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삭 감독의 화제작 ‘미나리’는 사실 감독부터 주연배우들까지 모두 생소하다. 오히려 ‘Plan B’라는 제작사 이름이 브래드 피트 이름값에 힘입어서인지 익숙한 편이다. 영화 출연진 중에 그나마 눈에 익은 이름은 조연으로 이름을 올린 윤여정뿐이다. ▲ 영화의 배경은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바람이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하던 레이건 대통령 시대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미나리’는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스토리로 알려진, 미국에 이민 온 한 가정의 이야기를 다룬다. 대부분 사람들의 삶이 그렇듯 그저 조금은 답답하기도 하고 잔잔하기도 하다. 호화 캐스팅에 어마어마한 물량을 투입해서 때려부수는 블록버스터 할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독립영화’ 같기도 한 ‘미나리’는 조금은 따분하기도 할 듯하다. 그럼에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고, 윤여정에게 여우조연상까지 안겨줬다. 외국 관객들에겐 무명에 가까운 감독과 배우들이 200만 달러란 저예산으로 이뤄낸 대단한 성과다. 당연히 무엇이 수많은 영화제와
공감능력이 좋은 사람들은 상대방을 감싸고 보듬어준다. 하지만 상대방의 아픈 곳을 잘 후벼 파는 사람들도 공감능력이 뛰어나다. 남이 아파하는 걸 공감해야 남의 아픈 곳을 찌를 수 있어서다. 문제는 공감능력을 후자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사회가 시끄러워진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어떨까. ▲ 사회가 다양화·파편화하면서 ‘공감’의 문제가 제기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멜빈 유달(잭 니콜슨)은 ‘잘나가는’ 소설가다. 그것도 로맨스 소설 작가다. 그렇다면 유달은 당연히 뛰어난 공감능력의 소유자라야 한다. 소설 속 등장인물의 미묘한 ‘사랑’ 감정을 정교하게 다루지 못한다면 로맨스 소설 자체가 성립되지 못하고,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도 없을 것이다. 사실 영화에서 멜빈 유달이 벌이는 행각을 언뜻 보면 ‘공감능력 제로’에 가깝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유달의 공감능력은 소설가답게 뛰어난 편이다. 지정석이 있는 것도 아닌 일반 식당에서 매일 자신이 앉는 자리를 고집하다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
영화의 남녀 주인공은 분명 괴팍한 소설가 멜빈 유달과 식당 웨이트리스 캐롤 코넬리다. 하지만 영화의 전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조그만 강아지 버델도 만만치 않다. 이 강아지는 영화의 포스터에도 잭 니콜슨과 함께 당당히 투톱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의 여자주인공이 ‘무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심상치 않다. ▲ 뮤즈란 관찰자로 하여금 기억의 창고 속에 잠들어 있던 무엇인가를 깨워주는 존재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버델은 유달과 같은 아파트 같은 층에 사는 게이 화가 사이먼 비숍의 반려견이다. 혼자 외롭게 살아가는 젊은 화가의 반려견이니 서로가 죽고 못 사는 사이일 것 같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비숍은 버델에 죽고 못 살지만, 버델은 딱히 그렇지도 않다. 상당히 쿨하고 주인과 거리를 둔다. 어느 날 비숍이 강도를 만나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고 입원해 있는 동안 유달이 임시로 맡아 돌본다. 지독한 위생 결벽증이 있는 유달과 털북숭이 강아지 버델은 예상외로 궁합이 잘 맞는다. 유달과 산책할 때면 유달처럼 보도블록 경계를 절대 밟지 않는 강박증도 닮았다. 버델을 돌
솔직함이 팩폭이나 뼈를 때린다는 말로 용인되는 시대다. 연예인이든 정치인이든 하물며 논객이든 상대의 허물과 부족함을 솔직하게 팩폭한다. 하지만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은 채 마음 내키는 대로 내지르는 ‘솔직함’은 방종이다. 이것을 즐기는 우리 사회가 참으로 가학적加虐的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 frank(솔직하다)의 어원은 자유(free)에서 유래한다. 마음 내키는 대로 말을 내지르는 것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상대가 누가 됐든 상대방의 기분을 아랑곳하지 않고 느낌 그대로 퍼부어대는 유달(잭 니콜슨 분)은 어찌 보면 대단히 솔직한 인물이다. 웬만한 사람들은 속으로는 동성애를 혐오하고,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을 지니고 있더라도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는다. 다양한 성 정체성을 인정하고, 피부색에 편견을 갖지 않아야 하는 게 적어도 교양 있는 사회인으로서의 덕목이 된 시대다. 