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성철/ <제이누리> 발행.편집인 그냥 눈을 감을까 생각도 해봤다. 그래도 지난해 말과 비교하면 좀 변화되는 조짐이 있으니 "굳이 말을 꺼내 무엇하리" 곱씹어도 봤다.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다 “이건 아니다”란 생각으로 바뀌었다. 2015년도 제2회 제주도 일반회계 및 특별회계 세입·세출 추가경정 예산안 처리결과를 보고 든 결론이다. 제주도의회는 제2회 추경예산안 세출부분에서 112억6996만원을 삭감하고, 똑같은 금액을 다른 명목으로 증액한 수정안을 28일 본회의에서 가결, 통과시켰다. 삭감된 예산은 무언지, 증액된 예산은 무언지 찬찬히 훑어봤다. 무엇보다 눈에 들어오는게 있다. 집행부가 요구했지만 의회에서 삭감한 예산내역을 나열한 A4 용지 분량이다. 5페이지다. 그 반대로 증액한 예산내역을 나열한 문서의 분량은 21페이지다. 종이 분량만으로도 4배가 불었다. 게다가 감액된 예산항목이 70건이었다면 증액된 예산항목은 340건이다. 항목은 5배 불었다. ‘목돈’을 쓰려던 도 집행부의 계획이 의회에 의해 짜잘한 ‘푼돈’으로 쪼개진 것이다. 먼저 제주도
▲ 양성철/ 발행.편집인 지금으로부터 13년여 전인 2002년 5월26일의 일이다.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한 목장부지에 언론사 기자들이 몰려 들었다. 그 해는 민선 3기 6·13지방선거가 예정된 때였다. 현장에 기자들이 몰려든 이유는 단 하나-. 도지사 선거에 출마, 불꽃 경쟁을 벌이던 두 후보간에 벌어진 논란 때문이었다. A후보가 상대방 B후보를 향해 “지사 재직 시절 피땀 어려 키운 농민들의 감귤을 수매, 땅에 파묻었다”고 주장했고, 애지중지 농사를 짓는 농민들의 정서를 자극했다. 두 후보는 사실 모두 지사를 역임한 라이벌이었고 당시 선거는 말 그대로 치열했다. 급기야 허위사실 유포 공방전이 벌어졌다. A후보는 신문에 광고로 감귤매립 논쟁의 불을 지피더니 당일 언론사 기자들을 불러 모아 직접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헤치고 파묻힌 감귤을 보여주며 B후보를 공박했다. 물론 현장에서 파묻힌 감귤이 나온 건 맞지만 도무지 어느 지사 재직시절 매립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열매는 공세를 편 쪽에서 따 먹었다. 선거가 끝나고 나서도 이 사건은 진실공방이 이어졌고 B후보의 대응과 조사, 추후 증언 등으로 볼 때 결
지록위마(指鹿爲馬)란 말이 있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일컫는 것이다. 유래는 이렇다. 중국 천하를 통일한 진(秦)시황은 스스로를 첫 황제란 뜻으로 시황제(始皇帝)라 칭했다. 물론 후계자들은 2세, 3세 황제로 이어질 일이었다. 그렇게 진나라는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러나 진시황은 제5차 순행 도중에 중병에 걸리고 말았다. 천수가 다했음을 직감했던지 그는 환관(宦官) 조고(趙高)에게 명하여 큰 아들 부소(扶蘇)에게 보내는 서신을 만들었다. 편지에는 “군사를 몽념(蒙恬)에게 맡기고 함양(咸陽)에서 나의 관을 맞아 장사를 지내도록 하라”고 적었다. 황위를 큰 아들에게 넘기는 유서였다. 하지만 그는 유서만 남기고 승하했다. 편지와 옥새는 모두 환관 조고가 지니고 있었다. 시황의 죽음을 아는 사람은 다만 나이 어린 태자 호해(胡亥)와 승상 이사(李斯), 그리고 조고를 비롯 환관 5~6명뿐이었다. 조고는 먼저 호해를 설득하고 승상 이사마저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세 사람은 비밀리에 담합하여 호해를 황위 계승자로 세우고, 부소와 몽념 장군에게 자결하라는 내용으로 유서를 조작했다. 부소는 자결했고, 몽념은 이를 거부하다 반역죄로 잡혀 사형을 당했다. 2세 황제가 된 호해의
