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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파이트 클럽 (5)
누구나 하나쯤 갖고 있는 치부 ... 남에게 들켜야 느끼는 부끄러움
뻔뻔함으로 뭉개는 금배지 숱해 ... 스스로 참회록 쓴 현자의 시사점

주인공인 ‘화자(話者)’는 타인의 고통을 ‘눈팅’하면서 자신의 고통을 잠시라도 잊는 ‘부끄러운 짓’을 하던 중, 자신과 마찬가지의 ‘고통 눈팅족’인 말라(Marla)를 발견하고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치부’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 치부를 남들에게 들키기 전까지는 부끄럽지 않다. 그런데 말라는 주인공에게 치부를 들키고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말라의 등장으로 느꼈던 수치심은 당연히 말라가 사라지면 같이 사라져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다. 주인공 ‘화자’는 그제야 남들에게 들키지 않은 치부도 부끄럽기는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혼까지 갈아 넣는 노동의 대가로 장만한 ‘이케아’ 가구로 채워 넣은 작은 아파트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이었는지를 절실하게 느낀다.

남들에게 들키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부끄러울 ‘치(恥)’는 누구에게 들켜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心)’에 ‘귀(耳)’ 기울이면 스스로 알 수 있는 부끄러움이다. 남미 오지로 선교하러 간 사제들은 남미 원주민들이 벌거벗고 산다고 같이 벌거벗지 못한다. 

주인공은 결국 이케아로 채워 넣은 안락한 아파트로 상징되는 ‘물질’에 얽매여 살았던 자신의 삶에 수치심을 느낀다. 그는 아파트를 불 질러버리고 모든 물질적 욕망과 단절된 타일러 더든의 ‘파이트 클럽’에 합류한다.

파이트 클럽에서 매일 밤 누군가에게 얻어맞아 얼굴이 으깨지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자신을 학대하면서 부끄럽게 살아온 자신의 ‘참회록’을 쓰는 것 같다. 그곳에서 자신이 정말 욕망해야 하는 것이 ‘이케아 가구’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다는 것을 알아간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톨스토이(Tolstoy), 그리고 루소(JJ. Rousseau)의 참회록은 세계의 3대 참회록이라고 불린다. 모두 자신의 치부를 스스로 낱낱이 들추고 고백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을 배반했던 부끄러움을 고백한다.

톨스토이는 “나는 신을 믿었다기보다는 신을 부정하지 않았을 뿐이며, 신을 믿지 않는 자들이 오히려 나보다 더 지혜롭고, 정직하고 솔직하고 도덕적이었다”며 “나는 그들보다 더 잔인하고, 비도덕적이고 교만했다”고 고백한다. 
 

 

루소의 참회록은 압권이다. 루소는 거룩한 교육사상을 설파하면서 정작 자신은 변태적인 ‘바바리맨’ 짓을 되풀이하고, 동거녀와 낳은 다섯 아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내던져버렸던 치부를 숨김없이 고백한다. 

루소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수치심이 죽음보다, 범죄보다, 그 무엇보다 두려웠다. 땅속으로 들어가 질식해 죽고만 싶었다. 억누를 길 없는 수치심이 모든 것을 압도했고, 그 수치심이 나를 뻔뻔하게 만들었다.” 아우구스티누스, 톨스토이, 루소 모두 ‘뻔뻔함’으로 수치심을 감추기를 거부하고 용기를 내어 ‘참회’를 통한 새로운 사람이 되는 길을 택했다. 

프랑스 철학자 프레데릭 그로(Frédéric Gros)는 신간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에서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꼬집는다. “권력을 쥔 소수 기득권자들의 뻔뻔함과 몰염치, 무례가 이 세계를 점령하며 곳곳에서 ‘수치도 모르는 것들’이란 분노의 외침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들은 수치심을 알지 못하기도 하지만, 성장하지 못한 정신적 유아에 머물러 광적인 자기애로 자기의 무가치함을 자각하지 못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그런 저열함을 타인의 탓으로 쏟아내기에 수치심이 이들의 내면에서 어떤 조심성이나 신중함을 만들어내지도 못한다.” 

이는 권력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수치심을 아예 못 느끼거나 그 수치심을 ‘뻔뻔함’으로 뭉개는 개인이나 사회는 질곡에 빠져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윤동주가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부득이 창씨개명을 신청하기 5일 전에 썼다는 ‘참회록’은 아우구스티누스나 톨스토이, 루소의 참회록보다 더 절절하다.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창씨개명을 한 수많은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거나, 느껴도 뻔뻔하게 뭉개는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소망하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는 혼자 죽도록 괴로워하고 참회한다. 그들의 그런 수치심과 참회가 있었기에 우리에게 독립이라는 혁명이 가능했을 것이다.
 

 

영화 속 말라처럼 수치스러운 모습을 들켜도 수치심을 느끼지도 못하든지, 뻔뻔함으로 뭉개는 사람들이 ‘별종’이 아닌 ‘정상인’처럼 보이는 세상이다. 말라도 ‘사치스럽게’ 수치심을 느끼는 주인공을 별종 보듯이 한다. 지극히 당연한 참회록을 쓴 아우구스티누스나 톨스토이, 루소, 그리고 윤동주 모두 별종처럼 보이는 세상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온갖 부끄러운 모습을 이미 모두 들켜버린 정치인들이 국회의원 선거에 너무도 당당히 나선다. 그들에게는 수치심이라는 것이 아예 없었든지 아니면 수치심을 뻔뻔함으로 뭉개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들에게 열광하고 지지하는 사람들도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거나 뻔뻔함으로 뭉개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혹시 목욕탕에서 다 같이 발가벗은 것처럼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프레데릭 그로의 말처럼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는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게 맞다면 참으로 우울한 일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윤동주의 ‘서시(序詩)’가 국민 최애(最愛) 애송시(愛誦詩)라는 것이 왠지 민망한 오늘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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