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주년을 맞은 <제이누리>가 또 새로운 연재물을 시작합니다. 흑돌과 백돌의 만들어낸 제주의 역사입니다. [제주바둑의 향기]는 바둑돌을 놓고 명멸한 인생사와 제주인들의 삶의 애환을 담아냅니다. 30여년 언론계에 몸을 담으며 그들의 인생사를 추적했던 장승홍 조선일보 전 사회부 차장이 제주바둑협회의 도움을 얻어 그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고수(高手)의 세계와 더불어 바둑판 세상에서 만나는 인간사 진리를 엿볼 수 있습니다. 많은 애독바랍니다/ 편집자 주 |
제주가 낳은 강동윤(姜東潤, 89년생)은 세계바둑의 제왕(帝王)을 했고, 여류 기사 고주연(高周延, 89년생)은 유럽 바둑붐을 위한 바둑 사절(使節)을 맡았었으며, 오정아(吳政娥, 93년생)는 세계바둑 여왕을 꿈꾸고 있다.
천재소년 강동윤은 2009년 세계바둑 1위라는 이세돌 9단을 꺾어 제13기 박카스배 천원전 우승을 거머쥔 뒤 대망의 제22기 후지쯔배에서 이창호 9단을 이겨 우승의 대업을 이뤄냈다. 그에게 따라붙었던 ‘국내용’이란 꼬리표를 뗀 세계대회 첫 우승이었다. 이창호의 키즈가 이창호를 꺾은 승리로, 제주인의 큰 영광이었다.
2009년 7월 강동윤의 세계 제왕 등극 때 제주에서 열기(熱氣)는 뜨겁지 않았다.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출신인 그에게 겨우 2009년 ‘제주시를 빛낸 시민’에 선정될 정도 일뿐이었다. 그의 아버지 강상훈은 제주명문고 제일고 17회 졸업생으로 서울에서 회계사를 하고 있다. 제주에서 청소년들의 바둑열기가 치솟고 강동윤의 키즈가 많아야 했었다. 제주 바둑계는 물론 제주도와 사회적인 관심이 부족했다. 제주인 프로 골퍼 양용은이 같은 해인 2009년 미국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했을 때와 비교하면 그 열기가 부족함을 알 수 있다. 제주인에게서 가장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로 ‘제주인의 영웅’을 키우지 않는다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병폐를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제주인이 모두 곰씹어 반성할 일이다.
강동윤은 5살 때 바둑을 두기 시작하여 초등교 3년 때 아마유단자대회에서 우승을 하면서 바둑의 길로 나섰다. 그는 공부에 전념키 위해 바둑을 그만 둘 마지막 생각으로 출전했다가 우승을 한 것. 초교 5년 때 권갑용 도장을 집에서 다니며 공부를 접고 바둑에 전념한 셈이다. 그래서 학력은 초등교 졸업이다. 2002년 5월에 입단했다. 입단 3년 만에 제5기 오스람코리아배 신예연승최강전에서 우승한데 이어 제9기 SK가스배 신예프로 10걸전에서도 연거푸 우승했다. 2006년 바둑리그에서 연승상과 월간 MVP상을 받았다.
2007년 바둑리그 다승왕에 이어 7월 제4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에서 그의 어린 시절의 우상 이창호를 꺾으면서 스타덤에 올랐고, 9월 제7기 오스람배에서도 우승했다. 2009년의 세계기전 후지쯔배 우승에 이어 2010년 중국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출전, 단체전에서 중국을 꺾어 금메달을 따냈다. 2011년 한국바둑리그에서 그의 소속팀 포스코를 우승으로 이끌었고 정규리그MVP, 1지명 랭킹상, 다승상등 3관왕이 됐다. 올 들어서도 제8기 원익배 십단전에서 박영훈을 2대 0으로 꺾어 우승, 개인통산 타이틀 7개를 획득했다.
강동윤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바둑의 매력에 대해 “바둑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라고 밝혔다. 그는 바둑을 ‘자신의 분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바둑은 나와 항상 옆에 있고 24시간 바둑을 생각하고 바둑은 나랑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그의 바둑을 일러 ‘강동윤 바둑은 상투적이지 않다’, 두터운 바둑을 두다가도 기회가 있으면 전투모드로 간다고 말하며 그를 ‘속기의 제왕’이라고도 부른다. 실전에서 익힌 공격형으로 짐작하기 어려운 자유로운 행마(行馬)로 ‘외계인’이란 별명도 갖고 있다.
강동윤은 올해 10월 4일 현재 한국기원의 바둑 랭킹이 6위이다. 62전 46승 16패, 승률 74%이다. 2008년 통합 랭킹이 4위, 2009년 5위에 비해 한두 단계 낮지만 이 랭킹은 전혀 뒤지지 않는 실력이다. 그의 괴력(怪力)이 발휘되어 세계 제패의 날을 기대할 수 있다. 이때는 제주인 모두가 제주의 큰 영예로 여겨 바둑 열기가 크게 달아오르길 기대한다.
강동윤과 동갑내기 고주연도 6살 때 허장회 바둑교실에 입문, 김종수 6단의 문하에서 입단을 준비해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2006년에 입단했다. 입단 전인 2002년 7월 국내 유일의 아마추어 바둑대회 파크랜드배 한국남녀 아마페어바둑대회에서 고근태와 함께 출전, 조민수‧송예슬 조를 누르고 우승했다. 2005년 국무총리배에서는 준우승을 했다.
