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기예를 실연하며 구걸하는 방식은 민간 예술 측면에서 보면 가장 간단한 잡기 성질, 즉 소형 잡기인 ‘수류성(水流星)’이다. 간단하고 쉽게 배울 수 있기에 이 잡기로 구걸하는 거지는 아동이 대부분이다. 청 왕조 최후 1년, 1911년에 제남(濟南) 밖에서 어린 아이가 이런 방식으로 길가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구걸하고 있었다. 그 어린아이는 물이 가득 든 그릇 하나를 손에 들고 나왔다. 그릇을 줄로 묶어 미간에 연결시킨 후 손으로 공중에서 흔들다가 손을 놓자 머리 위에서 흔들거리며 빠른 속도로 빙빙 회전하였다. 그릇 속에 담긴 물은 쏟아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알려진 바로는 그 소년은 왕 씨로 부모 모두 세상을 떠나 홀론 유랑하며 구걸했다고 한다. 근대나 현대에 이르러 우리는 여전히 그릇 두 개를 가지고 재빠르고 날쌘 동작으로 작은 구슬을 옮기는 방식으로 구걸하는 어린 거지들을 볼 수 있다. 이 또한 같은 부류다. 성인 중에는 ‘화류성(火流星)’ 잡기를 실연하면서 구걸하는 거지도 있다. 『북경민간생활채도』 제90 「사화류성도(耍火流星圖)」의 제사는 이렇다. “이것은 중국 화류성이다. 사람이 줄 하나를 가지고 양쪽 끝에 철사 망을 매달고 속에 숯을 넣어 불은 붙인 후 돌리는 것을 화류성이라고 한다. 그릇에 물을 담아 돌리는 것은 수류성이라고 한다. 손으로 돌리든지 입에 물고 돌리든지 땅에 누워 돌린다. ‘용 둘이 구슬을 가지고 논다(二龍戱珠)’, ‘질풍처럼 바다를 건너다(飄洋過海)’, ‘배검(背劍, 왼손으로 검의 호수를 잡고 팔꿈치에 붙여 세워 검을 감춤)’, ‘편마(騙馬, 말에서 내렸다가 안장을 손으로 잡고 다시 오름)’과 같은 이름이 있다. 거리에서 이를 실연하면서 돈을 번다.” 이외에도 마술, 무술, 항아리 곡예, 패왕편(霸王鞭)1), 석쇄(石鎖) 유희 등과 요지경, 취 재주부리기가 있다. 기예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거지 유형은 천태만상이요 별의별 것이 다 있었다. 인력 제공 유형(노무형, 勞務型) 이른바 ‘노무형(인력 제공 유형)’의 거지는 일반인이 마다하는 싼 값, 비천하면서 간단한 노동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동냥하는 거지를 가리킨다. 청대 고록(高祿)의 『청가록(淸嘉錄)』 12권 「十二月·叫火燭」 기록은 이렇다. “세밑 기나긴 밤, 딱따기를 치면서 길을 따라 ‘인화물 조심, 경계’를 큰소리로 외치는 자를 ‘규화촉(叫火燭)’이라고 한다. 채철옹(蔡鐵翁)은 시로 읊었다. ‘해질 무렵에 누가 불조심을 외치는가, 거지가 길을 따라 대나무 딱따기를 치네.’ 지금 민간에 야경을 도는 것과 같다.” 거지는 대부분 혼자서 도처를 유랑하며 구걸하면서 외롭고도 추운 밤을 보낸다. 더욱이 연말연시의 추운 밤에는 일반인들은 온가족이 모이기에 야경을 도는 ‘규화촉’의 일은 거지와 같은 오갈 데 없는 사람을 고용한다. 거지도 그런 기회에 평소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에 마다하지 않는다. 청대 말기 민국 초기에, 포두(包頭) 양산(梁山) 사인구(死人溝)의 거지는 시신을 입관하고 야경을 도는 일을 맡았다. 노동을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노무형’에 속한다. 물론 수입은 모두 거지 두목에게 바쳤다. 북경의 강방(杠房)은 혼례나 장례가 있을 때 많은 거지들이 임시로 고용되어 일을 도왔다. 대도시에서 구걸하는 거지는 차문을 열어주거나 짐을 날라다주거나 오르막을 오르고 다리를 건너는 수레꾼을 도와주면서 행하를 받아 생활하기도 했다. 이 모두 ‘노무형’에 속하는 거지다. 취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노동을 제공하면서 구걸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그리 쉽지 않았다. 경쟁이 심할 때가 많았다. 노동을 제공하는 구걸 방식은 대부분 임시성에 지나지 않았다. 무작위일 경우가 많았다. 거지 항방(行幇) 구성원 중에서 두목에서 선택되어 파견되거나 다른 사명을 받은 자들을 제외하면 노동을 제공하면서 구걸하는 거지는 대부분 비교적 안분지족하는 자들이었다. 막돼먹은 불량배하고는 달랐다. 현대 요 몇 년 사이에 대도시의 길거리에서 신문이나 잡지를 파는 남녀 맹인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이 부르는 가격은 정가보다도 비싸지만 가련한 마음에 사람들은 사준다. 정가보다 비싸다고는 하지만 몇 푼을 더 벌기도 어렵고 벌었다 한들 소소한 액수에 불과하다. 이런 부류의 사람도 전문적인 거지라고는 할 수는 없지만 임시성의 노무형 거지로 분류해도 무방하다. 경제적인 형편이 곤란한 맹인에게는 생활에 다소나마 보탬이 되는 이러한 노동을 제공하면서 구걸하는 행위는 그나마 떳떳하고 마음이 편안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돈을 벌기는 그리 쉽지 않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패왕편(霸王鞭)은 원래 중국 민간 무용에 쓰이는 채색된 짧은 곤봉으로 양 끝에 구멍을 뚫고 구리 조각을 끼워 소리 나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 도구를 이용해 실연하는 중국의 민간 무용의 하나를 가리키기도 한다. 화곤무(花棍舞), 타련상(打連湘)이라고도 한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우리가 버린 폐물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을 본다' 정크 아티스트 양용방전 '마이 라이프' 2025년 양용방 개인전 my life전은 냄비, 후라이팬, 숟가락, 냄비 뚜껑, 솥 등 폐기물로 만든 조각 작품들을 선보인다. 이런 조각을 정크 아트(junk art)라고 하는데 정크 아트란 폐물(廢物)로 만든 미술이라는 뜻으로 고물상에 버려진 폐물들을 수집하여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반전(反轉)의 예술 방법을 말한다. 산업 산회 등장 이후 정크아트는 물질문명이 낳은 쓰레기로 다시 그 문명을 되돌아보게 하는 비판적인 역설을 생각하게 한다. 양용방은 주로 정크 아트 조각가로 신선한 의미를 부여하여 오늘날 우리들이 처한 사회적 의식과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전시는 제주전:11월 19일~12월 26일 갤러리 이호, 서울전:11월 26일~12월 26일 인사동 인사아트센터 제주갤러리) 우리는 '예술작품을 인간의 정신활동의 산물이다'라고 한 헤겔의 말을 기억하고 있다. 예술은 분명히 인간 기량의 산물이며, 기량은 몸이라는 정신과 육체의 통일체에서 나오는 결과를 따른다. 생명은 물질로부터 나오고, 정신은 생명을 통해서 생성된다. 몸이라는 생명의 집합체가 정신을 보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몸과 정신은 분리되지 않고 하나다. 있다는 것에서 있는 것이 나온다. 그래서 헤겔은 예술미를 정신으로부터 태어나고 다시 태어난 미라고 여겼던바 예술미를 자연미보다 더욱 우월하게 생각했다. 예술에 있어서는 자연도 하나의 모티프가 될 수 있다. 미의식도 사회에 따라 변하고 예술 표현의 방법도 다양하게 나타나는 오늘날이지만, 그래도 예술이 정신적 활동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 정신이 있는 한 예술은 새로움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예술이 고정되지 않거나 실험정신의 산물이라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예술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하지만 세상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형태학적 해석의 논리를 따라가면 그 형태 속에는 분명 어떤 형식이 있다는 말이 되고, 마지막에는 그것의 예술 내용을 말하게 된다. 우리는 그 내용을 하나의 ‘의미’나 ‘의미 찾기‘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는 숱하게 내용이 형식을 결정한다거나 혹은 그것의 반대로써 형식이 내용을 결정한다는 논쟁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예술에는 형식이라고 하는 구분이 그리고 내용의 의미를 드러내는 주제가 있다. 또한 그것의 개념들을 전복하거나 형식으로서의 장르나 내용으로서의 의미마저 깡그리 무시할 수도 있다. 예술은 절대로 고정적인 개념으로 전형화되지 않는다. 사고(思考)가 균일화될수록 경직된 집단화의 길로 향하는 것이다. 예술 자체가 자유의지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의 예술사가 걸어온 길이 미적 개념에 저항하거나 전복, 변형시키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예술 자체에서 창조라는 의미가 다시 새롭게 힘을 얻게 된다. 결국 창조(창작)는 예술의 과정에 속해있는 ’하나의 단단한 심지‘라 할 수 있는 저항인 셈이다. 