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게메 양! 경 해시민 얼마나 좋으쿠과?"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That's right. How nice would it be to do that?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속담에 한 사람이 높은 벼슬에 오르면 그 딸린 식구도 권세를 얻는다〔계견승천(鷄犬升天)〕라고 하였다. 외척으로 얻은 파벌관계, 종족 관념은 중국문화 전통 속에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왔고 깊이 뿌리 박혀 있다. 그런데 신사들은 그 친척과 친우, 벗이 거지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가문의 명예를 잃고 조상을 욕되게 하는 데에는 방법이 없다. 소자첨〔蘇子瞻, 소식(蘇軾)〕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천하의 현사를 두루 아끼었다고 전한다. 스스로 “위로는 옥황상제를 곁에서 도울 수 있고 아래로는 비전원(悲田院)의 거지도 곁에서 도울 수 있다”라고 자부하였다. 벗이 거지라 할지라도 결국 벗은 벗이다. 상국(相國)의 증손자, 시를 지어 구걸하다 청나라 때에 상국 문공공(文恭公) 왕욱령(王頊齡)의 증손, 즉 왕유문(王幼文) 원외의 손자가 시가지를 돌아다니며 걸식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가 구걸할 때에는 연화락(蓮花落)1)을 부르지 않고 시를 지었다. 점포 사람들 모두 그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기에 늘 그에게 많은 돈을 보시하였다. 그의 부모가 그를 집안에 가둬두기도 하고 묶어두기도 했지만 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하여 도망쳐서는 늘 하던 대로 걸식하였다. 밤에는 시내의 돌 위에 드러누워 잠을 청했다. 나중에는 행방불명이 되었다. 본래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 현귀한 가문 출신이 기꺼이 걸식을 행하며 즐거워했으니, 가풍을 훼손하고 가문을 욕되게 했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다. 어찌할 것인가, 본인이 좋아서 그러한 것인데. 황실(皇室) 노태야(老太爺), 개방(丐幇)에 가입하다 청나라 광서 중엽에, 수도 남성(南城) 난광(暖廣)에 살던 거지 무리 중에 황조 종실 출신 노태야가 한 명 있었다. 걸식을 달갑게 여겼다. 때때로 창포, 마괘자를 입은 귀인이 다가와 안부를 전하고 돈을 전달하였다. 노태야는 성격이 좋지 않았다. 아무 때나 타인과 싸움했다. 난광 관원이 사람을 시켜 포박하려하니 노태야가 말했다. “너희가 나를 묶는 것은 쉬울 것이다. 그러나 나를 놓아주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이 짐짓 화난 체하며 말했다. “포박하는 것으로 그칠 줄 아느냐, 곤장을 때릴 것이다.” 당시 곤장을 치려면 포박을 풀어야 했다. 포박을 풀 때 노태야의 바지 위에 황대(黃帶)가 둘려있었다. 선례에 따르면 종인부(宗人府) 이외에 다른 관원은 종실 사람에게 형벌을 내릴 수 없었다. “가시오. 곤장도 때리지 않을 것이오.” 어쩔 수 없이 풀어주었다. 현귀 종인 중에 거지 무리에 가입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거지가 됐어도 여전히 종친 특권을 향유하고 있었던 모양이고. 일반인이 건드려서는 안 되는 특별한 거지였다. 친척과 친구 중에 거지가 있으면 가문의 명예를 손상시키기도 했으나, 사인 중에도 거지와 벗을 맺은 경우도 있었다. 청나라 때 산동 내양(萊陽)에 풍아한 사인 강학재(姜學在)가 있었다. 자는 실절(實節)이요, 황제 근신의 둘째아들이다. 그는 동정동산(洞庭東山)을 유람하면서 돈이 있는 사람들과는 교류하지 않았다. 상양승사(相羊僧寺)에서 기념으로 절구시를 벽에 쓴 거지를 초청한 후 상좌에 앉혀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며 함께 술을 마셨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거지는 강학재의 손은 잡고 말했다. “당신은 정말로 나의 지기입니다.” 강학재는 기뻐서 이후에도 자주 그와 담론하였다. 나누지 않은 이야기가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만났다. 사찰 스님이 거지를 무시하여 떠나라고 하자, 거지는 스님의 뺨을 한 때 때린 후 떠나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강학재가 일부러 그 거지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강학재가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은 만나지 않는다고 비난했으나, 강학재는 마음에 두지 않았다. 바로 ‘아래로는 비전원(悲田院)의 거지도 곁에서 도울 수 있다’고 한 소동파와 같은 기개다. 제왕장상, 사인학자 모두 거지 출신도 있고 거지로 전락한 부류도 있다. 그 친척이나 친구도 예외는 없다. 거지와 친구를 맺기도 하고 거지를 상좌에 앉히고 교류하기도 하였다. 송나라 원나라 이래로 거지 집단이 점차 추락하여 본뜻이 변질된 이후에도, 곤궁해져 거지로 전락하거나 자의적으로 거지가 된 현재(賢才) 은사(隱士)가 적지 않았다. 1) 몇 사람이 간단히 분장하고 대나무 판을 치면서 노래하는 통속적인 가곡이다. 보통 노래의 매 단락마다 ‘蓮花落, 落蓮花’라고 메기는 소리를 붙인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희재(韓熙載), 기방에서 구걸하다 한희재(韓熙載), 자는 숙언(叔言), 오대(五代) 때 유주(濰州) 북해(北海) 사람으로 후당 장종 이존욱(李存勖)의 동광(同光, 923~926) 연간에 진사였다. 그의 부친 한광사(韓光嗣)가 명종에게 피살되자 강을 건너 남당에 의탁하였다. 세종 때에 병부상서를 지냈다. 포용력이 있었고 비굴한 바가 없었다. 해고를 당해도 시종 절기를 잃지 않았다. 문장을 잘 써서, 서현(徐鉉)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큰돈을 주고서라도 문장을 사려고 하는 사인과 승려, 도사들이 많았다. 이런 아사도 의외로 기원에 가서 걸식하는 것을 놀이로 삼았다. 가기(歌妓) 100여 명을 한꺼번에 사서 하루 종일 가기와 함께 뒤섞여 놀기도 하였다. 낡은 옷을 입고 짚신을 신어 맹인 예인처럼 분장하고서는 홀로 거문고 타면서, 문아한 문객에게 박자판을 들게 하고는 기방에 가서 걸식하는 것을 즐겁고 유쾌하다고 여겼다. 송나라 때 소동파(蘇東坡)가 친우 보각(寶覺)이 낡은 승복을 주자, 감사의 뜻을 표하며 시를 읊었다. “아픈 몸에는 옥대 걸치기도 벅찬 일인데, 불민하여 화살촉 같은 기봉에 떨어지도다. 기생집에서 술이나 얻어먹을 물건으로, 운산 선승의 옛 가사와 바꾸었도다.”1) 바로 한희재의 풍류 일사를 전고로 사용해 쓴 시이다. 이처럼 당시 풍속과 맞지 않는 심리적 변태행위는 대체로 일시적으로 처한 상황이 좋지 않은 고민에서 비롯된, 모든 것을 하찮게 대하고 제때에 즐기려는 심리와 연관이 있다. 송나라 사람 황조영(黃朝英)은 『정강상소잡기(靖康緗素雜記)』에서 평가하였다. “한의재는 본래 고밀(高密) 사람이다. 후주가 즉위 후 북인을 심히 의심하여 독주로 독살당한 자가 많았다. 한희재는 두려워 마음 가는 대로 솔직하게 행동하면서 예법을 준수하지 않았다.” 송나라 사람 주밀(周密)도 『계신잡식(癸辛雜識)』에서 평했다. “후인은 화야연도(畵夜宴圖)로 조롱했지만 그 정서는 슬프기 짝이 없다.” 사림에 거처하는 사람을 보면 풍아하고 맑으며 고아하지만, 역시 위험하고 고생스러워 고충이나 마음고생이 적지 않았다. 북송 영종 조서(趙曙) 치평(治平, 1064~1067) 때의 전중어사 전기(錢覬)는 왕안석을 따르는 손창령(孫昌齡)을 비판했다가 수주(秀州)로 쫓겨났다. 집안이 가난하고 모친이 나이가 들어 친척과 친구에게 음식은 구걸했으나 의연하여 귀양살이 하는 관리의 형색이 없었다. 사인의 절기를 잃지 않은, 사림이 찬양하는 풍아한 일이었다. 