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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의 세상풍경(12) ... 영화 <국제시장>이 떠올린 해방정국 <서귀포시장>

 

영화 국제시장이 2월 들어 누적 관객 수 1300만명을 넘어섰다. 영화진흥위원회의 박스오피스 통계에 의하면 이는 역대 휴먼드라마 장르 중 흥행 1위의 기록이란다. 영화평론가들이 10점 만점에 5점을 부여한 ‘보통’ 영화가 요새 말로 대박을 친 셈이다. 그 덕택에 영화 속에서 영자 역을 한 여주인공이 어린이재단에 기부금을 낸단다. 영화 관람객 수에 비례해서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이. 참 가슴 따뜻한 이야기다.

 

이처럼 국제시장이 관객들로부터 ‘극찬’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관람객들의 반응에 관한 자료를 짚어보면, 전문가들이 ‘신파적 스토리’라고 비평하는 영화의 흐름이 ‘우리들의 이야기’로 소통되기 때문이란다.

 

6.25의 흥남철수작전으로 비쳐지는 국가의 무능함, 전쟁과 폐허에서 전개되는 가난의 뼈저림, 생존을 위해 독일의 탄광과 베트남 전선에서 사투하는 개인의 몸부림, 이산가족을 찾아서 분단의 비극을 부둥켜안는 범국민적 눈물 등이, 여전히 진행 중인 우리사회의 아픔으로 공감되어서다.

 

사실, 오늘도 변함없이 국가는 무력하고, 가난한 이들의 삶은 죽음보다 혹독하고, 취업문은 파독 광부‧간호사의 10대1보다 치열하고, 세월호의 비극은 아직도 눈물에 젖어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세월은 흘러가도 세상살이의 밑바닥은 정지된 듯 변함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 가혹한 삶의 중심을 가장 평범한 아버지가 죽을 힘을 다해서 달려주었기 때문에 ‘감동적’이라는 게 관객들의 평가다. “내가 없으면 네가 가장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들을 잘 지키라”던 아버지의 마지막 당부를 바통처럼 그러쥐고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주인공.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켜내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사선을 넘어서, 절룩거리는 다리로 굳세게 완주하는 우리들의 아버지가 눈물 겹게 위대해서다.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요?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요. 아버지가 되게 보고 싶었습니다"라고 이어지는 아버지 대 아버지의 대화가 사무치도록 그리워서란다.

그런데, 그 아버지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무시로 눈물을 흘렸다는 영화 앞에서, 정작 나의 눈물샘은 피난민을 실은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무사히 흥남부두를 떠나면서부터 흐르기를 멈춰 버렸다. 주인공 덕수의 종횡무진 하는 고생이 안타깝고 안쓰럽긴 하지만 눈물이 솟구칠 만큼 가슴 아프지가 않았다. 내가 너무 무정한 탓일까?

사실, 이 영화를 제작한 감독의 의도가 ‘소박하게 일만 하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만든 영화’란 소문에, 상영시간 내내 그 때를 살았던 제주도 아버지들의 삶이 회상되었다. 비교할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왠지 모르게 파독광부 선발과정을 보면서는 ‘그래도 운이 좋은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어오는 걸 어쩌랴.

 

1960년대 초 한국은 인구 2400만명에 실업자가 250만명, 실업률이 10%를 넘는 나라였다. 더 엄밀히 말해서 16세 이상의 생산활동 가능인구를 기준으로 보면, 실업률은 15%를 넘을 것으로 보인다. 종업원 200명 이상인 기업이 50여개에 불과하던 시절의 얘기다. ‘파독광부 45년사’에 의하면 제 1진으로 출발하는 500명 모집에 지원자가 4만 6000명이나 몰려들었다. 이들에게 약속된 월급은 미화 162달러로, 당시의 1인당 국민총생산액(GDP)이 87달러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목숨을 걸 만큼 매력적인 고임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국제시장의 덕수처럼 파독광부 1진으로 출발한 이들 중에는 대학 재학생과 졸업생이 20%나 되었다. 이 광경을 묘사한 신문기사를 보면, ‘처자를 두고 가는 이들은 눈물짓곤 했지만, 총각 광부들은 돈벌이하러 가는 길이라 웃음을 앞세웠다(서울신문, 1963.12.21).’