그래서 시대사조, 시대 개념, 형식 유행(스타일)이라는 말은 같아 보이지만 같지 않은 바로 저항의 다른 얼굴인 시대정신이었다. 시대라는 말에는 변화라는 말이 들어 있고, 변화라는 의미 속에는 변형된다는 진화적 개념이 함께 있다. 진화의 개념에는 생존이라는 목표가 있다. 그러나 생존에는 은연중에 삶과 죽음이 포함되는데 진화에는 진보와 퇴행이 동시에 들어있다. 요즘 세상은 어느 때보다도 어둡다. 그렇지만 우리는 늘 새로운 변화, 즐거운 세상을 꿈꾼다. 예술이란 '삶을 위한 활기찬 노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오늘날 어디를 가든 이 생명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필요한 때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예술은 모든 곳에서 절망보다는 희망의 기운을 주는 힘의 예술이 돼야 한다. 시대정신이라는 존재의 자유의지를 원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빠르게 훼손되고, 국가자본주의라는 전체주의 길로 치닫는 것을 볼 때, 자본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빈부를 가르고 있는 지금 예술은 전형의 단순화라는 과거의 유령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 우리 시대 진보는 역사주의가 아니며 동시대 현실주의가 돼야 한다. 이 냉혹한 자본주의 현실, 그 현실이 점점 파시즘으로 변해가는 이때 자본의 현실주의는 자본주의에 있고, 병들어가는 자본주의는 긴급 처방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을 드러나게 할 수 있는가? 인간은 개체적 생명체다. 많은 만큼 생각이 다양해야 한다. 하나가 되면 위험할 때가 있고, 필요할 때도 분명히 있지만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이 정치적으로 결정돼서는 안 된다. 80억 인구의 마음들이 하나로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어떤 사상의 패턴은 있을지언정 주형물(鑄型物)과 같은 똑같은 존재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보는 사람마다 보는 느낌이 각자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수많은 갈래로 퍼지는 리좀(Rhizom)과 같다. 마음은 한날한시가 다르고, 어떻게 변해갈지 모르는 전방위 방향의 실시간 심리를 생성한다. 심리학에서 인간의 심리적 유형을 패턴화시켜서 마음을 유추할 뿐이다. 나의 아비투스(habitus)가 다른데 내가 옆 사람과 같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가. 마음은 당사자가 내면의 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존재들이 같은 마음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송대에 병부상서와 지추밀원 요직을 두루 거친 안돈(安惇)〔자는 처후(處厚)〕은 사건에 연루돼 폄적되어 담주(潭州)로 가는 도중에 의진(儀眞)의 정자에서 손님을 만나는데 거지가 나타나 마술을 할 줄 안다면서 한바탕 즐겨보자고 하였다. 안돈은 괴이하다 여기면서도 흔쾌히 예로써 대접하였다. 거지는 벼루, 붓, 종이, 향로를 가져와 달라하고는 흙과 침으로 먹을 만들었다. 흙에 입김을 불어넣어 유향을 만들고서는 불을 붙이니 특이한 향기가 코를 찔렀다. 그런 후에 먹을 갈면서 안돈에게 자신은 글자를 쓰지 못하니 하급 관리에게 자신이 읊는 제시(題詩)를 써달라고 하였다. “옥 같은 가인과 기름진 술이 있고, 술 취해 누운 원앙 장막 안에 있네. 아주 가까운 거리의 동정호에 그대는 가지 못하니, 장생불사가 최고의 풍류로다.” 안돈은 가만히 읽으면서 생각하였다 : 내가 향락을 탐하지 않은 게 벌써 오래 전인데 어찌 ‘옥 같은 가인’이 있겠으며 ‘술 취한 원앙’이 있겠는가. 더욱이 ‘동정호에 갈 수 없다’면 내가 신선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 아닌가. 안돈은 거지에게 감사하는 말을 하고 술 한 주전자를 건네니 거지는 단숨에 들이키고는 장읍하고 떠났다. 나중에 안돈이 동정호를 지날 때 조정에서 관직을 취소한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때야 안돈은 기이한 거지의 제시를 떠올리고는 더욱 괴이하다 여겼다. 이 전기적인 이야기 속의 영험한 점을 칠 줄 아는 거지는 점을 치면서 구걸하는 유형에 속한다. 옛날에 강호에서 점성, 관상을 보는 부류를 ‘건항(巾行)’이라 하였다. 직업 은어도 많았다. 해당되는 사람들 내부에서 비밀스런 정보를 덮어 숨기기 위해서였다. 『강호통용절구적요』에 수록된 내용은 이렇다. “문왕과(文王課)1)를 원두(圓頭), 육임과(六壬課)2)를 육흑(六黑), 팔자 점을 치는 것을 팔흑(八黑), 문자점(文字占)을 치는 것을 소흑(小黑), 이튿날 운을 점치는 것을 대자건(代子巾) ; 새점(새를 이용하여 치는 점)을 치는 것을 추자건(追子巾), 작건(雀巾) ; 손을 재서 운을 점치는 것, 풀 수량으로 점을 치는 것을 초건(草巾), 줄을 세서 점을 치는 것을 양건(量巾), 철판을 쳐서 점을 치는 것을 만건(灣巾), 현악기를 타면서 점을 치는 것을 유조건(柳條巾), 금을 타면서 점을 치는 것을 협사건(夾絲巾) 등등으로 불렀다. 관심을 통괄적으로 참반(斬盤)이라 하였다. 사묘나 셋집에서 사는 자를 모두 괘장(掛張)이라 했는데 사묘는 음지, 셋집은 양지라 불렀다. 입을 열지 않고 관상을 보는 것을 아건(啞巾), 벽 옆 문전에 서서 관상을 보는 것을 창건(搶巾)이라 하였다. 관상책을 이용해 점을 치는 것을 심풍(尋風) ; 애매한 문장, 차용자, 18가락 곤선승(捆仙繩)으로 점을 치는 것을 박판(撲板)이라 한다. 땅 위에서 문자점을 치는 것을 연지(硯地), 대 위에서 문자점을 치는 것을 교량(橋梁), 찻집에서 문자점을 치는 것을 답청(踏靑), 조개를 가지고 문자점을 치는 것을 리흑(蜊黑), 판 위 묵화로 문자점을 지는 것을 혼판(混板), 판 위 남색 그림으로 문자점을 치는 것을 남판(藍板)이라 한다.” 여러 가지 별점, 관상술은 방법이 다르고 분파가 많아서 은어도 서로 다르다. 원숭이에게 재주를 부리게 하면서 구걸하는 방식도 있다. ‘원숭이 놀이’는 중국 민간 잡기 중 하나다. 속칭 ‘원숭이 부리기(耍猴儿)’이다. 청대 『북경민간생활채도』 제50 「사후도(耍猴圖)」의 제사는 이렇다. “이것은 중국에서 원숭이를 부리는 그림이다. 그 동물은 사람 모양으로 온몸에 털이 나있다. 영리해 스스로 귀면을 쓸 수 있고 옷 입기, 장대 오르기, 물구나무서기, 양 위에 올라타기 등을 할 수 있다. 사람이 원숭이를 길거리에 끌 고 가서 징을 쳐 신호하면 그런 행동을 한다.” 이런 기예로 구걸하는 것은 모두 기예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매예형(賣藝型)’에 속한다. 예부터 한 업종을 이루어 해당 은어를 가지고 「사후도」 그림을 달리 해석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 원숭이를 노자(老子)라 하여 원숭이 부리기를 노자 부리기, 원숭이를 묶은 쇠줄을 장명(長命), 개를 팔자(叭子), 양을 쌍각(雙角), 귀면을 검황(臉幌), 장소를 반자(盤子), 채찍을 제인(提引), 원숭이가 공연하는 나무 시렁은 천평가(天平架), 원숭이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게 만드는 것을 헌도자(獻桃子), 점포를 파식(擺式), 집을 와자(窩子), 향촌을 포회퇴(跑灰堆), 구걸한 재물을 향두(響頭)가 있다, 구걸하지 못하면 향두가 없다 등등으로 말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 이상적인 주택의 위치 ① 음양변화(陰陽變化) : 음과 양의 기운을 품고 변화해야 한다. ② 금대환포(金帶環抱) : 금대를 두른 듯 물이 감싸야 한다. ① 산(현무) ② 도로(백호) ③ 하천(청룡) ④ 저수지(주작) ▲ 이상적인 도시 또는 마을의 위치 ① 조산(祖山) ② 소조산(小祖山) ③ 주산(主山) ④ 청룡(靑龍) ⑤ 백호(白虎) ⑥ 호종산(護從山) ⑦ 안산(案山) ⑧ 조산(朝山) ⑨ 수구산(水口山) ⑩ 용맥(龍脈) ⑪ 용혈(龍穴) 위에서 나열된 용어를 설명하자면 ① 조산은 태조산이라고도 하며, 혈에서 가장 멀고 높은 산이며 나무의 뿌리와 같은 근원의 산을 지칭하고, ② 소조산은 태조산을 떠나 산맥이 나뉘어 분맥(分脈)한 중조산이 다시 이어져 용맥의 기운이 가득 모인 혈장지(穴場地), 즉 해당 집터인 당혈(堂穴)까지 얼마 남겨놓지 않고 높이 수려하게 우뚝 솟은 산을 의미한다. ③ 주산은 혈(穴) 뒤편의 산세인 내룡(來龍)이 이어지면서 높고 낮게 또는 좌우로 굽어지고 꺾이는 형태를 의미하는 맥절(脈節) 중에 묘 뒤에 높게 솟은 산을 말하며 대체로 마을이나 묘지에는 이 산이 있다. 마을의 경우는 이 주산이 마을을 지켜준다고 하여 진산(鎭山)이라고도 부른다. ④ 청룡은 주택이나 마을 또는 묘지의 왼쪽에서 가까이 감아주는 산을 내청룡(內靑龍)이라 하고 내청룡 밖에서 감아주는 산을 외청룡이라 한다. 사람의 왼팔과 같고 청룡이 아름답고 기세 좋게 감싸면 아들자식의 발복이 누대로 잘되고 부귀가 따르게 된다. 