▲ 영화 <삼국지> 포스터 500여년이 넘도록 아시아의 고전으로 불리는 명(明)대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는 ‘천하의 대세란 본래 갈라지면 하나로 합쳐지고, 합쳐지면 또 갈라지는 것(天下大勢, 分久必合,合久必分)이란 명문장으로 시작한다. 그 <삼국지연의>의 시발점이 되는 서기 168년, 13세의 나이로 즉위한 영제(靈帝)는 평생을 환관들의 영향 속에 살았다. 선대 환제(桓帝) 때 부터 황제를 모신 열 명의 내시들은 그 시절 한 몸처럼 움직이며 정권을 농단했다. 남조의 송나라 범엽이 쓴 기전체 역사서인 <후한서>와 나관중이 쓴 장편소설 <삼국지연의>에 이들을 ‘십상시’(十常侍)라고 기록한다. 10명의 상시, 즉 환관들이다. 후한의 문신 장균(張鈞)이 영제에게 올린 상소에 처음 이 말을 썼다. 후한은 어린 황제가 즉위, 환관이 권력을 장악할 때가 많았다. 권력마저 세니 녹봉 2,000석을 받는 중상시, 즉 환관이 되는 자가 많았다. 역사서 <후한서>(後漢書)에는 십상시들이 많은 봉토를 거느리고 그들의 부모형제는 모두 높은 관직에 올라 그 위세가 가히 대단하였다고
그는 말이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그 역시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재임할 땐 그러지 않았는데 ···.” 지난해 말 우연히 전임 지사 중 한 사람과 점심 자리를 같이 했다. 화두는 연말 불거진 제주도정과 의회 간 ‘예산전쟁’이었다. 그와 필자 역시 도와 의회가 마치 힘겨루기라도 하듯 서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기싸움 하는 양상이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팽팽하던 기싸움은 연말을 지나 연초로 넘어가며 봄 눈 녹듯 사라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우여곡절을 거쳐 ‘조기 추경’으로 가닥을 잡아가더니 시각차로 입씨름이 있는 듯 했지만 그래도 도정이 ‘응급복구’ 예산을 의회에 들이미는 데 까진 갔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돌연 ‘원희룡 지사의 중앙 인터넷언론 인터뷰 발언’이 의회의 심기를 건드렸다. ‘설 이전 예산통과’는 이렇게 물 건너갔다. 이해한다. 솔직히 필자가 봐도 원 지사의 발언은 거칠었다. 하지만 언론에 몸 담은 처지에서 <머니투데이> 기사를 찬찬히 훑어보면 원 지사의
▲ 양성철 <제이누리> 발행.편집인 28살의 청춘이었다. 아내는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해군사관학교를 64기로 나와 장교로 복무하며 어엿한 대위 계급장을 달았다. 제주방어사령부 정훈과장이란 보직을 받아 제주에 내려온 지도 근 한 달. 한 달 만에 그 청춘은 비상출동 명령으로 서귀포로 향했다. 8년여를 끌어오는 제주해군기지 공사장 현장. 기지조성 공사가 한창이건만 군 관사 공사현장 앞을 차지한 농성천막장이 ‘과제’였다. 그로선 국방부와 해군본부의 명을 받은 처지. 지난달 31일 국방부 장관 명의의 행정대집행 계획에 따라 오전부터 그는 서귀포 강정마을 현장을 지켰다. 100여명의 용역 등 1000여명의 인력이 동원돼 ‘해군기지 반대’를 외치던 농성천막과 망루는 모두 철거됐다. 고단했다. 해군장교로서 소임을 다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늦은 시각 그는 서귀포의 한 모텔에 투숙했다. 하지만 그 숙소가 그가 마지막을 맞이할 운명의 장소인지는 그도 몰랐다. ▲ 해군의 의뢰를 받은 용역들이 철거 대상인 소형버스의 창문을 망치로 깨부수고 있다./뉴시스 야심한 새벽 무렵 잠시 바람이라도 쐴 겸 그
