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샌디에이고에 사는 리차드 부부는 아이를 잃고 회복하기 어려운 고통과 상심에 빠진다. 아이를 잃은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고통이지만 그 과정에서 부부는 미묘한 마음의 갈등을 겪는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마주했을 때 다른 누군가에게 고통의 책임을 떠넘기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기진맥진한 리차드 부부는 모로코 여행을 떠난다. ▲ 현대사회는 하모니 오케스트라보단 즉흥적인 재즈 연주자가 잘 어울린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리차드 부부는 잠시라도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 출발의 전기를 찾고 싶었던 듯하다. 인간이란 눈에 보이는 게 바뀌면 생각도 바뀐다. 아이의 모습이 어른거리는 샌디에이고를 벗어나 황량한 모로코 사막을 대하면 생각도 바뀔지 모른다. 그보다 조금 앞선 시간. 아내의 자살이라는 충격과 상실감에 빠진 일본의 한 사업가는 모로코로 사냥여행을 떠난다. 모로코는 한니발 장군의 카르타고 시대 이후 로마·이슬람 세력의 부침을 겪은 역사의 흥망성쇠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역이기도 하다. 아이를 잃은 리차드 부부나 아내를 잃은 일본인 사업가나 모두 허무한 카르타고와 로마의 영광이 잠
바벨탑을 쌓아 올라간 사람들은 대홍수의 ‘지정생존자’ 노아의 후손들이었다. 이들은 신이 다시는 인간들에게 대홍수를 내리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무지개까지 띄워 보여줬건만 영 미심쩍었던 모양이다. 또 다른 대홍수에 대비해 하늘까지 닿을 만한 높은 탑을 쌓겠다는 야심 찬 기획을 하고 실행에 옮겨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바벨탑’ 역사에 들어간다. ▲ 바벨탑 이전의 세상은 ‘온 누리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사람들은 어쩌면 또다시 신이 분노하지 않도록 신의 뜻대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대홍수로 응징 당한 그 시절처럼 난잡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다면 제2의 대홍수는 필연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당연히 신은 인간들의 도발에 분노하고 이 괘씸한 인간들에게 또 다른 응징을 가한다.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 추방에서부터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과 이토록 끝없이 부딪혔다는 것이 놀랍다. 콩가루 집안의 부모 자식 관계를 보는 듯하다. 신은 공사 중인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인간들의 말이 서로 통하지 않게 만들
일본인 사업가 코지는 휴가차 떠난 모로코에서 사냥을 즐긴 뒤 사냥총을 자신을 열심히 도와준 현지 가이드에게 선물로 주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 사냥총이 ‘나비효과’처럼 야기할 파문을 그 일본인과 현지 가이드는 짐작조차 할 수 있었을까. ▲ 일본인 사업가 코지가 모로코 가이드에게 선물한 사냥총은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킨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일본인 사업가 코지가 모로코 가이드에게 선물한 사냥총은 양치기의 손에 흘러가고 양치기 소년은 호기심에 방아쇠를 당긴다. 어처구니없게도 총알은 관광버스에 앉아있던 미국인의 어깨에 박힌다. 9·11테러를 겪은 미국 CIA는 발칵 뒤집힌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미국인 부부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부부는 자신들의 여행 중 아이들을 돌보기로 한 멕시코 도우미에게 며칠만 더 집에 있어달라고 청한다. 하지만 멕시코 도우미는 그럴 수 없다. 그녀의 아들이 돌아오는 주말에 결혼하기 때문이다. 도우미는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멕시코의 아들 결혼식에 참석하지만, 아이들이 위험에 빠지고 만다. 사냥총을 모로코 가이드에게 선의로 선물한 일본의 사업가나,
알레한드로 이냐리투 감독이 빚어낸 걸작 ‘바벨(2007년)’은 도무지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는 모로코와 미국, 멕시코, 그리고 일본이라는 동떨어진 4개 나라에서 벌어지는 동떨어진 사건들을 보여준다.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는 이 4개 나라의 동떨어진 인물들을 엮는 건 모로코 어린아이가 호기심에 쏴본 총알 한방이다. ▲ 우리는 자신이 어떤 ‘연쇄반응’의 고리 속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한 일본 사업가가 모로코로 사냥 여행을 간다. 이 젊은 일본 사업가는 모로코의 현지 가이드에게 사냥총을 팁으로 선물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사냥총을 선물받은 모로코 가이드는 양들을 공격하는 자칼을 쫓아내기 위해 사냥총이 필요했던 양을 치는 친구에게 그 총을 판다. 사냥총을 산 양치기는 아들에게 그 총을 맡기고 양들을 잘 지키라고 당부한다. 이 소년은 총을 쏴보고 싶지만 자칼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좀이 쑤신 소년은 자칼 대신 멀리 지나가는 버스를 향해 조준하고 발사한다. 물론 나쁜 뜻은 없다. 그 총알은 관광버스를 타고 가던 미국인 젊은 부부(브래드 피트와 케이트 블란쳇)