하지만 유달은 자신의 소설 ‘왕팬’이기도 한 출판사 여직원에게도 거침없이 ‘여혐’을 드러낸다.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게이 화가에게는 대놓고 당장 밟아 죽여야 할 불결한 벌레 대하듯 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카데미상’이라는 것은 ‘딴 세상’ 일처럼 그저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기생충’과 ‘미나리’가 연거푸 아카데미상을 받는 걸 보니 이제는 제법 ‘이 세상’ 일처럼 여겨진다. 아울러 아카데미상을 받았다는 외국영화의 수준과 배우들의 연기를 우리네의 그것들과 비교평가해 보기도 한다. 다른 것은 잘 모르겠지만 잭 니콜슨의 연기만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의 무게를 되레 가볍게 느껴지게 만든다. ▲ 루틴을 중시하는 이들은 변화의 이유를 궁금해하고, 질문을 통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지독하리만치 인간 자체를 혐오하고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으며 괴팍스럽기 짝이 없는 유달이 로맨스 소설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설정이 자못 흥미롭다. 이토록 인간을 혐오하고 사람들과 소통이 절벽인 인물이 독자들과 공감하고 소통해야 하는 소설 작가라는 사실도 의문이지만, 그것도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설정이 다소 황당하게 느껴진다. 유달은 매일 아침 정확히 똑같은 시각에 일어나 똑같은 동네 식당에서 반드시 똑같
로맨스 소설가 멜빈 유달(잭 니콜슨 역)은 지독한 강박증과 결벽증을 지닌 채 뉴욕시의 고급 아파트에서 참으로 ‘싸가지’ 없고 별나게 살아간다. 그러던 중 멜빈 유달(잭 니콜슨)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게이 화가 비숍이 집안에 침입한 강도에게 거의 죽을 만큼 폭행을 당하고 병원에 실려간다. 사고를 수습하러 온 비숍의 에이전트는 능수능란하게 사고의 뒷수습을 한다. ▲ 반려견과 사는 이들은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개를 통해 치유받는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고 수습과정에서 비숍이 애지중지 키우던 강아지 베델의 처리가 실로 난감하다. 비숍의 에이전트는 궁리 끝에 옆집에 사는 유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비숍이 퇴원할 때까지 이웃으로서 강아지 베델을 돌봐줄 것을 부탁한다. 그 에이전트는 아마도 유달의 악명을 전달받지 못했던 모양이다. 알았다면 언감생심 유달이 혐오해 마지 않는 ‘게이’의 강아지를 당분간 맡아달라는 부탁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강아지를 아파트 창밖으로 내던지지만 않아도 감지덕지할 일이다. 그런데 사람을 기피하고 병적으로 청결에 강박증이 있는 유달은 자그마한 털뭉치 강아지
제임스 브룩스 감독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7)’는 명배우 잭 니콜슨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긴 작품이다. 과연 잭 니콜슨의 ‘악당’ 연기는 발군이다. 영화의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지만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은 상당히 심각하다. 잭 니콜슨은 대단히 비사회적인 염세가이자 독설가이며 강박증세를 가진 소설가인 멜빈 유달을 연기한다. 이렇게 복잡한 ‘캐릭터’를 물 흐르듯 소화해내는 잭 니콜슨의 연기가 과연 일품이다. ▲ 유달은 관객들의 억눌린 욕망을 대리만족하게 해주는 또 다른 ‘영웅’으로 보인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멜빈 유달은 로맨스 소설 분야의 베스트셀러 작가다. 당연히 생활은 풍요롭다. 뉴욕의 고급 아파트에서 ‘고급지게’ 살아가지만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다. 세상과 인간을 향한 혐오로 짜증과 분노가 충만한다. 당연히 독신이다. 거기에 더해 유달은 강박증 환자이기도 하다. 집밖을 나서면 모든 문고리나 손잡이를 손수건으로 감싼 다음 잡아야 하고, 매일 들르는 단골식당에 갈 때도 집에서 식기를 챙
‘테넷’의 주인공과 요원들은 ‘현재’를 바꾸기 위해 ‘미래’로 들어간다. 미래를 조작해 인류의 운명을 통째로 바꿔버린다. ‘과거’로 돌아가 과거를 바꿔 현재를 바꾸는 주제들은 꽤나 익숙하지만, 미래를 바꿔 현재를 바꾸는 방식은 특히나 우리들에게는 조금은 신선하기도 하다. 그런데 왠지 마음에 와닿지는 않는다. 테넷의 우리나라 흥행 성적표가 썩 훌륭하지 않았던 이유일까. ▲ 동양의 미래관이 ‘운명론적’이라면 서양은 반대로 ‘의지론적’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미래에 관한 관점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첫째,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며, ‘정해진 미래’는 우리의 희망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오는 것(coming)’일 뿐이라는 관점이다. 