백호는 청룡과 마찬가지로 혈판의 오른쪽에서 호위하듯 가까이 감아주는 산을 내백호(內白虎)라 하고 내백호 바깥의 산을 외백호라 한다. ⑥ 호종산(護從山)은 본신(本身)이라 할 수 있는 주된 산줄기인 용맥을 보호하고 감싸주는 주변의 산이나 산줄기를 말한다. ⑦ 안산(案山)은 일명 주작(朱雀)이며 집이나 마을 앞에 응대하듯 가까이 보이는 산으로서 집터나 마을에 모인 기(氣)가 다른 곳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보호하고 안산 밖에서 멀리 곧게 충(沖)을 해오는 물을 감당하여 완충하는 역할도 한다. ⑧ 조산은 안산 너머로 마주 보이는 크고 작은 높은 산을 말한다. 다시 말해 청룡과 백호, 안산 밖에 나열된 산들로서 유정한 모습으로 조응된 산들을 말한다. ⑨ 수구(水口)란 풍수용어로 혈장을 중심으로 하여 전후좌우의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빠져나가는 물목을 말한다. 수구사는 물은 멀리 흘러와 무릇 수구에 급히 빠져나가는 물을 느리게 멈추어 흘러갈 수 있도록 작은 산봉이나 언덕 혹은 바위나 기타 돌무더기 같은 지형지물을 가리킨다. ⑩ 용맥은 주된 산줄기를 따라 흐르는 기의 지하 통로라 할 수 있는 산의 능선을 가리킨다. ⑪ 용혈은 기(氣)가 흘러가는 산능선인 용맥을 따라 흘러온 기운이 뭉친 터를 의미한다. ▲ 명당주택의 풍수적 위치 조선조 실학자인 이중환(李重煥) 선생의 《택리지(擇里志)》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살 터를 정하는 데는 첫 번째로 지리(地理)가 좋아야 하고, 두 번째로 경제적인 이익이나 경제 활동이 편리한 곳이어야 하고, 세 번째로 인심이 좋아야 하고, 네 번째로 수려한 산과 물이 있어야 좋다'고 했다. 사실 '산 좋고 물 좋으면 인심도 좋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따라서 주택으로서의 적당한 위치는 양지바르고 거친 바람이 들지 않고 사람이 살기에 아늑하고 포근한 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풍수적 조건을 두루 갖춘 곳에서 생활한다면 풍요로움을 상징되는 건강하고 윤택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아왔다. 이러한 일련의 지리적인 관점은 오래전부터 조상들의 지혜와 경험에서 비롯되고 터득된 일련의 통계적인 환경학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풍수적으로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이나 터는 사람이 살기에 부적합한 장소라 할 수 있다. 사실 지리적으로 불리하거나 지기(地氣)의 흐름이 좋지 않은 흉가(凶家)에 살게 되면 원인도 모르게 몸이 아프거나 하는 일마다 장애가 많이 따라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갑작스러운 사고나 질병이 생겨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호소하는 때도 있다. ▲ 주택의 선택에 필요한 풍수적 조건 풍수에서는 사람이 사는 가옥(家屋)이나 집터 또는 사업장을 선택할 때 세 가지 요소를 중시한다. 바로 주택의 모양이나 주택이 위치한 터의 형세를 말하는 건물의 생김새나 상태를 의미하는 가상(家相)의 삼대요소(三大要素)를 말한다. 그 중 첫 번째가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산을 등지고 낮은 곳을 향해 적당한 거리에 물을 마주하거나 흐르는 물이 감싸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통풍과 배수가 잘되어 어떠한 천재지변(天災地變)에도 해를 당하지 않은 아늑한 지세라고 보면 된다. 이러한 곳에 살면 건강한 삶은 물론 오래오래 장수한다고 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주택의 앞이 낮고 뒤가 약간 높아야 좋다는 “전저후고(前低後高)”의 지형이다. 주택보다 마당 쪽이나 정원이 높아 버리면 큰비가 오거나 할 때 물이 집 쪽으로 역류(逆流)하게 되고 역행(逆行)하는 기운이 형성되게 되어 불리하다. 이렇게 되면 가슴을 누르듯이 답답한 느낌을 받게 되어 정신이 불안정하고 하는 일이 막히거나 신체가 허약해져 건강상에 이상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러한 곳에 살게 되면 뛰어난 인재나 지도자가 나온다고 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집안에 사람이 출입하는 곳이 좁은 듯하고 집의 뒤편이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형태인 가옥이 이상적인데, 정원에 들어서면 건물보다 정원이 좀 편안하고 너그러이 안정감이 감돌아야 좋다는 “전착후관(前窄後寬)”의 지형을 말한다. 이 말은 집 안에 모인 기운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아 좋다. 반대로 마당 쪽이 넓고 집 뒤가 좁으면 집안에 모인 기운이 밖으로 새어 나가서 좋지 않다는 의미이다. 대지의 형태는 네모가 반듯한 것이 좋고 주택의 앞쪽이 배(倍) 정도 길어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좋은 정원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곳에 살게 되면 부귀(富貴)가 산처럼 쌓인다고 했다. 반대로 앞이 넓고 뒤가 좁으면 재물이 모이지 않고 흩어진다고 했다. ▲ 기운이 잘 모이는 ‘명당 집터’ 땅에는 기운이 잘 모이는 땅과 기운이 잘 모이지 않는 땅이 있다. 명당은 맥이 이어져 기운이 모인 곳으로 이러한 자리는 건강과 복을 얻을 수 있다. 명당이라고 하는 것은 양지가 바르고 사람이 살기에 아늑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다. 집의 뒤쪽을 받치고 있는 주산이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고 수려하며 단정한 곳이며 주위 사방에서 호위하는 산들이 있고 산맥이 평지 쪽으로 유유히 뻗어 내리흐르는 물가에서 그쳐 평평한 들판에 집터가 이루어진 곳을 말한다. 가장 좋은 곳은 일조량이 적당하고 통풍이 잘되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전후좌우로 동산이나 산이 감싸주는 포근하고 아늑한 곳이 이상적인 명당이라 말할 수 있다. 또 사방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적당하게 막아주는 곳이어야 하고 주변의 자연환경이 안정감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기의 순환이 잘 이루어지는 곳으로 바람을 막아주고 밝고 아늑하며 일조량이 적당하여 쾌적한 느낌을 주는 곳이 바로 복과 건강을 얻을 수 있는 명당이다. 양택은 음택과 차이가 있는데 큰 물가에는 대체로 부유한 집과 훌륭한 인물이 많이 나오는 유명한 마을이 많이 있다. 물의 이치는 양택에서 경제적인 그것이 관련이 많다. 급하지 않고 잔잔하게 흐르는 시내와 물이 모이는 곳은 대대로 자손을 이어가며 건강하게 장수하며 오랫동안 살 수 있는 터가 되는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 신영대는? = 대한풍수연구학회 편집위원장, 한국역술인협회 공인 역학연구원이다. 중문학 박사와 풍수학자로서 ‘제주의 오름과 풍수’, ‘명리학원리대전’, ‘풍수지리학 원리’, ‘전원시인 도연명 시선', ‘흰 구름 벗을 삼아 읽어보는 당시선’ 등 다수의 저서를 냈다. '한라산 총서'의 구비전승·지명·풍수 분야와 ‘세계자연유산지구 마을일지 보고서’ 중 풍수 분야 공동 집필자로도 참여한 바 있다. 또 제주도 각 마을 '향토지' 풍수 부문에 공동 집필자로 참여하고 있다. 현재 제주관광대 관광중국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점을 치고 관상을 봐주면서 구걸하기도 했다. 갑골 복사(卜辭)부터 『주역』까지 중국은 일찍부터 고유한 점복 사상과 완전한 방법론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주례·춘관·사무(司巫)』 등의 기록을 보면 “상사(喪事)는 무당이 신을 내리는 예를 관장한다”라고 돼있다. 점복과 무술(巫術)은 이미 민간 사회에서만 유행했던 것이 아니라 일찍부터 상층사회의 정치활동 중에서 중요한 합법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깊고도 두터운 전통문화의 토양이 있었기에 많은 강호 술사들이 생겨나 일상 민간 생활의 필요에 적응하게 된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현대 과학에서도 합리적인 과학적 요소가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옛날 강호 술사 대부분은 경박한 선입관(고정관념)을 계승하였을 따름이었다. 각자 나름대로 꿍꿍이속이 있고 비슷한 것 같지만 서로 다른 생계 수단을 영위하였다. 가난해 초라하게 된 거지들이 이러한 술법을 이용하여 구걸하는 것이 뭐 그리 새로운 일은 아닐 터이다. 당대 단성식의 『유양잡조속집(酉陽雜俎續集)』 1권 「지낙고상(支諾臯上)」의 기록을 보자. “신비(辛秘)가 오경 시험에 합격한 후에 결혼하러 상주(常州)로 갔다. 일행이 섬서(陝西)에 도착하여 나무그늘에서 쉬었다. 