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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신개념 웹연재소설] 옛 우표첩(32)

4 아우라지 물가에 닿자 규범은 덥석 주저앉고 말았다. 버스 타고 오기 방금 전 세종의 큰 어머니와 나눈 말이 떠올랐다.

 

“세종이는 어디로 갔어요?”

 

큰 어머니는 처음 질문의 뜻을 몰라 다시 물었다.

 

“어디로라니?”

 

“세종이를 떠나보낸 곳이 어디냐고요.”

 

그제야 알아차린 듯,

 

“세종이가 틈만 나면 가곤 하던 여량 물 위에 뿌려졌단다.”

 

중학교 운동장에서 들었던 환청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규범이가 왔구나.’

 

이번에는 세종이의 얼굴을 물 위에서 볼 수 있었다. 둥실 떠 웃고 있었다. 하늘을 보고 누워 웃는 얼굴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이 들려왔다.

 

‘이 물을 따라 내려가면 규범이, 네가 있는 서울까지 갈 수 있단다.’

 

규범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도 전에 입에서 탄성의 절규가 신음으로 터져 나왔다. 쏟아내는 신음이 가슴에 도로 쌓이며 폭발하듯 찢겨졌다.

 

“이 바보야, 기다렸어야지. 기다리고 있어야지, 이 바보야.”

 

하지만 늦게 와서 미안하다며 규범이 엉엉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 따위 시험이 무어라고...’

 

세종이를 보고 싶을 때마다 시험이 몸을 묶었고 시험을 준비할 때마다 친구 세종이가 더 무지 보고 싶었건만, 뒤로 미룬 우정 그리고 사랑은 끝내 만남으로 기다려주지 않았다.

 

‘내가 바보야.’

 

규범은 아직 떠나지 못하고 물 위에서 웃고 있는 세종에게 소리쳤다.

 

“바보, 규범이가 이제야 왔다. 미안하다, 친구야.”

 

물 위에서 세종의 얼굴이 웃다가 울며 출렁거렸다. 흐르지도 못하고 누워 머물러 있는 친구가 대답해왔다.

 

‘우리, 이렇게 만나고 있잖니. 내 친구, 규범아, 와줘서 고맙다.’

 

물 위에서 멈칫하며 머뭇거리던 친구의 얼굴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만남이 그토록 깊었고 이제야 만났건만 곧 헤어져야 하는 재회는 짧았다.

 

“너를 알았고 너를 만나서 난 참 기쁘다.”

 

세종이 떠내려가면서 대답한다.

 

‘나도 이 세상에서 너를 알고 떠날 수 있어서 행복해. 너를 가슴에 품고 이제 우주에로의 여행을 떠나도 될 것 같다. 나는 엄마·아빠가 있는 저 하늘, 달님에게로 가게 될 거야. 엄마·아빠가 내게 그랬듯이 너와 완전히 떠날 수 없어서 일거야. 네 곁에서 머물 거야. 네 주변을 맴돌며 강강술래 하듯이 돌고 있을 거야. 매일매일.’

 

 

 

 


기억은 현재다. 추억은 기억을 지금이게 한다. 기억은 몸이고 추억은 피다. 과거를 흐르게 하며 돌게 함으로서 지금이게 하는 추억은 그래서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슬프고 기쁘다는 것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부재로서도 존재하기에 있고 없음은 무의미하다. 없기에 영원하다. 흐르게 하는 추억이 있어서다. 단지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보고 듣지 못하고 만지지 못할 뿐이다.

 

세종을 흐르는 강에 떠나보내고 규범이 세종의 일기장을 펼쳤다. 일기 곳곳에 얼룩이 져 있었다. 이젠 울지 않을 거야, 라던 세종이의 눈물자국 같았다. 눈물을 삭히기에는 너무나 어린 세종이었다.

