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성 서북부에 인접한 하북성에 영진(寧津)현이 있다. 그곳에는 오랫동안 ‘궁가항(窮家行)’이라는 명칭의 방대한 개방(丐幇)이 존재하였다. 오랫동안 유지되다가 현 중국 정권이 들어서서야 사라졌다. 통상적으로 궁가항을 ‘염상(捻上)’이나 ‘염자(捻子)’라고 불렀다. 돌아갈 집이 없어 곳곳으로 유랑하며 걸식하는 사람들이 그 조직에 들어갔다. 금전이 생기기만 하면 먹고 마시고 도박에 탕진하였다. 헤프게 다 써버리고 저축하지 않았다. 자신들을 ‘만년궁(萬年窮)’이라 불렀기에 ‘궁가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스스로 ‘이정항(理情行)’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사리, 인정을 강구하는 항방(行幇)이라는 뜻이다. 궁가항에는 ‘사념자(死捻子)’, ‘활념자(活捻子)’, ‘간상(杆上)’의 구분이 있었다. 그중 ‘사념자’가 정통이며 소속된 거지가 가장 많았다. ‘사념자’는 속칭 ‘규화자(叫化子)’라는 거지로, 푼돈을 구걸하는 거지였다. 동한(東漢) 말기의 곤궁하기로 유명한 명사 범염(范冉)1), 일명 범단(范丹)을 조사(祖師)로 모셨다고 전한다. 『후한서·범염전(范冉傳)』에 “환제(桓帝) 때에 범염은 내무장(萊蕪長)이 됐는데 모친 조상을 당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나중에, “저자에서 점을 치며 살다가 당인(黨人)이 금고를 당하자 조그만 수레에 처자를 싣고 밀고 다니면서 물건을 주워서 살림 비용으로 삼았다. 여관에서 쉬기도 하고 나무 그늘에 의지하여 살기도 했다. 그렇게 10여 년을 살다가 풀로 집을 얽어 머무니 누추한 곳이었다. 때로 양식이 떨어져 궁하게 살면서도 태연하였고 언행과 모습을 바꾸지 않았다. 마을사람들이 ‘시루 속에 먼지가 생기는 범사운(范史雲)이요, 솥 속에 물고기가 생기는 범래무(范萊蕪)라네’라고 노래하였다.” 항방에서 전해오는 조사의 전설을 보면 범염을 나이 차이가 수백 년이나 있는 공자(孔子)와 연결시키고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 당시에 범염이 홀로 방 두 칸짜리 초가집에 살고 있었다. 주의에 49과의 수수깡 다발을 묶어 만든 마당이 있었다. 공자가 양식이 다 떨어지자 제자 자로(子路)를 범염에게 보내어 양식을 꾸어오도록 하였다. 자로가 오니 범염이 물었다. “세상에 무엇이 많고 무엇이 적소? 무엇이 기쁨이고 무엇이 괴로움이요?” 자로가 대답을 못하여 빈손으로 돌아갔다. 공자가 다시 안연(顏淵)을 보냈다. 안연이 대답하였다. “세상에는 사람은 많으나 군자는 적소. 빌릴 때는 기쁘나 갚을 때는 괴롭소.” 그러자 범염이 각각 1아령(鵝翎, 거위 깃)의 관에 쌀과 밀가루를 담아 보냈다. 안연이 가지고 가서 공자에게 건넸다. 관을 뒤집으니 쌀과 밀가루가 쏟아져 나와 산을 이루었다. 일이 끝난 후 공자가 범염을 찾아가 감사를 전하며 말했다. “빌린 쌀과 밀가루를 다 갚을 수 없겠습니다.” 범염이 말했다. “나중에 내 도제들에게 갚으시지요.” 공자가 답했다. “그럽시다! 나중에 내 도제들에게 명심하여 갚으라고 하리다. 문에 대련이 붙여있는 집은 모두 들어와서 구걸해도 되도록 하겠소이다.” 또 다른 전설은 말한다. 어느 날, 범염과 공자가 정오까지 바둑을 두다가 범염이 물었다. “세상에서 어느 것이 가장 귀중합니까?” 공자가 답했다. “당연히 금전이지요.” 범염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소. 세상에 사람이 살아있는 보물이지요. 당신은 돈이 있어도 먹고 싶은 것을 모두 다 사지 못하잖소. 나는 돈이 없어도 내 도제들이 먹을 것을 준다오.” 공자는 머리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사념자’는 한문(韓門), 제문(齊門), 곽문(郭門) 3대 지류로 나눌 수 있다고 전해온다. 그리고 『궁가론(窮家論)』에는 관련 전설과 항방 규칙이 기록되어 있다고 전하지만 고찰하기 어렵다. 중일전쟁 기간에 역사학자 영맹원(榮孟源)이 영진현 대류(大柳)진 누자두(簍子頭)2) 유마자(柳麻子)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염상의 조사는 범염이라 하였고 염상은 공자의 도제에게 외상값을 청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주로 소주양조장, 기름공장, 염전이라 하였다. 50년대 이후 영맹원은 또 대류진의 누자두 낙대개자(雒大個子)를 찾아가 조사하였다. 그는 스스로 유문(柳門)이라 하면서 유문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1982년 6월, 영진현 사무소 직원이 정장(程莊)에 가서 이미 63세가 된 쌍확(雙確)공사 양노원에 머물고 있던 정준복(程俊福)을 찾아가 조사하였다. 정준복은 16세 때에 창주(滄州)에서 궁가항에 가입하였고 곽문의 17대 손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사념자 3대 지파 이외에 범문, 유문 2문이 더 있었다. 곽문의 정준복은 창주에서 가입했다는 것을 보면 궁가항 조직은 산동에 가까운 영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하북성 창주도 활동 지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념자는 일반적으로 ‘화탑자(花搭子)’, ‘무탑자(武搭子)’, ‘규가(叫街)’ 3부류로 더 나눌 수 있다. 화탑자는 수래보3)로 구걸한다. 노래할 때 소뼈로 만든 악기를 가지고 노래하는데 살랍봉(撒拉棒)이라 한다. 죽판(竹板)을 치는 것은 살봉자(撒棒子)라 한다. 내나무 틀에 사발을 메달아 다니는 것은 살랍계(撒拉鷄)라 한다. 무탑자는 위협해 겁주는 방식으로 구걸하는 형태다. 손에 식칼〔채도(菜刀)〕를 들고 흉부를 치는 것, 살랍분(撒拉笨)이라 한다. 신발 바닥으로 흉부를 치는 것, 잡양자(砸瓤子)라 한다. 낫으로 자신의 앞이마나 정수리를 치면서 선혈이 낭자하게 하는 것, 자파두(刺破頭)라 한다. 규가는 절름발이, 소경, 팔다리 한 쪽이 없는 사람 등 신체장애자가 구걸하는 것을 말한다. 사찰 시장이나 번화한 도시 시장에서 구걸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범염(范冉, 112~185), 단(丹)이라고도 한다. 자는 사운(史雲)이다. 후한 진류(陳留) 외황(外黃) 사람이다. 남양(南陽)에서 번영(樊英)에게 수학했으며, 삼보(三輔)에서 몇 해 동안 마융(馬融)을 스승으로 섬기었다. 환제(桓帝) 때에 내무장(萊蕪長)이 되었지만 어머니 상을 당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나중에 태위부(太尉府)로 불렀다. 시어사(侍御史)로 삼으려 하자 숨어살며 시장에서 점복(占卜)으로 생계를 꾸렸지만 가난했다. 나중에 당고(黨錮)를 당하여 궁핍하게 살면서도 의연했고 언어나 태도도 고치지 않았다. 당금(黨禁)이 풀리자 삼부(三府)에서 여러 번 불렀지만 나가지 않았다. 시호는 정절선생(貞節先生)이다. 2) 개방(丐幇) 중에는 개방 방주라고 불리는 우두머리 이외에 작은 우두머리(소두목)이 있었다. 그런 소두목을 일반인은 ‘누자두(簍子頭)’라 불렀다 모든 개방에서 일정한 지위가 있었다. 3) 수래보(數來寶), 혹은 수백람(數白欖), 중국문화 특유의 곡예(曲藝)다. 예술표현 형식의 일종이다. 일반적으로 혼자서 하거나 둘이서 함께 하기도 한다. 진행의 방식은 ‘낭독’ 방식이다. 낭독하는 내용은 일이 생기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나 현장에서 순간순간 반응하는 두 가지가 있다. 공연하는 사람은 매구마다 통하는 숫자, 박자, 유머를 적절히 섞는다. 듣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청중을 즐겁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공연한다. 간단히 말해 장타령으로, 두 개의 골판이나 참대쪽에다 방울을 달고 그것을 치면서 하는 타령이라 이해하면 쉽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청나라 때에는 대체로 현(縣)을 중심으로 다스렸다. 각 지역의 거지를 관리하는 항방의 수령을 거지 두목이라는 뜻인 ‘개두(丐頭)’라 불렀다. 개두는 대부분 암흑가 흑사회(黑社會) 방회(幇會)의 핵심 인물이나 본바닥 건달, 불량배가 맡았다. 아문의 인가를 받았더라도 세력에 기대어 이루어졌다. 패권을 다투는 중에 각종 수단으로 여럿을 굴복시킨 후 자리를 차지하는 이도 있었다. 개두는 이른바 ‘몽둥이(杆子)’를 권력의 상징으로 삼았다. 사실은 구걸할 때 가지고 다니는 타구봉(打狗棒)의 추상적 숭배에 불과하지만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개방에 속한 사람은 몽둥이로 활동하는 사람이라는 뜻인 ‘간상인(杆上的)’이라 불렀다. 방주(幇主)의 ‘몽둥이’는 ‘상방보검’1)과 같아서 개방의 규율인 ‘방규(幇規)’를 위반한 거지를 징치하여 ‘때려죽여도 원망하지 않을’ 정도의 위력을 가졌었다. 신임 방주는 먼저 조사(祖師)와 ‘몽둥이(杆子)’에게 제사를 지내어 권력을 위임받았다고 명시하였다. 새로 개방에 가입한 거지는 반드시 방주에게 몽둥이를 증송해 관할에 복종을 표시하였다. 사실, 중국전통문화의 배경 속에는 ‘몽둥이(杆子)’는 타구봉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나이〔호한(好漢)〕들이 거의(擧義)하다’는 함의를 가지고 있다. 『사기·진시황기(秦始皇紀)』에 진섭(陳涉)의 봉기를 “나무를 베어 무기로 삼고 장대를 높이 들어 깃발로 삼았다.”라고 기록에서 비롯되었다. 나중에 농민봉기를 ‘장대를 높이 들어 일어났다.’라고 표현하였다. 명나라 때에 녹림이 뜻을 모아 봉기한 사건이나 단체를 ‘납간자(拉杆子)’2)라 한 것도 그러한 표현 습관의 연장이다. ‘간(竿)’이 ‘간(杆)’이 된 것은 글자는 다르나 뜻은 같은 별칭이다. 청나라 때에 경사(京師)에서 활동하는 개방에는 황간자(黃杆子)와 남간자(藍杆子)로 나뉘어 있었다. 만청팔기(滿淸八旗)에서 유래하였다. 황간자는 전문적으로 종실 팔기 중의 거지를 관할한 고급 개방(丐幇)이었다. 황간자 구성원은 팔기 중에서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인물이나 시정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무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개두는 할 수 없이 그중 권위가 높거나 세력이 큰, 포악하고 고집이 센 왕공 버일러(貝勒)3)가 맡았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거지를 관할할 수 없었다. 황간자 개방의 거지는 평상시에는 길거리에서 구걸하지 않았다. 단오절, 중추절, 연말에 여러 점포를 돌아다니며 구걸하였다. 명절 때가 되면 세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노래 부르고 고판(鼓板)〔박자판〕을 두드리며 다녔다. 