부스럼 딱지가 붙은 얼굴에 서캐가 붙어있는 옷을 입고 옆에서 다리를 뻗고 앉아있던 거지가 신비에게 신부를 찾아가지 말라고 하였다. 신비가 참지 못하여 떠나자 거지도 따라갔다. 신비의 말이 힘이 없어 빨리 갈 수 없었다. 거지는 따라가면서 끊임없이 행차를 멈추라고 강권하였다. 앞에 녹색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자 신비가 읍하며 인사를 나누자 거지도 뒤따라 맞장구쳤다. 1리여를 가자 녹색 옷을 입은 사람이 갑자기 앞 말을 급히 몰아 달려갔다. 신비가 이상하게 여겨 저 사람이 왜 저러지 혼잣말을 하자 거지가 말했다. ‘저 사람이 시간이 됐는데 어찌 어찌 자유롭겠소?’ 신비가 이상하다 여겨 처음으로 물었다. ‘그대가 시간이 됐다고 했는데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거지가 답했다. ‘잠깐 있으면 스스로 알게 될 거요.’ 상점에 다다르자 수십 명이 상점을 둘러싸고 있었다. 까닭을 물으니 녹색 옷을 입은 사람이 죽었다고 하였다. 신비가 크게 놀라 노비에게 말에서 내리라고 한 후 옷을 벗어 거지에게 주고 말을 태워주었다. 거지는 감사하는 말도 하지 않았다. 거지는 자주 깊고 오묘한 이치가 있는 말을 하였다. 변경(汴京)에 도착하자 거지가 신비에게 말했다. ‘나는 여기에 머물 것이오. 공께서는 무슨 일로 가시는 것입니까?’ 신비가 약혼하러 간다고 말하자 거지가 웃으면서 말했다. ‘공은 사인이시니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분은 공의 처가 아니오. 공이 결혼할 시기는 아직 멀었소.’ 이튿날 술 한 잔을 권하고 신비에게 이별을 고하면서 상국사(相國寺)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후에 불이 날 거외다. 여기 조금 있다가 나중에 떠나시오.’ 오후가 되자 까닭 없이 사찰에 불이 나 상륜이 무너졌다. 거지가 떠나기 전에 가지고 다니다가 다른 때에 의문이 생기거들랑 풀어보라며 머리 묶는 비단 두건을 건네주었다. 20여 년이 지난 후 신비가 위남위(渭南尉)가 돼서야 배(裵) 씨와 결혼하였다. 배 씨 생일에 친척과 손님이 모였을 때 갑자기 예전에 거지의 말이 생각나서 두건을 풀었더니 손바닥 크기의 종이가 있었다. 글이 쓰여 있었다. ‘신비의 처는 하동 배 씨로 모월 모일 생이다.’ 바로 그날이었다. 신비가 거지와 헤어진 날을 세어보니 처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을 때였다. 봉영(蓬瀛)의 선비가 인간세상으로 쫓겨 내려왔단 말인가!” 이야기는 전기적인 색채가 너무 강하고 황당하다. 거지가 친 점이 영험하다는 걸 강조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 기록을 통해 점에 정통한 거지가 우대를 받았고 특별히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입내(성대모사)의 기원은 아주 오래다. 『사기·맹상군열전(孟嘗君列傳)』에 맹상군이 급히 함곡관을 넘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닭이 울어 새벽을 알리지 않으면 함곡관을 통과할 수 없었다. 다급한 상황에서 좋은 방법을 떠올린 사람이 있었다. 닭의 울음을 잘 흉내 내는 사람을 찾아 새벽을 알리는 수탉 소리를 모방하여 울게 하여서는 여러 닭들이 일제히 따라 울게 만들어 무사히 함곡관을 넘었다. 이 기록에서 당시에 이미 성대모사 기예를 갖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대에는 명확한 입내 기술을 기록한 문헌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 9권 「재집친왕종실백관입내상수(宰執親王宗室百官入內上壽)」의 기록이다. “음악이 아직 울리지 않았는데 집영전(集英殿) 산 위 누각에서 교방(敎坊)의 가무를 연주하는 예인들이 여러 금수의 소리를 흉내 내자 내외가 숙연해졌다. 울음이 그치자 공중에서 소리가 잘 어울리니 난새와 봉황이 날아와 모이는 것 같았다.” 『무림구사(武林舊事)』 1권 「성절(聖節)」에도, ‘여러 금수가 우는’ 호복(胡福) 등 2명이 있었다. 6권 「제색기예인(諸色伎藝人)」에 ‘사투리를 배운’ 방재랑(方齋郞)이 있었으며 ‘물건을 파는 소리를 흉내 내는(吟叫)’ 사람이 강아득(姜阿得) 등 6명이 있었다. 당시에 이른바 ‘규과자(叫果子)’1), ‘음아(吟哦, 음영吟詠: 박자에 맞춰 음송, 낭독하는 것)’ 또한 입내에 속했다. 송대 고승(高承)의 『사물기원(事物紀原)』 9권의 기록이다. “가우(嘉祐) 말에 인종이 죽어서 사방에서 8음이 그치고 조용하게 되자, 시중에 처음으로 규과자 놀이가 생겨났다. 본래 지화·가우 연간부터 자소환(紫蘇丸)을 읊을 것과 악공 두인(杜人)이 십규자(十叫子)를 엮은 것이 시작이다. 경사에서 물건을 팔 때에는 소리를 지르게 마련인데 음아(吟哦)〔음영(吟詠)〕가 서로 달랐다. 그래서 시민들이 그 성조를 채용하여 사이에 사장(詞章)을 넣어 오락거리로 삼았다. 지금 세상에 성행하니 ‘음아’라 부른다.” 이것이 바로 당시에 『도성기승(都城紀勝)』에서 말한 ‘와사(瓦舍)의 여러 기예’ 중 하나인, 시정에서 여러 색깔로 물건을 파는 소리를 따서 노래하고 읊조리는 기예다. 궁조에 맞춰 이루어진 ‘규과자’는 시중의 물건을 파는 성조를 종합적으로 모방한 것이다. 당시에 여러 설창(說唱), 가무(歌舞), 곡예(曲藝), 잡기(雜技) 예인은 모두 거지의 지위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하물며 보잘 것 없는 재주인 입내 예인이야 말하여 무엇 할 것인가. 『청패류초·걸개류』에 수록된 「개효각종성(丐效各種聲)」의 사례가 그것이다. 입내를 실연하면서 구걸하는 거지의 사례는 청대 정지상(程趾祥)의 저서 『차중인어(此中人語)』 3권 「개기(丐技)」에서 따왔다. 광서 초년에 상해시에 거지 한 명이 있었다. 입에 갈대 줄기로 만든 피리를 물고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 병아리 소리, 연 날리는 소리 등을 흉내 낼 수 있었다. 거의 진짜 같아 사람들이 가짜를 구별할 수 없었다. 이외에 돼지, 개, 소, 양 등 가축 소리도 똑같이 흉내 낼 수 있었다. 기공(氣功)을 실연하면서 구걸하는 방식도 있다. 직접 기록된 문헌을 근거로 하면 기공(氣功)은 이천여 년 전의 사서와 의서에 이미 보인다. 기공을 운용하여 병을 예방하고 몸을 튼튼히 했다는 기록이다. 중국 전통 무술도 일찍부터 기공으로 몸을 튼튼히 하고 몸을 지키는 효능을 받아들여 하나로 융합시켰다. 역사상 유명한 무술 대가들은 기공의 도에 정통하였다. 강호에 기예를 팔아 걸식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기공도 구걸하는 방식의 하나가 되었다. 청대 선통 말년(1911) 7월, 신해혁명이 발발한 그 해에 강녕(江寧) 하관(下關)시에 거지 한 명이 나타났다. 그는 한 점포에 들어가 긴 걸상을 하나 가지고 나와 계산대 위에 거꾸로 올려놓고는 주먹을 쥐고 운기를 한 다음 걸상에서 2,3촌 떨어진 곳에서 주먹을 뻗고 당기면서 걸상을 왔다갔다 움직였다. 걸상에 주먹이 닿지도 않으면서 4차례가 움직이게 만들었다. 한 차례 실연한 후 점포 주인에게 사례금을 요구한 것은 물론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도시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당시의 시장에서는 각양각색의 장사꾼이 생겨났다. 장사꾼의 큰소리로 외치며 물건을 파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일어나 끊임없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러자 당시의 설창 예인이 물건을 파는 소리에서 영감을 얻어 그 소리를 기초로 가공하고 연마해 전문적인 기예로 발전시킨 후 당시의 경성의 ‘와사(瓦舍)’에서 공연하였다. ‘규과자(叫果子)’는 그런 입내(성대모사) 공연 중의 하나다. 주로 당시에 과일을 파는 장사꾼들이 외치는 소리를 모방하였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청대 광서 연간에 소주(蘇州) 도화선관(桃花仙館)에서 석판 인쇄한 당재풍(唐再豊)이 편찬한 『아환회편(鵝幻匯編)』 권12 『강호통용절구적요(江湖通用切口摘要)』의 기록을 보자. “강호 여러 기술은 모두 네 가지로 나눈다. 포(布), 피(皮), 이(李), 과(瓜)인데 이를 행하는 자를 상부(相夫)라 부른다. 상부를 하는 자는 하다라 하지 않고 맡다 라고 하여 스스로를 당상(當相) 사람이라 부른다. 점, 관상, 문자점 등을 통틀어 포항(布行)이라 부르고 병을 치료하는 약을 파는 것, 고약을 만들어 파는 것 등을 통틀어 피항(皮行)이라 하며 요술(마술) 4가지1)를 통틀어 이자(李子)라고 부르고 권법, 곡마(曲馬) 등을 통틀어 과자(瓜子)라 부른다.” 이 네 가지 부류에 속한 거지는 실제로 기예를 부리며 구걸하는 매예형(賣藝型) 거지다. 일찍이 명·청시기에 강호에서 의술을 행하고 약을 팔면서 구걸하던 거지 사이에 많은 ‘당상(當相)’의 직업은어가 유행하였다. 