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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人터뷰] 박찬식 제주지사 예비후보 "국제자유도시 20년, 이제 멈추자"
"패러다임 전환.도민사회 합의 끌어낼 역할 필요 ... 살아온 길이 적임자 증명"

 

'모든 일은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다. 혹자는 삼세번에 득한다고도 말한다. 뭔가를 하려면 적어도 세번은 도전해야 한다는 선조의 격려가 담겼다. 시민정치연합 제주가치의 박찬식 공동대표는 지역사회에서 시민 활동가로 더 알려져있다. 제주 제2공항 반대진영의 핵심적 인물로 꼽힌다. 확실히 그는 정치 신예다. 하지만 생애 모든 선거를 따지자면 첫 번째 출마는 아니다. 박찬식(59) 무소속 제주도지사 예비후보.  

 

13살, 생애 첫 번째 출마 ... "촌놈이 출세했다"

 

서귀포 중문면 월평리(현 서귀포시 월평동)에서 나고 자란 그는 어릴 적부터 마을에서 자자한 ‘공부 잘하는 아이’였다. 마을 어른들이 '촌에서 썩히기 아까운 인재'로 여겨 어머니께 제주시로 ‘유학’을 보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할 정도였다. 그가 제주시에 첫 발을 들인 때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1974년. 제주교대 부속국민학교가 처음으로 문을 연 해였다.

 

당시 교육대학의 부속학교는 돈 있는 집안의 아이가 간다는 인식이 강했다. ‘귀족학교’라는 별칭도 있었다. 그는 제주시로 온 첫 해를 “촌에서 와서 제주시 아이들에게 기가 눌려 있었다”고 회상했다.

 

첫 1년은 갑자기 바뀐 생활을 꾸리는데 바빴다. 그는 자취를 했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동네 선배가 그의 식구였다. 일찍 등교하는 형이 아침을 차려놓고 등교하면 일찍 하교하는 그가 장도 보고 빨래도 했다. 힘들지는 않았다. 고향에서도 늦게까지 일하시는 어머니, 아버지를 밥을 해놓고 기다리곤 했다. 그래서 ‘유학’이 결정됐을 때 적어도 밥 걱정은 하지 않았다. 

 

유학 2년차, 그의 인생에 기적이 일어났다. 월평리 ‘촌놈’이 제주시 아이들을 제치고 전교 어린이회장에 당선된 것이다. 그는 “공부 잘하면 기본으로 반은 먹고 들어갔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당시 어린이회장은 직선제였다. 전교 아이들이 직접 그를 뽑은 것이다. 먼 서귀포에서 제주시로 와 가사를 돌보면서도 학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또래 아이들은 그런 범상치 않은 책임감과 든든함도 함께 느끼지 않았을까.

 

하지만 촌놈의 기적은 한 학기도 가지 못했다. 그가 어린이 회장에 당선된 것은 6학년 1학기, 1975년. 그는 1학기가 다 지나기 전 “어린이 회장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선생님이 그래야 한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했다. 같은 해 2학기부터는 다른 아이가 어린이 회장을 맡았다. 그 친구와는 60세가 다 된 지금도 친하게 지낸다. 하지만 촌 아이가 시내 부자학교에서 회장으로 뽑혔다는 당찬 뿌듯함이 침식됐던 그 순간은 아직까지 안타깝다.

 

실상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년쯤 지난 대학시절이었다. 현대사를 깊이 공부하면서 알았다. 13살 아이에게서 어린이 회장 자리를 빼앗은 것은 당시 정권이라고. 그가 당선됐던 1975년, 박정희 군사정권은 그해 5월3일 긴급조치 9호를 발령, 모든 학교의 학생회를 임명제로 바꿔버렸다. 명칭도 학도호국단으로 바꿨다.

 

그의 첫 번째 선거였다.

 

뜨거웠던 1982년, 전국 수재들이 모인 서울대에서 광주의 참상을 알게 되다

 

시간이 흘러 그는 1982학년도 대입 학력고사에서 전국 7등이라는 명예를 달고 서울로 입성했다. 당시 전국 수석이었던 원희룡 전 제주도지사와 나란히 서울대 법대로 진학해 제주의 자랑이 됐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마주한 서울풍경은 살벌했다. 광주민중항쟁으로부터 2년 뒤였다. 교내엔 경찰이 쫙 깔려있었다. 어디를 가든 꼼짝달싹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교내를 걷던 4월 어느 날, 누군가가 “학우야!”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유인물이 뿌려졌다. 학생들이 그곳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교내에 깔린 경찰이 일제히 학생들을 덮쳤다. 학우들은 끌려갔다. 그는 난생 처음 본 광경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5월이 되니 암암리에 유인물이 돌아다녔다. 교내에는 사복 경찰이, 바깥에는 전투복을 입은 경찰이 있었다. 신문에 유인물을 숨기곤 덜덜 떨면서 읽었다. 

