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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시평] 제주 자부심 줬던 그 인연, '제2공항' 해법 머리 맞대라

 

A와 B는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친구사이다. 그 둘은 청소년기에 이르러 제주시내 학교로 진학했다. 그리곤 제주의 명문사립고와 최강공립고를 대표하는 간판이 됐다. 그 명문사립고는 오현고, 최강공립고는 제주제일고다. 제주에선 꽤 알려진 ‘맞수’ 관계의 라이벌 학교다. 그 시절엔 그랬다.

 

그 둘이 고교 3년이 된 1981년 말 치른 대입 학력고사는 그 이전 예비고사와 본고사를 치르던 대입시험과 다른 전형이었다. 한 번의 시험으로 모든 걸 결판냈다. 그 시험에서 당시 고작 45만 인구였던 제주는 전국 수석과 7등 수험생을 배출했다. A가 수석이었고, B가 7등이었다. 소수인구의 작은 섬에서 내놓은 결과에 전국이 들썩였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시절 ‘전국수석’은 B가 되리란 예상이 더 우세했다. B는 수시로 치러지던 전국단위 모의고사에서 늘상 최상위권을 맴돌았다. 그래서 그 고교는 ‘학력고사 전국수석’을 배출한 전국 최고의 명문고가 될 것이란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판 결과는 뒤집혔다. 그래서 그의 7등은 빛이 바랬다.

 

A와 B는 둘 다 서울대 법대 진학을 택했다. 물론 합격했다. 지금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과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그들과 법대 동기다. 막판 수모를 겪었지만 B의 법대 원서접수번호는 1번이었다. 눈치보기 작전이 한창이던 그 시절 입학전쟁 풍경을 떠올려본다면 ‘접수 1번’은 그나마 앳된 청년이 부린 객기다. 하지만 그들이 낸 놀라운 성적은 그후 그들을 따르는 동기와 후배들을 양산했다. 82학번이거나 그 이후 학번 세대의 제주출신 대학생은 대학에 진학하면 그들을 만나는 게 영광이었다.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 후배들에겐 성경의 교리처럼 들리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마주한 서울풍경은 살벌했다. 대학가는 연일 시위의 연속이었고, 당시 집권세력은 12·12 반란과 5·17 쿠테타로 권력을 손에 넣은 전두환 군부정권이었다. 수많은 학생과 민주인사들이 연일 민주화를 요구했지만 돌아온 답은 군홧발 진압과 투옥이었다. 광주 5·18이란 비극이 지나간 자리에 국민의 민주화를 위한 갈망은 어찌보면 사치였다. 숱한 민주인사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던 시절이다.

 

제주에서 상경한 두 수재의 눈에 비친 우리 사회의 실상은 그렇게 처참함, 그 자체였다. 그리고 숱한 나날 그 둘은 번민과 고민으로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들은 서서히 한국사회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A는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아 노동운동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학업도 포기했다. 반면 B는 학생운동을 돌파구로 삼았다. 노동운동의 길에 뛰어들어 대학에서도 무기정학 처분을 받은 A와 달리 B는 부활한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섰다. 비록 분루를 삼키며 2위 득표로 ‘총학생회장’ 감투를 쓰진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는 제주출신 학생들에게 자부심이었다. 1985년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영예를 안은 그는 나중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김민석 전 의원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에도 그들의 신념은 투철했다. 노동운동 전선 선배인 A에 뒤이어 B 역시 노동운동 현장으로 파고 들었다. 어느 날 대구의 한 공장에서 일하던 B에게 A가 찾아왔다. 서로의 인생사와 미래를 걱정하며 서로를 격려했던 추억이 있다.

 

어느덧 시간은 흘렀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뤄지고 그와 동시에 군부정권은 퇴진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전두환에 이어 쿠테타 동지인 노태우가 다시 정권을 틀어쥐었다. 1980년대 학생·노동운동에 복무했던 이들의 절망이 줄을 이었다. A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는 사법고시에 매달렸다. 수년간을 매달려도 어려운 그 사법시험에 그는 도전한 지 채 1년도 안돼 단박에 합격했다. 그것도 또 수석이었다. 연수원 생활을 마치고 그는 그 시절 성적상위권 연수원생들이 선택하는 판사 자리를 마다하고 검사의 길을 선택했다. 또 뉴스감이었다.