노래 부르는 거지는 손등을 위를 향하게 하고 판을 두드리는 거지는 고판을 평평하게 들고 다녔다. 보시하라는 의사표시였다. 점포 문 앞에 다다르면 상점 점원이 나와서 최소한 고액화폐 5매 이상을 머리 위로 높이 들고 공손하게 고판 위에 올려놓았다. 거지가 다섯 구절을 노래하기 전에 보시하는 돈을 꺼내야만 했다. 그런 규칙을 어기는 점포가 있으면 거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났다. 이튿날에는 더 많은 사람이 들이닥쳤고 그 다음날에는 더 많은 거지가 모여들었다. 점포 문을 열 때부터 닫을 때까지 거지 무리는 문 앞을 떠나지 않았다. 못된 장난은 치지 않았지만 돈을 내지 않으면 영업할 방법이 없게 만들었다. 주변 사람과 상점 주인에게 황간자를 잘못 건드리면 화를 초래해서, 사서 고생한다는 것을 제대로 알려 주는 행동이었다. 그러면 상점 주인은 중재해줄 사람을 초청하여 화친을 청하고 수천이나 되는 돈을 건네야 했다. 적게 주면 끝이 없었다. 더 많은 돈을 방주에게 주고 조정하면 빠르고도 순조롭게 해결이 되었다. 경사(京師)의 남간자는 일반 거지를 관할하는 개두(丐頭)〔거지 우두머리〕였다. 새로 온 거지는 3일 이내에 구걸한 물건을 모두 개두에게 보내야 했다. ‘헌과(獻果)’라고 한다. 헌과가 많으면 많을수록 빛이 났다. 평상시에는 구걸해서 얻는 물건의 20%정도만 떼어 내어 개두에게 헌납하면 됐다. 규정에 따라 개두가 걷는 일반적인 수입이었다. 명절이나 설, 결혼식이 있거나 장례식이 있으면 상점 주인이나 상주는 정액 이외에 더 많은 돈을 개두에게 주었다. 개두는 지역을 관할하는 거지 우두머리였다. 밖에서 온 거지가 관내에서 구걸하려면 지역 개두에게 복종하여야 했다. 상점들도 거지의 소란을 피하려면 많은 돈을 개두에게 뇌물로 주고 표주박 형태의 종이를 얻어서 문에 붙여놓았다. ‘조문(罩門)’이라 한다. 어떤 곳에는 ‘모든 형제는 소란을 피우지 마라.’라는 문구를 써놓기도 하였다. ‘조문’이 붙어있으면 거지는 그곳은 건너뛰고 구걸하러 가지 않았다. 개두가 거둔 돈의 일부를 여러 거지에게 나누어 주기 때문이었다. 그 규칙을 위반하는 거지가 생기면 상점 주인은 개두에게 알려서 조정하고 징치하도록 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조문’이 붙여진 상점에는 다시 가서 소란을 피우는 일은 없었다. 거지가 병이 나거나 죽으면 개두는 의무적으로 적당한 위로금을 주거나 조직에 있는 구성원이 분담하였다. ‘복이 있으면 함께 누리고 어려움이 있으면 함께 감당한다.’라는 ‘고락을 함께 하는’ ‘동고동락’의 의식 중에 실행된 것은, 패주 방식의 봉건 가장 제도였다. 개두는 내부의 권리와 지위를 상징하는 몽둥이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 굵고 긴 담뱃대를 늘 사용하면서 거지 내부에서 자신의 신분을 명시하였다. 30년대 초에 여대생 두 명이 거지 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상해(上海) 칠백 거지에 대한 사회 조사」를 발표하였다. 그중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청대에 이르러 거지에게 개두(丐頭)가 생겼다. 대체로 횡포하고 세력이 있어야 자격이 주어졌다. 지방마다 지현(知縣)이 임명하여 파견했는데 구역을 나누어 관할하였다. 개두는 각 구역 내에 있는 거지를 관리하는 절대적인 권위가 주어졌다. 새로 온 거지는 먼저 개두가 있는 곳에 가서 그를 위하여 복무한다고 보고하여야 했다. 매일 수당을 지급하거나 호되게 맞아야 했다. 그가 견뎌내면 그 구역 내에서 구걸할 수 있었다. 개두가 거지가 길에서 구걸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까닭에 매월 상점에서 ‘개연(丐捐, 거지에게 주는 물품)’을 거두고 도장 찍힌 홍색 종이를 건네주어서 문에 붙이면 거지들은 다시는 그곳에 가서 구걸하지 않았다. 그런데 거지에게 돈을 나누어 줄 때에 개두는 자주 이자를 받았고 여전히 거지들을 내버려두어 길거리에서 구걸하게 하였다. 이렇듯 개두는 거지를 통제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거지를 착취하였다. 그런 개두는 세습 되는 까닭에 그들의 권위는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여전히 지방에서는 세력이 있다.” 이 보고서를 보면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에 상해 개방의 대체적인 상황을 알 수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상방보검(尚方寶劍), 지고무상의 황제를 상징한다. 고대 중국에 황제가 ‘상방(천자가 쓰는 기물을 맡았던 벼슬이나 기구)’에 수장한 검이다. 한(漢)대에는 ‘상방참마검(尚方斬馬劍)’, 명대에는 ‘상방검(尚方劍)’이라 하였다. 황제 어용 검으로 상방보검을 가진 대신은 형을 먼저 집행하고 나중에 보고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 것처럼 황권의 권력을 대표하였다. 보검을 보면 천자를 만난 것처럼 하였다. 상급자가 특별히 허락한 권력을 비유하는 성어가 되었다. 2) 나무를 베어 무기로 삼다 : 참목위병(斬木爲兵) ; 장대를 높이 들어 깃발로 삼았다 ; 게간위기(揭竿爲旗) ; 녹림(綠林) : 화적이나 도둑의 소굴을 이르는 말로, 후한 말 왕광(王匡), 왕봉(王鳳) 등 망명자가 녹림산에 숨어 있다가 도둑이 되었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 납간자(拉杆子) : 패거리를 모아 도당을 만들다, 비적이 되다. 3) 패륵(貝勒), 즉 ‘버일러’로, 본래 부족의 수장을 의미였고 구사(gusa, 旗)의 주인을 의미하였다. 청대에는 친왕(親王), 군왕(郡王) 아래, 버이서〔패자(貝子)〕 위에 있는 세습 작위가 되었다. 경우에 따라 특정 관서의 수장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었다. 명나라 말기에는 한(汗)의 아들, 조카 등을 버일러로 지칭하였다. 청나라 때에는 황제 아래에 친왕과 군왕을 두면서 그다음 지위로 내려가게 되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바다에 주목한 특별한 그림 공필화 전통은 현대를 통해서만 제대로 보인다. 현실의 시대 정신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전통은 빨리 사멸(死滅)한다. 전통은 시간적 개념을 넘어서는 지금-시간의 공간에 대한 생동감 있는 적응일 것이다. 당대성이 없는 전통은 고리타분한 골동품과 같다. 전통은 신제품처럼 새롭고 세련되고 신선해야 한다. 지금 세대가 이해하는 미감이 요구되기도 한다. 역시 해석자로서 화가의 몫이 된다. 이미선은 제주도에서 활동하는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여성 공필화가이다. 비단에 그려지는 까다로운 공필화 기법을 다루는 일은 ‘장인으로서의 작가’라는 개념에 더 어울린다. 그만큼 공필화는 시간과 공력(功力)을 들이는 싸움이기에 집중력과 정확도가 요구됨으로써 장인들의 태도를 쉽게 버릴 수가 없게 만든다. 이미선의 장인적 태도는 이미 중국 원나라 때 영락궁 삼청전에 그려진 대형 벽화<조원도(朝元圖)>의 모사를 통해 오롯이 작품을 대하는 태도에서 담력(膽力)을 키울 수 있었고 장인적 배포는 그때 몸에 밴 것이다. 2024년까지 이미선은 이중섭 미술관, 서울 제주갤러리, 평화센터 등 개인전과 초대전을 통틀어 모두 16회의 경력이 있는 중견 작가로써 성장했고, 지속적으로 한국 공필화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작가라는 이름의 인생은 늘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노정(露呈)에 서 있는 것인 만큼, 중국화의 기교로써 한국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한 ‘한묘중기(韓描中技)’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선은 고향(故鄕)이 제주도 서귀포여서 그에게 한국성은 곧 제주 로컬리티가 되며, 제주가 밑바탕이 깔린 한류를 지향하는 것이 그의 미학적인 특질이자 목표가 되고 있다. 제주 아일랜드, 치유의 정원 제주도, 바람마저 울고 가는 외로운 아일랜드. 구로시오 해류(黑潮流)에 스치는 섬의 아픈 기억을 치유하기 위해 화가는 붉은 화산섬의 이름으로 그림을 그렸다. 아름다운 자연 아래 펼쳐지는 풍경은 고난의 연대를 지나 왔던 수많은 제주사람들의 숨비소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들숨 날숨’의 그 파람 소리가 단지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로만 알 뿐, 섬땅에 기록된 지문(指紋)이자 거친 숨결의 역사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때로 예술은 기억의 환기작용이기도 하여, 아름다움도 고통을 치유하는 하나의 희망이 되기도 한다. 이미선은 지난 2022년 제주 서울 갤러리, ‘제주 아일랜드-치유의 정원’이라는 주제로 공필화의 전통을 제주의 바다를 대상으로 현대적으로 해석한 작품들을 보여주었다. 우리의 일상은 늘 자연에 가까이 있는데, 이미선은 그간 자연의 언저리에서 공존하는 일상의 변화를 담아내기 위해 사물과 풍경들을 즐겨 다루면서 여전히 ‘치유의 정원’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주제로 제주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삶의 중심이 제주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미선에게 ‘치유의 정원’은 관람자만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의 인생살이에서 새롭게 보듬어야 할 대상들의 상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그림을 그림으로써 마음이 후련하거나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기에 ‘치유의 정원’은 자아의 그늘에 새 빛을 쏘이고, 타자에게도 심리적 위안을 줌으로써 삶에의 의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선의 그림은 매우 안정적으로 평온하고 고요하다. 잔잔한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것, 예술의 기능이 복잡한 혼돈 속 일상을 정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제주 아일랜드-치유의 정원’은 제주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풍경과 소재로 구성되었다. 한라산, 오름, 들판, 밭, 섬 속의 섬, 폭포, 바다 등의 정경 아래 소재들은 말, 나비, 밭, 돌고래, 꽃, 탑, 의자 등이 있다. 