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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신개념 웹연재소설] 옛 우표첩(26)

10 “싫다더니 이런 것 때문이었나? 검사라고 했지?”

 

선희와 규범이 옷을 다 챙겨 입기도 전에 황귀동이 열쇠로 문을 따고 카페 안으로 쳐들어왔다. 규범은 선희가 열쇠를 주며 남편 말고는 당신이 처음이야, 라고 한 말을 떠올리며 그가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그녀의 남편임을 직감했다.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생각지 않나? 이 자와 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이 아냐. 당신의 처신에 달려있다는 거지. 처음처럼 돌아갈 건지 아님... 초심을 잊고 이 자에 붙어? 하지만 난 그런 따위엔 관심이 없으니, 사업인지 사랑인지 선택하라고. 사업을 선택하려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선택하려니 사업이 아쉽긴 하겠지?”

 

귀동이 그의 아내 선희를 어르고 있을 때 규범은 선입감과 서두름으로 그르치고만 일을 떠올렸다.

 

존속상해로 구속된 박 기자를 무혐의로도 처리할 수가 없었다. 사건 자체를 없던 것으로, 서류 모두를 남기지 않고 다 지워버려야 했다. 문 검사는 기자를 처음 조사한 서초경찰서의 형사계장을 검사실로 불러들였다.

 

“문제 삼지 않겠다. 우리 쪽에서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정확한 사정만은 내가 납득할 수 있게 분명하게 말하라. 내 앞에서 한 어떤 말도 여기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도록 하겠다. 내가 다 책임진다.”

 

최종 책임은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문 검사는 잘 알고 있었다. 혈색이 가무숙숙한 형사계장은 대동한 형사를 돌려보며 그에게 전가하려는 눈치다.

 

“계장님, 당신이 말하시오.”

 

당혹해하며 당황하는 모습이 계장의 얼굴에 역력했다. 문 검사는 안으로 형사계장만 들어오게 했다.

 

“앉으시오.”

 

여직원에게 단 커피를 내오게 했다. 커피가 들어오는 동안 검사실은 침묵이 돌았다. 계장은 커피잔을 든 손을 떨고 있었다.

 

“뇌물과 관련이 있습니까? 아님 다른 이유라도?”

 

“고소인인 박 기자의 장인이 군 보안대 중령 출신이라고 합니다. 서초경찰서에 군 직속 후배가 있습니다.”

 

“진단서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어떻게 허위진단서를 받아낼 수 있었지요? 흔히 그래왔듯이 경찰서에서 의원을 주선했습니까?”

 

계장은 이미 빈 커피잔을 들어 잔 나발을 불듯 빨아댔다.

 

“그 사람의 군 후배인 형사가 그랬나봅니다.”

 

규범은 목소리의 톤을 높이며 짜증을 냈다.

 

“받아먹은 돈은?”

 

“진단서도 있고 존속상해죄에 해당돼 장인에게 법적으로 유리하다는 판단에 부담을 덜 가졌습니다.”

 

“액수는?”

 

“저희 형사반 회식 정도는 되었습니다.”

 

“많지 않다는 말인가?”

 

“예.”

 

검사는 들고 있는 물잔을 소리가 나도록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버럭 소리 지를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자기가 더 큰 불찰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검사는 자신에게 더 짜증이 났다. 경찰서에서 올라온 조서를 재차 확인조차 하지 않았던 데에는 기자에 대한 반감이 앞섰기 때문이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수사계장을 불렀다.

 

 

“박장수를 다시 부르시오. 그리고 고소인과 피고의 부인을 다시 내일까지 출두하라고 하시오. 특히 부인을 이번엔 꼭 나오게 하고 서두르시오.”

 

문규범은 선희가 남편에게 무언가 애써 애원하는 듯한 행동을 보며 서울구치소에서 검사실로 불려온 박 기자와의 대면을 상기했다.

 

“당신 장인과의 전화통화 녹취록에 의하면, 당신은 고소인인 장인에게 폭언을 해댄 사실이 드러납니다. 인정합니까?”