 

광주의 참상은 큰 충격이었다. 그는 제주도 출신 선배들이 만든 학내 써클인 ‘제주도문제연구회’에서 근현대사 등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학년 2학기는 번민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법대 출신들은 선택지가 너무 분명했다. 고시를 보든가, 포기하든가. 학생운동을 하면서 고시를 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지사는 먼저 운동권에 뛰어들어 그에 앞서 사법고시를 포기한 상태였다. 원 전 지사는 고향 친구인 그에게 “너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2학년이 되던 해, 그는 ‘고시를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 군부독재 하에서 고시를 보고 출세를 하는 것을 양심상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학생운동의 길을 택했다. 시위에 참여하고 선.후배와 공부하면서 사회를 알아갔다. 

 

이듬해 총학생회가 부활했다. 그는 총학생회장 선거에 나섰다. 학생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고향의 아버지가 그의 소식을 듣고는 식음을 전폐하셨다.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면 이제 집에서 그를 놔줄지도 몰랐다. 그는 정권에 의해 어린이회장에서 물러난 지 딱 10년 만에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다시 출사표를 냈다.

 

생애 두 번째 선거는 아쉽게도 2위 득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훗날 국회의원이 되는 김민석 의원이 그 시절 서울대 총학생회장 당선인이다. 그래도 아랑곳 하지 않고 학생운동을 이어갔다. 그는 선거가 있었던 그해 여름, 시위를 주도했다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이하 집시법) 혐의로 구속됐다. 파란만장한 1985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듬해 출소한 그는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대구에 있는 한 공장에 취업한 1987년은 노동자 대투쟁이 벌어졌던 해이기도 했다. 그 역시 파업에 동참하고 노동자의 권익을 찾는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고 분위기가 일변했다. 반년 만에 해고된 그는 노동조합을 만드는 이를 지원하고 상담해주는 대구노동자협의회로 들어갔다. 교육서클부장으로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활동도 이어갔다. 아내도 그때 만났다.

 

그 무렵 제주에서는 4.3의 본격적인 진상규명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항쟁의 ‘호헌철폐’와 ‘독재타도’ 구호는 4‧3이라는 금기의 벽을 부쉈다. 추모와 진상 규명의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1989년 제주4·3연구소가 발족됐다. 

 

그는 1990년 서울로 돌아갔다. 민중당(民衆黨) 창설로 주요 상근 실무자가 무더기로 빠져나간 전국노동조합협의회를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교육선전부장, 조직부장, 정책실 차장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1995년에는 한국통신 노조 민주화 투쟁도 지원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노동운동’이라는 기관지에 쓴 글들이 빌미가 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다시 구속됐다. 이적표현물이라며 징역 4년이 구형됐다. 하지만 김영삼 말기에 불었던 노사 타협 분위기 속에서 6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제주4.3 50주년을 2년 앞둔 때였다.

 

서울대 학내 써클 ‘제주도문제연구회’에서 회장직을 맡기도 했던 그는 종종 제주로 내려와 농촌활동을 하고 지역조사 운동을 하곤 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탑동 매립 반대운동으로 서울로 상경한 제주해녀들을 지원하기도 했다. 고향 제주는 늘 마음 속에 있었다. 그간 노동운동 현장에서 활동하느라 잘 챙기지 못한 것이 걸렸다. 

 

 

학생운동에서 노동운동, 그리고 제주 4.3과 제2공항 ...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광정의 여정

 

50주년을 1년 앞둔 1997년, 제주 시민사회는 4.3 전국화를 위한 4.3 50주년 사업을 본격적으로 펼쳤다. 4.3 진상조사 등에 대해 정치적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면 결국 중앙에서 ‘이슈화’가 돼야 한다. 그해 4월 ‘제주4·3 제50주년 기념사업추진 범국민위원회’도 결성됐다. 당시 제주4·3연구소는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가 사회운동을 하면서 얻은 네트워크는 4·3전국화에 큰 불씨가 됐다.