그래서 소동파는 증시를 써서 “오부(烏府) 선생은 쇠로 간을 만들었나”라고 읊으면서 ‘철간어사(鐵肝御史)’라는 명칭이 붙었다. 그런데 한희재와 비교하면 후련하지 못한 억압된 심리가 생겨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한희재보다 유쾌하지 않다. 한희재는 행위가 방종하여 세속 예법의 구속을 받지 않았다. 반면 전기는 예전과 다름없이 도덕군자라는 가식적인 면을 벗어던지지 못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어멍 어디 갔당 왐수과?" (어머니 어디 갔다가 오십니까?) “Mom, Where have you been and are you coming?.”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거지 은사 마옹항(馬翁恒) 거지 무리에 은거하였던 아사(雅士)가 있다. 세상을 업신여기고 스스로 즐기는 유형에 속한다. 청나라 때 봉대(鳳臺)에 마체효(馬體孝)라는 이름의 제생(諸生)이 그런 부류에 속한다. 마체효는 성정이 호쾌하고 시원시원하였다. 부부가 모두 시를 읊고 불학을 좋아하였다. 창화하며 즐기다가 참선의 이치를 논하면서 밤새기도 했다. 다년간 강남의 명산대천을 유람하고 난 다음 이름을 광(曠), 호를 옹항(翁恒)이라 고친 후 행적이 묘연해 졌다. 나중에 숙천(宿遷)현에서 죽은 거지가 발견되었다. 가슴에 시 한 수를 품고 있었다. 말미에 ‘개은(丐隱) 옹항 절필’이라는 서명이 있었다. 현령은 기이하다 느끼고 매장한 후에 그 시를 새기고 창화시까지 써서 비석을 세웠다. ‘개은(丐隱) 옹항 선생의 묘’라 불렀다. 숙천에서 죽은 거지의 절명시가 마체효의 부인 진(晉) 씨에게 전해지자 진 씨가 읽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죽은 사람은 내 남편이다.” 그 시에는 서명이 없었다. 집안사람이 숙천에 가서 대조 확인한 결과 틀림이 없었다. 은사가 아니면 뭐라 할까. 벼슬길에 마음을 두지 않고 배움을 버리고 멀리 유람하며 숨어 지내는 거지가 됐으니. ‘속세의 덧없음을 깨달은’ 은사가 아닐는지. 유랑하며 구걸하는 것을 최후의 귀착점으로 삼은 은사일 터이다. 모든 것을 하찮게 대하며 걸식을 놀이로 삼은 방탕한 사인(士人) 세상사를 벗어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가 있다. 세상을 업신여기며 냉소적 태도를 취했던 사인이 많다. 방탕하기 그지없이 방종하게 지냈던 자들도 대대로 존재한다. 그런 행동 때문에 대부분 풍류 명사가 되었다. 국군(國君) 중에 걸식을 재미로 삼은 자도 있었다. 풍류 아사(雅士) 중에도 그런 예가 적지 않다. 모두 세속과 상반되는 변태 행위다. 변형된 마음 상태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이상한 행적으로 굴절되게 표현하고 있다. 조경종(曹景宗), 자기 공로를 믿고 걸식을 오락으로 삼다 남북조시대 양(梁) 왕조에 용감하고 날래어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운 대장군이 있었다. 성은 조(曹), 이름은 경종(景宗), 자는 자진(子震)으로, 신야(新野, 하남에 있는 지역)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말 타기와 활쏘기를 잘했고 사냥을 좋아하였다. 관직이 시중(侍中), 중위장군(中衛將軍), 강주자사(江州刺史)를 역임하였다. 52세에 부임 도중 세상을 떴다. 사람됨이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모르는 글자가 있으면 몸을 낮추어 사람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조작하였다. 술 마시기를 즐기고 놀기를 좋아하였다. 음력 섣달에 소리를 지르며 길거리로 뛰쳐나가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구걸하는 것을 오락거리로 삼았다. 그런 기회를 틈타 그의 날랜 부하들은 부녀자들을 희롱하고 재물을 약탈하기도 하였다. 그런 사실이 계속해서 양 고조(高祖)에게 전해져서야 비로소 조경종이 그런 변태적 유희를 하지 않게 되었다. 황제는 그를 책망하지 않았다. 예전에 고조는 공신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어 과거 이야기를 나누는 주연을 여러 차례 마련하였다. 조경종은 때때로 술에 취하여 본분을 잊어버렸다. 간혹 소관이라 잘못 불렀는데도 황제는 일부러 내버려 두고 그런 말을 듣는 것을 즐길 거리로 삼았다. 조경종이 자기 공로를 믿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여러 가지 변태 행위는 당시 황제가 총애하면서 벌어진 일이니, 갖가지 추태를 부린 것도 이상할 것도 없다. 명사 배휴(裴休), 탁발 거지가 돼 기원(妓院)에서 구걸하다 당나라 때에 서법, 문장으로 유명한 명사 배휴(裴休)는 자가 공미(公美)다. 당 선종(宣宗) 이침(李忱) 때, 대중(大中) 연간에 병부시랑(兵部侍郎)에서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진급할 때까지 5년 동안 조운(漕運) 적폐를 개혁하고 방진(方鎭)의 세금 포탈을 제지하면서 정치적 공적을 많이 쌓았다. 집안 대대로 불교를 믿었는데 배휴 대에 이르러 더욱 깊어졌다. 아사(雅士) 배휴는 때때로 승복을 입고서 발우를 들고 기원에서 구걸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풍류 일사로 여태껏 남아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강영호(1943~2021)는 사실주의 화가로 한국의 옛 기물이나 제주의 풍광을 즐겨 그렸다. 제주시 도남 출신으로 1963년 오현고를 졸업하고, 1967년 홍익대 서양화과와 조선대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개인전 17회, 2010년 17회 개인전 이후 지병이 악화되어 작품 활동을 중단하였다. 국내외 다수의 개인전과 한·러 교류전, 아시아미술대전, 10개국 예술교류전, 서양화 중견작가 초대전 등에 참가하였다. 제주대 강사, 한국미술협회제주도지부장, 한국예총제주도지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문우회, 상형전, 이상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한국미술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2015년 연갤러리 특별기획전 '강영호 화백 초대전'을 마지막으로 투병하다가 2021년 8월 타계하였다. '탐라이야기'(1993년)는 강영호 화가가 줄곧 관심을 가져온 제주의 옛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다. 탐라의 옛 사람들이 남기고 간 유물에서 진정한 제주의 아름다움을 찾고자 한 작품이다. 애기대백이 허벅, 각지불, 불상, 석류가 서로 뿜어내는 조형적 아름다움이 과거 시간으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탐라이야기는 화면 전체가 과거의 회상처럼 보이려고 면을 겹치고 있으며, 점묘적인 마티에르가 사물 서로가 공간에서 연결되는 장치가 되고 있다. 색상 또한 마치 아스라한 각지불 조명처럼 어른거리는 느낌을 준다. 옛제주인의 과거 여행을 소박하게 보여주고 있다. 강영호의 '상(象)'(1988년)은 불상의 상체와 머리부분을 그린 작품이다. 반가사유상을 통해 법열을 느끼도록 한 작품이다. 이미지는 보여지는 불교의 세계관을 상징한다. 전체적인 색조의 분위기는 전기가 없는 불당의 느낌을 주는데 이 또한 오래된 시간의 경험이 배어나는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란 불상으로서 오른쪽 다리를 왼쪽 허벅다리 위에 얹고, 오른손을 받쳐 뺨에 대고 생각에 잠겨 있는 부처의 형상이다. 