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그해 6월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일찍 찾아온 여름이었다. 걷기만 해도 땀을 흘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시절은 암울하기만 했다. 연초 한 대학생이 경찰의 고문 끝에 운명을 달리했다. 서울대생 박종철이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벌어진 사건은 온 국민의 공분을 샀다.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당시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의 수사결과 발표는 코미디나 다름 없었다. 은폐로 묻혀지나 싶던 고문치사 사건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대학가의 시위는 격화됐다. “어떤 경우라도 불법과 폭력, 그리고 선동으로 우리의 공동체 자체를 파괴할 수 없다”는 그 시절 전두환 대통령의 담화는 협박이었다. ‘4·13 호헌 선언’이라고 불렀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함성은 6월에 이르러서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러다 또 다른 대학에서 또 한명이 목숨을 잃었다. 고작 만 20세의 청년이었던 그는 교정 민주광장에서 집회를 마치고 학우들과 어깨를 걸고 교문 앞에서 구호를 외쳤을 뿐이었다. 그를 향해 경찰은 최루탄을 쐈다. 직각으로 날아든 최루탄 파편은 그의 머리에 꽂혔고, 그는 그렇게 피 흘리며 쓰러졌다. 학기말이 닥친 지라 대개의 대학생
1945~48년 해방정국 3년은 혼돈의 연속이었다. 일제 강점기 36년이란 통한의 세월을 보내고 1945년 8월 맞은 조국광복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미 미국과 소련의 군정(軍政)체제가 등장, 한반도는 그와 동시에 38선이 가로막은 ‘영토분단’ 상황에 들어갔고, 48년 남과 북이 각기 다른 정부를 세우는 ‘체제분단’ 상황에 이어 급기야 1950년 6·25전쟁으로 우린 ‘민족분단’이란 운명에 직면했다. 분단고정화 3단계 과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우리 민족은 진정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북을 차치하고 남한만을 놓고 보면 그래도 어엿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제헌국회가 내세운 헌법에서도 그렇듯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했다. 그리 본다면 나라를 넘기고도 모자라 일제에 부역, 사리사욕을 챙겼던 친일 부역세력들에 대한 단죄는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실패했다. 1948년 제헌국회가 제정·공포한 법률에 따라 반민족행위조사특별위원회(반민특위)가 꾸려져 1년여간 활동을 한 결과는 ‘정의가 불의에 밀린
그들의 수법은 언제나 그렇다. 본질이 아닌 문제로 판을 깨려 하거나 적반하장도 예사다. 오리발 내밀기는 물론 언제 그랬냐는 듯 말 뒤집기는 다반사다. 거기에 한술 더 떠 함부로 매도하거나 ‘빨갱이’와 같은 덧칠을 해대며 낙인 찍기도 즐겨 쓰는 방책이다. 물론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는다. 오로지 유·불리만을 따지고 불리하면 ‘네편’이고 유리하면 ‘내편’이다. 그렇게 모두를 ‘편의 영역’으로 가르고 이전투구(泥田鬪狗) 상황으로 끌고 간다. 정연한 체계로 질서가 잡혀가고 있다면 오히려 ‘깽판’을 만들어 아수라장으로 몰고 간다. 합리적 공간에선 책임이 규명되기에 오히려 그 책임을 모면하고자 상황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부끄러움도 없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그건 개의치 않는다. 초등생 수준의 유치한 전장터로 등장인물들을 모두 끌어들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차피 관심은 모두를 진흙탕으로 끌어들여 모두에게 오물을 뒤집어 씌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불리한 국면이 오면 동원할 수 있는
▲ 제주는 과연 '쓰레기.범죄의 소굴'인가? [제이누리 그래픽] 제주도가 뒤집어쓰는 오명(汚名)이 있다. 한마디로 치욕스러운 불명예다. ‘한국관광의 1번지’이자 ‘청정 자연의 고장’으로 알려진 제주도인데 통계의 영역에 들어가면 의아스런 ‘전국 1위’ 타이틀을 갖고 있다. 범죄발생률과 1인당 쓰레기배출량이 대표적이다. 모두 전국 1위다. 이로만 놓고 보면 제주는 범죄의 소굴이고, 넘치는 쓰레기로 오염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섬이 된다. 통계를 더 살펴본다. 먼저 최근 나온 대검찰청의 범죄분석 보고다. 9일 대검찰청이 발간한 ‘2016 범죄분석’에 따르면 2015년 전국 평균 범죄 발생건수는 10만명 당 3921건이었다. 그러나 제주지역은 10만명 당 5739건으로 1위를 기록했다. 전국 평균에 비해 1800여건이나 더 많은 수치를 보였다. 2위인 광주광역시(4560건), 3위 부산광역시(4453건)와도 1000건 이상 차이를 보였다. 게다가 제주는 2010년 이후 6년 연속 범죄발생비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매년 4000~5000건을 기록하면서 불명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