▲ <인디언, 영혼의 노래> 책 표지 <인디언, 영혼의 노래>란 책이 있다. 어니스트 톰슨 시튼과 줄리아 M. 시튼 부부의 저작이다. 1937년에 초판이 나왔다. 부부는 인류학자다. 어니스트 톰슨 시튼은 세계적인 동물학자이자 박물학자였고, 줄리아 M. 시튼은 미국의 인디언 연구가다. 7명의 인디언과 7명의 백인 도움을 얻어 인디언의 사상과 문화에 대한 기록을 정리한 것이 이 책이다. 책은 주목할 만한 진술을 전한다. “백인의 문화와 문명은 본질적으로 물질적인 것이다. 그들은 ‘얼마나 많은 부를 가지고 있는가’를 성공의 척도로 삼는다. 인디언의 문화는 본질적으로 정신적인 것이다. 그들은 ‘동족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가’로 성공의 기준을 삼는다. 그들의 사는 방식, 사고, 모든 행위에는 정신적인 의미가 들어 있으며 정신적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행해진다.” 정신세계에 주목하는 인디언들의 삶은 인터넷과 각종 SNS에 많이 퍼진 ‘말 달리던 인디언 이야기’로도 짐작할 수 있다. 말을 타고 달리다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
▲ 양성철/ <제이누리> 발행.편집인 한 마디로 점입가경이다. 충돌과 갈등, 분열만이 있을 뿐 도무지 어떤 결론을 얻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제주의 공익과 미래를 향해 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감정과 핏대만 내세우고 있는 건 아닌지 솔직히 의문이 간다.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인사청문회가 민선 6기 원희룡 제주도정 출범 후 수차례 열리고 있다. 제주특별법은 물론 어떤 법규와 관계규정에도 없는 청문회다. 집행부 수장의 지명·임명직인 행정시장과 공기업, 출자·출연기관의 장을 상대로 한 청문회다. 공모·심사과정을 거치고 인사위원회의 추전을 받은 후보자를 다시 인사청문회 무대에 올려 또 검증하는 것이다. 국회 인사청문 대상인 정부 부처 장관 후보자도 공모.심사는 거치지 않는다. 대통령이 지명한 뒤 청문자리에 간다. 지난 7월 민선 6기 원희룡 도정 출범 후 4개월여가 지났지만 제주시장 후보자는 그 청문회를 거쳐 자진사퇴했고, 두 번째인 제주에너지공사 사장 후보자는 청문회에서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원 지사가 그래도 29일 임명을 강행했지만 다음날인 30일 제주도의회는 당일 예정된 제주발전연구원장 후보자의
▲ 양성철/ <제이누리> 발행.편집인 바야흐로 ‘협치’(協治) 전성시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미 ‘인플레이션’ 상황으로 치달았다. 민선 6기 원희룡 도정이 출범하면서 핵심가치로 내세운 ‘협치’는 ‘협치정책실’이란 도정의 새 조직 등장과 더불어 그동안의 민선 1~5기 제주자치 시스템과 다른 ‘새로운 현상’이 등장할 것이란 예고였다. 하지만 원희룡 도정 출범 100일을 지나 ‘협치’는 제주사회 곳곳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 ‘협치정책실’은 등장도 하기 전에 ‘옥상옥’(屋上屋)이란 비판을 받았다. 도정을 비판하는 측은 “이것이 협치냐”고 따지고 있고, 심지어 도의회 마저도 의원당 20억원의 재량사업비를 요구하며 ‘협치 예산’이란 간판을 들이댔다. 원 도정이 이를 거부하자 의회는 “협치가 아닌 무단통치”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협치(協治, governance)는 정치학·행정학에서 거론되는 용어지만 사실 생소한