부처가 성불(成佛)하기 전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부처의 사유란 업보를 받은 인간이 결국 번뇌를 이기고 해탈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는데 청동불이 주는 느낌이 오랜 고뇌가 시간에 드리워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창열(1929~2021)은 물방울 화가로 널리 알려졌다. 1929년 평안도 출신으로 어릴 때는 할아버지에게 서예를 배웠고, 광성고보 시절에는 외삼촌에게 뎃생을 배웠다고 한다. 가족의 회고록에 의하면 김창열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한 지 2년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학업을 중단하였고,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서 경찰관이 된 아버지와 친척들의 권유로 자신도 경찰관이 되었다. 휴전 후 다시 서울대학교에 등록하려고 했지만 월북한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 다닌 것이 문제가 돼 등록할 수 없게 되자 경찰관 생활을 하면서 혼자서 그림을 그렸다. 1957년 현대미협 동인회를 결성하여 앵포르멜 운동을 한국에서 전개했다. 이후 박서보의 주선으로 제2회 파리비엔날레 한국이 초청되면서 참여작가 4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1971년 다시 파리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고, 1972년 물방울 그림을 처음 그리기 시작했는데 2004년 프랑스 국립 쥐드폼미술관 초대전에서는 물방울 예술 30년을 결산하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2016년 여름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이 저지리에 개관되었고, 2021년 91세를 일기로 영면하자, 화장한 뒤 미술관 뒤 숲에서 수목장을 지냈다고 한다. 김창열의 '무제'(1958년)는 한국 현대미술운동 초기의 작품으로 1950년대 후반의 한국미술의 시대정신과 경향성이 모두 드러나는 작품이다. 김창열은 1957년 조선일보사에 의해 시작된 현대작가초대전에 1958년 2회전부터 참가했으며, 김창열의 당시 작품 경향을 알 수 있다. 현대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추상미술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서구미술이 한국적인 수용은 당시 우리에게 현대성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식민지를 겪은 채 바로 분단전쟁을 치른 직후의 상황에서 무엇이 새로운 것이 돼야하는지 되묻게 되었다. 작품 '무제'는 마치 즉흥적으로 순식간에 그려진 탑과 같은 모습인데 이상하게도 하단부가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이는 형태이다. 종전 직후의 상황들이 모든 것들을 처음부터 해야했고 해결해야할 과제가 산더미 같은 마음의 초조함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김창열의 '판자집'(1959년)은 서울의 판자촌 모습을 조형적 겹치기 작업으로 인식한 반추상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화가의 속성이 그렇듯이 자연 안에 구상과 추상의 조형성이 동시에 들어있어 어떤 측면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그리고 어떤 정신사적인 세계관에 영향을 받았느냐에 따라 작품의 경향이 결정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경향성은 변하기도 하면서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에 놓이게 된다. '판자집'은 처절한 사회 현실이 보이지 않은 채 미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여 기하학의 모습으로 접근한 작품이다. 사상이 미학을 결정하는 게 맞다. 서양화가 강길원(1939~2021)은 전남 장흥 출신으로 조선대 문리대 미술과를 졸업했다. 국전에서 여섯 번 특선하면서 1960년대에 국전 최연소 초대작가가 되었다. 1965년 홍익대 회화과 석사를 이수하여 고등학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재직하다가 1977년 제주대 미술교육과 교수를 거쳐 공주대 교수로 정년퇴임하였다. 제주대 교수시절 강길원은 친절하고 자상한 교수법으로 유명했다. 제주의 풍경을 그리면서 육지 화가들이 제주의 풍경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곧바로 따라서 그리는 화가가 나올 정도였다. 2004년 옥조근정훈장을 수여했으며, 다작의 작가이면서도 부부 금슬이 좋기로도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전남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했으며 2021년에 세상을 타계했다. 강길원의 '용두암'(1987년)은 대표적인 자연물 관광지이다. 용의 상징은 바다를 지키는 영물이고,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이기도 하다. 바위가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용두암인 것이다. 동양인들은 용을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는 대상으로 인식했지만 서양인들은 반대로 퇴치해야 할 사탄의 일종으로 여겼다. 기독교 세계관을 받은 것이다. 용두암은 화산 때문에 생긴 바위로 흐르는 용암이 바다를 만나면서 솟아올라 생성된 것이다. 일종의 투물러스의 형상석인 것이다. 용이 오른 쪽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승천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비춘 모습과 같아서 환상적인 느낌마져 들게 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후작(侯爵)이 구걸에 열중하다, 호적에서 지워지다 청나라 도광(道光) 연간에 북경 해대문(海岱門) 안 영광사(永光寺) 앞에 40살 쯤 먹은 거지가 있었다. 채찍질을 잘했고 해학(諧謔)에 뛰어났다. 아무 때나 속어로 내키는 대로 소곡을 편성해 읊었다. 듣는 사람들이 탄복해 앞 다퉈 돈을 희사하였다. 돈을 구걸한 후 거지는 술을 사서 맘껏 마시고는, 남은 돈은 한 푼도 남기지 않고 전부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거지는 훈구 세신으로 이미 후작을 세습하였고 예전에 건청문(乾淸門)을 지켰다고 했다. 30세 이후에 집을 벗어나 거지 행렬을 따라다녔다. 어떤 때에는 몇 개월에 한 번 돌아왔다. 일 년 내내 돌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집안사람들이 여러 번 집에 돌아와 산해진미를 향유하라고 애걸복걸해 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집에 잡혀 들어가도 삼사일이면 집안사람들이 소홀한 틈을 타 옷을 갈아입고 담을 뛰어넘어 숨어버렸다. 조정에서도 그 소식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병이 들었다는 핑계로 호적을 지우고 그의 아들에게 작위를 세습하도록 하였다. 기이한가? 속세의 관점일 수 있다. 그 거지는 부귀영화를 버려버리고 거지 행세를 한 은사임이 분명하다. 무엇을 지향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인간세상을 꿰뚫어본 인물일 수도 있다. 세상에 그런 예가 어디 한 둘인가. 이선(李仙)이라 자칭한 거지 이 또한 청나라 때에 있었던 일이다. 스스로 이선이라 부르는 거지가 있었다. 진짜 이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커다란 표주박을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구걸하였다. 돈을 얻으면 곧바로 술을 사서 마셨다. 