예를 들어 『신각강호절요(新刻江湖切要)』에 기록이 있다 : 의사를 제붕공(濟崩公), 원기를 북돋우는 것을 고권인(苦勸人), 명의를 한화통(熯火通), 부유한 의사를 한화(汗火), 한때 인기 있는 의사를 단청(丹靑), 죽채(竹彩) ; 안과를 피간(皮懇), 침과 뜸을 차연만(釵烟彎), 진맥을 탄현자(彈弦子), 탕약(湯藥)을 사다(손으로 약재를 집어서 달아 첩(貼)으로 짓는다는 뜻)를 배한(配熯), 약을 바르는 것을 암로(暗老), 암한(暗熯), 고약을 원지(圓紙), 도원(塗圓) ; 약을 달이는 것을 전한(煎熯), 소량의 약 가루를 고약의 가운데에 놓고 상처에 바른 것을 비설(飛屑), 방추형 약을 한화(熯火), 한금(熯琴), 오고 가고 하면서 약을 파는 것을 도피(跳皮), 행한(行熯) ; 약을 소매하는 것을 주소포(丢小包), 춘약을 파는 것을 파한(派熯), 취폐(取鄨), 괘랑(掛狼), 기생충병을 치료하는 것을 칠절통(七節通), 칠절조(七節吊), 침을 놓는 것을 차매(叉賣), 차당(叉黨), 환약을 환한(丸熯), 립립(粒粒) ; 우황을 폭공(爆工), 약용 진주 분말을 교환하는 것을 고부공(鼓釜工), 연충 토하기를 발묘수(潑卯水) ; 짐을 짊어지고 약을 파는 것을 천평당(天平黨), 환약을 파는 것을 도립립(跳粒粒), 호탱(虎撑)2)을 촌령(寸鈴), 금창약을 파는 것을 도십자한(跳十字熯), 향을 피우고 산 위의 사묘에 참배하며 약을 파는 것을 공당(拱黨), 관음당(觀音黨), 추환(捶丸)3)하며 약을 파는 것을 만자(彎子), 처방전을 파는 것을 제공(提空) ; 고약을 제조하는 것을 취도아(炊塗兒), 북경사람이 약을 파는 것을 염칠피통(念七皮通), 승려가 약을 파는 것을 삼피도(三皮跳), 도사가 약을 파는 것을 화두생(火頭生), 전진당(全眞黨), 충치를 치료하는 것을 시수(柴受) ; 부녀자가 약을 파는 것을 타청(拖靑), 반시(扳柴), 공중에서 약을 취하는 것을 채립(采粒), 나귀 타고 약을 파는 것을 타귀(拖鬼), 우산을 들고 약을 파는 것을 창피(昌皮), 마술하면서 약을 파는 것을 정차당(丁叉黨), 가판대를 늘어놓고 약을 파는 것을 흘탑당(趷 黨), 좌선해 약을 파는 것을 주돈자(丢墩子), 게시해 약을 파는 것을 설벽(設僻), 가짜 약을 파는 것을 도장한(跳將熯), 의술을 배우는 것을 쇄피(鎖皮) 등등이라 불렀다. 관상을 보는 ‘당상(當相)’을 행할 때에는 각각 12간지 동물을 표시하는 띠로 은어를 만들었다. 『강호통용절구적요(江湖通用切口摘要)』는 더욱 구체적이고 생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대 위에 약병을 설치해 병을 치료하는 자를 사평(四平), 대 위에 약병을 설치하고 약을 파는 자를 념자(捻子), 땅 위에 많지 않은 약병을 설치한 자를 점곡(占谷), 손에 호청을 들고 흔들면서 거지를 지나면서 긴 천을 이용해 간판으로 삼아 손님을 맞이하는 자를 추포(推包), 호청을 추자(推子) 등으로 불렀다. 고약을 팔면서 철추로 자기 몸을 때리는 자를 변한(邊漢), 고약을 팔면서 칼로 팔 등에 자해하는 자를 청자도(靑子圖), 고무 협지고(夾紙膏)를 파는 자를 용궁도(龍宮圖), 고약을 팔면서 돈을 요구하지 않고 향만을 요구하는 자를 향공(香工), 시골만 돌아다니면서 광대라 자칭하며 병을 치료하는 자를 수포(收包), 가판대를 깔아놓고 초약을 파는 사람을 초한(草漢), 대나무 막대기에 많은 기생충을 달고서 기생충환(吊蟲丸)을 팔며 다니는 자를 낭포(狼包), 기생충을 달고 다니지 않고 기생충환을 팔며 다니다 찾는 사람이 없으면 먼저 쌀벌레나 돈을 땅에 던져 병자를 토하게 만드는 자를 도모수(倒毛水), 삼삼칠(參三七)을 팔고 다니는 자를 근근자(根根子), 가루약을 물에 넣어 환을 만드는 것을 탕리자(湯李子), 황색 돌기를 술에 섞어 허리와 다리 통증을 치료할 수 있다고 팔고 다니는 자를 추리자(推李子), 안약을 파는 자를 태한(抬漢), 가짜 용골(龍骨)을 팔고 다니는 자를 처량자(凄涼子), 구슬 놀이를 하면서 고약을 팔고 다니는 자를 탄궁도(彈弓圖), 독창을 치료할 수 있다며 춘약을 팔고 다니는 자를 연장(軟賬), 당의정을 팔고 다니는 자를 통틀어 첨두(甛頭), 징을 치며 당의정을 파는 자를 초포(超包), 약을 잘게 잘라 사탕에 넣기 전에 바싹 졸이는 것을 좌목첨두(剉木甛頭), 사탕을 길게 만들기에 앞서 톱양을 본뜨는 것을 소포첨두(小包甛頭), 속이 비고 부드러운 당의정을 포화념지(鋪貨捻地), 마술을 선보이고 나중에 약을 파는 것을 취마(聚麻) 등등으로 부른다. 약을 파는 모든 것을 통틀어 피항소포(皮行小包)라 부른다.” 이러한 여러 가지는 의술을 행하고 약을 파는 자들의 본업의 내막을 잘 보여준다. 두 책에서 서술한 내용이 약간 다른 점이 있기는 하지만 서로 보충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기와 지역에 따라 유행의 차이에서 오는 상이점이라 하겠다. 청대 『북경민간생활채도』 제96 「찬령매약도(串鈴賣藥圖)」의 제사는 이렇다. “이것은 중국에서 방울을 흔들며 약을 파는 그림이다. 이 사람은 강호 떠돌이 의사다. 의술에 의약에 어느 정도 정통하며 말재간이 좋아 여러 성을 돌아다니며 기예를 판다. 한 손에 방울을 들고 흔들며 다른 한 손에는 서로 다른 약 이름을 쓴 광고를 들고 있다. 병을 치료할 때에는 눈으로 병색을 보고 병세에 따라 말을 옮기며 약을 판다. 단지 의식을 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림의 형상은 제사에 못지않다. 몇 마디 말로 의술을 행하고 약을 팔면서 구걸하는 방식의 거지의 행위를 정확히 묘사하고 있다. ‘단지 의식을 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한 마디로 거지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마술(戱法儿)’의 기본 수채활(手彩活, 즉 손재주)에는 4가지가 있다. ‘단(丹), 검(劍), 두(豆), 환(環)’이다. 단(丹)은 쇠구슬을 삼키는 것 ; 검(劍)은 보검을 삼키는 것 ; 두(豆)는 선인적두(仙人摘豆, 사발 2개에 콩이나 콩 크기의 진흙알 7개를 엎어놓고 옮길 때마다 변환하고 나중에는 온데간데없는 눈속임 마술) ; 환(環)은 구련환(九連環, 지혜의 고리)을 가리킨다. 2) 호탱(虎撑)은 낭중행의(郎中行醫)의 표시(標示)다. 구리나 쇠로 만든 금속권(圈)이며 가운데는 비어있고 안에 작은 쇠구슬을 집어넣었다. 호탱을 흔들면 소리가 난다. 명청(明清)시대 안휘성(安徽省) 안경(安慶)에서 유의(游醫) 낭중(郎中)들은 등에는 약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호탱을 쥐고 방방곡곡을 누비고 돌아다니며 의술을 행하며 한약도 팔았다. 이것이 ‘호탱(虎撑)’의 내력(来历)이다. 안경 일대에 유전되어 내려오는 다음과 같은 신기한 전설이 있다. “당(唐)나라 때 명의 손사막(孫思邈)이 어느 날 심심산곡으로 약을 캐러 들어갔다. 산 중턱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여러 빛깔이 섞여 알록달록한,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입속에 피를 머금고 있다가 손사막을 향하여 고통스럽게 신음 소리를 내었다. 손사막은 호랑이가 불쌍하여 호랑이의 입안을 들여다보았다. 늙은 호랑이의 목구멍 속에 기다란 뼈가 걸려 있었다. 손사막은 호랑이가 목숨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목구멍에 걸려있는 기다란 뼈를 꺼내기는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호랑이가 입을 다물면 손이 끊어질 것을 염려하여 손사막은 급히 마을로 내려가 철장에게 철환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손사막은 철환을 호랑이의 입안에 버티어 놓고 철환의 구멍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호랑이의 목에 걸린 뼈를 호랑이의 입 밖으로 끄집어내었다. 호랑이는 감격하여 손사막에게 머리를 조아리고는 멀리 산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와 같은 소문이 퍼진 후 유의낭중들은 자기들도 손사막처럼 고명한 의술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한 손에 철환을 들고 다니며 행의를 표시하기 시작했는데 이와 같은 철환을 호탱(虎撑)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유의낭중(游医郎中)들에게 호탱(虎撑)을 흔드는데 있어서 일정한 규칙이 있다. 예를 들면 호탱을 자기 가슴 앞에서 흔드는 유의낭중은 일반 낭중(郎中)이고 호탱을 자기 어깨 높이에서 흔드는 낭중은 의술이 비교적 뛰어난 낭중이며 호탱을 자기 머리 위로 높이 올려서 흔드는 낭중은 의술이 매우 고명한 낭중이라는 상징이다. 호탱의 위치와 상관없이 약방의 문 앞을 지나 갈 때는 호탱을 흔들어서는 안 된다. 약방 안에 손사막의 위패(位牌)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낭중이 약방 앞을 지나가며 호탱을 흔들 경우엔 스승을 모독했다는 혐의를 받고 약방 주인은 즉시 유의(游醫)의 호탱(虎撑)은 물론 약 바구니까지 몰수하고 동시에 손사막의 위패 앞에 분향하며 사죄하라고 명했다. 사료(史料)에 의하면 송(宋)나라 때 명의 이차구(李次口)가 호탱을 손에 쥐고 행의하기 시작했다고 수록되어 있다. 이차구는 의술이 고명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민간 의사들이 호탱(虎撑)을 가지고 돌아다니며 행의하는 습속은 청(清)나라 말과 민국(民国) 초년까지 계속되었으며 신중국 성립 후 점차적으로 사라졌다.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민간 의사의 행의를 표시하던 ‘호탱’은 한의 역사 문물이 되고 말았다. 