이미선이 전통 공필화의 기법을 현대적 해석으로 보여준 것은 오름이나 섬, 그리고 한라산의 묘사에서 보여준 면 분할 방식이다. 작은 모자이크처럼 색면을 분할하면서 쌓아가듯 형태를 붙이는 묘사 방식은 제주의 전통 민화에서 전해오는 것이기도 하다. 넓은 면을 채색하면서 작은 블럭과 같이 면분할 방식으로 다른 기법을 동시에 한 화면에 배치하는 것은 칠한다는 것보다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한 화면에서 또 다른 공간 개념들로 다르게 보여주는 것은 마치 암석의 입자 구성과도 같이 구조화된 층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미선이 보여준 소재들 가운데 그가 오랫동안 몰두해온 대상은 바다에 등장하는 나비이다. 나비는 상징적으로 섬과 육지의 매개, 자연과 청정이미지로서 건강한 생태의 증거, 동물과 곤충이 영속적으로 공존할 자유, 몸과 정신의 교감 상태를 말하고 있는 상징이며, 영혼의 매개자로 인식되는 ‘나부(나비)의 신화적 초현실성이기도 하다. 또 나비는 섬 주위를 유영(遊泳)하는 남방 돌고래의 벗인 해녀처럼, 돌고래의 새로운 친구가 되기도 하고, 궁국적으로 제주의 생태적 건강함을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이때 돌고래와 함께 등장하는 나비는 의인화로 길을 가는 인생의 동반자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 동행이 비록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이것을 보는 관람자들은 새로운 기분으로 우리 세계에 대한 신비로운 감정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바다를 건너는 나비는 무려 1000km를 날아 육지에 도달하는 제주 왕나비의 전설적인 행보를 먼길(長程)이라는 상징으로 그린 것이다. 부드러움은 억셈을 이길 수 있는데 연약한 날개로 거친 바다 위를 날아오르는 그것의 강렬한 에너지는 생명의 힘이 아닐까? 어쩌면 모든 생명체에게는 개체마다 희망적인 삶의 목표를 관철시키려는 의지가 있다. 그런 점에서 의지는 본능적 생명작용일 것이다. 이미선은 마치 나비가 된 듯이 육지로 나들이 한 것이 어느덧 16년 만의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난 2022년 육지 나들이는 새로운 전기(轉機)를 마련하는 일이어서 다른 때보다 의미가 새롭다고 했다. 제주도 자연과 바다가 육지 사람들의 치유의 정원이 된다는 의미가 되면서, 또 그간 해협을 건너지 못했던 여행이기도 했다. “나의 막힌 마음을 새롭게 일깨워주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나비와 돌고래의 평화로운 동행처럼 이 동행은 치유를 위한 평화의 길이며, 평화는 결국 인류에게 되돌려 줄 때 진정한 평온이 찾아올 것이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제주 아일랜드-치유의 정원’은 세계가 더욱 혼돈으로 치닫는 지금에 바다로 이어진 지구촌의 상처받은 세계시민을 향하여,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과 평화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가는 작가의 마음이 투사된 돌고래의 나아감을 보여주었다. 여전히 시간은 갈 것이고 사회는 쉬지않고 변화의 바람을 탈 것이다. 돌고래는 약자가 되었고, 멸종 위기로 치닫고 있다. 앞으로 인류는 여섯 번째 대멸종의 예상 앞에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육상의 대지는 황폐해지고 물은 오염되고 있으며, 재난은 끊이질 않고 커져만 간다. 남은 바다는 인간이 버린 플라스틱과 제조물 폐기물에 환경이 병들고 있다. 문명을 창조했던 인간은 그것을 생산한 만큼 버려야 할 것도 총량이 같을 것이다. 기후 열대화는 전지구의 생태를 교란시키고, 식량난과 기후 재앙이 빈번해지고 있다. 인류가 갈길은 더 약한 생물들의 수난으로 이어져 미래가 어둡기만하다. 어쩌면 이제 예술은 우리의 미래인 암울한 시대를 그리야 할 지도 모른다. 돌고래가 길을 잃고 있다면 우리 인간들도 똑 같이 길을 잃고 있을 것이다. 공필화가 이미선은 50대 여성 중견작가로서 동덕여대 회화과, 중국 노신미술대에서 중국화 공필화를 공부하고 경인미술대전 우수상, 제주도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하고 제주대 출강, 전업화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미술협회 회원으로 다각도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전통의 공필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확장시키고 있으며 우리나라에 몇 안 되는 정통 공필화가로서 제주의 자연을 치유의 정원이라는 개념으로 접근, 아름다운 생태적 자연을 화폭에 담는 그림에 집중하고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공필화는 비단에 채색으로 그리는 중국화의 화법이다. 우아하고 화려한 것이 공필화의 특성이기도 하다. 중국과 인접한 우리나라는 채색화는 도화서 화원이나, 서민의 민화에 발달했고 문인화는 양반 사대부가 즐겨 그렸다. 제주는 아름다운 자연의 섬으로, 공기가 맑고 숲의 향기가 감미로우며, 비단결 같은 바다가 푸르게 열려 있어서 그 곳에 가면 누구라도 지친 일상의 병을 자연적으로 치유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이 제주도가 치유의 정원이 되는 까닭이고, 그 그림이 마음의 위안이 되는 이유가 아닐까. 마왕퇴, 고개지에게서 비롯되는 공필화 공필화란 역사적으로 볼 때 그 기원은 동기창이 북종화라는 장르로 분류하기 훨씬 이전으로 올라간다. 공필화라는 말이 주는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공필호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매우 자세하고 정밀하게 그리는 회화 기법으로 외형묘사에 치중하여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 세필(細筆)가 화려한 색채를 공들여 사용한다. 화원화가(畫員畫家)나 직업화가들이 그리는 그림으로 사의(寫意)를 중시하는 문인화와는 상대적 개념이기도 하다. 다시말해서 공필화는 채색 중심의 화법인 북종화로 정립되면서 더욱 정교하고 섬세한 경치와 사물을 표현하는 중국화의 표현방법이며, 우리나라에서는 도화서 화원들의 기록화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다. 중국 채색화의 전통은 이미 서한(西漢) 시대 마왕퇴 무덤에서 출토된 백화(帛畫)에서 보이는데 미왕퇴 벡화는 말 그대로 비단에 그려진 화려한 채색화이다. 천상세계의 풍경, 무덤주인의 승천, 장례식장의 모습, 지하세계의 풍경 등 T자형 명정(銘旌)에 4가지 장면으로 그려졌다(趙力·院晶京.2020). 또 중국 불화의 시조로 여기는 조불홍(趙弗興), 동진(東晉)의 화가 고개지(高愷之,313~406, 또는 348~409)를 공필화의 초기 화가로 유추할 수 있다. 특히 조불홍의 ‘제자의 제자’에 해당하는 고개지는 화가 이름이 정확히 전하는 작품들을 남겼는데 조식(曺植)과 견씨(甄氏) 부인의 사랑을 그린 <낙신부도(洛神賦圖)>, 여성에게 덕행을 권장하는 <여사잠도(女士箴圖)>와 <열녀인지도(列女仁智圖)> 등 빼어난 채색 인물화가 그것이다. 고개지는 화가이자 미술이론가로서, 『화론(畵論)』, 『위지승류화찬(魏晉勝流畫贊)』, 『화운대산기(畵雲臺山記)』 등을 저술하여 바깥 사물의 형상을 빌려 내면의 정신을 표현한다는 ‘이형사신(以形寫神)’, 그리고 생각을 옮겨서 오묘함을 얻는다는 ‘천상묘득(遷想妙得)’ 이라는 회화이론을 내놓아 중국 회화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공필화의 화가이자 문인화의 시조로도 추앙되고 있다. 이는 형사(形似:사실성)와 정신(情神:사의성)을 하나의 몸체로 보는 그의 관점 때문일 것이다. 고개지의 생각대로 “인물화는 정신의 오묘함을 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눈(阿堵)”에 있다고 하여, 한나라, 위나라의 고졸한 기풍에 반대하면서 정신을 전달하는 것을 중요시 여겨 눈동자를 그리는 일에 힘을 쏟았다(任道斌, 2022). ‘눈은 마음의 창(窓’)이라거나 ‘눈의 정기(精氣)’라는 표현이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시대를 뛰어넘어 프랑스 조각가 로댕이 무엇보다도 눈의 표현을 최고로 중요시 여긴 시각과 일치한다. 공필화는 동양화의 두 갈래의 하나인 남종화에 대비되는 북종화 화풍의 양식에서 그 회화의 발전 과정을 말할 수가 있다.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은 명나라 말기의 문인이자 화가로서 그의 화론서 『화안(畵眼)』에는 남·북종화의 유래가 나온다. “선가(禪家)에 남종(南宗)과 북종(北宗) 두 종파가 있으니, 당나라 때 처음 나뉘어졌는데 그 사람 출신이 남북이라는 것은 아니다. 북종은 이사훈(李思訓) 부자(父子, 당대의 화가)의 착색산수(着色山水:彩色山水)에서 전해져 송나라 조간(趙幹:오대 남당의 화가)·조백구(趙伯駒:남송의 화가)·조백숙(趙伯驌:남송의 화가)이 되었고, 마원(馬遠:남송의 화가)·하규(夏珪:남송의 화가)에 이르렀다. 남종은 왕마힐(王摩詰:王維:당대의 화가)이 처음으로 선담(渲淡:淡彩)을 사용하여 구연(拘硏)의 법을 일변(一變:한가지 다른 기법을 확립)하였는데 그것이 전해져 장조(張璪,당대 말기의 화가)·형호(荊浩:오대의 화가)·관동(關同:오대의 화가)·동원(東源:오대의 화가)·거연(巨然:오대 북송초의 화가)·곽충서(오대 북송초의 화가)·미가의 부자(米家父子:아버지 米芾(북송대의 화가), 아들 米友仁(남송대의 화가)의 화법에 이르렀고, 이것이 육조(六祖:보리달마. 혜가, 승찬, 도신, 홍인, 혜능) 이후 마구(馬駒)·운문(雲門)·임제(臨濟) 등의 자손이 성하고 북종이 쇠미해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화론이란 하나의 양식적 표현 방식이자 창작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화론에는 시대의 상황과 시대정신의 주제와 형식이 따른다. 즉 화론은 그림의 방향, 의미, 화가의 자연관, 사회상, 아비투스 등 세계관을 표현하는 총체적 방식이다. 그래서 화론은 그 시작이 있으나 시대마다 계승되더라도 변형되고 해석이 달라진다. 어제 사람의 뜻이 오늘 사람의 의미가 다름을 보여주는 것이다. 양식이 시대마다 다르다는 것은 화론이 어떻게 당대에 적응하고 진보하느냐에 따라 소멸되거나 확장되기도 한다. 이미선과 공필화와의 만남 중국 심양의 노신미술대학 쑨언룽 교수는 1996년 당시 유학생 신분이었던 이미선을 “공필(工筆) 인물과 화조화 방면에 재질(才質)이 뛰어났다‘라고 회고하면서 중국화를 그리는데 있어 중요한 세 가지 요소를 당부하였다. 