미국에 건너가 맨땅에 헤딩하는 제이콥은 10년간 병아리 감별사로 악착같이 모은 돈을 모두 털어넣고 은행 융자까지 얻어 아칸소 허허벌판에 땅을 마련한다. 그렇게 만들어낸 ‘농장주’의 꿈을 안고 그는 가족들을 이끌고 아칸소 촌구석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농장주인을 향한 제이콥의 여정은 험난하기만 하다. ▲ 제이콥은 자식이 ‘노예’의 삶이 아닌 ‘주인’의 삶을 살게 하고 싶어 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아칸소 벌판에 땅을 마련한 제이콥은 등골 빠지는 중노동에 시달린다. 제이콥 자신만 힘든 것도 아니다. 자신의 중노동은 그렇다 쳐도 사람 구경조차 어려운 아칸소 구석에 따라온 아들 데이비드와 딸 앤의 형편도 딱하다. 주변에 인가조차 없으니 함께 어울릴 또래가 없을 수밖에 없다. 학교가 끝나면 마지못해 시간을 때우는 학교 친구의 집에는 술주정뱅이 아빠가 상주한다. 주정뱅이답게 언행이 대단히 비교육적이다. 무한경쟁시대의 막이 오른 1980년대 미국은 사교육 열풍이 불어 소위 ‘헬리콥터 맘’들이 극성스럽게 아이들을 학원으로 실어나르기 시작하던
가장 제이콥의 농장 분투기는 실로 눈물겹다. 낯선 이국땅에서 병아리 감별사로 10년간 모은 돈을 쏟아붓고 대출까지 해서 척박한 땅을 장만한다. 가진 돈을 모두 부었으니 당장 네 식구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 지겨운 병아리 감별을 계속해야 한다. 이른바 ‘투잡’이다. ▲ 모든 근로자가 자신을 일터의 주인으로 느끼는 되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농장을 마련한 제이콥은 병아리 감별을 하고 헐레벌떡 돌아와 맨손으로 땅을 일군다. 가장 먼저 필요한 건 농업용수 확보다. 가진 돈이 넉넉하다면 업자를 불러 우물을 팔 수 있겠지만 제이콥은 그럴 형편이 아니다. 포클레인도 아니고 달랑 삽 한자루 들고 우물을 파기 시작한다. 솜털 뭉치같은 병아리만 만지던 제이콥이 할 만한 일이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팔을 쓸 수 없어 혼자 옷도 못 입는다. 사투에 가깝다. 그런 아빠를 딱한 눈으로 보는 데이비드에게 제이콥이 비장하게 말한다. “공짜로 할 수 있는데 왜 돈 주고 우물을 파?” 정말 제이콥은 공짜로 우물을 판 것일까. 만약 우물을 파는 데 투입한 노동력과 시간을 다른 곳에
‘미나리’의 주인공인 병아리 감별사 제이콥의 꿈은 다소 불안해 보인다. 아칸소의 황무지에 자기의 농장을 일구고 싶어 한다. 10년간 병아리 감별사로 모은 돈을 모두 털어넣고도 모자라 은행대출까지 받는 무리를 감행해서 아칸소에 농지를 매입하고 농장주의 꿈에 부푼다. 요즘 말로 ‘영끌’ 농장이다. ▲ 제이콥의 욕구는 1단계에서 갑자기 5단계로 직행해버린 느낌이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미나리’의 주인공인 병아리 감별사 제이콥은 ‘농장 주인’을 꿈꾼다. 하지만 현실과 꿈 사이의 간극이 당황스러울 만큼 크게 느껴진다. 1950년대 미국 심리학자 매슬로(Maslow)가 발표한 ‘욕구 5단계설’은 오랫동안 설득력을 가져왔던 심리학의 고전이다. 매슬로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욕망은 5단계로 이뤄지는데, 1단계는 ‘생리적 욕구’가 지배한다. 간단히 말하면 일단 먹고살아야 하고, 비바람을 피할 집이 있어야 한다. 그 욕구가 충족되면 인간은 ‘안전 욕구’를 느낀다. 1단
영화 ‘미나리’에서 5살짜리 꼬마 데이비드의 존재감은 대단하다. 데이비드가 등장하는 분량이나 영화를 이끌어가는 역할 모두 할머니 순자 역으로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을 받은 윤여정을 능가하는 듯하다. 나이 어리다고 조연상 자격이 안 된다면 조금은 억울한 일이다. ▲ 바람은 하늘의 뜻일 뿐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데이비드의 존재감은 영화 포스터에서도 나타난다. 남녀 주연배우들을 모두 제치고 포스터에 단독으로 등장한다. 포스터에서 데이비드는 대형 성조기가 벽면을 덮은 농장 건물 배경의 풀밭 위를 나뭇가지를 들고 걸어오는 모습을 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나뭇가지다. 데이비드가 소중하게 들고 있는 구부러진 나뭇가지 하나에 영화의 핵심 주제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제이콥은 10년간 병아리 감별사로 근근이 모은 돈과 은행에서 받은 대출금을 합쳐 아칸소 외진 곳에 척박한 땅을 산다. 그렇게 농장주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향한 첫발을 내딛는다. 농장을 건설하려면 우선 물이 문제다. 우물을 파주겠다는 전문가가 두개의 나뭇가지를 들고