 

「갱 밖에서 돌을 선별하던 중에 가끔 갱내로 들어갈 때가 있다. 처음엔 잔심부름이었지만 내 손에도 어느 새 탄을 캐는 광부의 공구들이 들려있다. 나 같은 어린 아이는 갱 안에서 일할 수 없지만 일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갱 안으로 투입되곤 한다. 세상과 단절된 갱 안에선 세상의 법이 적용되지 않는가 보다. 하지만 이래서 수입은 늘었다. 두렵고 무서웠지만 다른 광부들과 같이 탄광 속에 있다 보면 그 안도 고속도로 상의 터널과 같아졌다. 어둠은 모든 두려움도 감추게 하는지 모른다. 어둠 속에선 나를 잊게 하기에 오히려 밝은 바깥 세상보다도 편할 때가 있다. 벌이가 좋아지면 돈을 모아 규범이가 있는 서울로 올라가야지, 이런 생각이 가슴과 눈을 콱 막는 그 어둠 속이 좋아지기도 한다. 규범이는 지금 이 늦은 시간에도 여전히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있겠지. 너와 내가 가는 길은 전혀 다르지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친구이기 때문이지. 그렇지, 규범아?」

 

‘그럼. 우린 친군데 당연히 만날 수 있지.’

 

규범이 입에서 절로 나오는 대답이 가슴을 울컥하게 만든다.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게 된 친구를 낯선 글씨로만 만나고 있다는 사실에 이리도 깊이 서러울 수 없었다.

 

「서울로 갈 차비는 충분히 모아졌다. 하지만 공부로 바쁜 규범이를 서울에 가도 만날 수 있을까. 규범이와 헤어지기 전에 사진이라도 같이 찍어두는 건데... 그땐 곧 만날 줄 알았지. 헤어짐은 쉬어도 만나긴 어렵다. 내일은 아우라지로 나가 서울로 가는 강을 타봐야겠다. 정선 아리랑의 이런 구절이 지금의 내 심정 같다. ‘돌담 넘어 밭 한 뙈기를 건너가면 되련만 얼키고 설키었으니 수천리가 아니냐.’」

 

규범은 얼키고 설키었다는 구절을 되뇌고 되새겼다. 중학생이었고 고등학생이었던 우리가 얼키고 설킬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엄마·아빠를 사고로 잃고 난 후 나는 모든 것을 다 잃었다. 당신 아이들도 챙기기 바쁜데 조카인 내가 얼마나 부담이 되시겠니. 나도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고.”

 

세종은 성질을 부리지 못하니 성격을 상실했다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었다. 투정이나 짜증을 받아주던 부모가 없으니 자연히 그것들도 사라졌고, 사라진 그 빈 틈새로 눈치가 채워졌다고 했었다.

 

“나를 나이게 할 수 있는 건 성격이잖아. 하지만 나는 성격이 형성되기 전에 부모를 잃고 그리고 다 잃었지. 말 없는 아이로 변해버렸어. 성격을 드러낼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거든.”

 

세종은 학교에서 참으로 말이 없었다. 친구들은 그런 그를 자폐아나 정신지체아로 간주해 상대하곤 했다. 하지만 말을 섞어본 규범에겐 그렇지 않았다.

 

“규범이 네가 내 입을 열어줬다.”

 

그러나 세종은 정선으로 돌아간 후로 다시 말수를 줄일 수밖에 없었다.

 

창 밖은 삼경인데 보슬비가 오고요

 

우리들의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

 

산천에 올라서 임 생각을 하니

 

풀잎 마디마디에 찬 이슬이 맺히네.

 

오시라는 정든 임은 왜 아니 오시고

 

오지 말라는 궂은비만 줄줄이 오는가.

 

당신은 거기에 있고 나는 여기에 있어도

 

말 한 마디 못 전하니 그 거리가 수천리로구나.

 

일기장에는 정선 아리랑의 이런 구절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규범은 세종이가 즐겨 써놓은 구절들마다 가슴에 와 닿았다. 누구나 부러워하던 자기지만 정작 규범은 외톨이었고 그래서 외로웠다.

 

“내가 네 입을 열어줬다면 세종이 넌 내 눈과 귀를 열어줬다. 내가 보고 듣는 것은 극히 한정돼 있거든.”

 

외로운 아이들은 그래서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규범이 네가 외로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

 

세종이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을 때,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너 자신을 알라는 그리스 신전에 새겨있다는 문구가 내 가슴에 더 깊이 각인되더라.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내 꼬라지를 알라는 말로 들리는데, 시험성적이 아는 것의 척도도 되지 못하지만 고작 성적으로 대접 받는 나를 내가 들여다보면 사실 정말 한심스럽기 그지없거든. 하고 싶은 공부를 해야 하는데 시험이나 합격이라는 목적을 둔 공부는 내게 결코 힘이 돼주지 못하거든. 그 공부는 내 공부가 아니라 엄마의 공부며 타인의 이목에 맞춰진 공부에 불과하거든.”

 

규범이 고개를 저어댔다. 세종이가 물었다.