첫째 전통이고, 둘째 삶의 체험이고, 셋째가 작가의 수양(修養)이 그것이다. 창작을 하는 화가에게 있어 지녀야할 이 세 가지 요소는 비단 중국화만의 국한 된 것이 아닐 것이다. 전통은 저마다 자신의 속한 나라의 문화적인 패턴으로 이어지기 때문이고, 삶의 체험은 실존하는 사회적 장소에서의 자신의 삶을 말하며, 수양은 작가라면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최고의 테크닉을 익혀야 하기 때문에 이 세 가지 요소 모두가 중첩되는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과 한국은 서양에 대비되는 동양이라는 공간의 관계틀 속에서 그 문화적 공감대를 같이해온 지 무척 오래됐고, 현재에도 여전히 이웃의 문화적인 소통관계가 유지되는 정서적 공동체(emotional community)로 생각되고 있다. 이미 두 나라는 대륙과 한반도라는 지정학적인 관계로 서로 간 곡절도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천 년 역사를 같이 이어오면서 우리의 의식에서는 중국을 멀고도 가까운 나라로 여기고 있다. 이미선이 낯설음을 마다하고 중국행을 택한 것은 오로지 새로운 그림을 찾아 나선 때문이었다. 그에게 새로운 그림이란 단연 중국화였고 중국화를 바르게 알아야 동양의 정신과 한국화의 문화적인 배경도 바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통을 알아야 새로운 시대적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는 나름의 의미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가 택한 것이 중국 채색화의 기법인 공필화인데 공필화(工筆畵)는 결이 고운 비단에 매우 정교하게 그리는 중국 채색화의 한 분야로 그 품격이 높으면서도 우아한 것이 특징이다. 앞서 말했지만 중국미술사에서 백화(帛畵), 즉 비단 그림은 이미 2500년 전 전국시대(戰國時代) 초(楚) 나라 때부터 나타나고 있으며 서한(西漢), 동진(東晉)에 이르러 고개지(顧慨之)의 비단 그림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어 공필화의 깊은 연원을 가늠할 수 있게 해주었다. 〈여사잠도(女史箴圖〉는 군주에게 충성하는 궁중 여인들의 덕행을 널리 알리는 세필(細筆)의 그림으로, 비단 그림이 고고하고 기품이 있는 궁중화의 중요한 분야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A.D 6세기 서위시대 돈황 막고굴 벽화 <오백강도성불도>, 당나라 장희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 645~684)의 묘도 벽화 <객사도>, 송나라 염입본(閻立本. ?~673)의 <보련도(步련輦圖)>, <역대제왕도(歷代帝王圖)>, 중당시기 장훤(張萱, 712~781)의 <도련도(搗練圖)>, 원대(元代)의 전진교(全眞敎)의 중심지였던 영락궁 삼청전(三淸殿)의 <조원도(朝元圖)> 등의 벽화가 공필화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회화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조원도> 중의 신선 행렬은 여덟 명의 주요 신선을 중심으로 각종 인물 280명을 그렸다. 다양한 인물의 형상은 그 규모가 매우 크게 그려졌으며, 금분으로 장식하여 원나라 벽화의 웅장한 풍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 삼청전의 벽화는 화공인 마군상(馬君祥) 등이 그렸다고 한다. 특히 이미선은 이 영락궁의 벽화에 감화되어 공필화를 수련하고자 2m 이상 크기의 도교 신선 그림을 실제로 세 점을 1년 가까이 모사하여, 화려한 채색의 깊이와 선묘의 유려함을 익힐 수 있었다. 미술의 기본기는 누가 뭐래도 손의 자유로운 표현에 있다. 물론 오늘날에는 머리로만 그리는 개념적인 작업도 성행하지만, 그 바탕에는 형태와 색채, 선묘를 통해 내면적 정신이 살아나야 하는 조형 정신이 녹아있어야 한다. 대상없는 생각만으로 새로움을 찾을 수 없고, 새로움과 상상력은 삶의 경험과 세계에 존재하는 자연,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유추해서 만들어진 변형된 일상의 사물들을 통해서 다시 재발견되는 것이다. 창작은 넓게 보면 재발견이며 해석이고, 재구성이다. 어떤 때는 은유와 반전과 상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현재 찾아볼 수 있는 문헌을 보면 이른 시기에 출현한 중국 개방(丐幇) 형태를 기술한 문헌기록은 송원(宋元) 화본(話本)소설 중 『김옥노봉타박정랑(金玉奴棒打薄情郞)』〔김옥노가 박정한 낭군을 몽둥이로 때리다〕에 나타난 ‘단두(團頭)’다. 단체 우두머리라는 뜻인 ‘단두’는 개방의 방주(幇主)다. 이야기는 송대 항주에 7대까지 세습한, 도시 전체의 거지를 통할하는 단두 김노대(金老大)를 묘사하고 있다. 그는 거지가 구걸해 온 음식과 돈을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거지에게 고리대나 일숫돈을 놓아 부당한 이익을 취하거나 착취까지 일삼았다. 명나라 때 풍몽룡(馮夢龍)이 편찬한 『전상고금소설(全像古今小說)』 제27권 『김옥노봉타박정 랑』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때는 송나라 소흥(紹興)1) 연간에 임안(臨安)은 비록 건도(建都) 지역이요 부유한 고향이지만,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거지가 적지 않았다. 거지 중에 우두머리가 되는 자를 ‘단두’라 부르며 거지 무리를 관리하였다. 거지 무리가 구걸해 오면 단두는 ‘일두전’2)을 받았다. 비나 눈이 올 때면 단두는 멀건 죽을 쒀서 구걸할 곳이 없는 거지에게 먹였다. 낡은 옷도 단두가 관리하였다. 그래서 거지들은 자신을 낮추어 노예처럼 단두에게 복종하고 감히 거스르지 못했다. 단두는 창기와 놀지도 않았고 도박도 하지 않았다. 의연하게 모두를 위하여 일했다. 단두는 관례적으로 구걸한 물건을 받아내어 거지에게 고리로 착취하였다. 단두는 그렇게 생계를 유지하며 한시도 직업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단지 한 가지, ‘단두’에 대한 시중의 평판은 좋지 않았다. 자신이 열심히 일하여 농지를 마련하고 몇 대에 걸쳐 뜻을 얻었더라도, 결국은 거지 두목 출신이었다. 일반 백성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밖에 나가면 존중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문을 걸어 잠그고 집안에서만 으스대었다. 그렇다하더라도 ‘양천(良賤)’ 두 글자로만 헤아린다면 창녀, 배우, 관아의 하인, 졸개 4부류를 비천하다 했지만 거지는 그 축에는 들지 않았다. 거지는 돈이 없을 뿐 몸은 헌데가 없지 않던가. 예를 들어 춘추시기에 오자서(伍子胥)는 환란을 피하는 와중에 오시(吳市)에서 퉁소를 불며 걸식하였고 당나라 때에 정원화(鄭元和)는 가랑(歌郎)3)이 되어 『연화락(蓮花落)』을 부르다가 나중에 뜻을 이루어 비단 이불을 덮지 않았던가. 모두 능력이 특출하였던 거지였다. 그렇기에 거지는 사람들에게 경멸당하기는 했지만 창녀, 배우, 하인, 졸개의 비천함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자, 지금부터는 항주에 있는 단두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자. 성은 김(金)이요 이름은 노대(老大)다. 조상에서 그까지 7대에 걸쳐 단두를 지내어, 완전한 가문을 이루었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밭에서 농사지으며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었다. 곡물 창고에 곡식이 가득했고 주머니에는 여윳돈이 많아 아랫사람들에게 변돈을 놓았다. 갑부라고는 할 수 없으나 부자 축에는 들었다. 김노대는 기개가 있어 단두 자리를 족인(族人) 김라자(金癩子)에게 넘겨주었다. 자신은 이미 모든 걸 향유했다며 거지에게 달라붙지 않았다. 그렇다하더라도 동향사람들은 습관대로 그를 단두라 불렀다. 김노대는 50여 세로 아내를 여의고 아들 없이 옥노(玉奴)라는 외동딸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서 ‘김옥노가 박정한 낭군을 때린’ 민간 전설이 생겨났다. 줄거리는 이렇다. 김노대는 딸이 재능과 용모가 뛰어난 것을 이용하여 사인(士人)에게 시집보낼 생각을 했다. 중매를 거쳐 가난한 수재 막계(莫稽)가 데릴사위로 김 씨 집안에 들어갔다. 돈 한 푼도 쓰지 않고 사람과 재물 모두 얻은 셈이었다. 김옥노의 권유와 지지아래 막계는 급제 후 무위군(無爲軍) 사호(司戶) 관직을 받았다. 급제는 하였으나 이웃의 어린아이가 손가락질하며 “김 단두의 사위가 관원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막계는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오늘과 같은 부귀를 누릴 수 있다면 왕후 귀척의 데릴사위로 들어가지 못할 게 뭬 있겠는가. 단두를 장인으로 모셔야 한다면 평생 치욕이지 않은가! 자녀를 낳아 키워도 역시 단두의 외손이니 이야깃거리로 전해지지 않겠는가. 이제 단호히 끊지 않으면 안 되겠다. 재삼재사 숙고하지 않으면 결국은 후회하게 될 게다.” 이렇게 나쁜 마음을 먹고 밤중에 부임하는 배에서 처를 밀어 강에 빠뜨려 버렸다. 다른 좋은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갈 심산이었다. 그런데 강물에 빠진 김옥노는 죽지 않았다. 새로 부임한 회서(淮西) 전운사(轉運使) 허덕후(許德厚)의 양녀로 들어갔다. 그런 후에 막계를 다시 데릴사위로 불러들였다. 동방화촉을 밝히는 밤에 막계는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욕을 먹었다. 그런 후에는? 둘은 다시 사이좋게 되었다. 단두 김노대를 임지로 데리고 가 죽을 때까지 봉양하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소흥(紹興, 1131년 ~ 1162년)은 남송 고종(高宗) 조구(趙構)의 두 번째 연호다. 32년가량 사용하였다. 고종(高宗)이 양위하고 난 후에 효종(孝宗)이 융흥(隆興)으로 개원할 때까지 사용하였다. 건염(建炎) 5년 1월 1일(1131년 1월 31일)에 연호를 소흥(紹興)으로 개원하였다. 소흥(紹興) 32년 11월 16일(1162년 12월 23일)에 연호를 융흥(隆興)으로 정하였다. 2) 매일 하루에 한 번씩 내는 돈, 옛날에 거지는 매일 구걸해 온 소득에서 일정 분분을 상례적으로 거지 우두머리에게 납부하였다. 매일매일 납부했기에 ‘일두전(日頭錢)’이라 불렀다. 3) 옛날 장례식 때 만가(挽歌)를 부르는 사람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개방(丐幇)은 거지의 동업조직 항방(行幇)1)이다. 