 

포승에 묶여있는 박 기자가 대답했다.

 

“장인에게 큰 소리를 친 것은 인정합니다. 녹취록을 본 검사님께서 잘 아시다시피 애엄마가 딸이 맞느냐고 내가 장인에게 따져 물은 것도 인정합니다. 녹취록엔 그 날 통화한 내용이 다 들어있습니까? 창피스러운 일이지만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두 시간 정도 통화했습니다. 전화는 내가 출근 준비 중이던 이른 아침에 장인이 걸어와 받았습니다. 장인이 그랬습니다. 자기 딸이지만 데리고 살 수 있는 여자가 못 된다며 이혼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혼할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두 시간 가까이 이혼을 강요하더니 급기야, 이 새끼야, 왜 이혼 안 한다는 거야? 라며 내게 욕을 해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애엄마의 가족들이 끼어들지 않으면 우리 부부에겐 문제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내게 거듭 욕을 퍼부었고 내 직장인 신문사에 찾아가 나를 망신시켜 퇴사하게 만들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때 애엄마가 딸이 맞느냐며 내가 큰 소릴 내고 말았습니다. 이 부분만 녹취한 게 아닙니까?”

 

“하여튼 폭언을 해댄 것은 맞지요?”

 

“큰 소리를 폭언이라고 말한다면 맞는 거겠지요.”

 

검사는 죄명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단지 진단서에 명시된 상해의 동기 등 정황으로 죄를 억지로 엮을 순 있다는 궁색한 생각은 들었다.

 

“장인도 아버지인데 폭언을 해댄 것에 반성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말하면서도 검사는 자신이 없었다. 수사계장에게 시켜 당시의 통화시간을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피고인이 말하는 대로 두 시간 넘게 통화했다. 녹취록은 단 일 분에 불과했다. 법정에선 이 녹취록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고소인인 박 기자의 장인과 그의 아내, 그리고 박 기자를 한 자리에 불러 삼자대면을 하기로 했다.

 

“고소인의 이름이 김현채 맞습니까?”

 

“예.”

 

“피고와는 어떤 사이이지요?”

 

“제가 장인이 됩니다.”

 

“피고인의 아내 김미정 씨 맞습니까?”

 

그녀는 대답을 않고 김현채를 쳐다봤다.

 

“김미정 씨가 맞습니까?”

 

그녀는 수사계장을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돌려 아버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 어떡해?”

 

김현채가 제 딸을 보고 고개를 끄덕거려 보이자 그제야 짧게 대답했다.

 

“예.”

 

“박장수 씨는 고소인 김현채의 사위가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고소인의 딸 김미정 씨가 아내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장인의 집 거실에서 장모와 고소인의 딸들 앞에서 고소인인 장인을 목을 조이며 폭행한 적이 있습니까?”

 

“절대 없습니다. 제가 오히려 장인과 장모에게 멱살을 잡혀 거실 밖으로 끌려 나와야 했습니다.”

 

“고소인은 2주의 진단서를 폭행증거로 제출했습니다. 맞습니까?”  김현채가 당당하다는 듯 고개를 세로로 끄덕이며 우쭐해했다.

 

“진단서가 있는데도 박장수 씨는 폭행을 부인하고 있는 겁니까?”

 

“진단서는 가짜입니다. 허위라는 말입니다.”

 

“그럼 의사의 진단서를 믿지 못하겠다는 겁니까?”

 

박장수는 두 손을 묶은 수갑을 내려다본 뒤 그의 아내를 흘끗 바라보고 이내 고개를 돌렸다.

 

“제가 하지도 않은 폭행으로 상처를 입었다고 하니 그런 진단서를 당연히 믿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의사가 거짓말을 칩니까. 사람이 거짓말을 치는 거지요.”

 

“믿는지 믿지 않는지, 예 아니오, 라고만 대답하시오.”

 

“예. 믿지 않습니다.”

 

“고소인 김현채 씨는 사위인 박장수 씨의 말을 들었지요? 대답해 보시오.”