현대의 민간 의사들과 민영 병원에서는 고객을 끌어 들이기 위한 수단으로써 빨강 색깔의 비단 위에 “묘수회춘(妙手回春)”, “신의성수(神醫聖手)”, “도초편작(道超扁鵲),기압화타(技壓華佗)” 등 글씨를 써서 문 앞에 높이 매달아 놓는다. 3) 옛날 놀이의 하나다. 마당에 한 자 가량의 너비로 네모나게 금을 긋고 가운데 공 따위를 놓은 다음 다른 곳에 구멍을 파서는, 몽둥이로 공을 쳐서 그 구멍 안에 넣는 사람이 이긴다. 타탄(打彈)이라고도 한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 전통 초가의 공간을 그대로 찾아보기는 힘이 들고, 개량되었거나 기억에만 남아 있는 공간이 되었다. 대정 지역 농촌의 집들은 원래의 초가의 터를 확장하거나 개량된 현대의 집이 대부분이다. 물질적 변화의 삶이 공간 구조도 바뀌게 한 것이다. 제주 전통의 가옥 구조를 보면 진입로인 올레, 너른 마당, 채전(菜田)인 우영, 간장·된장·젓갈류를 보관하는 장팡, 돼지가 사는 돗통(통시), 소를 키우는 쉐막, 살림집인 초가 한 채나 혹은 안거리 밖거리, 모커리 가옥 3채가 서로 분리돼 있었다. 또 마당과 이어서 눌터와 초가를 돌아가면 뒷 우영이 있었다. 초가의 구조 또한 대부분 3칸에서 4칸이었고, 초가 구조는 정제(정지), 쳇방, 큰방, 작은 방, 마루, 안방(고팡), 굴묵, 난간 등으로 이루어졌다. 정제(정지:부엌)에는 예전에 세 개의 돌로 받치 솥덕이 3곳에 있었으나 난방을 사용하게 되면서 방과 이어진 온돌을 놓았다. 쳇방은 앉아서 식사를 하는 공간이며, 거실 역할을 하고 있는 마루에서는 제사를 지내거나 접객을 하는 공간이었다. 물론 큰 방에서 제사를 지내는 집들도 있다. 대정 지역에서는 고팡을 안방이라고 하여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로 썼으며, 평소에도 늘 통쇠(자물쇠)를 걸어두었다. 안방은 그냥 흙벽으로 두고 곡식을 차고 어둡게 보관하였으며, 두 주먹 크기의 ‘창곰’을 내서 공기만 겨우 통할 수 있고 빛을 최소한 제한하여 들어오게 만들었다. 안방에는 곡식을 보관하는 통개와 뒤주(나중에 드럼통)들이 있었다. 영락리, 동복리, 김녕리 등에서는 그 통개에 안내(안칠성)를 모시기도 하는데 그 통개 속에는 안칠성의 상징물(구슬, 오색천, 오곡)을 넣고, 제사 때나 철갈이 때 그 통개 위에다 상착에 제물을 차려 놓는다. 온돌은 근세에 이르러 서민에게 도입되어, 방 구들에 두 줄의 홈을 파서 납작한 곶돌인 아아용암으로 줄줄이 덮은 후에 찰흙을 바르고 마르면 장지를 붙여서 콩기름을 여러 번 바른다. 밖으로 굴뚝을 내어 연기를 배출하였다. 난방은 두 곳에서 이루어진다. 초가가 개량되면서 정제(부엌)와 붙은 방은 솥덕과 연결하여 온돌을 만들었고, 다른 방인 경우 따로 굴묵과 연결하여 온돌을 지폈다. 땔감은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밥을 지을 때는 솔잎·소나무 쭉정이·장작·콩깍지·조칲·솔또롱(솔똥,:솔방울) 등을 사용했고, 때에 따라서 보리낭이나 감젯줄을 사용하기도 했다. 굴묵의 연료로는 보리 까끄레기나 쉐똥을 사용하여 불을 지핀 후 당그네로 뜨거운 불채를 깊게 밀어넣으면 점점 방바닥이 뜨거워진다. 또 연료는 따로 눌(노적단)을 눌어서 마당 구석에 놔둔다. 연료 중에 낭뿔리가 있는데 낭뿔리는 주로 소나무 뿌리이다. 낭뿔리는 화력이 좋아서 큰일 때에 돼지고기를 삶을 때 사용하기 때문에 따로 구입해 둔다. 동네 청년들이 모여 낭뿔리 계모임을 만들었다. 또 다른 눌로는 촐(꼴)을 누는(쌓은) 눌이 있었다. 촐눌은 쉐나 말을 키우는 집의 먹이이며, 촐눌로는 감젯줄눌, 콩깍지눌, 조칲눌, 오리지널 촐눌이 있었다. 기본적인 쉐와 말 먹이는 촐이었다. 그러나 별미처럼 꽁깍지와 조칲은 쉐와 말이 좋아하고 감젯줄은 특히 말이 좋아한다. 그리고 깔개로 쓰는 보리낭눌은 돗통에 깔거나 비가 올 때 마당에 깔기도 하고, 또는 날래(곡식)를 널(말릴) 때 멍석 아래 깔개로 쓰거나 여러 모로 집 안팎 공간의 깔개로도 사용하고 장마철에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 우영에는 채소들을 심었는데 일종의 자연 냉장고처럼 싱싱하게 때마다 캐서 먹는다. 우영에는 나물·파·고추·가지·상추·무 등을 조금씩 가꾼다. 우잣에 심는 나무로는 동백, 감나무, 비파, 피마자, 복사꽃을 심었고, 돗통 옆에는 무화과를 심는다. 초가 뒤편이나 서측에 낙숫물을 막기 위해 양애(양화)를 심었고 향기로운 순은 식용으로 먹었다. 올레에 심는 꽃으로는 마농꽃, 봉숭아, 분꽃, 칸나 등을 심었다. 돗통은 정제와는 반대편에 만든다. 신화에서도 정제와 측간은 멀어야 좋다는 말이 있는데, 남선비의 본부인인 조왕 할망과 첩인 노일저대구의 똘이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이며, 멀리 있어야 하고, 사실은 위생상으로도 서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 쉐막에는 쉐를 키우지만 잠대와 같은 농기구를 걸어 놓거나 작두와 남방애를 보관한다. 나날이 증가하는 이주민의 시대가 되면서 제주 전통문화는 변해가고 있고, 타지역 문화와 혼합되는 상황에 놓여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제주도의 문화 지각이 변동하고 있다. 공간은 사회적, 환경적으로 생산력에 따라 마치 유기체처럼 변한다. 인구 변동, 생활방식, 삶의 질에 따르는 의식주 변화에 따라 다시 공간이 바뀐다. 정작 중요한 변화의 요인은 산업의 큰 변화였다. 모든 것은 변하고, 변하는 것이 세상이 이치라면, 삶도 당연히 변해야 정상이 아닐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중국의 전통 의약학(醫藥學)은 역사가 유구하다. 집단주의적 관념(인체의 각 부분이 전체 유기체를 구성하는 정합(整合)된 것으로 보는 관념), 변증론치(辨證論治)1), 예방과 치료의 결합(예방치료)에 뛰어나다. 현재 보이는 상(商)대 복사(卜辭) 중의 현존하는 질병에 대한 기록은 500여 항목이나 된다. 서주(西周) 때에는 의학이 ‘천관총재(天官冢宰)’에 속했다. 식의(食醫), 질의(疾醫, 내과), 양의(瘍醫, 외과), 수의(獸醫) 등 여러 과가 있었다. 의사는 의정(醫政)을 모두 관리하였다. 이후에는 민간에서 사의(私醫)가 명성을 떨쳤다. 『사기·편작창공열전(扁鵲倉公列傳)』의 기록을 보면 춘추시대 때에 진월인(秦越人, 편작)이 내과 수술에 능했고 대하의(帶下醫, 부인과), 소아과, 이목(耳目) 비병(痹病)의 등을 겸했다. 모두 “각지의 인정 풍속에 맞추어 진료 과목을 바꾸었다.”(隨俗爲變) 전통 중의학은 민간에서 생겨났기에 역대로 유방랑중2)이 강호를 떠돌아다니면서 의술을 행하고 약을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중의학은 가전(家傳) 풍습이 있다.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인연이 생기면 의약 기술을 배우거나 관련 지식을 얻는 경우도 있었다. 옛날 약방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전문적인 한의사가 아니라 대부분 의약 지식이 있어 질병을 진단하고 약을 조제하였다. 이러한 중국민족문화 중에서 그러한 의약학 문화전통이 존재하기 때문에 의술을 행하고 약을 팔면서 구걸하는 거지 부류가 생겨난 것도 기이한 일은 아닐 터이다. 약방에서 약을 조제하는 사람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약을 캐고 약을 심으며 약을 만드는 약농(藥農), 약공(藥工)도 거지로 전락하는 경우가 있었다. 가전비방을 배운 사인이나 관리도 생활이 곤궁해져 초라하게 되거나 환란에 빠지게 되면 자기 기술을 펼치면서 걸식하거나 돈을 버는 것은, 그저 길거리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동냥하는 거지보다는 그나마 용이하기도 하였고 떳떳하기도 하였다. 『후한서·방기전(方技傳)』 기록을 보자 : 곽옥(郭玉)이라는 광한(廣漢) 낙성(雒城) 사람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부수(涪水)에서 고기를 자주 낚았기에 부옹(涪翁)이라 불렸다. 민간에 은거하며 구걸하면서 질병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침술로 치료해 줬다. 나중에 『침경진맥법(針經診脈法)』을 저술하여 제자 정고(程高)에게 전해주었다. 정고도 은거하면서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공명도 쫓지 않았다. 곽옥은 어릴 적부터 정고를 따라다니며 방진(方診, 처방과 진찰) 육징(六徵)3)의 기술과 ‘음양의 변화를 헤아릴 수 없다(陰陽不測)’의 법술을 배웠다. 나중에 궁중의 태의승(太醫丞)이 됐을 정도로 의술이 뛰어났다. 그럼에도 그는 어질었고 자신의 재능을 뽐내지 않았다. 빈천한 하층민에게도 전심전력으로 병을 치료하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곽옥의 부친은 의술을 행하며 구걸하였다. 곽옥도 명성을 얻어 관리가 됐으면서도 여전히 가풍을 지키며 가난한 병자를 멸시하지 않았다. 인품과 의술 모두 뛰어났다. 적어도 한(漢)대에 이르면 중국 민간에 의술을 펼치며 구걸하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을 이 사례에서 알 수 있다. 송대 소박(邵博)의 『소씨문견후록(邵氏聞見後錄)』 29권 기록을 보자 : 정사보(鄭師甫)는 종아리에 부스럼이 났다. 