일종의 민간직업 집단형태로 출현한 민간 비밀 사회조직 형태다. 거지라는 특수한 직업을 기초로 형성된 조직으로 일반적인 방회(幇會)2) 단체의 성격을 갖추고 있다. 당나라 때 가공언(賈公彦)은 『주례·지관·사장(肆長)』에서 “사장(肆長)은 각각 그 시장의 정령을 관장한다.”라는 문장의 ‘소(疏)’에 말했다. “이 사장(肆長)은 1사(肆, 가게)에 1장(長, 우두머리)을 세워 1사의 일을 검사 대조하게 하였다. 지금의 행두(行頭)〔행수〕와 같다.” 항방은 우두머리를 세워 외부조직을 구성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사장(肆長)’은 관방의 행정관리 구성원에 속하는 것이다. 민간의 동업조합(guild)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요 동업조합이 출현했다는 의미도 아니다. ‘개방’은 민간 직업단체, 비밀 사회조직이라는 이중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2개의 대립된 사물은 하나로 융합’되지 않던가. 민간 직업집단의 동업조직 형태로 형성된 시기는 송나라 때이다. 송나라 사람 차약수(車若水)의 『각기집(腳氣集)』의 기록이다 : 금릉에서 상민에게 행원(行院)이 있다는 말을 직접 들었다. 찐빵을 파는 사람들은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이나 다른 지역에 자금을 주지 않았다. 찐빵을 파는 여러 집에서 함께 모여 시장을 빌렸다. 어떤 사람은 취사도구를 보내고 어떤 사람은 자금을 보내고 어떤 사람은 면류를 보냈다. 필요한 것은 다 있기에, 호인행원(護引行院)이라 했다. 조금도 거리끼는 마음이 없었다. 여기의 ‘행원’이라는 용어가 바로 당시에 여러 공업이나 상업 업종의 ‘항방’을 부르는 명칭 중 하나였다. 송나라 때에는 축국(蹴鞠)놀이가 성행하였다. 이에 따라 한때 ‘원사(圓社)’, ‘제운사(齊雲社)’ 등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오락장소가 있었다. 축국과 같은 구예(球藝)를 가지고 생계를 유지하는 직업의 업종도 있었다. 송나라 사람 주밀(周密)의 『무림구사(武林舊事)』 권6 『제색기예인(諸色伎藝人)』 기록에 따르면 당시 항주(杭州)에 황여의(黃如意), 범노아(范老兒), 소손(小孫), 장명(張明), 채윤(蔡潤) 등 명성이 자자한 ‘축국’ 예인이 있었다고 한다. 민간 동업조직의 또 다른 두드러진 상징(표지)은 상응하는 내부 교류용 은어 ― 항화(行話, 직업은어)가 있었다는 점이다. 송나라 때 왕운정(王雲程)이 편찬한 『축보(蹴譜)』 중의 「원사금어(圓社錦語)」는 당시 ‘원사’ 내부에서 유행하던 은어의 한 부류다. 중국에 있어 결사(結社)의 방회(幇會) 형태는, 멀리 원나라 때의 농민봉기와 초기 민간 종교 흥기 때의 비밀 단체부터, 근대에 한때 극성하였던 청홍방(靑紅幇)에서 그 원류와 궤적을 찾아볼 수 있다. 거지의 동업조합 조직은 상술한 두 가지 민간 사회단체 조직의 형태가 혼합, 파생되어 나왔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항방(行幇), 옛날에 도시 상인, 소수공업자, 기타 노동자의 직업 혹은 지역 관계로 결성된 작은 단체를 가리킨다. ‘trade association’라 할 수 있다. 동업 조합, 동업자 단체인데, 여기에서는 ‘동업조직’이라 한다. 2) 중국에서 지하 조직을 ‘흑사회(黑社會)’라 부른다. 이 지하 조직은 중국 사회 곳곳에서 범죄의 온상이 되었다. 흑사회는 ‘대규모 조직(幇)을 가진 범죄 집단’을 의미한다. ‘흑방(黑幇)’, ‘방회(幇會)’, ‘방파(幇派)’로 불리기도 한다. 중국 공안부의 내부 자료에 따르면, 90년 중국 내에는 5백여 개에 이르는 흑사회 조직이 있었다. 이들은 조직의 강령과 지방 활동 계획을 가지고 일부 지방 도시 또는 농촌에서의 활동을 조종하는데 이를 위해 막대한 자금과 차량, 심지어 무기도 갖추고 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무훈은 가르치는 데에 소홀리 하는 선생이 있으면 찾아가 무릎 꿇고 사정하였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 학생이 있으면 찾아가 오랫동안 무릎 꿇고 충고하고 타일렀다. 성과가 있는 학생이나 선생에게는 여러 사람 앞에서 무릎 꿇고 감사를 표시하고 포상하며 장려하였다. 그가 의학 자금 모금에 다소간 희망이 생겼을 때 도박 빚을 진 친형이 찾아와 도와달라고 하였지만 무훈은 한 푼도 나누어주지 않았다. 관(冠)현 장팔채(張八寨)의 효부 진(陳) 씨가 밤샘 바느질로도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자 구걸하면서 시어머니에게 효양한다는 말을 듣고서는 아끼지 않고 10무의 토지를 증정하였다. “이 사람 훌륭해, 훌륭해. 10무 토지를 줘도 아깝지 않지. 이 사람 효부야, 효부. 토지 10무를 줘서 노인을 봉양하게 해야 돼.” 그가 구걸한 돈의 절대 다수는 의학을 창설하는 데에 썼다. 의학 창설이 성공한 후에도 무훈은 여전히 유랑하고 걸식하며 살았다. 잠은 사찰에서 잤다. 학생들이 찾아가 무릎 꿇고 학당에 거주하라 애걸할 때에도 그는 말했다. “착한 사람들이 돈을 희사한 거야. 내게 의학을 세우라고 한 거지. 가난한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라고 한 거야. 나를 위하여 그것을 써버린다면 착한 사람들을 속이는 거와 다름없어. 양심에 위배되는 일이지. 나는 그런 일은 절대 할 수 없어. 그리고 나는 즐겁게 살고 있어. 아무런 근심 걱정 없어. 너희는 돌아가서 열심히 공부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가난한 아이들이 공부하고 글을 읽을 수 있다면 그의 숭고한 이상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세상에 더 이상 그것보다도 즐거운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무훈이 그랬다. 광서 22년(1896) 4월 23일 새벽, 59세였던 무훈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영락하여 유랑하고 걸식하며 교육 사업을 일으킨 일생을 마감하였다. 당시 학생들은 방성대곡하였다. 당읍(堂邑), 관도(館陶), 임청(臨淸) 3현의 관리와 신사 모두 장송하였다. 장례에 참석한 각 현의 향민은 2만 명이 넘었다. 광서 30년(1904), 무훈이 죽은 지 8년이 되는 해에, 신임 산동순무 원수훈(袁樹勛)은 무훈이 생전에 구걸하며 교육 사업을 일으킨 고행과 의거를 사실대로 조정에 상신하였다. 국사관(國史館)에서 전기를 쓰고 ‘충의전사(忠義專祠)’를 건립하도록 주청하였다. 이후 무훈이 구걸하며 교육 사업을 일으킨 정신에 영향과 감화를 받아 중국 내에 계속해 많은 학교가 세워졌다. 당읍현에서는 사범강습소를 무훈중학으로 개편하였다. 무훈의 족형제의 손 김동(金棟)이 기부해 관도, 관현에 각각 무훈고급소학을 건립하였다. 풍환장(馮煥章)이 태안(泰安)현과 안휘 소현(巢縣)으로 나누어 각각 무훈을 기념하는 소학교를 20여 곳에 창립하였다. 단승무(段繩武)는 수원(綏遠) 포두(包頭) 일대에 독립적으로 기부해 무훈을 기념하는 소학교 20여 곳을 지었다. 이외에도 많은 지역이 무훈의 영향을 받아 소학교를 세웠다. 그해 무훈이 임청현 신사 시선정(施善政)의 찬조아래 창설한 ‘어사항의숙(御史巷義塾)’에서 교편을 잡은 사람이, 학문과 품성이 모두 훌륭한 왕비현(王丕縣)이다. 무훈이 죽은 후 왕비현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모금을 했다. 무훈 생전에 창설한 3개의 의숙 중 가장 작았던 어사항의숙을 규모가 가장 큰 교육시설로 만들었다. 왕선생 본인은 1933년 80여 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의숙의 돈 한 푼을 개인적으로 쓴 적이 없었다. 그렇게 하면서 아내의 이해와 지지를 받지 못하자 깨끗하게 관계를 끊었다. 왕선생은 조상이 전해준 비방을 팔아서 입에 풀칠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후인들은 그를 ‘제2의 무훈’이라 불렀다. 실로 무훈이 생전에 간청하고 중탁한 것을 성실히 실행했으니, 동지라 해도 부끄럽지 않다. 무훈은 평범한 거지가 아니었다. 일반적인 고아한 사인도 아니었다. 그의 인품과 덕성은 사림의 많은 사인과 한데 섞어 논할 수 없다.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국가는 위험해진다. 교육 사업만 그러한가. 어떤 사업을 하든지 간에 실제로 무훈과 같은 정신이 필요하다. 명리를 추구하지 않고 용감히 헌신하며 추구하는 바를 견지하는 정신과, 몸소 체험하고 힘써 실천하는 행동이어야 한다. 나라와 사회를 위하여 온 힘을 다하다 죽으면 그만이다. 죽을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하면 될 일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아사와 거지의 각종 일사기문은 중국문화의 내부에 사인문화와 하층문화 사이의 계층(계급)을 넘어선 교류를 반영하고 있다. “네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네가 있다.” 라는 말처럼 한 몸이나 마찬가지다. 변이를 두루 겪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 한 몸처럼 함께 스며들어 있다. 그 실질을 강구해보면 인생의 지향, 품격 정조, 그리고 사회의 처지가 두 계층 문화를 교류하게 만드는 기본 축이다. 그 계층 간의 문화 교류가 지극힌 제한적이고 영역이 비교적 좁지만 중국문화사에 독특한 효과를 발휘하였다. 일정한 수준에서 아(雅)문화와 속(俗)문화 사이의 인위적인 역사의 한계를 타파하였다. 서로 영향을 주었고 서로 같이 스며들어 있다. 그렇게 중국문화의 발전과 사회 발전을 촉진시켰다. 동시에 사회·역사·문화 중 여러 분야의 인물의 세태, 사회 면모, 사회 현상, 심리 상태를 고찰하고 분석하는 데에 별천지와 같은 관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3. 중산간이라는 말의 기원 ‘산간(山間)지대’라는 말은 『삼국사기(三國史記,1145(인종 23년)』 「고구려본기」에 보이고, ‘산간(山間)’은 중국 당나라 정사(正史)인 『구당서(舊唐書, A.D.940)』에도 나오는 매우 오래된 용어이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높아 수려한 지역이어서 산지(山地)가 발달해 있어서 페르낭 브로델(P.Braudel)의 말마따나 “산지의 사람들은 넓고 소통이 힘든 공간 속에 파묻혀 있어 대개 경작이 불가능하든지 혹은 아주 힘들어서 문명의 재건에 필요한 접촉과 교환이 어렵다”라고 했다. 그런 곳에서는 삶에 필요한 핵심 물품들을 모두 자체 조달해야 하기 때문에 사회와 문명, 경제는 모두 후진성과 빈곤함을 면치 못했다는 것이다. 