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기저귀를 갈면서 가만히 살펴보면, 어머니의 다리가 많이 가늘어진 듯 하다. 그래도 장딴지 만큼은 다른 어르신들보다 튼튼하시다 생각했는데, 이제는 가죽만 남아서 탄력 없이 헐렁거린다. 엉덩이 부분도 볼기의 두둑한 살이 많이 빠져서 마치 바람 빠진 공처럼 쭈글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어머니, 오래 사시느라 너무 수고가 많으셨다. 이 두 다리로 한라산 중산간과 오름을 누비면서 얼마나 많은 고사리를 캐셨던가. 물질하러 바다를 오갈 때는 산지동산을 오르내리고 고닥고닥 돌짝길을 걸으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2남7녀를 키워내시느라 동새벽에 일어나서 물항아리 가득 물길어 놓고, 아침밥을 먹는둥 마는둥 빌레왓으로 내달리실 때는 얼마나 마음이 다급하셨을까. 100년을 사시면서 얼마나 힘겹게 땅을 밟고 버텨내셨으면, 이렇게도 힘살들이 녹아들었을까. 깃털처럼 가볍게 말라버렸을까. 이게 어머니가 지나온 삶의 흔적이구나.... 아, 제주도 여인의 일생을 생각하니, 가슴 한 켠으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 온다. 코로나19의 격리기간이 닥치기 전에는 교회 여성들이 토요 봉사모임을 만들어서 독거노인을 방문하곤 하였다. 주로 말벗이 되어드리는 게 목적이지만, 혼자 사시는 분의 경우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도미노가 붕괴하는 모습을 동원해 극적인 결말을 극대화한다. 주인공 V는 영국 국회의사당을 폭파할 날로 정한 D-day에 그의 지하 아지트에서 도미노 패들을 쓰러뜨린다. 수만개에 달하는 듯한 도미노 패들이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 같은 장관을 연출하며 쓰러진다. 그 쓰나미가 지나간 자리에 무정부주의(anarchism)를 상징하는 이니셜 ‘A’가 신의 계시처럼 드러난다. 도미노 패를 쓰러뜨린 V는 자신의 승리를 예감하는 동시에 죽음도 예감하고 있다. 지하 아지트 바닥 가득 펼쳐져 완성된 ‘A’를 굽어보는 V가 쓰고 있는 가이 포크스 가면의 ‘미소’가 참으로 신비롭게 느껴지는 장면이다. 환희 같기도 하고 처연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부처님의 미소처럼 평온하기도 하다. 도미노 패들이 일사불란하게 쓰러진 후 통행금지령으로 인적이 끊긴 어두운 런던 밤거리에 V와 똑같이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망토를 걸친 시민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내 수십·수백명으로 불어나 런던의 밤거리를 점령한다. V의 아지트에서 도미노 붕괴가 완성된 것처럼, 런던 거리에서 시민들 하나하나가 기꺼이 한개의 도미노 패가 돼서 일사불란하게 하나의 그림
2022년 늦가을, 인플루엔자의 움직임이 심상찮다. 2020년, 2021년은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할 때 공포에 떠는 전세계 보건의료 책임자들은 '트윈데믹(Twindemic)'이 우려된다며 사람들에게 주의를 강조했다. 즉 쌍둥이라는 Twin에 어려운 의학 용어인 팬데믹(Pandemic)을 합쳐서 코로나19와 인플루엔자가 동시에 유행할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두 해 가을과 겨울에 인플루엔자는 유행하지 않았다. 보건의료 전문가들은 이솝우화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들이었을까? 인플루엔자 이야기 인플루엔자는 우리 말로 독감(毒感)이라고 부른다. 한자말로 보면 독한 감기라고 보여질 텐데 사실은 전혀 다른 놈들이다. 바이러스들이지만 전혀 다른 집안이다. 감기는 인두염, 후두염 등 상기도 부근에 감염을 일으키면서 증상을 일으키는 여러 종류의 바이러스들이 원인이다. 지금 유행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도 감기를 일으키고, 전문가에 따라서는 200여종의 바이러스가 감기를 일으킨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인플루엔자는 같은 증상을 나타내지만 그 바이러스들과 급을 달리 한다. 걸리면 감기라고 하지 않고 인플루엔자, 즉 독감이라고 따로 부르는 이유는 감기가 고양이라면 인플루엔자는 호랑