글을 쓸 때마다 고민을 거듭한다. 혹이라도 서투른 표현 하나가 애매한 이를 다치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괜한 오해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있다. 사실과 판단을 전하려 할 뿐인데 ‘유·불리’와 ‘편’의 문제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기에 괜히 온갖 공상을 거듭하게 된다. 그러다 결론을 내렸다. 혹이라도 의도하지도 않았고, 생각조차 않았던 방향으로 흐르더라도 “언론 본연의 소명은 입을 다무는 게 아니라 말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 지난 6일 이기승 제주시장 내정자 인사청문회 6일 이기승 제주시장 내정자에 대한 제주도의회의 인사청문회를 보고 든 생각이다. 7일 그가 사퇴했기에 이젠 전 내정자라 씀이 맞다. 인사청문회가 열리기 전 그동안의 논란을 보면 ‘진실의 윤곽’은 이미 다 밝혀진 것이나 진 배 없었다. 언론에서 나온 얘기와 법원 판결문, 의회에서 불거져 나온 얘기를 종합해 사실관계로 정리해보면 이렇다. 이기승 제주시장 전 내정자는 24년여 전 연합통신 기자이던 시절인 1990년 2월7일 밤 차량을 몰고 제주시
▲ 양성철/ 발행.편집인 중앙언론사에 재직하며 제주도청에 출입하던 시절이 있었다. 민선 2기 우근민 도정이 출범하고 나서 1년여가 지난 1999년 시점이었다. 어느 자리에서 얘기를 나누다보니 도청 출입기자를 놓고 일부 공무원들이 ‘파벌’을 분류하더란 말이 나왔다. 선거에서 경쟁한 후보를 기준으로 'A기자는 B후보 편, C기자는 D후보 편‘이란 식이다. 공무원들의 입에서만이 아니라 기자들의 입에서조차 아무렇지 않다는 듯 ’편‘으로 기자들을 나누고 있었다. 그 ‘편 가르기’에서 내가 ‘B후보 편’이란 사실을 처음 알았다. B후보는 전임 지사였고 1998년 6·4선거에서 우근민 후보와 경쟁하다 낙선한 이다. 그 편에 가담해 아무런 것도 한 적이 없고, 그 편과 ‘동지그룹’이란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지만 그리 분류돼 있었다. 이유를 알아보니 기가 차기도 하고 가관이기도 했다. B후보와 고교 동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민선 2기 시절 우근민 도정의 ‘막가파식’ 개발드라이브가 못 마땅했고, 심지어 세계적 이중화산
▲ 양성철/ 제이누리 발행.편집인 1993년 12월 말 제주행 항공기에 몸을 실은 한 신사는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해 2월 군사정권을 끝장내고 출범한 김영삼(YS) 문민정부의 개혁정치가 정점에 이를 무렵이다. 그는 관선 제주도지사 임명장을 손에 쥐었다. 그의 나이 만 51세였다. 행정고시에 합격, 1967년 제주도청 사무관으로 첫 공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1976년 제주도를 떠났다. 그리고 중앙부처에서 활약하던 이였다. 그에게 지사 임명장을 주며 YS는 “개혁의 분신이 돼라”고 신신당부했다. 임명장을 손에 쥔 그는 곧바로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가 제주 공직생활 중 겪었던 악폐와 구습, 멀리 서울에서 지켜보던 고향의 적폐들이 떠올랐다. 뜻하지 않게 6공 정부의 황태자였던 박철언에게 맞섰다가 미국으로 쫓겨갔던 일화도 그의 머리를 스쳐갔다. 하지만 그보단 그 덕택에 미국생활에서 터득한 글로벌 마인드로 고향 제주를 번듯하게 세계시장 반열에 올려놓겠다는 포부가 더 컸다. 취임과 동시에 그는 개혁의 칼날을 손에 들었다. 비서수발을 받으며 독립 공간이란 호사를 누리던 실·국장들을 실무 과 단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