제주도의 산지(山地)는 섬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한라산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지만 산지의 규모가 크지 않고, 사면이 바다인 관계로 해안마을이 발달하였으며, 그 한라산과 해안 사이에 초지(草地)와 곶(藪: 2000년대 이후 곶자왈이라는 신생어로 사용)이 형성돼 있어서 고려시대 몽골점령기에는 목장을 동·서 아막의 행정에 의해 운영되었고, 조선시대에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삼읍으 10소장 체계로 나누어서 목장지로 활용되었다. 과거 제주도 ‘준(準)산간지대’라고 할 수 있는 웃뜨르에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대륙침략을 위해 1937년부터 축산개발사업을 실시하여 중산간 일대에 100여 개소의 공동목장을 설치한 바 있다(강경선;1998).' 당시 일본제국주의는 비단 말과 소만이 아니라 돼지·닭·양 등 전쟁에 필요한 식량 군수자원이면 모두 규모를 파악하고 장려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중산간 지역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도 않으며, 대개 관행적으로 ‘평야를 제외한 산간지역’ 또는 ‘평야와 산간의 중간지역’ 등으로 혼동돼 사용되는 정도이다. 일본은 중산간 지역에 대한 견해를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 중산간 지역이라는 용어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사용돼 왔다는 것으로, 본래는 산촌지역과 평지지역의 중간에 위치하는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중산간을 도시근교 및 평지지역을 제외한 중간·산간 공간으로 경지가 소규모이고, 자급자족적이며 복합적 농림업 생산을 주체로 하면서 저밀도 경제활동이 전개되는 지역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또 다른 견해로는 중산간 지역이라는 개념이 극히 최근에 만들어진 용어라는 주장이 있으나, 이미 일본인들이 일제강점기 제주에서 중산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일본에서도 오래 전에 사용된 개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장우환;1997). 제주의 풍수적 전통에서는 중산간이라는 지리적 개념이 없었으며, 해안마을을 알뜨르, 산간마을을 웃뜨르로 뭉뚱그려서 불렀다. 동서남북 방위를 중심으로 우(上)알(下), 왼쪽(左), 노든쪽(右)으로 설명을 했지, 중앙은 우주, 왕이라는 중심이라고 해서 지존이기 때문에 중(中)이라는 말을 조심했다. 앞서 살펴 보았듯이 우리나라에서는 산이 많은 지대를 ‘산지(山地)’라 하고, 산골짜기 지역·산골을 말하는 ‘산간(山間)’이라고 하여 매우 오래 전부터 그렇게 불러왔다. 지리적인 의미에서 중산간(中山間)이라면 ‘산간지역의 가운데’라는 말인데 그 기준에 대한 설정이 애매하기 때문에 이 중산간을 설명하려면 그 용어가 성립되기 이전 그 용어가 사용된 변화들을 추적해봐야 할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여러 문헌들을 살펴보게 되면, 어떻게 개념이 형성되었는지 그것의 흐름이 명확하게 다가온다. 단언하면, 중산간이라는 지리적 구분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말이다. 일제는 아시아 대륙의 전진기지로써 제주도를 이용했는데 그 때 한반도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토대를 크게 변질시켰다. 일제에게 제주도는 오로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일본의 환상적인 식민지 건설을 위한 군수기지에 불과했고, 제주도의 토지·산림정책을 통해 전쟁 물자 조달을 활성화하기 위한 수탈지로써 생산지를 구분하는 개념으로 중산간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중산간이라는 말이 탄생하기까지 일제 식민지 제주도를 방문한 총독부 촉탁, 일본 기자 등 일본인 학자들의 저서를 보면 그 용어의 맥락을 쉽게 읽을 수가 있다. 1905년에 발행된 『조선(朝鮮)의 보고(寶庫) 제주도(濟州島) 안내(案內)』에서는 대체로 제주도를 탐색하는 관찰자 시점에서 일제식민지 경영의 이로운 점을 파악하고 있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는데, 일제강점 이전의 시기에 제주도를 샅샅이 파악하여 분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여기에 보면 '본도에 있어서 농민이란 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벽지에 살고 있으며, 연안의 주민은 반농반어(半農半漁)의 모습이다'라고 하여, 제주도 구역을 산간과 연안으로 나누고 있다. 일본은 1905년까지만 해도 관찰자 시점으로 우리나라의 지리 개념을 사용하여 말하고 있다. 1923년에 발행된 『남국(南國)의 보고(寶庫) 제주도(濟州島)』에서는 '산간부락 쪽은 땅이 척박하다는 것과 음료수 때문에 인구가 적으며, 신탄업(薪炭業, 땔감과 숯굽기)이나 목축업을 겸하고 있다'라고 하여 1923년까지만 해도 여전히 ‘산간’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의도적으로 일본에서 천민들이 사는 마을을 비하해서 부르는 ‘부락’이라는 개념을 그대로 우리에게도 적용하고 있다. 1928년 『제주도 개세(濟州島ノ槪勢)』에서는 농기(農期)와 관련하여 제주도의 지리 구분을 3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산간지대, 중간지대, 해안지대이다. 산간지대는 삼림지대 아래에 위치하며 농경지로서는 가장 높은 지대로 해발 3000척(尺) 내외이고, 산간지대와 해안지대 중간에 위치하는 지대를 중간지대라고 하였고, 온난한 지대로 겨울에도 강설(降雪)이 없는 곳을 해안지대라 하고 있다. 여기에서 산간지대와 해안지대 사이를 ‘중간지대’로 설정하고 있는데 한 개념이 새롭게 도입되면서 중간지대가 설정되고 있다. 1929년 조선총독부 촉탁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의 『제주도생활상태조사(濟州島生活狀態調査)』에는 농업 토지의 이용을 분류하면서 화전지대의 항목에서 중산간지대 및 중간지대라는 말이 섞여서 나온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삼림지대, 산간지대, 중간지대, 해안지대라는 틀에서 토지의 성격을 신·구(新舊)로 구분하고 있다. 이때부터 중산간지대라는 말이 처음 나온다. 舊 분류 新 분류 해발 삼림지대 삼림지대 600m 이상 삼림 화전(火田)지대 중산간지대, 산간지대 300m 이상 농지 목장지대 중간지대 200m 이상 농지 경작지대 해안지대 200m 이하 농지 1930~38년까지 여덟 번의 제주도 답사와 200일 이상의 제주도 현지 연구로 8년 만에 발간된 마수다 이치지의 『제주도(濟州島)의 지리학적(地理學的) 연구(硏究)』에서도 토지이용상의 지대를 3개 지대 즉, 산간지대, 중간지대, 해안지대라는 개념으로 나누고 있는데 이 지대들이 취락지대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193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제주도세요람(濟州島勢要覽)』에서는 경작지대별 분류나 경지(耕地)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산간지대, 중간지대, 해안지대로 구분하고 있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3개 혹은 4개의 구역으로 상정하고 해발 고도의 높이로 토지이용을 위해 산간지대와 해안지대 사이를 중간지대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띤다.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는 방어기지 건설의 맥락에서 전략적으로 구상한 것으로 보이는 분류 방식이다. 같은 맥락에서 제주도 농가 분류 방법을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제주도편(朝鮮半島)의 農法과 農民-濟州島篇)』 에서는 산지부(山地部), 평야부(平野部), 해안부(海岸部)로 나누고 있다. 1935년~1965년 30년에 걸친 제주도에 관한 보고서인 이즈미 세이치(泉靖一)의 『제주도(濟州島)』에서는 자연촌의 독립적인 공동체의 예외로서 ‘중산간(中山間)’이라는 말이 1929년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가 주장한 이후 다시 등장하고 있다. 또 1942년 7월에 발행된 『문화조선(文化朝鮮)』에 실린 특파기자(特派記者) 미즈시마 유즈루(永島 謙)의 「제주도 일주(濟州島 一周)」라는 글에도 또 다시 ‘중산간지대’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 기사에 “얼마 없어 아라리(我羅里)라는 중산간지대의 고풍(古風)의 부락에 들어선다”라는 말에서 보듯, 중산간이라는 개념이 일제강점기인 1929·1935·1942년에 점차 성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대체로 제주도를 산간지대, 중간지대라고 구분하고는 산간과 해안 사이의 지대를 중간지대로 설정했으나 1929년에 중산간이라는 말이 처음 나오면서 점점 그 용어가 확산되었던 것이다. 발행연도 지리적 용어 출전 저자 1905 산간벽지, 연안 『조선(朝鮮)의 보고(寶庫) 제주도(濟州島) 안내(案內)』 아오야기 츠나타로오(靑柳網太郞) 1923 산간부락 『남국(南國)의 보고(寶庫) 제주도(濟州島)』 朝鮮總督府 全羅南道濟州島廳 1928 산간지대, 중간지대, 해안지대 『제주도 개세(濟州島ノ槪勢)』 朝鮮總督府 全羅南道濟州島廳(추정) 1929 산간지대, 중산간지대, 중간지대 『제주도생활상태조사(濟州島生活狀態調査)』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 1930~38 산간지대,중간지대,해안지대 『제주도(濟州島)의 지리학적(地理學的) 연구(硏究)』 마수다 이치지 1935 산간지대 중간지대 해안지방 「제주도(濟州島)의 사람과 마을」 미즈키 도라오(水城寅雄) 1939 산간지대,중간지대,해안지대 『제주도세요람(濟州島勢要覽)』 朝鮮總督府 全羅南道濟州島廳 1935~65 중산간지대 『제주도(濟州島)』 이즈미 세이치(泉 靖一) 1939 산지부, 평야부, 해안부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제주도편(朝鮮半島)의 農法과 農民-濟州島篇)』 다카하시 노로루(高橋 昇) 1942 중산간지대 『문화조선(文化朝鮮)』「제주도 일주(濟州島 一周)」 미즈시마 유즈르(水島 謙) 4. 