정부가 늦은 밤 택시를 타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내놓았다. 1973년부터 50년 동안 유지돼온 개인택시 부제를 해제한다. 파트타임(아르바이트) 택시 기사가 허용된다. 심야시간 택시호출료(3000원→5000원)가 비싸진다. 택시기사 취업을 원하는 사람에겐 먼저 일할 수 있게 하고 나중에 자격증을 따도록 절차를 간소화한다…. 그동안 이용자 부담 증가와 택시업계의 반발을 의식해 추진하지 못한 방안들을 모아놓은 듯하다. 이런저런 대책을 망라했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원인 분석을 제대로 하고, 맞춤형 대책을 차질없이 추진해야 한다. 대책의 방향을 기존 업계의 이익보다 택시 승객, 즉 소비자 이익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다. 심야 택시 승차난이 발생한 건 택시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의 심각한 불일치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해제되자 저녁 모임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택시 승객 수요도 늘어났다. 반면 코로나19로 타격을 받은 택시기사들은 택배나 배달 서비스 등으로 빠져나갔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19년 10만2000명이었던 법인택시 기사가 올해 7만4000명으로 감소했다. 임금 수준이 열악한 택시 운행을 포기하
아침이 되면 마당으로 나가서 대문을 지키듯 앉아 계시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대문 밖으로 나가서 집 주변의 길가를 살펴보아도 계시지 않는다. 이럴 수가.... 발끝을 올려서 시야를 더 넓혀 사방을 휘둘러보지만, 안 보인다. 이 정도면 어머니의 걸음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의 최대치인데.... 덜컥 겁이 났다. 지난번에 어머니를 잃어버렸을 때 119가 가르쳐준 어머니의 가능한 동선을 훑어봐야 할까 싶다. 자동차를 끌고 그 당시 어머니가 쪼그려 앉아 계시던 동쪽으로 향했다. 세상에! 어머니가 한 집 건너 이웃해 있는 펜션 앞에 동그마니 앉아 계시지 않은가. 마치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초췌한 모습이다. “어머니! 무사 여기 왕 이추룩 앉안 이수광? 어머니 잃어부러시카부덴 막 걱정되연, 애가 타게 촞아댕겸수게!” 그러자 어머니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 나왔다. “나, 이제는 죽어지민 조키여! 무사 나만 영 오래 살아점신고 이?” “어머니, 그게 무신 말이우까? 이제 백살이난 막 오래 살아진 거 닮아도, 요양원에 가민 백 다섯 난 할망도 이수다. 대포 부택이 어멍은 백두 살이라도 막 정광해영, 동네 이디저디 돌아댕기멍 재미나게 살지 안 햄수광? 경 허난, 어머니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V는 마침내 필생의 사업으로 삼았던 영국 국회의사당 폭파를 마무리 짓는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장면이기도 하다.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홍보하는 국영방송사를 폭파하는 것까지는 수긍할 수 있지만 ‘자유민주주의’의 상징인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까지 날려버리는 장면은 뜻밖이다. V는 영국 국회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 사원 지하를 통과하는 지하철 열차에 화약을 가득 실어 출발시킨다. 영국 국회의사당이 폭발하는 순간 밤하늘을 덮은 폭죽은 그대로 아름다운 축제의 불꽃놀이가 된다. 런던의 밤거리에 모여 영국 국회의사당을 날려버린 불꽃놀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얼굴엔 기쁨의 미소가 번진다. ‘빅 벤(Big Ben)’ 시계탑으로 유명한 영국 국회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누가 뭐래도 워싱턴의 미국 국회의사당과 더불어 세계 자유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양대 기념물이다. 마블에 등장하는 최악의 빌런이 아니고서야 인류의 오랜 염원을 담은 숭고한 자유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저토록 증오하고 조롱할 수 있을까. 