TV를 거의 매일 본다. 한달여 뉴스를 보는 재미로 살고 있다. 재미가 넘친다. 뉴스가 이렇게 흥미진진할 줄 몰랐다. 매일 새로운 뉴스가 터지고,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고 있다. 드라마나 개그 프로그램은 볼 이유가 사라졌다. 지금 당장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더 재미있고, 더 흥미진진한데 굳이 가상의 허구를 다루는 ‘픽션’의 세계에 눈을 돌릴 이유가 없다. 소설이나 드라마·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이 현실이 심장이 터질 정도로 가슴이 아프다. 솟구치는 분노를 참을 길이 없다. 여론조사 기법상 ‘무의미’나 다름 없는 고작 5%의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는 그보다 더 ‘유의미’한 단단한 90%의 ‘부정평가’에 눈을 돌리게 만든다. 그만큼 어느 누구와도 화제를 떠올리면 이 시대를 원망하고, 이 암울한 현실에 비통의 울분을 보이지 않는 이가 없다. 하물며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던 주변 인물들마저 분노의 목소리를 보태고 있다. 꼭 1년 전인 지난해 11월 개봉한 영화 ‘내부자들’을 보며 언론에 종사해온 지난 날을 주마등처럼 떠올린 적이 있
500여년이 넘도록 아시아의 고전으로 불리는 명(明)대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는 ‘천하의 대세란 본래 갈라지면 하나로 합쳐지고, 합쳐지면 또 갈라지는 것(天下大勢, 分久必合,合久必分)이란 명문장으로 시작한다. 그 <삼국지연의>의 시발점이 되는 서기 168년, 13세의 나이로 즉위한 영제(靈帝)는 평생을 환관들의 영향 속에 살았다. 선대 환제(桓帝) 때 부터 황제를 모신 열 명의 내시들은 그 시절 한 몸처럼 움직이며 정권을 농단했다. 남조의 송나라 범엽이 쓴 기전체 역사서인 <후한서>와 나관중이 쓴 장편소설 <삼국지연의>에 이들을 ‘십상시’(十常侍)라고 기록한다. 10명의 상시, 즉 환관들이다. 후한의 문신 장균(張鈞)이 영제에게 올린 상소에 처음 이 말을 썼다. 후한은 어린 황제가 즉위, 환관이 권력을 장악할 때가 많았다. 권력마저 세니 녹봉 2000석을 받는 중상시, 즉 환관이 되는 자가 많았다. 역사서 <후한서>(後漢書)에는 십상시들이 많은 봉토를 거느리고 그들의 부모형제는 모두 높은 관직에 올라 그 위세가 가히 대단했
▲ 대한민국의 주권, 이제 주인에게 반납하라 [제이누리 그래픽] 대학 2학년이던 때다. 연초 추위가 몰아치던 날이었다. 늦은 시각 자취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돌연 경찰서로 끌려갔다. 불심검문의 횡행하던 때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4·19혁명’을 다룬 논문 몇 편의 복사물을 가방에 담고 있었다는 죄(?)였다. 새벽 무렵이 되도록 자인서와 진술조서, 그 외 몇장의 자술서를 수도 없이 쓰고 나서야 겨우 경찰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처음엔 분노였지만 막상 경찰서 안으로 끌려가자 두려움이 앞섰고, 시간이 흐를 수록 피곤에 시달리다보니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가 나를 이끌었다. 새벽 무렵 경찰서 문을 나서며 맡은 한기가 그리도 싱그러울 수 없었다. 안도와 피로감이 동시에 밀려와 거의 하루 종일 자취방에서 잠에 곯아 떨어졌던 기억이 난다. 그해 연초엔 대학생은 물론 온 국민이 분노를 산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보다 고작 한 살 많은 서울대생 박종철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경찰에 의해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고, 그는 물고문을 당하다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세상을 떠
▲ 삼무도 제주, 이젠 국제범죄 온상으로 가나? [제이누리 그래픽] 인내에 한계를 느낀다. 도무지 감정을 억누르기가 어렵다. 도가 지나치다는 지적을 하던 단계였는데 대번에 대형사건을 저지르고 말았다. 멀쩡한 백주대로 음식점에서 집단폭행을 저지르더니 채 며칠도 지나지 않아 대범하게 성당에 난입, 살인사건까지 저질렀다. 그것도 자기들 땅이 아닌 남의 나라 땅, 평온과 평화의 섬이었던 제주도에서 그런 일을 벌였다. 결국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2002년 제주도가 ‘국제자유도시 원년’을 선포할 무렵 제주에선 무언가 모를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2002년 중국을 대표적으로 180여개 국가 국민에게 ‘무사증 입국’을 허용하면서부턴 특히 더 그랬다. ‘궨당’으로 지칭되듯 친족사회란 ‘1차적 관계’와 ‘공익사회’의 특성이 역력하던 제주가 태평양을 향한 전진기지와 교두보가 돼 나라를 예인할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등장할 만만찮은 폐해가 바로 그런 우려였다. 외국인 범죄의 급증은 이미 그 즈음부터 걱정거리였다. 그로부터 14년여가
▲ 양성철/ 발행.편집인 살다보면 아리송할 때가 있다. “세상은 점점 살기 좋아진다”고 하건만 “그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더러 있다. 완연한 여름이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이 계절은 사실 젊음의 계절이다. 산과 바다로, 그리고 들판으로 내달려야 더위로 시달린 몸이 기운을 차리게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자연의 에너지를 만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젠 아스라이 오래 된 과거다. 제주시 탑동 해안을 거닐며 이 여름 상념에 잠겨 본다. 대규모 콘크리트 덩어리로 매립한 이 해안은 사실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먹돌’ 해안이었다. 영겁의 세월을 견디며 매끈하게 다듬어진 먹돌이 해안 곳곳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빼어난 경관이 자리했던 곳이 지금 탑동해안이다. 보말과 소라도 손쉽게 내 손으로 들어왔고, 아마 그 시절 집집마마 마치 전리품처럼 소라껍질 크기를 들이대며 한 여름철 입맛을 달래주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그 ‘먹돌해안’은 1980년대 후반 매립의 ‘대역사’(大役事)로 콘크리트 덩어리 밑으로 파묻혔다. 이젠 그저 추억일 뿐이다.