해방 이후 중산간이라는 용어 해방 이후에 ‘중산간지대’라는 말이 언급된 사례를 들면 1949년 4·3과 관련한 것이 있다. <평화일보> 1949년 6월 2일자 「제주 4·3사건의 1년간 진상과 진압소탕전의 경과」라는 글에서, '…… 제2차 중산간지대 총공격 1월 6일 새벽부터 맹공격이 개시되었다'라고 하면서 중산간지대라는 말이 나온다. 또 1965년 발행된 우락기(禹樂基)의 『제주도-대한지지1(濟州道-大韓地誌1)』에 '본도의 종합개발안의 당면과제로서 중산간 부락 150개리를 이어주는 중산간 일주도로의 준공……'이라고 개발 계획을 소개하며 ‘중산간 부락’, ‘중산간 일주’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중산간과 부락이라는 개념은 해방 후에 4·3 사건 때 한라산 무장대 토벌시기와 이후 제주도종합개발계획과 함께 등장하면서 오늘날은 웃뜨르 마을들이 어느새 ‘중산간 마을’로 통용되었다. 언어는 행정적인 제도나 정책에 의해서 장려되거나 공익적인 실용성에 따라 편의상 유포되거나 사용된다. 이후 제주도종합개발과 관련한 정책적인 사업에 힘입어 웃뜨르라는 말보다는 중산간이라는 말이 자주 불리게 되었다. 지금은 중산간 마을이라는 말이 보편화되었다. 아름다운 우리의 웃뜨르라는 말이 어느새 역사 속으로 사장(死藏)돼 버렸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高昌錫 譯解, 「孝烈錄」, 『鄕土文化敎育資料集』, 제주교육박물관, 2011. 고창석·김상옥 역, 『濟州啓錄』, 제주발전연구원, 2012. 김종철, 『오름 나그네3』, 1995. 김현영, 『조선시대의 양반과 양반사회』, 集文堂, 1999.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 近世의 法과 社會』, 법문사, 1974. 신영대, 『제주의 오름과 풍수』, 백산출판사, 2009. 오성찬 외, 『제주의 마을⑬저지리』, 반석, 1991. 저지리향토사편찬위원회, 『저지리 향토지』, 2021. 정구복, 『古文書와 兩班社會』, 일조각, 2002. 제주도, 『濟州先賢誌』, 1988.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국문학보』 제15집, 1990.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16. 제주편 IV.1984.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어느제 오쿠과?" (언제 오시겠습니까?) “When would you like to come?”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1. 토포필리아 우리는 가장 작은 단위로 집에 살고 있지만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다. 집은 장소이기에 편안하고, 마을은 보다 넓은 공간이기에 여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지리학자 이-푸 투안(段義孚, Yi Fu Tuan)은 ‘장소는 안전을 상징하고, 마을은 자유를 상징한다’라고 말한다. 사람이 사는 곳인 집(home)이라는 이름을 가진 각각의 공간이 다른 여러 집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마을을 이루는 것이고, 그 마을이 자신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게 함으로써 그곳의 특별한 장소감(sense of place)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장소감이란 한 개인이, 자신이 자란 고향, 곧 그 장소를 평생 동안 지워지지 않을 감성의 근원으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객지에서 내가 태어난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바로 내가 자란 마을이 주었던 편안함과 자유를 누렸던 만족감에 대한 투사(投射)라고나 할까. 삶의 안정적인 발판이 되는 것으로 제일 우선인 것이 바로 집이며,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서 집을 이루어 사는 공동체 마을, 즉 고향이라는 이유가 그 삶의 자유를 위한 시작이 되는 것이다. 고향은 애틋한 경험과 친밀한 장소이자 애착이 가는 친밀한 공간으로 이푸 투 안은 ‘토포필리아(Topophilia)’라는 독특한 개념을 만들기도 했다. ‘토포필리아(Topophilia)’ 는 그리스어 ‘장소, 땅’을 의미하는 토포스(topos)와 ‘애착, 사랑’을 의미하는 필리아(philia)를 합성하여 ‘장소에 대한 사랑’을 새롭게 개념화했다. 우리는 시간의 그물을 벗어나지 못한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하게 만드는 원인이며 시간 앞에서는 그 무엇도 견딜 재간이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더욱 더 영속성을 꿈꾸면서 힘닿는데 까지 기억을 되살려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어떤 문명도 퇴락(頹落)하지 않는 것이 없고, 거기에 기대어 살던 사람들 또한 언젠가는 떠나지 않고 머물 수가 없다. 마치 일월(日月)이나 조석(朝夕)의 작용처럼 우리가 가면 후대가 오고 그들이 다시 우리가 남긴 문명의 바톤을 받고 이끌어 간다. 한 시대의 주인이었던 우리의 시대는 계절의 바람처럼 바뀌면서 시간은 계속 사람의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대로 그러하게(自然)’ 한다. 이것이 자연의 본 모습으로. ‘자연(自然)’의 ‘자(自)’ 라는 글자에서 보듯이 ‘스스로’, ‘저절로’라는 두 가지의 뜻이 있는 것처럼 ‘원자(原自), 본자(本自)와 같이 본래(本來), 원래(原來), 우주는 자연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자연은 본래 변화하는 것이 그 속성이라고나 할까. 떠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일까. 사람들은 자신과 관련된 것들에 대해서 기원(起源)을 중시 여긴다. 아마도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확인해 보고 싶은 충동 때문에 내 고향은 어떻게 이루어진 곳이고, 그 뿌리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 1886~1944)는, 기원(起源)을 두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시작’과 ‘원인’이라는 의미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시작의 의미로 볼 때 기원은 역사적인 사실로써 출발점이라는 말이 되나 ‘출발점을 어떻게 잡느냐’라는 개념 자체의 파악이 특히 힘들고, 또 기원을 ‘원인’으로 본다고 해도 자연과학과는 달리 인문과학에서는 본질상 그 원인을 탐구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기원이라는 것이 ‘원인・이유를 설명하는 ’발단’ 혹은 ‘설명하기에 충분한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그 역사의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설촌에 대한 탐구는 필요하다. “누구에 의해서 시작되었는가?” 2. 중산간 마을의 성격 용어도 시대의 산물이어서 시대가 만들어 낸다. 용어의 탄생은 전통어(傳統語) 바탕 위에 새롭게 신조어(新造語)가 나오고 필요에 따라 합성어(合成語)와 외래어까지 덧붙여진다. 언어의 탄생은 변화이자 새로움 자체이다. '중산간'이라는 용어는 근대적 개념어이다. 중산간은 곶자왈(곶+자왈)과 마찬가지로 알뜨르와 웃뜨르 사이, 즉 산간지대와 해안지대 사이의 지역을 가운데(中)로 설정하여 중(中)+산간(山間)을 구성해서 만든 합성어인데 옛날에는 없었지만 식민지 정책의 필요에 따라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용어이다. 저지리는 웃뜨르였다. 웃뜨르라는 의미가 산간마을, 외진 마을의 다른 의미였다. 이제는 중산간 마을로 불리면서 어느새 웃뜨르라는 말은 퇴화돼 버렸다. 중산간 마을 저지리(楮旨里)는 ‘저지리’라는 말의 어감에 비해서 해발 고도의 위치가 비교적 높은 곳에 자리한 마을인데 바로 한라산의 장엄한 산세가 지붕처럼 다가오는 한라산 서쪽 마당에 해당한다. 저지리는 동경 126도 20분, 저지리를 누구나 중산간 마을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저지리를 제주도 서북부지역 제주시 한경면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중산간 마을로 생각한다. 사실 저지리만이 아니라 소위 알뜨르에 대비되는 웃뜨르 마을들을 대개 중산간 마을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추세다. 또 서뜨르라는 지리적 개념도 있다. 서뜨르인 애월, 곽지지역에서는 서뜨르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웃뜨르라는 말을 쓴다. 이 의미로 봐서는 남서쪽 대정지역에서는 알뜨르에 대비되는 지리 개념으로 웃뜨르라 하고 있고, 제주도 서쪽 애월, 곽지지역에서는 서뜨르에 대비되는 중산간 지대를 웃뜨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중산간이라는 말을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현재 저지리는 한림리에서 남동쪽으로 16km, 한경면 신창리에서 동쪽으로 8km에 이르는 곳에 있다. 저지리에서 남쪽 모슬포까지는 14.5km, 저지리에서 제주시까지는 약 38.5km이다. 과거 대표적인 중산간 마을 저지리는 제주도에서 가장 물이 귀하고 변화가 더딘 곳이라는 평을 받았던 곳 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어느 마을보다도 이주 인구가 늘고 있는 가장 변화가 빠른 지역 1순위 마을로 탈바꿈 했다. 한경면 저지리(楮旨里;堂旨)는 해발고도가 130~140m 정도로, 이웃 마을 조수리(造水里;造乎勿, 해발 60~70m)와 그 높이가 두 배 차이가 나고 한경면에서는 한라산 방향 안쪽에 있는 제일 높은 지역이다. 제주도 서북부 지역 마을의 해발고도를 보면, 애월읍의 유수암리(流水巖;今勿德)가 해발 210~250m, 광령2리(有信洞)가 해발 200~220m, 어음2리(於音非) 해발 190~210m, 광령1리(光令)가 해발 150~180m, 해안동(海安, 伊生里)이 해발 190~210m이고, 한림읍 상명리(上明, 牛屯)가 해발 140~150m로 다음을 차지한다. 1997년 제주특별자치도에서 발행한 『제주도 중산간지역 종합조사』 에 따르면, 해발고도를 이용한 제주도 마을 설정을 0~200m 이하를 해안 마을로, 200m~600m 사이를 중산간 마을, 600m 이상을 산간마을로 구분하였다. 