 

언젠가 의료기술 면에서 보면 ‘부산은 서울보다 10년이 늦고, 제주는 부산보다 10년이 더 늦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디 병원만 그러하랴. 덕수보다 20년은 더 늦게 태어난 제주의 1960년생들도 초등학교 시절에는 가끔 아기를 업고서 학교에 갔다. 동생을 데리고 오는 애들도 있었다. 공부보다 아기업개가 주업인 학생을 위해 선생님은 우는 아기에게 사탕을 주셨다. 의무교육이 끝나서 중학교에 갈 즈음엔 마을 아이들 중 20∼30%가 함께 갈 수 없어서 울었다. 아동노동이 일반적인 시절이었으니, 입학식 날에 교복이 없다 해도 슬퍼하거나 노할 일이 아니었다. 온 동네를 뒤져서 낡은 옷 하나 찾게되면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할 일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밭으로 가서 일하다가 종소리가 울리면 학교로 내달렸다. 터진 옷이나 때 묻은 손은 대다수 아이들의 일상이었다. 도시락이 어렵거나 계면쩍은 아이들을 위해 학교는 점심시간을 개방하였다. 우리는 책상 밑에 쪼그리고서 도시락을 여는 대신 가슴을 활짝 펴고서 집으로 달려갔다. 자리젓이나 마늘짠지가 고작인 밥이지만, 가슴 따뜻한 선생님 덕에 마음 놓고 점심밥을 먹을 수가 있었다.

 

더욱이 6.25가 발발한 때 제주도민들은 육지보다 더 참혹하고 비참한 전쟁의 고통을 겪어야만 하였다. 1948년부터 발단된 4.3사건으로 인해 제주에서는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을 피하려고 일찌감치 해병대에 들어간 청소년들이 많았다. 이들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돼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워야만 하였다. 오죽하면 어린 소녀들까지 해병대에 자원해서 대한민국 최초의 여군들이 되었을까? 1954년 9월까지 지속된 4.3은 30여 만 명의 도민이 연루된 가운데 2만5천~3만 명에 이르는 목숨을 앗아갔다(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특히 1948년 가을, 국군 제9연대 본부가 주둔하고 있던 제주농업학교의 상황을 보면 ‘이곳 수용소에 갇히지 않으면 유명 인사가 아니다’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제주도를 대표하는 법조, 행정, 교육, 언론계 인사들이 대거 감금돼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제주도의 많은 인재들로 하여금 목숨을 부지키 위해 일본으로 밀항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였다.

 

2001년 말 일본에 등록된 재일 한국인 63만2450명 중 제주인 수가 10만7666명으로, 전체의 17.2%를 차지할 만큼 높은 것은 이를 방증하는 결과다. 제주도보다 인구수가 많은 곳은 경상남도가 약 17만명, 경상북도가 12만명 정도다.

 

2007년 1월 내가 ICC JEJU의 대표이사 자격으로 오사카지역 신년하례회에 참석하였을 때 그곳의 총영사가 했던 말이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오늘 저녁에는 재일 전남도민회와 제주도민회가 동시에 열렸습니다만 제가 이곳에 참석한 이유는 제주도민회가 훨씬 규모가 크고 유력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제주도민들이 일본으로 많이 건너간 데에는 제주의 척박한 자연환경도 한몫을 하였다. 오직 고구마, 보리, 유채 농사로 연명하던 제주도는 1950년대 내내 도별 소득 최하위를 차지하는 가난하고 황폐한 섬이었다. 오죽하면 바다를 밭 삼아서 파도에 몸을 던지는 ‘해녀’란 직업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제주에만 생겨났을까?

