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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잉글리시 페이션트 (5)

캐서린은 알마시와의 불륜관계가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튀니지의 허름한 천막 극장에서 알마시와 만나 이별을 통보한다. 도덕적 죄책감도 아니고 알마시에게 정이 떨어져서도 아니다. 결국은 남편이 눈치를 챌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다.

 

 

알마시는 캐서린의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캐서린은 도망치듯 극장을 빠져나온다. ‘어둠’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광명’의 세계로 빠져나간다. 어둠 속에 홀로 남은 알마시의 표정이 참담하다.

알마시가 캐서린으로부터 이별통보를 받은 날 저녁 호텔에서 ‘국제 사막클럽’의 연회가 열린다. 클리프턴을 비롯한 사막 탐사가들이 모두 멋진 연회복장으로 참석해 우아한 유럽식 파티를 즐기고 있다. 알마시는 극장에서 캐서린과 ‘접선’하느라 지각 참석한다. 캐서린에게 이별통보를 받고 어디서 ‘홧술’을 몇잔 했는지 이미 취한 듯하다.

알마시는 대뜸 자신도 속해 있는 ‘국제 사막클럽’이란 단체 명칭에서 ‘국제(international)’란 단어에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우아하게 차려입은 ‘국제 사막클럽’ 회원들을 향해 “세상에 국제라는 말처럼 더럽고 추악한 것은 없다”고 이죽거린다. 개별 국가는 자유롭지만 국가끼리 엮이고 관계를 맺으면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사라진다.

영원한 자유인이기를 갈망하는 알마시는 ‘국제 사막클럽’에 가입해 영국 탐사가들과 함께 하면서 사막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이 훼손됐음을 느낀다. 더구나 헝가리 출신의 알마시는 어제까진 영국인의 동지였지만 독일과의 전쟁이 임박한 지금은 독일의 스파이로 의심받는다. 19세기 중반 영국 제국주의 최전성기의 총리를 지냈던 팔머스턴(Palmerston) 경(卿)은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 이익만이 영원하다’는 관계의 명언을 남긴다. 

자유인 알마시가 보기에는 영국의 국민적 영웅이라는 팔머스턴 경 자체가 더럽고 추악함 자체일 듯하다. 알마시 입장에서 ‘관계’란 본질적으로 그렇듯 난잡한 것일 뿐이다. 알마시는 ‘국제 사막클럽’의 연회장에서 국제관계가 그렇듯 우리도 아무나 붙잡고 상대를 바꿔가면서 춤을 추자고 제안한다. 모든 나라가 아무나 돌아가면서 붙잡고 춤을 추는데 나는 왜 캐서린과 그러면 안 되냐고 세상을 조롱하는 듯하다. 난동에 가까운 진상을 떤다.

알마시의 ‘진상 짓’은 아마도 자신과 캐서린의 ‘억눌린 관계’가 폭발했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캐서린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캐서린에게 구속당하고 자기 본연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캐서린은 팔머스턴 경의 명언처럼 행동한다. 남편인 클리프턴과의 동맹을 깨고 자신과 동맹을 맺었다가, 이젠 다시 자신과의 동맹을 깨고 남편과 동맹을 맺겠다고 한다. 이런 ‘관계’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는 알마시의 조국 헝가리나 자신의 처지나 서글프다.
 

 

알마시는 자신을 구속하고 자신을 사라지게 만드는 모든 ‘관계’에 저주를 퍼붓는다. 캐서린과 클리프턴이 맺고 있는 부부라는 ‘관계’도 우스꽝스럽고 화가 난다. 캐서린과 클리프턴의 부부라는 ‘관계’가 또한 자신의 자유를 박탈한다. 그러면서도 캐서린과의 ‘관계’에 매달리고 있는 자신을 향해 분노를 표출한다. 알마시에게 캐서린과의 ‘관계’는 천국이자 지옥이다.

‘관계’란 그런 것이다. 어느 여론조사 설문 결과가 흥미롭다. 응답자 70%가량이 자신이 가장 기쁨을 느끼는 것은 ‘관계’에서 온다고 답한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응답자 70%가량이 자신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 역시 ‘관계’ 때문이라고 답한다. ‘관계’는 모든 사람에게 천국이자 지옥인 셈이다.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고 다만 영원한 이익만 존재하는 팔머스턴 식 ‘관계’란 꿀 빨러 들어갔다가 꿀에 빠져 죽는 개미지옥과 같은 것이다.

집권여당의 당대표 선거를 앞두고 팔머스턴 경의 명언이 다시금 죽지 않는 생명력을 발휘한다. 그 바닥에도 영원한 동지, 영원한 적이 없다. 다만 이익만이 존재한다. ‘당권’이란 이익 앞에 어제의 동지가 적이 되고, 어제의 적이 동지가 된다. 오늘의 동지와 적이 며칠 후에는 또 어떤 ‘관계’가 될지 아무도 모르고 아마 본인들도 모를 듯하다. ‘관계’란 본래 이렇게 민망하고 추악한 것이니 닥치는 대로 아무나 붙잡고 춤추자고 키득대는 알마시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주인공인 알마시의 모습과 집권당 대표 경선 모습을 보면서 문득 헤밍웨이가 떠오른다. 알마시와 헤밍웨이는 참으로 닮은 구석이 많다. 둘은 대단한 마초이자 자유인이면서 허무주의자이기도 했다. 결혼도 할리우드 스타처럼 4번이나 하고 종국에는 모든 것이 허무해서 권총자살한 인물이다. 

그의 단편 소설 「여자 없는 남자(Men Without Women)」에서 헤밍웨이는 ‘관계의 비극’을 술회한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무엇인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특별함도 잊어버리는 일이다.”

집권당 당대표 선거에 나온 내로라하는 분들이 영원한 이익만 존재하는 ‘관계’ 속에 얽히고설키다 보니 그분들의 본연의 모습이 무엇인지, 어떤 특별함이 있는 분들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아마 본인들도 고통스럽겠지만 보는 사람들도 고통스럽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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