 

노동운동에 전념하며 10여년 청춘을 불살랐던 B는 “아무래도 공부를 더해야 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흘러갔다. 유학을 결심했다. 변변한 처지가 아니었기에 그래도 좀 사정이 나은 친구들이 그를 도왔다. 유학자금을 마련해줬다. 생활비도 푼푼이 보태줬다. 그는 법과 정치를 다시 공부한다는 마음으로 영국으로 떠났다. 영국 요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아 오랜 기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그 시절 그가 소식을 듣게 된 A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A는 몇 년간의 검사 생활을 마치고 정치인으로 변신해 있었다. 지금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으로 맹활약중이었다. 훗날 그는 서울 양천갑 지역구에서 3선 국회의원으로 이름을 날렸고, 한나라당 사무총장까지 지내는 등 중진 국회의원으로 성장했다.

 

이 쯤이면 누군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알 판이기에 A와 B의 실명을 적는다. A는 민선 6기에 이어 7기 재선에 성공한 원희룡 제주지사이고, B는 ‘육지사는 제주사름’이란 단체의 대표인 박찬식 전 충북대 겸임교수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렇게 모질다. 그 인연은 이게 끝이 아니다. 박찬식 교수는 지난해 4·3 70주기 범국민위원회 운영위원장 직책을 맡았다. 대학시절에도 그렇게 곳곳을 뛰어 다니며 고향의 억울한 사연을 전하던 그는 지천명의 나이를 넘기고서도 한결 같았다. 고향 제주에 대한 그의 애틋한 사랑은 ‘육지사는 제주사름’이란 재외제주도민 단체의 이름에서도 묻어난다.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란 70주기 대표슬로건은 그와 뜻을 같이한 이들이 고안해 낸 절묘한 문구였다.

 

원희룡 지사 역시 지난해 4·3 70주기 사업을 사실상 뒤에서 ‘백 서포트’한 주인공이다. 국회의원 시절 단 한번도 제주에서 열린 위령제에 참석한 적이 없다는 비난을 듣는 그였지만 도지사로서 그는 달랐다. 적어도 4·3 70주기 각종 사업들은 그래도 제주가 키운 굵직한 인재인 그가 있었기에 더 추동력을 얻었던 게 사실이다. ‘전국수석’이란 타이틀을 늘 달고 다닌 그가 어엿한 도백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에 대한민국은 ‘4·3’을 빌미로 다시 제주에 주목했다.

 

그들의 인연은 대를 이어서도 이어진다. 원 지사와 박 교수의 딸이 경기 성남시 분당의 같은 고교를 다니며 둘 다 특출한 재능을 보여줬다는 얘기까지 접하면 불가(佛家)의 연(緣)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두 사람은 지금 대척점에 서 있다. ‘제주 제2공항’이란 강(江)이 그 둘을 현재 갈라놓고 있다. 제2공항 반대 범도민행동 공동대표도 맡고 있는 박 교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엉터리 용역으로 밀어붙인 제2공항 추진 결사반대”란 입장이 역력하다. 그 반대로 원 지사는 “중대한 결함·하자가 없는 제2공항 추진이라면 도지사로서 책임을 지고 완수해야 할 과제”란 인식으로 사안을 보고 있다.

 

‘제2공항’ 문제를 놓고 찬·반 양론 대립이 격화하고 있다. 서귀포 강정 해군기지를 놓고 벌인 십수년여의 찬·반 갈등은 도민 분열과 강정마을 공동체 파괴란 아프도록 시린 역사로 귀결됐다. ‘제2공항’이 다시 그런 문제의 중심추로 기능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이 ‘해피엔딩’으로 끝날 건지 ‘사생결단’의 비극으로 끝날 건지 알 수 없다. 그저 희망이 있다면 ‘제3의 길’은 진정 찾을 수 없는 것일까? ‘변증법적 결론’이란 이럴 때 필요한 해법이 아닐까? 그런 의문을 갖는다.

 

두 사람의 인연은 참으로 모질다. 제주가 배출한 인재였고, 모두의 부러움을 샀던 그들의 지금 인생사를 보면 더 그렇다. 서로 삿대질만 하고 끝내면 그건 비극이다. 아름다운 귀결이 제주도민 모두를 위해서도 더 낫다.

 

두 사람만의 얘기 같지만 따지고 보면 어쩌다 ‘흑역사’가 되거나 아니면 어쩌다 ‘시너지효과’를 얻는 인간관계는 대한민국, 제주도민 누구에게나 다 있을 법하다.

 

제2공항 추진 첫 단추부터 이제 다시 한번 복기(復棋)해 보자. ‘제3의 길’은 그래도 100년 제주사를 다시 쓴 우리의 지혜로 기록될지 모른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어찌보면 적기(適期)다. [제이누리=양성철 발행·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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