그만큼 일거리가 귀한 제주 사람들은 국제시장 저변에도 진출해서 일했단다. 오랫동안 서귀포 오일장에서 장사를 해 온 유순이 언니의 얘기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자리를 찾아 부산으로 올라간 그녀는 부부가 모두 국제시장에서 장사하는 집의 가정부가 되었다. 8명 식구의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아이들을 돌보는 살림살이 일체가 그의 몫이었다. 그렇게 손발이 부르트도록 일을 해서 받는 것은 주인집에서 함께 먹고, 자고, 입는 것과 약간의 용돈이 전부였다. 그저 한 식구라도 입을 덜기 위해 육지로 딸을 내보내야 했던 제주도 아버지들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사실 국가가 공인한 파독 광부보다 더 비참하고 지독한 게 일본에 밀항한 사람들의 삶이었다.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아버지 세대들이 종사했던 일들은, 일본인들이 싫어하는 3D업종 중에서 가방제조, 신발제조, 토목․건축, 자갈이나 고철 수집 등 사회계층의 가장 밑바닥을 이루는 막노동이었다. 저임금에다 일본인들의 차별과 박해는 물론 조국으로부터도 의심과 배척을 받은 이들의 삶은 그야말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정점을 이루었다.

 

디아스포라(diaspora)가 본토를 떠나 항구적으로 나라 밖에 자리한 민족 집단을 일컫는 말이고 보면, 6.25를 전후해서 일본으로 밀항한 재일 제주인들보다 더 디아스포라적인 삶이 어디 있으랴. 고통과 위험으로 점철된 노역을 눈물과 한숨으로 참아내면서 기약도 없는 고향길을 다만 꿈속에서 걷고 또 걸어보던 그들. 끝내 고향땅을 밞아보지 못하고 눈 감은 재일교포 1세대들이 우리 동네 이웃들 중에도 얼마나 많은가? 그야말로 끝없는 막장인생 속에서 유자꽃 피는 마당과 동백꽃 붉은 올레를 그리며 스러져 간 제주의 아들들, 그 비극적 인생들.

그처럼 버려진 재일교포들이 국가도 어쩌지 못하는 제주의 가난에 천우신조의 손길을 내밀었으니, 이 무슨 인생의 아이러니인가? 가장 극적인 것은 감귤관련 기부로써, 1962∼1970년 동안 그들을 통해 들여온 감귤묘목이 300여만 그루에 달할 정도였다. 그리고 재배기술 지원 및 신품종 소개 등에 힘입어 제주도의 GDP는 전국 최상위로 올라서게 되었다.

그런데 또 아이러니 하게도 어째서 이 글은 영화 국제시장에서 재일교포 쪽으로 빠져들고 말았는가? 사실 국제시장을 핑계 삼아서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제주의 시장 이야기이다. 국제시장 너머에서 벌어진 또 다른 우리들의 시장 이야기 말이다. 시장이야말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삶의 터전을 일구어 가는 곳, 추억이 서려 있는 장소,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공간이 아닌가?

그러니 이쯤에서 다시 우리들의 시장으로 돌아가 보련다. 국제시장을 낳은 6.25는 우리가 살아가는 서귀포의 상업에도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서귀포로 들어온 피난민들이 오일장을 중심으로 난전의 보따리 장사를 시작하면서부터 갑자기 상인수와 상품구색이 다양해져서다. 실제로 이들이 처음 본 서귀포의 상점들은 밥 사먹을 곳이 없을 정도로 허술하고 빈약했다. 가장 큰 상점이 중국인의 잡화상이었는데, 문을 닫고 장사를 하는데다 상점 내에는 진열된 물건들도 별로 없었다. 사실은 상점에 간판을 내걸기 시작한 게 고작해야 1949년경부터다.