사람들은 표주박 거지라고 불렀다. 술에 취하면 돈을 길거리에 뿌렸다. 앞 다퉈 돈을 줍는 아이들의 소리를 듣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 거지가 가는 곳마다 백여 명의 아이들이 뒤따라 다녔다. 그런 어지러움이 싫어 그에게 더 많은 주면서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는 시장 상인이 많았다. 그런 까닭에 그가 얻는 돈은 다른 거지보다도 10배 정도나 많았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거지는 글자를 쓸 줄 알았다고 한다. 시장 사람들이 100원 정도를 주면서 일 년 내내 다시는 그곳에 오지 않겠다는 약조를 써 달라고 하면 곧바로 승낙하고는 차용증을 써줬다. 약속을 위반하는 경우는 없었다. 차용증을 쓸 때, 한 글자를 쓸 때마다 북쪽을 향하여 세 번 절했다. 큰 글씨로 “우리 주인이신 광서 황제 모년에, 걸식하는 신하 이선 씀”이라 적었다. 궁금해서 “가난해져서 이런 지경에까지 전락한 당신이 어째서 황제의 은혜를 마음에 두고 한 시도 잊지 못하는 게요?”라고 물으면 그는 대답하였다. “나는 공도 없으면서 백 호의 사람들에게 흠뻑 취하게 얻어먹을 수 있잖소. 관리들도 죄라며 따지지 않으니 모든 것이 황제의 관용과 은전인 게지요! 지금 천하는, 한 읍을 관장하면 한 읍을 배불리 먹이고 한 군을 관장하면 한 군을 배불리 먹이잖소. 그들 모두 나처럼 공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백 호의 사람들에게서 먹을 것을 얻어먹으니 부끄럽지요. 그래서 감히 황제의 은혜를 잊을 수 없는 것이외다.” 그 거지가 말하는 뜻을 이해하는 사람은 ‘도력이 있는 거지’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그 거지를 평하며 말했다. “그는 관리였다. 모처에서 일을 했었다. 백성이 죽든 살든 상관하지 않고 백성에게 부당한 이익만을 추구는 상급자의 행태에 화가 나서, 관직을 버려두고 구걸하면서 풍자하고 비난하는 것이다.” 연시(燕市) 거지, 어리석은 노인 광서 23년(1897), 북경시에 화갑이 지난, 백발에 하얀 수염이 난 늙은 거지 한 명이 나타났다. 스스로 표주박 늙은이라 불렀다. 모자도 쓰지 않고 신발도 신지 않은 채 겨울이든 여름이든 홑옷만 걸치고 다녔다. 커다란 표주박 하나를 들고 다니며 먹을 것과 쓸 만한 것들을 구걸해 표주박에 담았다. 얻은 것이 돈이면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어떤 때에는 폭죽을 사서 터뜨리기도 했다. 미친 듯한 그의 행동을 보면서 사람들은 어리석은 늙은이라고 불렀다. 그 거지가 신선이라 굳게 믿고는 도를 알려달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그는 말했다. “나는 신선이 아니오. 예부터 지금까지 신선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소. 신선이 있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요. 사람을 속이는 방법인 게지요.” 관리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전에 산서(山西)의 어떤 현의 현령이었다고 했다. 사람됨이 강직해 부패한 상사에게 무례하게 굴었다. 여러 번 모욕을 주자 사지에 몰리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가정을 버리고 강호에 은거하게 됐다는 말이었다. 그러자 거지는 말했다. “골육을 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한다? 나는 절대 그렇게는 하지 않소.” 그 늙은이가 산동(山東)의 모 지방 출신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소년시절에는 재능이 있었는데 시험을 여러 번 봤으나 결국 낙방해 화가 난 나머지 거지가 됐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거지는 말했다. “나는 본래부터 재능이 없는 사람이오. 그리고 재능이 있으면서도 펼 기회를 만나지 못하는 게 어디 한 둘이요? 그것 때문에 화가 나서 불평하고 집을 떠난다는 말이요!” 끼어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물었다. “당신은 왜 폭죽 터뜨리는 것을 그리 좋아하오?” 거지가 답했다. “꿈속을 헤매고 있는 사람을 일깨우기 위해서요.” 호기심이 생긴 사람이 어떻게 하는지 볼 요량으로 많은 돈을 보시하면 늙은 거지는 말했다. “나는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치 않소.” 몇 문(文)만 챙기고 나머지는 돌려주었다. 어떤 때에는 다른 거지나 길에서 만난 아이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당시 조정은 하루가 다르게 쇠락하고 있었다. 거지는 분개하며 말했다. “재난이 닥칠 거야. 여기에 오래 머물 수 없어.” 그러고는 사라져 버렸다.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3년 후(1990)에 경자사변(庚子事變)1)이 발생하였다. 이를 보면 그 거지는 분명 보통 거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반청(反淸) 은사가 아니라면 사회 밑바닥에서 생활하였던, 의식이 있는 지사였다고 추론할 수 있다. (1901년 9월 7일, 청(清) 정부 전권대표 혁광(奕劻), 이홍장(李鴻章), 그리고 영국(英國), 미국(美國), 러시아〔아라사(俄羅斯)〕, 독일〔덕국(德國)〕, 일본(日本),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오흉제국(奧匈帝國)〕, 프랑스〔법국(法國)〕, 이탈리아〔의대리(意大利)〕, 스페인〔서반아(西班牙)〕, 네덜란드〔하란(荷蘭)〕, 벨기에〔비리시(比利時)〕 11개 국가의 대표가 북경에서 《신축조약(辛丑條約)》 체결)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1) 의화단 운동(義和團運動), 청나라 말기에 의화단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운동이다. 청나라 말기에 그리스도교는 서양 군사력을 등에 업고 들어온 종교였다. 이러한 이유로 보수적 관료, 지방의 신사, 농민 모두 반대하였다. 1850년대부터 전국에서 반(反)그리스도교 폭동이 일어났다. 특히 독일의 세력 범위로 사회 불안이 가장 심했던 산동에서는 의화단이라는 종교 결사가 조직되어, 부청멸양(扶淸滅洋)을 구호로 하여 반그리스도교, 반제국주의 운동을 일으켰다. 의화단이 베이징에 입성한 후 외국 공사관을 습격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8개국 연합군에게 패배하였다. 8개국 연합군은 청 정부를 압박하여 불평등 조약 ‘신축조약’을 체결하였다. 1900년은 중국 달력으로 경자(庚子)년으로 100년 전에 발생하였던 동란을 중국인은 ‘경자국변(庚子國變)’, ‘경자국난(庚子國難)’이라 부른다. 바로 ‘경자사변’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부현일(1939~2022)의 호는 남도(南島),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서 출생했다. 작은 키에 어진 심성을 가진 사람 좋은 아저씨 인상을 가진 화가다. 한국화에서 매란국죽의 사군자를 가르치던 부현일은 마치 서당 훈장처럼 이해심이 많은 인물로 천성이 온순한 성격에다가 제자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하는 제주대 한국화 교수였다. 1964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5년 동안 부산·마산 등지에서 중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했다. 1979년 제주대 미술교육과 강사, 1980년 전임강사로 임용되면서 제주대 미술학과 교수로 정년퇴임하였다. 