 

그가 제주4.3 50주년 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을 맡았던 2003년까지 벅찬 결실이 많았다. 1999년 12월에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약 2년 반 후인 2003년 10월 4‧3 진상보고서를 공식 발표했다. 그는 해당 보고서에 대한 평가 과정에도 참여했다. 약 7년을 4.3 전국화에 매진한 격이다.

 

그 무렵 몹시 지쳐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선 뒤 민주노동연구소 소장을 겸하면서 당시로서는 희귀한 사이버대학도 동시에 이끌던 때였다. 전국의 노조 간부나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위한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이었다. 시민단체 교육으로는 처음으로 3년 과정을 만든 과감한 시도였다. 온라인 강좌와 전국 각 지역에서 이뤄지는 오프라인 강좌가 병행됐다. 

 

한 달에 1~2번이었던 오프라인 강의는 수강생이 늘어나면서 월 20~30회까지 늘어났다. 서울, 대구, 부산 등을 다니느라 3년간 집에 오래 머물던 날이 없었다. 당시 8살쯤이던 딸의 가족에 대한 단상을 듣고 코 끝이 시렸다. “우리 아빠는 한 달에 한 번씩 집에 들어와요” 그도 지쳤지만 가족들도 지쳤다. 재충전이 필요했다. 어딘가 멀리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있으면 고생하는 동료들이 바로 옆에 보이는데 혼자 쉬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가 영국으로 가게 된 배경이다. 

 

그가 영국에서 보낸 5년은 자녀들의 성장기이기도 했다. 처음 출국할 당시는 큰 아이가 막 중학교에 들어갔었고, 작은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쯤이었다. 아이들의 청소년기를 가족끼리 똘똘 뭉쳐 보낼 수 있었다. 그 시간은 지금의 끈끈한 가족애의 밑천이 됐다. 그간 활동을 돌아보고 공부를 하면서 생각의 깊이와 폭을 넓히는 기회도 됐다. 그는 5년간 요크대학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고 2011년 귀국했다.

 

 

원래 계획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향후 몇 년간 공부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귀국 후 들른 고향에서 본 광경이 그의 앞날을 바꿨다. 해군기지 공사가 이뤄지고 있던 서귀포시 강정마을 중덕 구럼비 해안가에 전국 각지에서 온 시민단체들의 천막이 세워져 있던 때였다. 외돌개에서 올레길을 타고 월평리 집까지 걷다가 현장을 목격했다. 뉴스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현장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를 비롯한 재외도민들은 그해 11월 ‘강정을 사랑하는 육지사는 제주사름’을 결성해 강정주민들을 지지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4년 만인 2015년 11월, 제주 제2공항의 입지가 발표됐다. 그는 발표 직후 강정을 포함한 제주 전역이 진정한 평화의 섬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뜻을 담아 새롭게 명칭을 바꾼 ‘육지사는 제주사름’의 대표로 선출됐다. 

 

제2공항 반대 투쟁의 선봉장에 서고 보니 4.3 70주년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4.3 전국화가 본격화됐던 50주년에 못다한 일이 많았다. 배보상 문제, 수형인들의 명예회복 등 해야할 일이 산적해 있었다. 그는 2018년 제주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 운영위원장 직책을 맡았다. 모든 것을 다 바쳐 4.3전국화의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야 했다.

 

제주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는 그해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라는 구호와 함께 서울의 중심 광화문 광장에서 제주 4·3사건의 완전한 해결을 요구하는 한목소리를 냈다. 아울러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분향소를 전국 20곳에 설치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제주 4·3 이젠 우리의 역사’라는 특별전을 갖고 제주의 아픈 역사를 알렸다. 

 

그가 본격적으로 제2공항 반대 운동의 최전선에 선 것은 4.3 70주년 사업이 마무리 될 무렵이었다. 검토위원으로서 제2공항 입지선정 타당성 재조사 검토위원회에 참여했다. 회의를 거듭할수록 답답했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던져서 싸워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는 제2공항 비상도민회의 상황실장을 맡으면서 제2공항 투쟁의 정면에 섰다. 