 

4.3사건이 발생한 1948년도에 서귀포시 상권의 중심지였던 솔동산길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해 대부분의 상점들이 불타버렸던 연유다. 화재 후에 상점들이 새로 지어지고 주인들도 바뀌면서 간판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 즈음에 다방들이 생겨났는데, 해성다방이 최초로 문을 열었고, 이어서 향촌다방과 피서지 다방이 개점하였다. 그 덕택에 부산에서 피난 온 이중섭 화백이 이곳에서 담뱃갑속의 은지에다가 송곳으로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단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가족, 아이들, 게와 가족 등의 은지화가 탄생했는데, 어쩌면 그가 1951년에 그린 ‘서귀포의 환상’도 이 시장거리에서 잉태된 그림이 아닐까 싶다.

특히 부산에서 배를 타고 피난 온 상인들은 국제시장과 새로운 유통경로를 열었다. 서귀포항에서 대성호를 타면 보통 저녁 5∼6시에 출발해 꼬박 하루가 걸려, 24시간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서귀포에서 계란을 수집해서 부산에 나가 파는 상인들이 있었는데, 1개당 1원에 구매해서 1원 50전에 팔았다. 50%의 고마진에도 불구하고 운송도중에 깨지거나 부패해서 밑지거나 본전에 그칠 때가 많았다. 다행히 국제시장에서 각종 잡화를 도매로 사다가 서귀포에서 소매로 팔아 이윤을 남길 수가 있었다. 자주색깔 백만표 고무신이 1켤레에 쌀 1말 값에 판매되던 시절이었다.

 

 

1952년경, 솔동산 일대에 전기가 가설되었다. 노점에 있던 피난민들이 하나 둘 점포를 마련하면서 상점수가 많아지고 상가지역이 활기를 띄어 갔다. 포목·양품(미국산 생활용품들)·고무신·잡화가 상거래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대부분 한 상점이 다양한 상품들을 종합적으로 취급했다. 1954년경 개점한 오케이상회는 양품·잡화·학용품 등을 모두 팔면서 ‘백화점’이라 불렸다. 그리고 번영하는 이들 상점들과 동반해서 시장의 지경이 넓어졌다.

 

1965년 드디어 오늘의 서귀포 매일시장이 정부가 공인하는 대표시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상의 시장 이야기는 탐라대학 시절에 서귀포 상업의 역사를 쓰기 위해 피난민 시절 상인들을 만나서 채록한 것이다. 이들의 삶은 부산 국제시장의 꽃분이네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열악하고 치열한 것이었다. 하지만 시장 본래의 공생과 나눔, 변화, 발전 등의 속성과 공감하면서 생존하고 발전해 나갔다. 지금은 서귀포매일올레시장으로 진화하여 500여개의 상점과 오메기떡, 생선회 등을 특화시키면서, 전국 최고의 시장 명소로 자랑하게 되었다.

부산 국제시장이 영화를 통해 추억을 파는 곳으로 다시 흥행하고 있단다. 시장이 좋은 것은 서민들이 만남을 통해 인정을 나누고, 추억을 만들고, 이익을 공유할 수 있어서다. 시장에 가면 모두가 바빠지고 소박해지고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올 명절에는 시장에 가보자. 할머니의 주름진 손에서 추억을 사보는 것도 좋으리라.

 

국제시장보다 더 눈물겨웠던 제주의 시장 이야기도 들어보는 거다. 그리고 우리들의 시장 안에서 가슴 따뜻한 추억들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사람과 상품을 엮어서, 소위 ‘시장과 사랑에 빠지기’를 연출해보잔 말이다.

 

1000만이 넘는 관광객과 대박을 꿈꿔보면 좋겠다. 제주의 사랑으로, 시장의 본성으로!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했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 2기를 수료했으며, 언젠가 해녀가 되어 서귀포바다를 얼싸안고 살아가고 싶은 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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