 

“국가가 인정한 의사의 진단서가 허위라고 하니 제가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저러니 한참 더 콩밥을 먹어야 정신을 차릴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호로자식.”

 

“묻는 말의 대답 외의 다른 말은 삼가시오. 의사에게 두 번 찾아갔다고 하더군요. 처음엔 진단서를 얻어내지 못했다는데 다음 날 어떻게 진단서를 받아냈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김현채가 허리를 펴 몸을 세워 앉으며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일 없습니다. 다 이 놈이 말한 거지요? 이 놈이 내 목에 상처가 나도록 목을 조여 나를 죽이려 했습니다. 미정이도 보았지 않느냐?”

 

“여기 앉아 있는 사위가 말이지요?”
“예. 이 놈이지 누구겠습니까?”

 

수사계장은 욕지거리는 삼가라고 지적하며 아버지만을 쳐다보고 있는 김미정에게 물었다.

 

“남편인 박장수 씨가 아버지 김현채 씨에게 그날 어떤 행동을 취했습니까? 보셨지요?”

 

김미정은 검찰로 오는 전철에서 아버지로부터 ‘혼자 생각해서 대답하지 말고 대답하기 전 나를 본 뒤에 대답을 해도 하라.’는 말을 거듭 들어야 했다. 김미정은 검찰출두를 세 차례나 거부해왔다. 김현채가 끼어들어 대신 대답했다.

 

“제 딸이 그날 충격을 받아 말을 제대로 못합니다.”며 자상한 아버지처럼 딸에게 물었다.

 

“그렇지 않느냐? 이 놈이 나에게 폭언을 해대고 폭행을 했지? 말을 못하겠거든 수사관님께 그렇다고 고개만 끄덕거리면 된다. 가여운 것. 어쩌다가 저렇게 돼버리다니, 다 이 놈 때문이야.”

 

김미정은 수갑이 채워진 남편 박장수를 보며 차마 없는 사실을 있다고 말할 순 없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거나 돌려 앉은 박장수의 눈시울이 빨갛게 물든 초췌한 얼굴을 보니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수갑은 작은 몸을 더 왜소하게 만들었다.

 

‘이러고서 그 집에 들어가 온전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내 말을 잘 들어라. 이 기회에 내가 돈을 잔뜩 받아낼 테니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라.’

 

고소장을 쓰며 아버지가 하던 말을 떠올렸다. 아버지 말이 맞겠다는 생각을 하며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딸 김미정 씨에게 물었습니다. 김미정 씨가 대답하시오.”

 

그러나 김현채가 표정으로 불안감을 애써 감추며 딸에게 일렀다.

 

“사실대로 말하거라. 겁먹지 말고. 저 놈의 흉악한 손에 수갑이 채워져 있으니 또 그 짓은 못한다. 저 놈이 내게 한 짓을 검사님들이 보셔야 하는데... 내 가여운 자식.”

 

사실이라니. 무엇이 사실이지. 혼란했다. 혼란은 혼동으로 나타났다.

 

“아빠가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나는 모릅니다.”

 

이것이 그녀에게 사실이었다. 문규범은 삼자대면을 줄곧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다 의지하는 시집 간 다 큰 딸을 보며 검사가 나섰다.

 

“아빠가 하라는 대로라면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요?”

 

대답은 명료했다. ‘말 그대로 시키는 대로’

 

그러나 김미정은 대답을 유보하며 역시 김현채를 쳐다보았다.

 

“김미정 씨의 남편이 아버지에게 폭행을 해 지금 구속돼 있습니다. 옆에 보이지요? 김미정 씨의 한 마디가 진실이 될 것입니다. 김미정 씨의 생각을 말해야겠지요. 폭행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폭행을 한 것입니까?”

 

김현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이 애는 방에 들어가 있어 보지 못했습니다. 이 놈이 내 목을 잡고 죽이겠다는데 어떻게 가만히 볼 수 있었겠습니까?”