1980년 제주 산호다방에서 제주풍경을 그린 20점으로 첫 개인전을 시작해 2008년까지 7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자연에 대해 진지하고 언제나 외경심(畏敬心)을 가지면서, 실경(實景)에 바탕을 둔 제주의 풍광을 소탈한 필치로 담아내었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제주도립미술관 관장을 역임하는 동안 온갖 이해관계에 따르는 예술 행정가의 쓰라린 어려움을 절감하면서 그 휴유증으로 인해 결국 암과 투병하는 말년을 보냈다. 국내외 다수의 초대전 및 교류전에 출품하였다. 한국미술협회, 제주한국화협회, 정연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2018년 제주원로예술가회고사업 부현일 작품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2021년 8월 지병으로 소길리에서 자연치료를 택해 요양하다가 영면하였다. 장례는 미협장으로 치러졌다. 한 사람의 명예를 지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다치게도 한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 주는 것도 아니고, 많은 오해와 이해관계에 얽힌 채 따르기도 하고 공격하고도 한다. 지위란 늘 그런 바람 앞에 있는 것이다. 부현일의 '한라산 하경(夏景)'(1988)은 한라산을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이 잔잔하게 묻어나는 서정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한라산의 여름을 그린 작품인데 부현일이 소박하고 꾸밈없는 필치를 보여주고 있다. 청록 산수라는 화풍의 영향은 학창시절 배운 양식으로 한때 유행했던 동양화 작법이기도 했다. 안개로 덮이는 한라산의 자태에서 화가의 온순하고 따뜻한 감정과 기운이 전해지는 작품이다. '서귀포 황우지해안'(1986)은 서귀포 외돌개가 있는 해변인 황우지를 그린 작품이다. '한라산 하경'보다는 2년 전에 그려진 그림이어서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전해온다. 바다와 하늘도, 바위의 표현이나 경관, 사물도 모두 황토의 느낌으로 은은하게 표현되고 있다. 본격적으로 청록산수 스타일로 가기 전의 화풍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강용택(1931~2021)의 호는 녹전(綠田)이며, 서귀포시 대정읍 안덕면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 그림을 잘 그려 안덕의 셋슈로 불렸다. 셋슈는 일본의 선승(禪僧)으로 명나라에서 남종화를 공부하고 일본에 처음 남종화를 소개하여 선화(禪畵)를 유행시킨 인물이다. 녹전은 제주공립농업중 4학년을 중퇴, 1950년 3월 국립체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50년 9월부터 1956년 9월까지 해병대 군복무 중 미술활동을 하였다. 제대 후 1958년 송죽중학교에서 미술강사, 1956년부터 1967년까지 제주전신전화국 무선통신사, 1967년부터 1979년 제주어업무선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9년 서양화에서 동양화로 장르를 전환하여 4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제주신문 연재 역사소설 삽화를 그렸고, 한국문화예술진흥원, KBS, 기당미술관 초대전 및 다수의 전시회에 참가하였다. 화랑무공훈장 2개, 2007년 재암문화공익상을 수상하였고, 한국미술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2021년에 타계하였다. 강용택의 '1945년 여름'(1985)은 1945년 여름 태평양 전쟁에서 항복한 일본군 병사에게 물을 떠 주는 비바리를 그렸는데 비록 적국의 병사지만 항복하여 본국으로 떠나는 병사에게 테러 대신 우물가에서 물 한 그릇을 떠 주는 가톨릭적 휴머니즘이 배어나는 작품이다. 수묵 담채로 그려진 이 작품은 강용택 화가의 가톨릭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그림으로, 일본군 병사이지만 죄는 군국주의 정치에 있었지 일 개 병사에게 잘못을 물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류의 평화를 해친 일본군이지만 대승적으로 용서를 해주는 인간성이 돋보인다. 허벅을 지고서 우물가에 왔다가 마침 지나가는 패잔국 병사가 물를 달라기에 주는 모습에 기독교 인류애가 깃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진자명(陳子明), 옛 부하에게 사기 치며 구걸하다 역사에는 벼슬하다가 거지로 전락한 후 사람들에게 어떤 동정도 받지 못하는 사인이 있다. 진자명(陳子明)이 바로 그이다. 진감(陳鑑), 자는 자명(子明), 광동(廣東) 사람으로 명(明)나라 말기의 공사(貢士)다. 청(淸)나라 순치(順治) 때에 화정〔華亭, 현 상해 송강(宋江)현〕 현령에 발탁되었다. 진자명은 사람됨이 험악하고 외지어 타인을 비방하기를 즐겼다. 나중에 직권을 이용해 양식을 횡령하니 파직되어 감옥에 갇혔다. 만기 출소 후 생계가 막막해지자, 아무 때나 옛 부하였던 관리들을 찾아가 먹을 것을 요구하였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은밀하게 숨겨진 일이나 단점을 캐내기도 했다. 심지어 관부에 고발까지 하니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나이가 들어 입에 풀칠하지도 못하게 되자, 마누라와 함께 길거리에서 구걸하며 80세까지 살다가 결국 얻어먹지 못하여 굶어 죽었다. 평상시에도 사람들은 편견을 가지고 거지를 대하는데 진자명 같은 나쁜 자가 궁핍해져서 거지꼴하고 구걸하며 돌아다니니 가련하게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낡은 버릇을 고치지도 않고 계속 사기치고 협박하며 재물을 가로채다가 결국 굶어 죽었으니, 어찌 인과응보라 하지 않겠는가. 거지 중의 은사(隱士) 산과 들, 강호에 은거해 관직에 나오지 않는 사람을 은사(隱士)라고 한다. 은사는 특수한 사회현상의 하나다. 예부터 지금까지 존재한다. 상황이 다를 뿐이다. 『논어·계씨』에 “숨어 지내면서 그 뜻을 추구한다”라는 말이 있다. 은사란 뜻이 없는 것도 아니요 세상사와 절연한 것도 아니다. 그저 각자 지향과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각자 처지와 고락이 다를 뿐이다. 『순자·정명』에 “천하에는 은사가 없고, 버려진 착한 이가 없다”라고 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사기·화식열전』에 “동굴 속에 숨어 사는 선비가 높은 명성을 얻으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위해서인가?”라는 말이 보인다. 예나 지금이나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은거하면서 이름을 떨친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부지기수다. 진(晉)나라의 도연명(陶淵明)이 유명한 은사가 아니던가. 삼국시대의 제갈공명(諸葛孔明)도 산야에 은거했던 은사였다. 이름이 떨치자 나중에 유현덕(劉玄德)이 삼고초려 해서 산문을 나서게 하고 마침내 평생의 큰 뜻을 펼쳐 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는가. 은사란 ‘숨다’〔은(隱)〕에만 뜻을 두었다고 할 수 없다. ‘숨다’(隱)의 뜻은 ‘나타내다’〔현(顯)〕에 있다. 기회가 주어지면 뜻을 펼치고 꿈을 이루는 것이다. 오중(吳中) 동정산(洞庭山)의 거지 은사 은사(隱士)의 길은 여러 가지다. 불문에 은거하기도 하고 도교에 은거하기도 한다. 초야에 묻히기도 하고 고향에 내려가기도 한다. 상업계 여러 분야에서 장사하며 은거하기도 하고 몰래 거지와 같이 행동하면서 은거하기도 한다. 거지와 같은 부류에 은거한 은사가 가장 청빈하다고 할 수 있다. 상황도 복잡하기 그지없다. 