일본의 오키나와, 홍콩·싱가폴, 말레이시아의 랑카위, 그리고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십수년여 제주를 떠나지 않은 제주도민이라면 여느 곳과 달리 낯익은 도시이름이다. 대략 앞서 나열한 5개 국가·도시가 낯설지 않다. 공통점은 하나다. 제주가 때론 ‘국제자유도시’나, 때론 ‘특별자치도’ 간판을 내걸며 이른바 ‘벤치마킹’이란 이름으로 주목했던 곳이다. 서로 성격이야 다르지만 오키나와는 ‘국제도시’란 측면에서, 홍콩과 싱가폴은 ‘홍가포르’ 프로젝트란 말까지 나오면서 ‘사람·상품.자본 이동이 자유로운 곳’이란 차원에서, 랑카위는 ‘특별한 면세제도’에 주목해, 마데이라는 ‘특별자치구’의 성격을 눈 여겨 본 데 따른 것이다. 모두 제주 안에서 자발적으로 살폈다기 보단 정부 안에서 먼저 이 도시 이름을 거명했다. 2002년 제주국제자유도시란 간판을 내건 제주도는 2006년 7월1일 ‘제주특별자치도’란 새 간판을 또 내걸었다. ▲ 2006년 7월1
▲ 양성철/ 발행.편집인 1994년 9월이었다. 22년 전이다. 뭍생활을 하다 중앙언론사 기자란 명함을 들고 고향 땅을 다시 밟았다. 대학진학 때문에 처음 서울 땅에 발을 들여놓은 뒤 참으로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이었다. 그 시절 제주는 모든 게 새로웠고, 사실 경이로웠다. 기껏해야 고교시절까지 집과 학교 등지만을 오가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 세월을 보냈기에 고향 제주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당연히 수려한 자연경관은 물론이고 역사유적지도, 사회이슈현장도 도무지 ‘깡통’ 수준이었다. 그래서 기사를 쓸라치면 모든 게 새로 공부를 시작하는 마음으로 다가서야 했고, 다 새롭게 보이는 지라 배우는 재미도 쏠쏠했다. 주말이나 휴일이 되면 제주 곳곳을 누비며 익히는 재미가 지금과는 비견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시절 제주는 기껏해야 제주KAL과 제주신라호텔 정도의 특급호텔을 둔 정도였고, 이른바 제대로 된 콘도미니엄은 서귀포 중문관광단지 딱 한곳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걸 바라보는 시각과 시야는 ‘제주인’이라기 보단 ‘서울인’의 그것이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풍광 주위에 왜 호텔이 들어서지 않을까? 회원권을
▲ 제주돌문화공원 내 방사탑과 연자방아석 제주는 독특한 창조신화를 보유한 땅이다. 삼라만상이 만들어진 제주 형성사가 곧 천지창조의 이야기를 설파한다. 게다가 여느 곳과 달리 창조주는 여신이다. ‘설문대할망’이란 거대 여신(女神)이 제주도를 만들었다는 신화다. 모르는 이도 있을 것 같아 부언하면 ‘할망’은 ‘할머니’의 제주어다. 선문대할망, 설명두할망, 설명뒤할망, 세명뒤할망, 세명주할망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전해지는 설화다. 『탐라지(耽羅誌)』<담수계편>에는 설만두고(雪慢頭姑)라고도 표기돼 있다. 또 18세기 풍랑을 만나 저 멀리 지금의 오키나와인 류쿠(琉球)국까지 표류했던 장한철(張漢喆)이 지은 <표해록(漂海錄)>에는 사람들이 한라산을 보고 살려달라고 비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선마고(詵麻姑)다. 마고에 빌었다는 의미로 선문대할망이 한자 선마고로 표기된 것이다. 제주에서는 묻혀 죽은 노파라는 뜻에서 `매고(埋姑)할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설화와 함께 마고와 비교되는 할망으로 전해진다. ▲ 양성철/ 발행.편집인 제주 창조신화는 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