 

아버지가 남편에게 저지른 폭행으로 오히려 구속된 남편을 더 볼 수 없었다. 함께 더 살 수 없었다. 더구나 남편은 따져드는 성격에 불의 앞에서는 부모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사람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리에 앉으시오.”

 

수사계장이 김현채에게 단호하게 명령했다. 검사가 다시 물었다.

 

“멱살을 잡고 죽이겠다고 하니 차마 더 볼 수 없어 방으로 들어갔다는 말이군요. 좀 전엔 딸이 다 보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아는데... 계장 님 맞지요? 김미정 씨에게 다시 묻겠습니다. 어디까지 본 것입니까?”

 

거짓을 말하지 못하는 딸이 아버지는 걱정됐다. ‘넌 말하지 말거라.’ 한편 부모의 말을 잘 듣는 모범생인 딸이기에 아버지는 믿었다. ‘내가 다 할 테니 넌 날 믿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

 

김미정은 이런 뒤에야 검찰에 나올 수 있었다. 거짓을 말하지 못하는 효녀 모범생은 ‘어디까지 본 것입니까?’ 라며 다그치듯 물어오는 검사의 눈을 피하며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다.

 

‘네 남편의 서초동 아파트를 기어코 네 것으로 내가 만들고 말 테니 두고 봐라.’

 

아버지의 깊은 자식사랑은 헤아림마저 깊었다.

 

‘그 아파트를 네 명의로 해놓으면 그 놈이 나중에 언제고 돌려달라며 빼앗아갈 것이다. 그 놈이 영악한 기자 아니냐. 그러니 네 남동생 이름으로 올려놓던가, 그 아파트를 바로 팔아 역시 네겐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의 명의로 다른 아파트를 사놔야한다. 그래야 빼앗기지 않는다. 이런 것도 이 아빠를 전적으로 믿고 따라라.’

 

문규범은 귀동이 선희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다. 선희도 귀동의 얼굴에 기대어 있는 모습도 보고 있다.

 

‘돌아가게 될 여자였어.’

 

“아빠가 말하신 그대로 전 보지 못했습니다. 아빠가 말하신 그대로 방에 있었습니다.”

 

피고 박장수의 아내 김미정의 말이 규범의 귀에 다시 들려왔다.

 

검사가 박장수에게 물었다.

 

“그 자리에 아내가 없었습니까?”

 

박 기자는 고개를 떨궜다. 바닥에 한 방울의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대답을 듣지 않고 검사는 수사계장에게 모두 돌려보내라고 지시했다.

 

황귀동이 문규범에게 사진을 내보였다. 발가벗은 두 남녀가 마주 앉아 있고, 등을 대고 앉아 있고, 서서 껴안고 있는 장면들이었다. 창문 밖에서 찍은 듯했다.

 

‘너하곤 다 벗고 있어도 아무 일이 없을 것 같다.’던 상식깨기게임은 몇 장의 사진으로 상식이 되어 돌아왔다.

 

‘내 게임이 나를 묶고 말았구나. 내 꾐이 나를 가두고 말았구나.’

 

규범은 귀동이 요구한 합의금 1억 원을 거부했다. 문규범과 이선희는 간통죄로 구속되었고 언론은 흥이 나 이를 연일 보도했다. 젊은 검사와 미모의 강남 카페여주인과의 로맨스의 끝은 감방이었다, 현대판 이수일과 심순애, 꽃뱀에 물린 검찰 등등. 20분 게임의 벗은 사진들도 유출돼 세상에 떠돌아다녔다. 다른 검사들도 즐겨 보곤 했다.

 

한소연은 아들의 변호를 맡아줄 변호사를 찾기 위해 동창주소록을 펼쳤다. 10여 년 만에 다시 대학동창 변호사를 찾아갔다.

 

“아들 때문에만 우리가 만나는구나. 그새 얼굴이 많이 상했네. 너도 가는 세월엔 별 수가 없구나.”

 

안수철이 한소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글.그림=오동명/ 9편으로 계속>>>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전 제주에 정착, 현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고 있다. 더불어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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