 

“그럼, 넌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 건데?”

 

규범이 생각할 틈조차 없이 대답했다.

 

“공부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

 

그러나 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공부밖에 없었다.

 

“난 공부로 길들여져 있잖아.”

 

세종이가 규범이에게 다시 물었더랬다.

 

“공부하지 않게 되면 그 시간엔 무엇을 하고 싶은 건데.”

 

규범이 또 거침없이 대답했다.

 

“너랑 정릉에서 놀았잖아. 우리의 놀이를 하는 것, 정확히 말하면 우리만의 놀이를 즐기는 것.”

 

아우라지로 오면서도 규범이의 손에는 내내 서울서부터 가지고 온 농구공이 들려있었다.

 

「정릉에서 종구를 만들어 놀던 그 짧은 시간이 종종 생각난다. 놀다가 지치자 규범이가 정릉이 누구의 묘인지 아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매일 거길 드나들면서도 누구의 무덤인지 관심이 없었으니 모를 수밖에. 중학교 일학년생인 규범이는 정말 똑똑했다. 정릉이 이성계의 둘째 부인의 묘이며 처음엔 서울 시내 한복판인 광화문 쪽 정동에 있었는데 태종 이방원이 지금의 정릉으로 옮겼다고 했다. 두 번 일어난 왕자의 난에 대해서 들으면서 나는 입을 쩌억 벌리며 규범이를 다시 보게 되었다. 너, 대단하다며 아는 것이 힘이 맞네, 라고 규범이를 부러워하며 칭찬했을 때 규범이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조선 개국 당시의 정황을 읽다보면 난 한국인이라는 게 창피하단 생각이 들었어.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아는 것을 제대로 실천하는 게 힘이라는 것도 어린 나이지만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지. 왜 세종 임금이 그 분의 두 형과는 달리 아버지 이방원에 대해서는 침묵해야만 했을까.”

 

내 이름과 같다고 웃어대며 규범이는 계속 애기했었다.

 

“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가 정의처럼 또는 지혜처럼 되어버린 우리나라의 정치의식 곧 정신의식이 그 후 지금까지 오백년 넘게 지배논리며 국민의식으로 이어져 왔다고 보거든. 그 원조가 세종 임금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고, 아는 것을 행동하게 하는 것이 너 자신을 알라 아닐까, 이런 생각도 곁들어 들었고. 세종 임금이 앞에 계시다면 난 묻고 싶어. 세종 임금께선 자기 자신을 얼마나 알고 사셨나요? 라고 말야. 알면서도 아버지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셨나요? 아버지이기 때문에? 보신은 아니었나요? 하고 말야. 그 후 공부를 해도 지식이 자기 보신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갖게 되었지.”

 

그 때 내가 그랬다.

 

“세종대왕님을 감히 어린 네가 비판하고 있는 거니?”라며, 덧붙여 말했다.

 

“아무튼 내 친구, 문 규범 멋지다.”라고. 정말 멋졌지, 규범이가.

 

규범이가 간단하게 대답했던가?

 

“어리니까. 이러면서 나도 시험 보는 공부에만 전념하고 있을 뿐인걸 뭐. 세종 임금을 벗어나 보는 게 나의 공부에 대한 해답 같다. 공부의 목적이 기득권에로의 흡수가 아니라 기득권에서 벗어나서도 당당하기라 할까. 하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하고 있으니 나도 할 말은 없지 뭐.”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던 규범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정선 아리랑의 시구들을 똑똑한 규범이가 알려나? 들려주고 싶다.

 

‘친구는 남이련마는 왜 이다지도 다정하냐.

 

한시라도 못 보면 그리워서 나 못살겠네.’

 

규범이가 보고 싶으면 난 눈물이 난다. 아우라지로 나가 눈물을 쏟아낸다. 정선 아리랑은 이런 내 심정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듯이 또 읊조리며 내게 들려주곤 한다.

 

‘울어서 될 일이라면 울어나 보지.

 

울어서 안 될 일은 어떻게 해보나.’」

 

규범을 솔깃하게 하며 자극해왔다. 일기장을 접고 규범은 서울로 향했다.

 

‘세종 임금을 벗어나 보는 게 내 공부의 해답이라 했건만, 나도 여직 별 수 없네. 검사로 살다가 감방에도 갇혀보기도 하고... 이런 개 같은 삶이 있나.’ 글=오동명, 그림=정세리/ 3편으로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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