물이 들어가자 너무 부어서 걷지도 못할 정도로 아팠다. 거지가 귀지로 부스럼에 바르자 하룻밤 사이에 물이 흘러나오고 부스럼도 완치되었다. 책에는 너무 간단하게 30여 자의 기록밖에 없고 정사보의 자술이기에 그 거지에게 어떤 포상금으로 사례했는지도 서술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기술된 상황을 보면 의술을 행하며 구걸하는 거지라 판단할 수 있다. 명대 황희수(黃姬水)의 『빈사전(貧士傳)』 하권 『왕규(王逵)』의 기록을 보자 : 왕규의 자는 지도(志道), 전당(錢塘) 사람으로 한쪽 발을 절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하루 세 끼니를 잇기가 어려워서 약을 팔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나중에 계속해 약을 팔 수 없자 점을 쳐주면서 살아갔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사람을 위하여 근심을 덜어주고 곤란을 해결해 주었다. 이처럼 왕규는 약을 팔면서 구걸하였을 뿐 아니라 점술을 이용하여 걸식했음을 알 수 있다. 두 가지 기술을 가지고 있던 거지였다. 고대에 강호에서 의술, 점술, 점성술, 관상을 봐주는 것을 ‘방기(方技)’라 하였다. 『사기·창공전(倉公傳)』에 “방기에 뛰어나고 능히 병자를 치료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한서·예문지』는 말한다. “방기(方技)라는 것은 모두 생명을 살리는 기술이니, 왕이 설치한 관직 가운데 하나인 직무다. 태고에 기백(岐伯), 유부(俞跗)가 있었고 중세에는 편작(扁鵲), 진화(秦和),……한이 흥하자 창공(倉公)이 나타났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모두 강호 방기 중의 의술이다. 나중에 강화 사회에 네 가지로 나뉘었는데 그중 하나가 의술을 행하고 약을 파는 부류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변증론치(辨證論治), 각종 증상을 종합적으로 살펴서 치료를 결정한다는 한의학 이론이다. ‘증(證)을 변별하여 치료를 논한다’는 뜻으로, 한의학에서 질병을 인식하고 치료하는 기본원칙이다. 한의학에서는 병명에 관계없이 우선 증(證)을 살핀다. 증은 증후군(證候群)이라고도 할 수 있다. 환자로부터 얻은 정보들, 즉 질병의 원인이나 부위·성질·신체적 여건 등의 증후군을 종합적으로 살핀 후 치료를 한다는 이론이다. 변증시치(辨證施治), 변증론치(辯症論治)라고하기도 한다. 2) 주방랑중(走方郎中), 떠돌이 의생(醫生), 주랑중(走郎中), 유방랑중(游方郎中), 영의(鈴醫), 초택의(草澤醫), 주의(走醫)라고도 한다. 옛날 유학(遊學)하며 의술을 행하고 약을 팔며 사방을 주유했던 사람을 가리킨다. 3) ‘방진(方診)육징(六徵)’은 의방(醫方), 진법(診法)과 3음3양(三陰三陽)의 맥상(脈象)을 판별하는 의법(醫技)이다. 육미(六微)〔육징(肉徵)〕에 대해 청대 심흠한(沈欽韓)은 《양한서소증(兩漢書疏證)》에서 말했다. “육미(六微)는 3음3양(三陰三陽)의 맥후(脈候)다.” 《소문(素問)》 《육미지대론편(六微旨大論篇)》에 요지암(姚止庵)의 해제에 말했다. “하늘에는 육기(六气)가 있고 사람에게는 3음3양(三陰三陽)이 있어 상하가 상응한다. 변화는 여기에서 생겨나고 질병은 여기에서 일어난다. 그 뜻이 지극히 미묘하기에 육미지대론(六微旨大論)이라 하였다.” ‘육미(六微)’는 의도(醫道)를 가리킨다. ‘육미(六微)’는 ‘육징(六徵)’이라하기도 하는데 여섯 가지 징후를 가지고 병을 진단하는 법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세기 제주도는 초가와 돌담으로 이루어진 마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재료가 필연적으로 제주 마을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았다. 시대변화는 제주 환경의 역할을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대체했는데, 더이상 옛 환경을 유지하지 못하는 섬은 새로운 형태의 관광으로 변형된 마을 경관으로 태어났다. 역사는 언제나 그랬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러고 있으며, 아마 내일도 그럴것이다. 섬의 얼굴은 처음과 달리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이 그런 것처럼 초가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사라지고 우리도 사라져 갈 것이다. 몸에 털이 없어진 인간은 옷이 필요해서 풀로 옷을 만들었고, 소빙하기에는 동굴에서 살다가 지구가 따뜻해지면서 태양을 가리는 집이 필요했다. 초가는 초기 인류의 집 재료인 셈이다. 인간에게 진보란 사회적 발전의 지표가 되는 상황을 만나는 것이다. 풀잎, 동물 가죽, 제조된 옷의 속도처럼 동굴, 초가, 너와집, 기와집, 시멘트, 철제, 유리 등은 문명의 발전 속도에 비례했다. 그 가운데 1980년대까지 비교적 원형이 많이 남아있었다. 초가가 적어도 60대 이상의 연령층에게는 매우 익숙한 집 형태일 것이다. 대게 초가의 추억이라고 하면 한마디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가는 오래된 형식의 집이었다. 초가를 이용한 집은 정주(定住)가 시작된 신석기시대부터 유래한다. 제주의 초가는 순수한 자연재인 풀(草:띠(茅)), 흙, 돌, 나무로 만든 풍토재(風土材)이다. 화산섬이라는 특성이 돌을 중심에 두고 초가를 이루었다. 15세기에 유배 왔던 충암 김정(金淨, 1486~1521)이 처음 제주 초가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사람이 사는 집은 띠(茅)로 엮어서 매지 않고, 새(茅)를 지붕에 나란히 펴서 깔고는 가로로 눌러 단단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가 아는 초가지붕에 바둑판 모양으로 매는 띠줄은 훨씬 뒤의 방식이었다. 또한 16세기 초 집안에는 관리의 집 외에는 온돌을 놓지 않았는데 방은 구덩이를 파서 돌로 메꾼 다음, 그 위에 흙을 발라서 마르면 건초를 깔고 잠을 잤다. 기와집이 매우 드물어서 대개 관청마저 초가를 덮었다. 올래는 바람을 막기 위해 돌담을 쌓아서 매우 좁은 것이 몰아치는 바람과 눈을 막기 위해서였다. 제주 초가는 적어도 2000년대 초까지 겨우 잔재가 남아 있었고, 지금은 민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사라진 가옥이 돼버렸다. 그렇지만 지금은 초가지붕은 없지만, 그 형태를 알 수 있는 돌집이 남아있다. 돌집은 초가의 뼈대로써 1960년대에는 띠 가는 것이 번거로운 초가 대신, 양철 지붕이나 그 위에 콜타르를 칠한 지붕이 간간이 나타났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국가재건 시책으로 시멘트 국산화에 힘입어 평슬래브 주택이 양산화되기 시작했다. 필요한 석회석의 개발에 박차를 가해 쌍용양회를 비롯하여 현대, 한일, 동양 등 여러 개의 시멘트 공장을 건설하여 자급자족을 넘어 수출까지 하는 상황이 되었다(김석윤, 2014). 그야말로 한국은 시멘트 천국이 된 것이다. 이때부터 제주의 축담이나 돌담도 시멘트가 결합한 담장이 등장하였고, 1970년대 초부터는 농촌지역에 남은 초가들을 대부분 개량하여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꿨다. 1970년대는 주거의 측면에서 볼 때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 농촌 취락구조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근대 주거문화를 주도하던 시기였다. 지금 제주의 농촌은 빠르게 도시화가 진행 중이다. 농촌의 전통 마을은 사라지고, 반(半)도시화가 되면서 농촌의 경관은 점점 상실하고 있다. 전통 농업이 쇠락하면서 농가(農家)라는 개념이 무색할 정도로 농촌은 소도시가 되고 있다. 마을 한 가운데에 1980년대부터 등장한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고, 아파트나 빌라, 밭 가운데에 새롭게 전원주택이라는 개념으로 곳곳에 건립되고 있다.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농촌의 초가는 틀만 남겨둔 채 현대식으로 개량되었다. 화장실은 실내로 가 있고 부엌은 싱크대로 바뀌었으며, 식사 또한 좌식에서 입식으로 바뀌었다. 모든 것의 생활방식이 도시화돼 편리해졌다. 변화는 운동의 요소이며 필연적인 결과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말을 마치자마자 주머니에서 풀잎을 꺼내 입속에 넣고 씹으면서 두 팔을 벌려 혼자서 동굴 앞을 막아섰다. 동굴 속의 바람소리가 가까워졌다. 이윽고 황색 머리에 푸른 몸, 머리에는 짧은 뿔, 사람 넓적다리만한 커다란 뱀이 바람과 함께 동굴 밖으로 나와서는 거지 두목을 보자마자 몸을 휘감았다. 머리를 곧추세우고 숨을 내뿜으니 윙윙 울렸다. 거지 두목은 당황하지 않고 느긋하게 눈을 감고 계속해서 입속에 넣고 씹고 있던 풀의 즙을 내뿜으며 막아섰다. 거대한 뱀은 머리는 밑으로 내렸지만 둘둘 감은 몸에 힘을 더했다. 다른 거지들이 풀잎을 건네자 거지 두목은 풀잎을 씹으면서 뱀에게 수결을 해보였다. 