지나간 과거를 바꿀 수 없듯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미래도 바꿀 수 없다. 운명론(fatalism)의 뿌리다. 둘째는 미래는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making)&r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들어낸 ‘시간여행’에는 이전의 시간여행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한다.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 혹은 ‘미래의 나’와 ‘현재의 나’가 충돌하고 뒤엉켜 싸우는 장면이다. 최신작 ‘테넷’에도 그런 장면이 등장한다. ▲ 나의 적은 ‘다른 시간대를 살았던 나’와 ‘다른 시간대를 살아갈 나’일지도 모른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인류의 미래를 구원하기 위해 미래로 출동했던 주인공은 현재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미래로 출동하던 자신과 맞닥뜨려 뒤엉켜 싸운다. 똑같은 주인공이지만 서로가 서로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현재의 주인공은 미래에서 오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저지하고, 미래에서 현재로 돌아가려던 주인공 또한 자신을 막아서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각자의 임무에만 충실한 채 뒤엉켜 죽기살기로 싸운다. 나의 적은 같은 시간대를 살아가는 타인들이 아니라 다른 시
고대사회를 지배한 변수 중 하나는 ‘무당의 한마디’였다. 중세사회에선 ‘천국의 예언’이 사람들의 삶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현대에도 미래의 예언자들이 있다. 과학자, 기술기업, 그리고 언론이다. 이들의 예언은 통찰력이나 비전이란 이름으로 대체되곤 한다. ▲ 현재가 과거를 재구성하고 새로운 과거를 창조해 내기도 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시간을 오가는 ‘타임머신’ 영화는 대개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바꾸어버리는 상상을 담는데, ‘테넷’은 특이하게도 미래로 넘어가 현재를 바꾸는 상상을 담는다. 역사학자 E.H. 카(Carr)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정의한다. 과거에 일어난 ‘사실’은 박제처럼 영원히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역사가나 혹은 현재의 특정한 필요에 의해 현대인들의 생각과 관점으로 새로운 ‘사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중국의 거친 ‘동북공정(東北工程)’이 그렇고 말썽 많은 하버드대학 램지어 교수라는 사람의 일본
‘영웅’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항상 어마무시한 ‘악당’이 필요하다. 영웅과 악당의 크기는 정비례한다. 영웅과 악당은 그렇게 공존하고 어찌 보면 동업자 관계다. ‘테넷’에서도 이름 없는 영웅인 주인공의 존재는 사토르라는 최강의 악당이 있기에 더 빛나는지 모르겠다. ▲ 인간들에게 ‘열’을 제공하기 위해 지구상의 모든 것이 파괴되고 사라진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테넷’의 악당 사토르(Sator)는 수많은 ‘맨(man)자 돌림’ 히어로 영화들의 악당처럼 핵폭발로 지구와 인류를 끝장내려고 한다. 이유는 단순한 가학성이나 권력욕이 아니라 조금은 심오하다. 그래서 사토르를 단순히 또 하나의 황당한 악당으로 취급하기는 어렵다. 사토르는 인류를 몰살시켜야 하는 명분을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엔트로피(entropy)’라는 머리 아픈 열역학 이론에서 찾는다. 열에너지로 전환된 모든 것은 본래 상태로 환원될 수 없다. 열역학은 그야말로 ‘시간’처럼 불가역적(irreve
영화 도입부 우크라이나 오페라 하우스에서 작전을 펼치는 CIA 요원들은 혼란스럽고 긴박한 상황 속에서 피아我간의 식별을 위해 암구호를 사용한다. 한쪽이 ‘We live in a twilight world’라고 말하면 상대방은 ‘And there are no friends at dusk’라고 대답해야 ‘같은 편’임을 인증받는다. 어쩌면 이 암구호는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인버전(inversion)’이라는 영화의 소재와 영화의 결말까지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 우리는 모두 어스름한 시간 속에 살고 있다. 세상이 점점 밝아올지 점점 어두워질지 알 수 없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영화 테넷 속 CIA 요원들이 피아 식별을 위해 사용하는 암구호를 다시 보자. 영화 자막에는 이 암구호가 ‘We live in a twilight world(세상에 어둠이 내린다)’ ‘And there are no friends at dusk(어두워지면 친구가 없다)’고 번역돼 있다. ‘개구리’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