 

일명 ‘맞짱토론’이라고 알려진 공식토론에서 원희룡 전 지사와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2019년 제주도와 제주 제2공항 성산읍 반대대책위원회는 공개방송 토론회를 2차례 하기로 최종 합의했다. 그는 같은해 8월28일 1차 공개방송 토론회에서 제주 제2공항 강행저지 비상도민회의 상황실장으로서 반대 측 토론자로 나섰다. 이어진 2차 공개방송토론회에서는 고향 친구인 원희룡 전 지사와 1대 1 토론을 벌였다.

 

양측은 제주 항공 수요조사 용역 부실 문제와 제주공항 인프라 확충 문제 등을 놓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설전을 벌였다. 박 예비후보는 토론 과정에서 환경 수용력 문제와 입지선정 과정에서의 절차적 정당성 부족, 미래 예측수요에 대비한 제주공항의 활용 방안 등을 부각했다. 그날 토론은 양측의 첨예한 입장차를 확인하고 끝났다. 30여년 전 사법고시 포기를 고민하는 그에게 “너는 어떻게 할거냐”고 묻던 오랜 친구는 없었다.

 

 

이듬해 말 제주도·제주도의회의 제주 제2공항 도민 여론조사 합의가 이뤄졌다. 다음해에는 제주 제2공항 도민 여론조사가 본격 이뤄졌다. 반대가 47.0%(한국갤럽)·51.1%(엠브레인퍼블릭)로 찬성(한국갤럽 44.1%, 엠브레인퍼블릭 43.8%)을 앞섰다. 

 

하지만 성산읍 주민을 대상으로 진행한 별도 조사에서는 찬성이 64.9%(한국갤럽)·65.6%(엠브레인퍼블릭)로 반대(한국갤럽 31.4%, 엠브레인퍼블릭 33.0%)를 오차범위(각각 ±4.4% 포인트, ±4.38% 포인트) 밖에서 앞섰다.

 

제주도는 여론조사 결과를 두고 두 쪽으로 갈라졌다. 원 전 지사가 “제주의 미래와 다음 세대의 미래를 위해 엄숙한 책임감을 가지고 제2공항을 추진해나가겠다“고 선언하면서 제주도의 공식 추진입장이 확정됐다. 

 

같은해 환경부는 국토부가 2019년 9월 제출한 제주 제2공항 전략환경영향평가에 대해 최종 반려 결정을 내렸다. 전략환경영향평가에 대한 환경부 반려사유에 대한 보완 가능성을 판단하기 위한 검토연구 용역은 2차례 유찰 끝에 지난해 12월에야 수의계약이 체결됐다.

 

수행기간은 착수일로부터 7개월이다. 따라서 용역 결과는 계약기간 등을 고려하면 적어도 오는 7월 이후에나 나올 것으로 보인다. 제주의 새로운 미래를 이끌 새로운 도지사가 나온 직후다.

 

그가 세 번째 선거에 도전하기까지의 이야기다. 

 

“지난 20년간 제주는 국제자유도시라는 이름 아래 개발과 성장 일변도의 길을 달려왔습니다. 이제 여기서 멈추고 돌아봐야 합니다. 더 이상 난개발과 투기의 광풍에 아름다운 제주의 자연과 공동체, 사람이 망가지고 제주다움이 사라지는 현실을 방관할 수 없습니다.

 

제주의 환경수용력을 점검하고 제주 강점과 가치에 기반한 제주다운 미래 비전을 세워야 합니다. 제가 살아온 삶이 현재 제주도가 필요로 하고 있는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주의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토로하고 있는 도민들의 마음을 모아 들불처럼 타오르게 해 제주 정치의 큰 변화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담당하겠습니다"

 

다음은 그와의 인터뷰 전문. 

 

▷ 제주에 꼭 필요한 도지사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지금 제주도는 국제자유도시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걸어왔던 성장만을 위한 길을 계속 갈 수 없는 위기의 상황이라고 본다. 현재 제주에서는 환경, 불평등, 갈등, 기후위기 문제 등 수많은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이제는 개발보다는 보전으로, 성장보다는 삶의 질으로, 관광에서도 양적성장보다는 질적성장으로 전체적인 패러다임을 전환해야할 시기라고 본다. 그런 철학을 확고하게 가진 도지사여야 한다.