거대한 뱀은 다시 머리를 쳐들고 힘을 더 냈으나 거지 두목은 풀의 즙을 내뿜으면서 아랑곳 않고 막아섰다. 뱀은 지쳤는지 다시 머리를 내렸다. 그렇게 세 차례를 반복하자 거대한 뱀은 견디지 못하고서 거지 두목의 몸에서 떨어져 꿈틀꿈틀 기어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지 두목과 사왕이 악전고투를 하는 사이에 다른 거지들은 남아있던 뱀들을 모조리 잡아 바구니에 담았다. 모두가 기뻐하며 사찰 앞까지 돌아왔을 때 거지 두목의 얼굴이 점점 부어오르더니 얼마 없어 귀와 눈, 입, 코 모두 평평해졌다. 급히 다른 거지들을 불러 한꺼번에 풀잎을 씹어 즙을 얼굴에 뿜게 하였다. 풀의 즙을 뿜으니 얼굴이 점차 정상으로 돌아왔다. 거지 두목에게 어째서 커다란 뱀은 잡지 않고 동굴 속으로 돌려보냈느냐고 물으니, 별일 아닌 듯 답했다. “뱀의 왕, 사왕이오. 내가 만약 사왕을 죽이면 사방의 사왕들을 불러들이는 것이오. 그러면 나 또한 온전치 못하게 되오. 내가 어제 여기에 와서 주술로 뱀을 모았소. 그래서 남산의 뱀들이 오늘 여기에 다 모인 것이오. 이번에 뱀을 모두 잡았으니 이후에 주변 5리 이내에는 5년 동안 뱀의 우환은 없을 것이오. 하지만 나도 몇 년 동안은 여기에 오지 못할 거요. 사왕이 복수하려 할 테니까.” 남병(南屛) 효종(曉鐘) 비정(碑亭)의 오른쪽 돌계단에 사람이 앉으려고만 하면 얼굴이 붉게 부어오르고 뼛속까지 농이 앉았다. 거지 두목을 청하여 살펴보게 하였다. 거지 두목이 찬찬히 살펴본 후 말했다. “그 아래 돌 사이에 끼어서 나오지 못하는 독사가 있을 거요. 나오지 못하니 틈새로 독을 뿜어대는 거요. 사람이 그때에 마침 그곳에 앉으니 중독되는 것이오.” 돌을 치워서 살펴보니 과연 돌 틈 사이에 뱀 한 마리가 끼어있었다. 다시 돌을 치우니 큰 붕어마냥 돌에 눌려 뱀이 납작하게 되어있었다. 거지 두목이 말했다. “그것은 살무사요. 그곳에서 몸이 나오지 못하고 동굴로 돌아가지도 못했던 거요.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에게 잡혔겠지요.” 말을 마치자마자 뱀을 잡아 바구니에 넣었다. 사람들이 독사를 잡아 무엇에 쓸 거냐고 물으니 약방에 판다고 답했다. 여러 가지 뱀은 각기 다른 약용 가치가 있었다. 독성이 쌘 뱀일수록 약효도 좋았고 가격도 높았다. 돈 때문에 그렇게 모험하는 것이었다. 사찰 앞에 주민들 모두 거지가 뱀을 잡아주는 은덕에 감격하였다. 돈을 모아 술을 마련해 대접하니 여러 거지들이 환호하며 실컷 마셨다. 그러고서 주머니에서 풀잎을 꺼내 주인에게 사례로 건네면서 말했다. “이 풀로 해독할 수 있소. 뱀에게 물리거나 벌에게 쏘이거나, 심한 정저(疔疽), 독창에 씹어서 바르면 얼마 없어 완쾌되오. 하지만 아무렇게나 남용하지는 마시오.” 말을 끝내고서는 뱀을 담은 바구니를 들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돌아갔다. 상술한 부류의 거지는 강호에서 뱀을 부리며 기예를 팔거나 뱀약을 팔면서 구걸하는 거지와는 다른, 실질적으로 노동을 제공하는 부류다. 뱀을 잡아 돈으로 바꿔 생계를 유지하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뱀을 부리는 민간 잡기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고증하기가 쉽지 않다. 뱀을 부리며 구걸하는 방식은 송나라 때 서현(徐鉉)의 『계신록(稽神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모(毛) 씨 성을 가진 거지는 안륙(安陸) 사람으로 술안주로 독사를 즐겨 먹었다. 산동성과 강서성 일대를 돌아다니며 시중에서 뱀을 부리며 구걸하였다. 10여 년 넘게 구걸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파양(鄱陽)에서 온 땔나무를 파는 사람이 황배(黃培)산 아래에서 야숙하는데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네게 뱀 한 마리를 보낼 터이니, 강서에서 뱀을 부리는 모 씨라는 거지에게 가져다 줘라.” 강서에 가서 땔나무를 다 팔았을 때 뱃전에 똬리를 튼 하얀 뱀 한 마리를 발견하고는 만져보았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꿈속에서 노인이 한 말이 떠올랐다. 노인의 말에 따라 저녁에 뱀을 들고 시중에 가서 뱀을 부리는 모 씨 거지를 찾아서 건네주었다. 모 씨 거지가 손으로 만지려고 할 때 뱀이 피할 사이도 없이 손가락을 물었다. 거지는 큰소리를 내지르며 땅에 쓰러져서는 숨을 거두었다. 오래지 않아 거지의 시신이 부패돼 버렸고 뱀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전기적인 이야기는 믿을 수 없다. 다만 늦어도 송나라 때에 이르면 뱀을 부리며 구걸하는 거지가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명대 유원경(劉元卿)의 『현란편(賢欒編)』 기록이다. 오중(吳中)에 늙은이가 처음에는 집안이 가난해 뱀을 부리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 맏아들은 밥을 구걸하고 둘째아들은 개구리를 잡았으며 셋째아들은 ‘연화락’을 불렀다. 가족 전체가 거지였다. 나중에 점차 부유해지자 어느 날 그는 아들들을 불러 모아 말했다. “이전에는 너무 가난하여 집안을 일으키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생활이 나아졌으니 반드시 직업을 바꾸어 문학을 공부하여야겠다. 그렇게 해야만 온 가족이 좋은 명성을 듣게 될 것이다.” 집안에 사숙을 지어 선생을 초대하여 아들 셋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반년여가 지나자 선생이 갑자기 아들 셋 모두 하루가 다르게 학업이 향상됐다고 과장하였다. 늙은이는 잔치를 베풀고 이름난 유학자를 초빙하여 직접 시험을 치르도록 하였다. 이름난 유학자가 셋째아들에게 대우(對偶) 문장을 시험보자며 먼저 첫 문장을 제시하였다. “잇달아 버들개지 날린다.” 셋째아들이 대구를 만들었다. “늴리리 연화락 부르네.” 둘째아들에게 제시하였다. “살구나무 나뭇가지의 끝에 흰 나방 날아가네.” 둘째아들이 답했다. “파란 버들나무 아래서 청개구리 잡네.” 마지막에 맏아들에게 “구중궁궐에 문무 양반 관원이 배열해 있네”에 대한 대구를 답하라 하니, “십자가두에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준 부모를 부르네”라고 답했다. 늙은이는 아들 셋이 제출한 대구를 보고는 이상하다 여겼다. 자신이 이전에 뱀을 부리며 구걸하던 그런 수단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어찌된 일인가. 이상은 송나라와 명나라 때에 뱀을 부리며 구걸하던 거지의 사례다. 다음은 청나라 때의 일이다. 전해오는 바는 이렇다. 청대 건륭 4년(1739)에 풍(馮) 씨가 사람들과 어울려 항주의 서호를 유람하고 있었다. 정자사(淨慈寺) 앞에서 피부가 가마무트름하고 짧은 구레나룻이 난, 몸에 포대를 걸고 있는 거지를 만났다. 뒤에는 대나무 바구니를 든 수십 명의 거지가 뒤따랐다. 어디를 가느냐고 물으니 남병산(南屛山)에 뱀 잡으러 간다고 하였다. 풍 씨는 젊었기도 했고 호기심도 많아 그들을 뒤쫓아 갔다. 사찰 서쪽 산간의 평지 깊은 곳에 다다르니 동굴이 하나 있었다. 동굴 입구는 1척여로 동물이 자주 출입한 듯 둘레가 반들반들하였다. 거지가 절뚝거리며 동굴 앞으로 가 주문을 외우고는 울컥, 입 안 가득 무엇인가 물고는 동굴 입구를 향하여 내뱉었다. 동굴 안쪽에서 우르르 소리만 들려왔다. 그때 뒤따라갔던 거지들은 좌우로 배열해 있었다. 각자 준비해서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간 풀잎을 꺼내어 입에 넣고 씹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동굴 속에서 수많은 뱀들이 밀물이 밀려들 듯이 기어 나왔다. 오초사, 먹구렁이, 뱀장어, 그리고 유혈목이, 살무사 종류였다. 그 형상은 게처럼 생긴 것도 있고 잉어처럼 생긴 뱀, 신발처럼 생긴 뱀, 호랑이 머리에 뱀의 몸을 한 거, 머리는 뾰족하고 몸은 넓적하지만 길이가 몇 촌이 되지 않는 뱀, 저울대처럼 가는 뱀, 몽둥이처럼 짧은 뱀, 주사처럼 붉은 뱀, 남색처럼 푸른 뱀, 청동처럼 녹색인 뱀, 분처럼 하얀 뱀, 흑과 백이 반반인 뱀 등등 두려울 정도로 괴이하였다. 줄서있던 거지들이 씹고 있던 풀잎 즙을 손에 바르고 씹다 남은 풀잎 찌꺼기로 콧구멍을 막았다. 그런 후에 각자 뱀들을 잡아서는 가지고 왔던 대나무 바구니에 담았다. 뱀들을 거의 다 잡아넣었다 싶었을 때 갑자기 굴속에서 쏴쏴 비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거지 두목이 모두에게 말했다. “사왕(蛇王)이 온다. 빨리 피해!”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 학사, 대만 정치대학교 중문학과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자로 『선총원(沈從文) 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 『재미있는 한자풀이』, 『수달피 모자를 쓴 친구(선총원 단편선집)』, 『음식에 담겨있는 한중교류사』, 『십삼 왕조의 고도 낙양 고성 순례』, 『발자취-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