 값은 훌쩍 뛰기 시작했다. 더 올랐다는 제주도에선 집이나 땅을 사지 않고 세 들어 사니... 아버지는 돈과도 좋은 인연을 맺지 못하는, 아버지를 이렇게 말하면 불효자식에 호로자식이란 말을 들을 테지만 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