 

한편으로는 도지사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은 안 된다. 각종 개발사업, 축산 등 지역현안은 첨예하게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이다. 도지사가 도민사회의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야 하는 상황이다. 사회적 공론화와 토론을 통해 어렵지만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역할이 필요하다"

 

▷ 6.1 제주도지사 선거 출마 배경과 이유

 

"도민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도민과 괴리된 정치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관광객이 1600만명 가까이로 절정에 이른 2016년경부터 도민사회 저변에 변화가 시작됐다. 쓰레기와 하수 문제, 교통체증 등 생활환경 악화, 부동산 가격 폭등 등 여러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다. 과잉관광과 난개발, 제주의 환경수용력 등이 주요이슈로 등장했다.

 

그런데 제2공항이나 송악산개발, 비자림로 확장, 동물테마파크 등 현안에 대해 주요 정당의 도지사 후보든 국회의원 후보든 반대하는 유력 정치인은 아무도 없었다. 개발지상주의 관성에다 지역 사회를 주도해온 토건세력과의 유착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성의 정치세력과 유력정치인들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제주의 방향전환을 위해서는 새로운 세력과 인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시민정치연대 제주가치 창립에 참여했고, 출마를 결심하게 됐다"

 

▷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치러지는 지방선거다. 제주 제2공항 건설이 속도를 낼 것으로 전망되는데...

 

"제2공항은 이미 제주도민들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제2공항을 추진하면 엄청난 갈등을 초래할 수 밖에 없다. 해당 공약은 철회돼야 한다고 본다. 윤석열 당선인이 대통령 당선은 됐지만 실제로 제주도에서는 10% 정도로 (이재명 후보에게) 졌다. 제주에서의 민심을 존중해야한다고 생각한다"

 

▷ 당선된다면 제주도에서 가장 먼저 펼쳐야할 시급한 과제나 역점사업을 3가지 꼽는다면?

 

"대선 과정에서도 공감대가 있었던 입도세와 환경보전세 도입이 우선적으로 신속하게 추진됐으면 한다. 그리고 제2공항을 매듭을 짓고 현공항의 혼잡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이 마련돼야 한다. 제주도의 환경수용력, 제주도가 얼마나 많은 관광객을 수용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조사와 사회적 논의 및 합의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 제주도지사의 적임자로 생각하는 자신만의 경쟁력은?

 

"제주도는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 30년간 국제자유도시로서 걸어왔던 개발과 성장만을 우선시했던 방향에서 전환을 해야 한다. 저는 일관되게 그런 입장을 견지해왔다. 패러다임 전환을 이뤄낼 수 있는 확고한 철학과 역량을 갖췄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저는 4.3과 제2공항 관련 활동들을 하면서 도민 공론화까지 만들어내는 등 다양한 의견을 조율하고 합의를 끌어내는 과정도 겪었다. 패러다임 전환을 하면서도 사회적 공론화와 토론을 통해 도민사회의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적합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가진 역량이나 철학 등이 제주도에 쓰여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 필승 전략이 있나?

 

"지난 2018년 지방선거에서도 20% 정도의 도민이 진보정당 도의원 비례투표에 투표했다. 제주도에서는 20% 전후의 진보세력에 대한 지지세력이 있다고 본다. 과거에는 개발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으로 높았으나 지난 4~5년 사이 제주도의 쓰레기 문제, 오폐수 문제, 교통문제 등이 불거지면서 제주도가 이제는 보전 중심으로 가야한다는 도민들의 의견이 많아지고 있다. 이런 지지 세력을 결집할 수 있다면 충분히 다수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제주도민들께 드리는 각오 한 말씀

 

"제주도는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세계지질공원 및 생물권보전지역, 람사르습지도시에 지정되는 등 자연환경의 국제적인 인증과 관련해 4개의 타이틀을 갖고 있다. 이는 전세계에서 제주도가 유일하다. 그만큼 제주도는 특별한 가치를 갖고 있다. 그 가치를 우리가 잘 보존하고 가꾸고 활용한다면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보다 제주의 가치를 기반으로 제주의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데 과감하게 함께 나서자고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런 변화를 위해서 저의 모든 역량과 열정을 다하겠다." [제이누리=이주영 기자]

 

☞박찬식은?

 

학력

 

하원초등학교
제주교대 부속초등학교 졸업
제주제일중학교 졸업
오현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사법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
영국 요크대학교 정치학 박사

 

주요경력

 

전)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전)제주제2공항강행저지비상도민회의 상임공동대표
전)제주4.3제70주년범국민위원회 운영위원장
전)제주4.3평화재단 이사
전)제주4.3진상규명·명예회복범국민위원회(50주년)사무처장
전)성공회대학교, 충북대학교 외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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