어떤 때는 숨었다가 어떤 때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해, 일정치 않다. 예를 들어 청나라 때에 오중(吳中) 동정산(洞庭山)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거지가 살았다. 미친 듯한 모습으로 낮에는 길거리에서 구걸하고 밤에는 사당에 숙박하였던 숨은 군자다. 일찍이 왕요봉(汪堯峰)이 그가 지은 절구 시가 몇 수를 기록하였다. 예를 들어 이렇다. “건곤이 크다는 걸 믿지 않고 초연히 세상에서 무리를 짓지 않네. 삼협의 물을 입으로 토해내고 만방의 구름을 발로 밟네.” “형태가 있는 것은 모두 가짜인데 형체가 없는 것이 어찌 진짜이겠는가? 무생지(無生地)를 깨달으니 매화가 이웃에 가득하네.” “등불 휘황하니 이 밤 경축하고 밤 깊으니 사내와 계집이 서로 부르지 않네. 얇게 만든 낡은 주렴 위의 하룻밤의 꿈인데 명조가 현 왕조라는 게 무슨 상관이랴!” “일 장으로 구름 뚫고 위쪽에 이르니, 호수와 푸른 산 모두 망망하다. 건곤은 내가 능히 질 수 있나니, 밝은 달 맑은 바람 아래가 너무 바쁘다.”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다. 아무 근심 걱정 없다. 여유롭고 기쁘다. 행각승으로 다니다가 밤이 되면 사당에 머문다. 당연히 푸대접이다. 쉽고 통속적인 시어 중에 강호에 은거하는 거지의 마음을 간간히 표출하고 있다. “건곤은 내가 능히 질 수 있다.” 은사 거지, 구걸한 돈으로 책을 사다 청나라 때 일이다. 어느 날, 복주(福州) 서시(西市)에 거지 한 명이 나타났다. 키는 작고 갸름한 얼굴에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다. 손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베로 만든, 울퉁불퉁한 자루 하나를 들고 있었다. 비틀비틀 걸으면서 때때로 시구를 읊조렸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해 걸음을 멈추고 바라보다가 뒤쫓아 갔다. 빈 터에 다다르자 그 거지가 자루를 땅 위에 내려놓고는 안에서 종이를 꺼내 넓게 깔았다. 위에는 “사해(四海)에 쓸모없는 사람은 괴롭다”라는 해서로 된, 돈과 같은 크기의 글자가 쓰여 있었다. 아래에는 절강(浙江)에서 복건(福建)으로 친지를 찾아 나섰는데 만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떠돌아다니고 있다. 이미 3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으니 여러분이 돈주머니 끈을 풀어 도와주십사 등의 작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둘러싸 구경하던 사람들은 가련하다 여겨 몇 십 매의 동전을 던져주었다. 거지는 많든 적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천천히 자루에서 책을 꺼내 큰소리로 낭독하였다. 맑고 시원시원한 목소리였다. 읽는 책 내용에는 여러 은어가 포함돼 있었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거지는 몸을 굽혀 땅에 떨어진 동전을 주워서 돈주머니에 넣고서는 늠름한 모습으로 서점으로 들어섰다. 구걸한 돈으로 책을 사서는 허리춤에 메고 어정어정 걸어 나갔다. 이상하다 여긴 사람이 거지에게 물었다. “당신, 어찌 남는 돈이 있어 책을 샀소?” 생각지도 못하게 거지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당신이 홍곡(鴻鵠)도 아니면서 어찌 나의 뜻을 안다고 하겠소!” 말을 마친 후 소매를 툭툭 털고는 떠나갔다. 그곳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구걸하는 사람들과 함께 다녔던, 은거하면서 큰 뜻을 가슴에 품은, 은사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가버린 인생 돌이킬 수 없다 시간은 조석이 밀려오듯 많은 사람들을 어디론가 데려간다. 그 누구도 시간에 저항할 수가 없다는 것은 진리이며, 그 시간의 물살을 거슬러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세를 상상한다. 특히 종교인들은 현실의 편안함과 더불어 더욱 적극적으로 영생을 꿈꾼다. 그렇다. 종교는 믿는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믿는다는 것은 생각일 뿐 실존은 바뀔 수가 없다. 그 누구도 부활이라는 것에 대해 반증하지 못하였으므로 그것은 현실적으로 착각에 불과하다. 그저 생각뿐인 것. 삶이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감이 있다. 생명체의 태어남과 죽음,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지 모르는 생명체의 위대한 행로는 그 자페로 경이롭다. 최근 작고한 제주 작가는 누구인가. 2020년대 작고한 제주 작가는 강용택, 강광, 강영호, 백광익, 강길원 등 5명이다. 강광은 제주대 강사로 왔었고, 강길원은 제주대 교수로 재임했는데 본적이 육지 출신이지만, 직업상 제주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후진을 가르쳤다. 김창열은 한국전쟁 당시 경찰관으로 제주에 온 화가다. 그 인연으로 저지리 예술인 마을에 김창열미술관이 건립되었다. 강용택, 강영호, 백광익은 토박이다. 제주작가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제주출신이거나, 제주에서 교육자로 지내다가 육지로 간 일련의 화가들을 말한다. 지금은 제주작가라는 말이 예전보다 큰 의미는 없지만 정책적으로 볼 때 구분이 필요할 때도 있다. 이들 6인의 작고작가들은 나름 제주와 육지에서 활동을 했던 화가들이다. 화가 본인이 제주를 바라볼 때와 제주에 와서 살 때, 또 제주에 짧게 근무하더라도 화가 자신의 정서적 감수성들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가 있다. 강광(1940~2022)은 유독 과묵한 인상으로 조용히 살아온 화가였다. 강광은 평안남도 북청 출신으로 1965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베트남 전쟁 참전 이후 제주도에서 약 10년 동안 오현고 미술교사와 제주대 강사로 지내면서 상징주의적인 리얼리즘을 구현하였다. 1960년대 한국전쟁의 상처를 잊으려는 듯 추상미술이 유행하던 시기에 다시 충격적인 5‧16군사쿠데타를 목격해야만했던 화가로서는 당시 삶의 모순들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의기(義氣)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강광은 감수성이 예민한 대학시절에 4‧19혁명을 겪었고, 서울미대 졸업 후 미국의 대리전쟁인 베트남 참전이라는 육중한 역사의 무게를 견디면서 참전의 아픈 기억의 경험들에 대한 침묵을 배웠다. 그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회의(懷疑)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사람이란 무엇이었던가? 전쟁 앞에선 삶이란 존엄하지도, 존엄한 적도 없었다. 적이란 이념이 만들어낸 괴물이자 허상이어서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싸워야 했는지도 분별할 수가 없었다. 전쟁터에서는 오로지 살아남는 것만이 정의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은 것이라곤 인간 존재에 대한 트라우마뿐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강광에게 제주의 4월은 여전히 야생 들녘의 바람으로 휘돌고 있었고, 그 역사의 바람은 다시 5월 광주로 불어가 그 슬픔을 묵과하지 않게 만들었다. 슬픔은 비장함의 끝이 아닌가. 그래도 비극 속에서도 끝내 희망의 실마리를 놓지않은 채 평화의 다리가 보이는 한반도를 꿈꾸었다. 