고주연은 입단 첫해인 2006년 제2기 원익배 십단전 본선에 진출했다. 2007년 2단으로 승단했고 제1회 지지옥션배 본선, 제9기 여류명인전 본선에 각각 진출했다. 2008년 제3기 부안여류기성존 본선, 2009년에 제11기 STX배 여류명인전에 각각 본선에 진출했다.
고주연은 2010년 6월 한국바둑 세계화 사업의 하나로 김성래 4단, 이영신 4단과 함께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떠났다. 헝가리는 중부 유럽에 위치, 동‧서 유럽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유럽 각국을 순회하며 한국바둑의 사절로 한국바둑을 보급했다. 2년 만에 귀국한 그녀는 제11기 원익배 여류 10단전에서 본선 8강전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녀는 1971년 충암 바둑 장학생 1호인 허장회 9단의 바둑도장에 입문했기 때문에 ‘충암 바둑도장 사단’의 일원으로 활약한다. 그녀의 바둑은 ‘한번 장악한 우세를 끝까지 놓치지 않는다’라는 평을 받고 있다.
고주연의 외할아버지는 ‘제주 수산물 수출의 대부’로 일컫는 (주)진양수산의 김수진(金洙珍, 33년생, 제주시 건입동) 회장이다. 바둑을 좋아하는 애기가(愛棋家) 김 회장의 후원과 제주은행 지점장 출신 고윤석(高崙碩, 59년생), 김이경(金利璟, 63년생) 부모의 보살핌 속에 자랐다. 세명컴퓨터고교를 졸업했다.
새로운 여류 신예 강자로 부상한 오정아는 서귀포시 성산읍 신풍리 출신이다. 그녀의 기재(棋才)를 발견한 김기형(金起亨, 53년생) 전 제주도바둑협회장(경림산업 대표)이 제주도의 명예기사 장수영(張秀英, 52년생) 9단 도장에 그녀를 보내 10년 가까이 뒷바라지 하여 오늘의 그녀가 탄생했다. 오정아가 초등교 3년 때 장수영 도장에 나갔고 입단을 앞둬 2년 연속 반집으로 져 입단이 늦춰지는 불운도 겪었다.
오정아는 2011년 연구생 내신 1위로 입단하여 입단 첫해에 지지옥션배 본선에 출전했다. 올들어 2단으로 승단한 그녀의 활약은 눈부시다. 삼성화재배 본선에 진출했고 중국 궁륭산 병성배, 제4회 인천 실내&무도 아시안게임 한국대표로 선발되면서 여류 신예 강자로 떠올랐다.
올 7월 실내&무도 아시안게임 바둑혼성페어에서 강승민과 출전, 동메달을 딴대 이어 이 대회 여자단체에서 은메달을 땄다. 또 7월 제3기 SG배 페어바둑최강전에서 진시영과 조를 이뤄 박승화‧김혜림조를 백 불계로 제압, 우승했다. 오정아는 2기 때 조한승과 조를 이뤄 준우승을 거뒀었다. 앞으로 열릴 한중일 페어대회에 한국대표로 출전한다.
10월에는 ‘두뇌 올림픽’이라 일컫는 2013 스포츠어코드 세계마인드 게임즈 한국대표로도 선발돼 12월 12일 중국 베이징에서 대회를 치른다. 이 대회는 바둑외에도 체스‧브릿지‧중국장기‧체커 등 마인드 스포츠 5개 종목에서 세계 최고를 가린다. 선발전에서 남자부는 강동윤과 최철한을 누른 조한승이, 여자부는 최정, 박지연을 꺾은 오정아가 선발돼 랭킹 시드를 받아 자동 출전하는 박정환, 김지석, 박지은과 함께 5명이 한국대표로 출전하는 것. 그래서 그녀를 ‘대표 선수 전문’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오정아는 인기 미녀 기사로도 손꼽힌다. 최근 이세돌 9단과 오정아는 서울시 ‘2013년 차 없는 날’ 행사의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차 없는 거리로 조성된 광화문 광장에서 서울시민들을 상대로 다면기와 사인회를 열었다.
제주 바둑계는 강동윤, 고주연, 오정아를 이을 영재를 발굴, 키울 수 있어야 한다. 어린 원석(原石)을 발굴, 보배로 다듬어가려면 많은 시간과 재정이 필요하다. 제주를 빛낼 영재 프로 기사를 배출시킬 일이 제주바둑계의 숙원사업이고, 제주사회에서도 보다 많은 관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5회로 이어집니다>
☞장승홍은? = 연합뉴스 기자를 거쳐 조선일보 사회부 차장을 끝으로 은퇴한 원로 언론인이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제주지부장, 제주불교법우회 회장, 제주도불교청소년연합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불교와 청소년의 가교 역할을 해왔다. 제주청교련 회장도 지냈다. 청년시절부터 다져온 바둑실력은 수준급이다. 제주바둑계의 원로와 청년을 두루 아우른 친교의 폭이 넓다. 최근 본인이 직접 취재현장에 나서 제주바둑계의 역사를 정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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