하지만 지리적 구분에도 시간의 역사가 있어서 시대에 따라 다르게 구분돼야 하는데 이 구분대로라면 현재의 많은 제주도 전통마을들이 중산간 마을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구분은 20세기 이후 새로운 도로망의 개설로 인해 달라진 산업시대의 구분이기 때문에 그 이전 조선시대에 성립된 마을 설촌의 과거 토대와는 한참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 제주의 전통 자연마을의 분류는 15~20세기 초까지, 그리고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의 마을의 상황을 고려해야만 하는 것이다. 넓은 의미에서 산간마을을 웃뜨르, 해안마을을 알뜨르, 혹은 서부 해안 마을을 서뜨르, 그 마을 위 한라산 방향을 웃뜨르라고 불렀던 옛제주인들의 지리적 구분과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산간마을과 해안마을의 중간 마을로써 중산간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성립됐는지 그 역사적 경험을 알아야 제주도 전통마을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다. 현용준은 중산간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현용준은 중산간의 해발고도, 과거 도로망, 해안 어로활동과 용천수 의존도, 농경지 확보와 화전경작의 차이를 전제로 하여, 해발 100m 미만을 해안마을, 100m 이상~300m 이하를 중산간 마을, 300m 이상을 산간마을로 구분하였다. 현용준의 이 구분을 적용하면, 많은 전통마을들이 해발 100m~300m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중산간 개념의 역사적인 경로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17살 때, 무칠은 걸식하며 돌아다니다 관도(館陶)현 설점(薛店)촌에 이르렀다. 장(張)씨 성을 가진 거인의 집에서 더부살이하며 연 6000문(文)을 받는 고용인이 됐다. 3년을 쉬지 않고 일하다가 예전에 자신을 길러준 백모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임금을 수령해 돌아가 효도하려 했다. 그런데 어찌 생각이나 했을까, 장 거인은 무칠이 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이용하여 가짜 장부를 들이밀며 다그쳤다. “네 임금은 일찍이 모두 지급하였다. 이게 네 장부이지 않느냐?” 고의로 트집 잡고 있다고 모함하고 하인을 시켜 길거리로 끌고 가 온몸이 멍들도록 타작하도록 했다. 나중에 무칠은 또 수재의 집에서 고용인이 되었다. 어느 날, 그의 누나가 인편에 돈과 편지를 보내왔는데 때마침 무칠이 부재중이라 수재가 대신 받았다. 무칠이 돌아오자 수재가 대신 편지를 읽어주었다. 그가 글을 모른다는 것을 이용해 돈을 보낸다는 말은 빼버렸다. 다른 소식만 알려주고 돈을 몰래 삼켜버렸다. 나중에 누나가 다시 사람을 보내 돈을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에야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재를 찾아가 사실여부를 물으니 욕만 먹었다. 설날 때 수재가 춘련을 써서 무칠에게 붙이라고 하였다. 바람이 불어 춘련을 뒤엉켜 놓으니 엉망이 되었다. 침대 머리맡에 붙인 것은 ‘고양이 개 평안’이고 닭장에는 ‘온 집안이 상서롭게 되라’는 글귀였다. 수재는 대노해 뺨을 때리며 현장에서 임금을 20% 깠겠다고 하고는 꺼지라고 욕을 해댔다. 무칠은 참지 못해 욕을 되돌려 주었다. “너, 이 나쁜 인간! 처음에 내가 글을 모르니까, 나를 속여서 내 누나가 보낸 돈을 몰래 처먹더니, 지금은 내가 글을 몰라 춘련을 잘못 붙였다고 임금을 삭감하겠다고. 양심이 있기는 한 것이오? 네 그 더러운 돈, 내 더러워서라도 안 받겠소. 네게 줄 테니 뇌물을 쓰든 헛지랄 하든 멋대로 하시오!” 말을 마친 후 돈을 면전에 던져버리고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무칠을 가장 참지 못하게 만든 일은 나중에 벌어진다. 이모부인 장(張)사장이 무칠이 글을 모른다고 무시한 일이었다. 무칠의 이모부는 전지 몇 무(畝)를 가지고 있었고 두부를 파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모부 집에서 평일에는 맷돌질하고 농번기에는 밭에 나가 농사일을 했다. 1년에 일정한 임금을 받기로 이야기가 됐었다. 연말이 되어 임금을 계산할 때 이모부는 뜻밖에도 가짜 장부를 꺼내며 임금은 이미 지불하여 한 푼도 남아있지 않다고 거짓부렁 하는 게 아닌가. 인정하지 않는 무칠에게 강변하지도 못하게 하였다. 이웃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이모부는 거짓 장부를 내보이면서 똑 같이 말했다. 이웃은 무칠이 손윗사람을 존중하지도 않고 돈만 탐한다고 여기어 무칠의 말은 듣지도 않고 화내면서 가버렸다. 누구를 탓한다는 말인가, 자신이 공부할 기회가 없어 글을 모르는 까닭에 이렇게 되지 않았는가. 이번에는 너무 괴로워 마음병이 생겨버렸다. 병 때문에 마을에 있는 낡은 사찰에서 쓰러졌다. 3일 밤낮 동안 인사불성이었다. 물 한 모금 마실 수조차 없었다. 글을 모르는 고통과 분노는 무칠에게 너무나 깊은 상처를 주었다. 자기 길을 잃고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에 처하여, 여러 고장을 전전하면서 무칠은 자신의 운명을 탄식하였다. 자신과 닮은 천하의 사람들의 운명을 탄식하였다. 불만을 넘어 분노하게 되었다. 평정을 얻지 못하면 소리를 낸다고 하지 않던가. 자신이 글을 몰라 가는 곳마다 무시당한 것처럼 글을 모르는 다른 사람도 똑같이 모욕을 당하지 않겠는가! 문득 한 생각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의학을 일으키자. 돈이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 공부할 기회를 주자. 글을 몰라 무시당하는 일은 없게 하자. 무칠은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의 운명과 닮은 후배들을 구해내자고 맹세하였다. 마음이 정해지자 낡은 사찰에서 뛰쳐나와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머슴살이는 무시당하지 않느냐. 구걸하면서 내 마음대로 하는 것보다 못하지 않느냐. 내가 구걸하고 돌아다닌다고만 보지 마라, 조만간 의학원(義學院)을 지으리라.” 일시에 무가장(武家莊)을 놀라게 하였다. 사람들은 무칠이 미쳤다고 여겼다. 무칠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거지 개인에 대하여 말한다면, 오직 빈 손 두 쪽으로 의학을 일으키는 일이 어찌 쉬울까! 백 년 전 그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오늘 날에도 사람들은 쉬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기상천외’한, 천진난만하고 어리석은 발상이라 여길 게 분명하지 않은가. 그렇지만 이상을 추구하고 희생을 아끼지 않는 무칠의 분투아래 마침내 ‘하늘이 내린 중대한 임무’, ‘학문이 발전하는 기운’이 사실상의 장거가 되어 ‘무칠(七)’을 ‘무훈(訓)’으로 바뀌게 했다. 당시에 상금과 포창을 받아 생전에 패방을 세웠다. 죽은 후에는 국사관에 전기를 세울 수 있었다. 더욱이 옛날 남통(南通) 대용(代用)사범학교에는 무훈의 화상이 공자상과 병렬되었다. 진정으로 고아한 사인의 사림에 들어갔다. 개인이 품은 꿈을 실현시키는 것이 어찌 말처럼 쉬운 일이겠는가. 무훈 본인이 모욕을 감내하면서 간고의 노력을 다한 결과였다. 세상의 쓴 맛 단 맛을 다 본 결과였다. 일생의 심혈을 다 쏟아낸 풍상의 결과였다. 사실, 무훈 본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글은 배우지 못했다. 옳을 일과 명예와 절조로 사림에 영광스럽게 뛰어올랐지만, 실상은 종신토록 걸식하면서 살았던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기이한 거지’였다. 쉬이 믿을 수 없을 것은 사실이다. 의학을 일으킨다는 것은 우선 상당할 정도로 많은 자금이 필요하다. 학교를 건립할 거대한 자금을 저축하고 모금하기 위하여 무훈이 가장 기본적으로 한 방법은 구걸이었다. 돈을 구걸하기 쉽도록 우선 자신이 광대역을 자처하였다. 왼쪽과 오른쪽 각각 반씩 돌아가며 머리를 빡빡 깎았다. 사람에게 웃음을 선사하고 보시를 쉽게 받기 위해서였다. 무훈은 노래하였다. “이쪽은 깎고 저쪽은 남겼소, 의학을 지으면 걱정할 필요 없소. 이쪽은 남기고 저쪽은 깎았소, 의학을 짓는 것은 힘들지 않소.” 사람들이 ‘의학증(義學症)’에 걸렸다고 하면 그는 노래하였다. “의학증엔 조급함이 없소. 사람을 만나면 예의로 존중하고, 돈을 주면 연명하고, 의학을 일으키면 만년은 변함이 없소.” 돈을 보시하지도 않고 오히려 호통 치는 인색한 사람을 만나면 무훈은 노래하였다. “내게 주지 않는다고 난 원망하지 않소, 내게 밥을 주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요. 강요하지 않소, 억지로 동냥하지 않소, 급할 필요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소. 내가 동냥하고 당신은 선을 행하면 모두가 의학원을 지을 수 있소.” 혹은 노래하였다. “어르신, 삼촌, 화내지 마소, 잠시 화를 멈추면 내가 곧 떠나리다.” 지주가 어쩔 수 없어 돈 몇 푼 쥐어주었다. 구걸해오면 좋은 것은 돈으로 바꿨고 나쁜 것은 골라내 자신이 먹었다. ‘비열한 놈’이라고 비꼬는 사람이 있으면 무훈은 노래하였다. “야채 뿌리 씹네(가난을 견디어 내네), 야채 뿌리 씹어도 나는 배부르니 사람에게 더 요구하지 않네. 남은 밥으로 의학원을 짓네. 토란을 먹네, 토란을 먹어. 불도 물도 필요치 않네, 남은 돈은 의학을 일으키는 데에 어렵지 않네.” 심지어 물을 얻으면 먼저 얼굴을 씻고 난 후 물을 마시면서 노래하였다. “더러운 물을 마셔도 더럽지 않네. 의학을 일으키지 않는 게 더 더럽네.” 조금 많은 돈을 희사하는 사람을 만나면 무훈은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찬가를 불렀다. “난 밥을 구했는데 당신은 선을 행하네요. 의학을 지으면 당신 와서 보세요. 당신은 선을 행하고 나는 대신 일할 뿐, 모두 의학을 짓는 데 도와주네요. 많아도 좋고 적어도 좋아요, 의학을 짓는 데에 돈을 보시하세요. 이름도 날리고 선도 행하면 문창제군(文昌帝君)이 알아서 당신의 자자손손이 팔인교(八人轎)를 타게 만들 거요.”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혼저왕 먹읍서" (어서 와서 드세요) “Please come on and eat.”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