공안검찰에 의해서 불온시 된 '다리가 보이는 산하'는 그의 내면 깊숙히 우러나온 고민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강광의 기법으로는 캔버스 화면 위에 마티에르를 살리고자 두텁게 바르는 폴리에스테르 퍼티(putty, 일본 발음으로 빠데라고도 불렀다) 위에 색을 입히는 작업을 선호했고, 이 퍼티 작업은 당시 젊은 제주 작가들에게도 그 기법이 전수되었다. 삶이란 의미의 연속이지만 시간은 모든 존재를 무력화시킨다. 생전에 분단된 한반도를 여전히 황야라고 인식했던 강광은 2022년 4월 5일 향년 82세를 일기로 영원한 야생의 대지로 돌아갔다. 강광의 '오월의 노래-잃어버린 섬'(1985년)은 오늘에 보아도 여전히 예사롭지가 않다. 젊은 날의 사회적인 고뇌로부터 양심의 메아리가 울려오는 것일까? '오월의 노래'는 제주 4‧3의 섬에서 보는 비극적 현대사의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1948년 4월의 학살로 얼룩진 제주섬이 물결은 여전히 1980년 오월 광주로 흐르며 겹쳐지고 있다. 강광의 인식처럼 규명되지 않고 치유되지 못한 역사는 계속 중첩되면서 나쁜 역사가 돼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자행되는 억울한 죽음이 없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강광은 잠들지 못하는 제주섬이야말로 광주를 위해서 상징적인 오름에서 봉화를 피우고 있다. 우리의 소망은 현실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며, 역사의 물결은 결국 평화를 향해 열려 있기에 섬에서 벌어진 죽음의 의미를 한반도에서 새롭게 되새겨져야하므로 ‘오월의 노래’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깨침의 죽비라고 할 수 있다. 강광의 '횃불'(1980년대)은 말 탄 여성이 황량한 대지에서 죽음을 위령하려있는 듯 빛이 없는 잿빛의 세상을 향해 횃불을 들고 있다. 그러나 빛은 보이지 않고 형상만 어렴풋이 실루엣으로 처리돼 암울한 세상의 들판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횃불의 상징이란 우리는 암울한 현실을 마치 환한 대낮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 세계는 잿빛인데도 불구하고 컬러로 덮힌 채 착각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마치 화가 자신이 약소국에서 태어난 설움인듯 미국의 대리전인 베트남전이라는 더러운 전쟁에 참전해서 알게 된 수많은 한반도의 모순은 마치 돌파구 없는 구덩이에 빠져 불빛 없는 횃불을 들고 있는 형국이 아닐까? 자신의 위치를 깨닫지 못하는 가혹한 현실은 갇힌 세계에서 강요된 정의와 다름 없을 것이다. 화가는 우리에게 잿빛 세계를 벗어나야만 실제로 푸른 자연과 따스한 대지, 아름다운 생명의 광야를 달릴 수 있다는 암시를 하고 있다. 백광익(1952~2024년)은 밤하늘의 별을 노래했던 화가였다. 우주를 수놓은 수많은 별이 그의 벗이었지만 2024년 결국 그도 별이 되었다. 모든 인간은 별과 같다. 별의 원소가 인간을 이루는 원소와 같기 때문이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인간 모두 별로 가거나 지구별이 된다. 백광익은 제주 출신으로 제주대 사범대학 미술교육과를 졸업했다. 현대 추상미술을 제주에 도입을 시도하여 1976년 ‘관점동인’을 결성하고, 이듬해 창립하면서 제주 현대미술의 다양성을 추구하는데 앞장 선 화가 중 한 명이다. 제주도미술대전 최우수상 및 특선 4회를 수상했고, 창작미술협 회 공모전에 출품하여 대상을 수상하는 등 공모전에 도전하여 성과를 냈다. 부산청년비엔날레, 남부현대비술제 등 국내외에서 30여 회의 개인전과 수많은 단체전을 열 정도로 활발한 작품활동했다. 국내의 수많은 공모전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고,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과 심사위원을 역임하여 후세대 발굴에도 기여했다. 한국미협제주지회 17대, 20대 지회장을 역임했다. 미술교사로 시작하여 오현중‧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제주국제예술센터 이사장과 무릉갤러리 관장으로 활동하다가 2024년 7월 16일 불의의 사고를 당한 후유증으로 영면하였다. 7월 19일 오전 6시 부민장례식장에서 미협장으로 발인하였다. 바야흐로 인생의 무상함을 절감한다. 백광익의 '78-세월'(1978년)은 관점동인의 일원이었던 화가의 추상 초기의 즉흥적인 작업이다. 화면에는 사각의 모양들과 비정형적인 형상에 스크레치들을 남기고 있다. 추상이란 무엇인지 모를, 그래서 화가 자신마저 생각지도 못한 감각을 일깨우고자 작업을 한다. 추상은 형태와 색의 향연이다. 어떤 구조를 이루거나 그 구조의 속, 혹은 안감과 같은 유사한 것들의 흔적일 수가 있다. 세월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물질에서 시간의 흔적을 추적한 것 같다. 오래된 흔적이 묻어나는, 혹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해가는 퇴색과 풍화, 마모가 주는 감성적 느낌들은 시간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유정은? = 최남단 제주 모슬포 출생이다. 제주대 미술교육과를 나와 부산대에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술평론가(한국미술평론가협회), 제주문화연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제주의 무신도(2000)』, 『아름다운 제주 석상 동자석(2003)』, 『제주의 무덤(2007)』, 『제주 풍토와 무덤』, 『제주의 돌문화(2012)』, 『제주의 산담(2015)』, 『제주 돌담(2015)』. 『제주도 해양문화읽기(2017)』, 『제주도 동자석 연구(2020)』, 『제주도 산담연구(2021)』, 『제주도 풍토와 문화(2022)』, 『제주 돌담의 구조와 형태·미학(2022)』 등이 있다.
고광표 작가의 '돌하르방이 전하는 말'은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문화의 대표인 돌하르방을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석상 '돌하르방'을 통해 '오늘 하루의 단상(斷想)'을 전합니다. 쉼 없이 달려가는 일상이지만 잠시나마 생각에 잠기는 순간이기를 원합니다. 매주 1~2회에 걸쳐 얼굴을 달리하는 돌하르방은 무슨 말을 할까요?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주 "몽키지 말앙 혼저 오라게" (꾸물대지 말고 빨리 오시게.) “Don't delay, come quickly.” ☞ 고광표는? = 제주제일고, 홍익대 건축학과를 나와 미국 시라큐스대 건축대학원과 이탈리아 플로렌스(Pre-Arch)에서 도시/건축디자인을 전공했다. 건축, 설치미술, 회화, 조각, 공공시설디자인, 전시기획 등 다양한 분야로 활동하는 건축가이며 예술가다. 그의 작업들은 우리가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감정에 익숙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Shame and Guilt’ 등 현 시대적인 사회의 표현과 감정의 본질을 전달하려 하고 있다.
