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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시평]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야 할 '대선시계'

 

1945~48년 해방정국 3년은 혼돈의 연속이었다. 일제 강점기 36년이란 통한의 세월을 보내고 1945년 8월 맞은 조국광복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미 미국과 소련의 군정(軍政)체제가 등장, 한반도는 그와 동시에 38선이 가로막은 ‘영토분단’ 상황에 들어갔고, 48년 남과 북이 각기 다른 정부를 세우는 ‘체제분단’ 상황에 이어 급기야 1950년 6·25전쟁으로 우린 ‘민족분단’이란 운명에 직면했다. 분단고정화 3단계 과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우리 민족은 진정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북을 차치하고 남한만을 놓고 보면 그래도 어엿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다. 제헌국회가 내세운 헌법에서도 그렇듯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했다. 그리 본다면 나라를 넘기고도 모자라 일제에 부역, 사리사욕을 챙겼던 친일 부역세력들에 대한 단죄는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역사는 실패했다. 1948년 제헌국회가 제정·공포한 법률에 따라 반민족행위조사특별위원회(반민특위)가 꾸려져 1년여간 활동을 한 결과는 ‘정의가 불의에 밀린’ 참사였다. 조국광복을 위해 싸운 독립군을 탄압하며 일제 하 관헌·경찰 노릇을 하던 친일 앞잡이들은 끝내 살아 남았다. 김구·여운형 등 민족지도자로서의 세력화를 끝낸 이들에 비해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세력이 취약했다. 그가 친일·부역세력을 안은 이유이기도 하거니와 반민특위 특별재판부(부장은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를 무력화시킨 이유이기도 하다. 그 시절 치안국(지금의 경찰청)의 사주·배후에 따른 관제시위와 반민특위 습격사건 등이 있었다. 2년여 전 히트한 영화 ‘암살’이 말하는 장면이다.

 

역사는 돌이켜보면 모질었다. 단숨에 우리 현대사를 단순화하는 건 곤란하다 할지라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결국 독재로 전락했고, 1960년 3·15부정선거의 결과는 결국 4·19혁명을 불러왔다. 하지만 그 역시 잠시였다. 단 1년만에 민주성·정통성 회복의 부르짖음은 1961년 5.16쿠테타로 끝났다. 그리 등장한 박정희 정권은 우리가 다 아는 조국 근대화·산업화의 성과를 일군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말로 역시 독재였다. 그는 결국 그의 부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1979년 10·26사태란 이름으로 흉탄에 쓰러졌다.

 

‘민주화의 새봄’은 곧 예상됐다. 하지만 어이 없게도 ‘피를 먹고 자란 민주주의’란 나무의 열매는 또다시 군부가 따갔다. 12·12반란과 5·17쿠테타로 정권을 거머쥐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최근 회고록을 내고 스스로를 ‘광주사태의 희생자’라고 말하는 걸 보면 실소라기보단 분노가 치밀어 오를 판이다.

 

그가 ‘호헌철폐·독재타도’란 전국민적 시위 함성에 못이겨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인 건 1987년 6월의 일이다. 그해 4월13일 “어떤 경우라도 불법과 폭력, 그리고 선동으로 우리의 공동체 자체를 파괴하려는 사태를 용납할 수 없다”던 그가 내린 교묘한 정치적 계산이었다. 그것도 차기 대통령 자리를 넘겨주려던 그의 쿠테타 동지 노태우가 그 시절 여당인 민정당 대표의 직분으로 6·29 선언이란 이름으로 발표했다.

 

 

 

그래도 우리 국민은 믿었다. 여러 번의 개헌을 반복하며 빼앗겼던 대통령 직선제를 다시 쟁취했기에 이제 국민의 손으로 우리의 대통령을 뽑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1987년 그해 12월 대선에 등판한 유력 대선후보는 민주화 투쟁의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그림자를 드리운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그리고 노태우 민정당 대표였다. 결과는 황당했다. 노태우 후보의 36.7% 득표율 당선이었다. 결선투표제도 없던 시절 과반에도 미치지 못한 그의 당선이었고, 민주화 운동 거대산맥의 분열의 결과는 오히려 군사독재의 연장선이 되고 말았다.

 

정치는 타협의 산물이라고 했던가? 독자적 민주공화국 수립이 어렵다고 판단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결국 노태우 대통령 재임 시절 다른 맞상대 김종필 총재와 서로 삼각편대격으로 손을 맞잡았다.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고 하나의 정당으로 몸을 합쳤다. 뒷날을 기약한 타협이었지만 “야합”이란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김영삼은 그 동맹의 결과로 1993년 2월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지금은 구제금융(IMF) 사태를 몰고온 장본인이란 혹독한 비판이 뒤따르지만 그래도 그가 재임시절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12·12 내란수괴’란 죄목으로 감옥에 가둔 것은 ‘군사독재 종식’을 염원했던 그만의 전광석화였다. 조선궁궐 앞을 가로막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한 것 역시 그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타협은 그후 대통령 선거사에 빠질 수 없는 단골이었다. 금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다 알 듯 김대중 후보는 결국 김종필과의 연대란 ‘DJP 연합’을 통해 근소한 차이로 여권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다. 그의 뒤를 이은 노무현 역시 막판 연대를 철회한 정몽준 후보가 있었기에 어찌보면 드라마틱한 당선의 영광을 안을 수 있었다. 정의를 외치고, 민주화를 부르짖었던 이들의 집권과정은 이렇듯 타협과 연대의 산물이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을 보내고 2017년 4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란 국정농단 사태의 결과 조기대선을 목전에 두고 있다.

 

 

 

돌이켜보면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좌·우익의 대립과 찬·반탁 논쟁의 이면엔 민족세력과 친일세력의 대결구도가 감춰졌고, ‘5년 신탁과 30년 신탁’이란 미·소군정의 내밀한 계산을 이해 못한 어이없는 ‘찬·반탁’ 구호의 난장판으로 국민들은 혼돈 속에 이유없는 싸움판을 벌였다.

 

이번 대선에 나선 어떤 후보는 이번 대선의 유력주자를 놓고 ‘좌파와 얼치기 좌파, 그리고 우파의 대결’이란 프레임을 내걸었다. 그런 대결구도가 그에게 유리할 것이다. 어느 누구는 국정농단 사태로 보수가 궤멸 위기에 놓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치러지는 보수와 진보의 대결로 묘사하기도 한다. 게다가 또 어떤 이는 영남 패권세력의 몰락 속에서 치러지는 충청·호남세의 약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분명한 건 이번에야 말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되는 대통령 선거란 점이다. 정파와 지역, 계층과 연령 등은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해 아우르고 가야 할 연합과 연대의 대상이다. 그러나 불의와 연대할 순 없다. 민족정통성을 확립해야 할 해방정국에서 폐족(廢族)을 걷어내지 못한 치욕과 눈물은 우리 현대사 곳곳에 켜켜이 쌓여 있다.

 

불의는 타협이 아니라 청산의 대상이다. 그래야 우리 후세대들이 영광된 조국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 [제이누리=양성철 발행·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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