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여년 전 간첩으로 몰려 투옥까지 됐던 교직원이 어둠에서 벗어날 길이 열렸다. 이미 사망한 고인이 됐지만 진실화해위가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며 법원의 재심을 권고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지난 14일 열린 제52차 위원회에서 1970년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간첩 조작사건'에 대해 진실규명을 결정하고 재심을 권고했다고 22일 밝혔다.
대상은 1970년대 제주도의 한 중학교 서무주임으로 일하던 교사 고(故) 한모 씨가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과 연계된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부당하게 처벌받은 사건이다.
당시 한씨는 교장 관사 신축 관련업무를 보조하던 중 제주출신 일본 거주인 3명이 조총련 관계자라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면서 서신을 주고받고, 교장관사 신축비용 명목으로 63만원을 받은 혐의(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로 기소됐다.
한씨는 1971년 11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자격정지 3년을 확정받았다. 공동피고인으로 같은 중학교 교장이던 이모씨도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았다. 한씨는 이에 불복, 항고와 상고를 했으나 기각됐다.
진실화해위는 이 사건에 대해 2021년 6월 3일 조사개시 결정을 내리고 관련 수사와 재판기록, 신청인과 참고인 진술 등을 통해 진실규명을 위한 조사를 벌였다.
진실화해위 조사에 따르면 한씨는 1970년 9월29일 구속돼 같은해 10월8일 발부된 구속영장에 의해 다음날인 9일 서울중부경찰서에 인치되기 전까지 불법감금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당시 경찰은 한씨와 이씨를 임의동행 형태로 불법 연행해 제주에서 서울로 이동한 후 호텔, 경찰서 취조실, 여관 등을 옮겨 다니며 전기기구로 고문해 허위 자백을 받아낸 것으로 추정됐다.
대법원은 1985년 7월 ‘임의동행 형태로 연행했다 하더라도 조사 후 귀가시키지 않고 그의 의사에 반해 경찰서 조사실 또는 보호실 등에 계속 유치함으로써 신체의 자유를 속박했다면 구금에 해당된다’고 결정하기도 했다.

특히 한씨에 대해 연행 이후부터 피의자 신문조서 2회가 작성된 1970년 10월16일까지 당시 수사관들의 전기기구를 이용한 고문과 가혹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한씨와 이씨의 피의자 신문조서나 검찰사건 송치기록 등에서 '신체 이상 유무’에 대해 두 사람이 “신체에 아무런 이상이 없다”라고 진술이 돼 있으나 이는 수사관들이 가혹행위를 숨기고 책임모면을 위한 근거를 남기기 위한 것으로 판단했다.
공동피고인인 교장 이씨는 항소이유서에서 1970년 9월 28일부터 전기기구를 이용한 가혹행위가 시작돼 10월 6일경 새벽에는 정신이 마비되는 등의 피해를 언급했다.
한씨의 직장동료는 진실화해위에 "한씨에게서 '워낙 고문이 심해서 거짓말이라도 해서 나오지 않으면 죽었을 것'이라며 견디기 힘든 고문을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진실화해위는 서울 모 경찰서 담당 수사관들이 한씨와 이씨가 반국가 구성원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것으로 보고, 국가보안법 위반과 반공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기 위해 진술을 강요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압수조서도 일부 허위기재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이 1970년 10월 6일자에 작성한 압수조서에는 '피의자 한씨를 취조중 제주도에서 연행될 당시 모 중학교에 보관중인 서신철을 압수했다'고 돼 있다. 하지만 한씨는 그 이전인 1969년 9월 1일부터 제주도내 다른 학교에 근무중이었음이 확인됐다.
한씨와 연락을 주고받은 인물들 또한 재일본대한민국 민단 소속이거나 조총련과 관계를 끊은 이들이었다.
당시 경찰도 뒤늦게 이를 확인하고서 1심 판결 약 3주 전인 1971년 2월4일 검찰에 사실조사 결과보고 문건을 보냈으나 법원 판결은 바뀌지 않았다. 한씨는 1989년 사망했다.
진실화해위는 "국가가 한씨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불법체포·가혹행위 및 강요는 형사소송법상 재심사유에 해당한다"며 한씨와 그 가족에 대해 사과하고 확정판결에 대해 재심 등의 조치를 하라고 권고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독립된 국가 조사기관이다. 항일독립운동과 해외동포사,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 및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사건, 권위주의 통치시기 인권침해 사건, 3·15의거 사건, 그밖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 등을 조사한 후 국가에 후속 조치를 권고하고 있다. [제이누리=이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