관중(管仲), 배고파 구걸하니 밥을 무릎 꿇고 먹이다 춘추시대에 유명한 정치가, 『관자(管子)』의 작가라 알려진 관중(管仲)은 관경중(管敬仲)이라고도 불린다. 이름은 이오(夷吾)요, 영상(潁上) 사람이다. 포숙아(鮑叔牙)가 추천하자 제(齊) 환공(桓公)에게 경(卿)에 임용되어 ‘중부(仲父)’라 존칭되었다. 제나라에 관리로 있을 동안 관중은 정치, 군사, 경제 등 일련의 개혁정책을 펼쳤다. 국력을 크게 떨쳐 당시에 가장 강한 나라가 되었다. 제환공도 패주가 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혁혁한 공을 세운 사인도 일찍이 노(魯)나라에서 제나라에 의탁하러 가던 중에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기오(綺烏)의 관리에게 구걸하였다. 그 관리는 무릎을 꿇고 관중에게 밥을 건넸다. 기오의 관리는 눈치 보면서 조용히 물었다. “만약 당신이 다행히 죽음을 면하여 제나라에서 중용된다면 내게 어떤 보답을 하려 하시오?” 관중이 답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는 현인을 뽑고 능력자를 임용할 것이오. 어떻게 당신에게 보답하여야 되겠소?” 기오의 관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 시대의 명사는 곤궁에 빠져 구걸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하여도 지조는 잃지 않았다. 그러니 나중에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고! 거지의 시조 오자서(伍子胥), 퉁소를 불며 구걸하러 다니다 중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가난 때문에 걸식하며 유랑하다 나중에 동산재기 한 사인이 있다. 여태껏 거지들이 조사(祖師)로 받드는 오자서(伍子胥)가 그이다. 『초사·구장·섭강(涉江)』에 “오자(伍子)가 재앙을 당했다”라는 구절이 보인다. 왕일(王逸)이 주를 달았다. “오자는 오자서(伍子胥)이다. 오왕 부차(夫差)의 신하가 되어 월(越)나라 정벌을 명하라 간언했으나 부차가 듣지 않자 끝내 왕이 선물한 칼로 자살하였다.” 이에 대하여 오대(五代) 때에 촉(蜀)나라 사람 두광정(杜光庭)은 『녹이기(錄異記)』 7권에서 더 기묘하게 기술하였다. “오자서가 여러 차례 오왕에게 간언하였다. 왕의 명령을 거역하니 촉루검(屬鏤劍)을 내려 죽도록 하였다. 임종 전에 아들에게 절대 잊지 말라며 말했다. ‘내 머리를 남문에 걸어둬서 오나라를 정벌하러 오는 월나라 군대를 보게 하라. 물고기 껍질로 내 시체를 싸서 강에 던져두라. 나는 지금의 왕조가 저물어갈 때 파도를 타고 올라와 오나라가 패배하는 것을 보겠노라.’ 이로부터 해문산(海門山) 조수의 파구가 용솟음쳤다. 전단(錢塘)을 넘고 어장을 넘어서야 점차 줄어들었다. 온종일 계속되었다. 큰 소리를 내며 줄달음치고 번개가 번쩍이니 백여 리까지 들렸다. 오자서의 장례식에 썼던 마차가 보이자 조수의 파구에 표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이 전설은 민속신앙이 되었다. 오월(吳越) 지역을 넘어 양주(揚州), 안휘(安徽), 민광(閩廣, 복건과 광동, 광서 일대) 등지까지 퍼져나갔다. 당송(唐宋) 이래로 제왕들은 종종 오자서를 제후에 봉하거나 왕에 봉했다. 이 전설과 민속신앙은 오자서가 오나라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처참하게 생을 마감한 일에서 비롯되었다. 거지들은 오자서를 조사(祖師)로 받들었다. 오자서는 성은 오(伍), 이름은 원(員)이요, 자서(子胥)는 호이다. 부친 오사(伍奢)는 초(楚)나라의 대부였다. 초평왕(平王) 7년(BC522)에 평왕은 오서와 가족 대부분을 죽여 버렸다. 다행히 횡액을 피한 오자서는 홀로 도망쳐 송(宋), 정(鄭) 등을 거쳐 오나라에 의탁하였다. 오나라의 힘을 빌려 복수할 수 있기를 바랐다. 소관(昭關)을 지날 때 초나라 병사의 단속이 심했다. 방도를 마련하고자 수심에 잠겼다가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 모습이 백발로 바뀌고서야 출관할 수 있었다. 도피 중에 산도 넘고 강도 건너며 온갖 고생을 하였다. 구걸하면서 배를 채웠다. 오나라 수도(소주)에 도착했을 때에는 무일푼이었다. 머리털이 헝클어졌으며 얼굴이 꾀죄죄하여 거지꼴이었다. 어쩔 수 없이 길거리에서 퉁소를 불며 구걸하였다. 퉁소를 불면서 걸식하다가 3일 만에 관상을 보는 피리(被離)에게 발견되었다. 퉁소 소리가 지극히 슬펐다. 관상도 비범하지 않았다. 공자 희광〔姬光 : 합려(闔閭)〕에게 추천하였다. 전하는 바는 이렇다 : 오왕이 오자서를 소견할 때에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본래 일반인이 아닌데 곤궁하다하여도 어찌해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는가?” 오자서는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려 울며 하소연했다. “우리 부친은 아무 죄도 없는데 평왕에게 형과 함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저는 대왕께서 이 복수를 해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오왕은 그러겠노라 대답하였다. 궁궐에 머물게 하여 3일 밤낮을 시국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오왕은 오자서가 비범한 지혜와 용기를 지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명령을 내렸다 : 오늘 이후로 상하 귀천과 노소를 막론하고 오자서에게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왕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사형으로 죄를 묻겠다. 이렇게 힘을 얻은 오자서는 오나라에 충성을 다했고 부모형제를 죽인 초평왕에게 복수할 수 있었다. 민간에는 위와는 다른 전설도 전해져온다. 나중에 희광이 오왕이 되자 사람이 냉혹하고 이기적이며 각박하게 변했다. 가렴주구 하니 백성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희광이 오자서에게 고소성〔姑蘇城, 소주(蘇州)〕을 개축하라고 명했다. 오자서는 아무도 몰래 묘수를 남겨두었다. 성곽이 완성된 후 오자서는 조용히 부하에게 말했다. “내가 죽고 국가가 기황에 시달리거든 성곽을 허물어라. 그러면 백성을 구할 수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자서는 간신에게 모함당하여 죽임을 당했다. 월(越)나라는 그 틈을 이용해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얼마 없어 홍수에 가뭄이 겹쳐 백성이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었다. 초근모피도 구할 수 없게 되자 굶어죽은 시체가 들을 덮었다. 그때 오자서의 부하가 오자서가 남긴 말을 떠올리고는 성곽을 허물었다. 땅을 3척 정도 파자 성곽 아래에 찹쌀로 만든 벽돌이 쌓여있었다. 사람들은 ‘벽돌’ 몇 개씩을 들고 가서 밥을 지어 허기를 달랬다. 그렇게 현지 백성들은 흉년을 견딜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예전에 소주에서 구걸하며 지냈던 오자서가 소주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라고 하였다. 나중에 소주 일대의 거지들이 오자서의 상을 세우고 공양하면서 조사(祖師)로 모셨다. 그렇게 오자서는 죽은 후 민간신앙으로 재탄생하여 한 몸에 두 가지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하나는 조신(潮神)이요 다른 하나는 거지 조사다. 강에도 머물고 육지에도 머무니 얼마나 일이 많을까. 중국민간신앙 중 이런 현상은 그리 많지 않다. 중국 백성이 오자서를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하는지를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오자서가 퉁소를 불며 길거리에서 구걸했다는 이야기는 역사서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다. 필기, 전기, 돈황 변문, 소설, 평서, 희곡에도 선별된 제재로 수록돼 있다. 널리 퍼져있고 영향력도 심대하다. 민간신앙 중에 물의 신도 되고 땅의 신도 됐다는 오자서의 현상이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닐 정도로 넓고도 깊은 사랑을 받고 있다. 민속심리 중 사람들은 결국은, 자신이 좋아하고 존중하는 현상이 완벽하면서도 보통을 초월할 만능의 힘을 가지고 있기를, 바라지 않던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