영화 ‘미나리’는 미국에 이민 온 한 한국인 가정을 보여주지만 이름만 ‘한국인 가정’일 뿐, 그들이 보여주는 가족관계는 전형적인 한국인 가정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 가족이 보여주는 모습은 한국적이라기보다는 ‘미국적’이고 ‘세계적’이다. ▲ 과거 욕망과 니즈의 ‘서열화’는 공동체 유지를 위한 필수적인 장치였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미나리’가 미국과 세계 각국의 평론가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아카데미상 6개 부문에 후보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그 가정의 모습이 ‘미국적’이거나 ‘세계적’이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반면 아카데미상 수상작이라는 ‘국뽕’에 불을 지피는 엄청난 ‘버프’에도 국내 흥행이 기대에 못 미쳤던 건 한국 관객들이 보기에 ‘미나리’ 가족의 모습이 왠지 ‘한국적’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끔 듣게 되는 ‘가장 한국적인
‘미나리’는 미국에 이민 간 한 한국인 가족의 이야기를 담는다. 제목은 어디에 갖다 심어놓아도 잘 자라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미나리에서 따왔다고 한다. 제목만 봐선 미나리처럼 강인한 한국인 이민 가정이 미국에서 억척스럽게 뿌리내리는 희망찬 이야기를 짐작하게 한다. ▲ 명분이 사라져도 방향이 바뀌진 않는다. 또다른 명분을 내세워 욕망을 향할 뿐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영화속에서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한국으로부터 ‘급파’된 외할머니 순자(윤여정 분)는 한국에서 미나리 씨를 가져와 딸네 부부가 아칸소주 어디쯤에서 일구는 농장 한편에 뿌려 가꾼다. 씨앗과 열매는 통상 외국여행 반입이 불가한데 이 문익점 같은 할머니는 어떻게 미나리 씨앗 한움큼을 ‘밀반입’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기는 하다. 공항 검색이 이렇게 허술해서야 미국의 생태계는 한 세대도 못 견디고 붕괴될지도 모르겠다. 순자가 밀반입한 미나리는 과연 그 이름답게 아칸소에서도 잘 자란다. 그러나 정작 제이콥과 모니카 부부의 가정생활은 그다지 순탄치도 못하고 정말 미나리처럼 미국땅에 제대로 뿌리내릴 수
정이삭 감독의 화제작 ‘미나리’는 사실 감독부터 주연배우들까지 모두 생소하다. 오히려 ‘Plan B’라는 제작사 이름이 브래드 피트 이름값에 힘입어서인지 익숙한 편이다. 영화 출연진 중에 그나마 눈에 익은 이름은 조연으로 이름을 올린 윤여정뿐이다. ▲ 영화의 배경은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바람이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하던 레이건 대통령 시대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미나리’는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 스토리로 알려진, 미국에 이민 온 한 가정의 이야기를 다룬다. 대부분 사람들의 삶이 그렇듯 그저 조금은 답답하기도 하고 잔잔하기도 하다. 호화 캐스팅에 어마어마한 물량을 투입해서 때려부수는 블록버스터 할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독립영화’ 같기도 한 ‘미나리’는 조금은 따분하기도 할 듯하다. 그럼에도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고, 윤여정에게 여우조연상까지 안겨줬다. 외국 관객들에겐 무명에 가까운 감독과 배우들이 200만 달러란 저예산으로 이뤄낸 대단한 성과다. 당연히 무엇이 수많은 영화제와
공감능력이 좋은 사람들은 상대방을 감싸고 보듬어준다. 하지만 상대방의 아픈 곳을 잘 후벼 파는 사람들도 공감능력이 뛰어나다. 남이 아파하는 걸 공감해야 남의 아픈 곳을 찌를 수 있어서다. 문제는 공감능력을 후자처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사회가 시끄러워진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어떨까. ▲ 사회가 다양화·파편화하면서 ‘공감’의 문제가 제기된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멜빈 유달(잭 니콜슨)은 ‘잘나가는’ 소설가다. 그것도 로맨스 소설 작가다. 그렇다면 유달은 당연히 뛰어난 공감능력의 소유자라야 한다. 소설 속 등장인물의 미묘한 ‘사랑’ 감정을 정교하게 다루지 못한다면 로맨스 소설 자체가 성립되지 못하고, 독자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도 없을 것이다. 사실 영화에서 멜빈 유달이 벌이는 행각을 언뜻 보면 ‘공감능력 제로’에 가깝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유달의 공감능력은 소설가답게 뛰어난 편이다. 지정석이 있는 것도 아닌 일반 식당에서 매일 자신이 앉는 자리를 고집하다 ‘자기 자리’에 앉아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