빌런이 아니라 ‘우리들의 영웅’으로 그려진 V가 자유민주주의의 상징을 날려버리고, 시민들은 그 모습에 비로소 안도하고 새 희망의 미소를 짓는 영화 속 장면은 자못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공포와 불안감을 나타내는 게 전부가 아니라 사랑의 시작이라고 말해주는 영화가 있다. 31분짜리 짧은 상영 시간이지만 완성도와 감동이 100% 충전된, 허진호 감독이 만든 독립영화 ‘두 개의 빛: 릴루미노(Two Lights: Relúmĭno, 2017)’다. 제목에서 말하는 두 개의 빛은 감독이 의도한 것도 있겠지만, 관람자 각자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어차피 예술 작품의 주제와 감동은 감상하는 자의 것이니까.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잘 쳤으나 점점 시력을 잃어 ‘저시력장애’를 가지게 된 서인수(박형식)는 현재 피아노 조율사로 일하는 청년이다. 그와 달리 장난기 넘치고 밝은 성격의 안수영(한지민)은 냄새로 일하는 조향사(아로마 테라피스트)다. 7살 때부터 안 보이기 시작해서 현재 한쪽 눈은 아예 안 보이고, 다른 쪽은 안개 낀 것처럼 뿌옇게 보일 뿐이다. 수영이 사진동호회에서 함께 출사(사진 찍으러 나가는 일)를 다니면서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해도 인수가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점점 잃어 가는 시력 때문에 걱정과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수는 동호회에서 만난 시각장애인들이 한결같이 밝은 척하는 것도 못마땅하다. 안 보이는
미국의 고강도 긴축 여파로 국내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원화가치가 급락하면서 원ㆍ달러 환율이 1430원을 뚫었다. 1400원대 환율은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9년 이후 13년 만이다. 시장에는 1450원선에 이어 1500원에 이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원화가치가 가파르게 떨어지자 외국인 투자자들이 주식 매도에 나서며 주가도 속락하고 있다. 급기야 국제 금융가에서 ‘아시아 외환위기’ 가능성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위험한 국가로 한국과 태국, 필리핀이 지목됐다. 아시아 경제의 양대 축인 중국 위안화와 일본 엔화의 가치 급락이 리스크 요인으로 꼽혔다. 두 화폐의 가치 하락이 지속되면 아시아에서 자본 이탈이 가속화해 1997년과 같은 외환위기가 재연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위험한 국가로 지목된 가장 큰 이유는 경상수지 적자 우려다. 무역수지 적자가 4~9월 여섯달 연속 이어져도 경상수지는 흑자를 유지해 왔는데 8월부턴 적자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아져서다. 상품수지와 서비스수지, 소득수지 등 외국에서 벌어들인 돈과 외국에 지불한 돈의 차이인 경상수지 적자는 국내 외환보유액을 감소시키는 쪽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가뜩이나 금융시장이 불안한 판에 실물
영화의 배경이 되는 ‘미래 어느날’ 영국은 극악한 ‘전체주의 국가’가 돼 있다고 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영화 속 영국 시민들의 일상은 일견 자유롭고 평화스러워 보인다. 시민들은 깨끗하고 질서 잡힌 런던 거리를 자유롭게 왕래한다. 어떻게 된 일일까. 독재자 ‘슈틀러’가 장악한 영국은 평온하다. 노숙자는 없고 쓰레기도 없다. 너절한 광고 전단도 없다. 시민들을 감시하기 위한 무장경찰이나 계엄령 치하와 같은 탱크도 보이지 않지만 질서정연하다. 시민들은 카페와 식당에서 자유롭게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눈다. 또한 자유롭게 TV를 시청한다. 히틀러나 스탈린이 그토록 꿈꿨던 ‘전체주의 지상낙원’이 마침내 슈틀러 총통이 지배하는 영국에서 실현된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면 다른 ‘그림’이 보인다. 평온해 보이는 거리 곳곳에는 ‘핑거맨(fingerman)’이라고 불리는 사복 비밀경찰들이 섞여 있다. 카페나 식당에도 어느 자리엔가 섞여서 태연하게 식사를 하면서 시민들을 감시하고 있을 터다. 언제든지 불온한 대화를 나누는 시민들을 발견하면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뽑아낼 준비가 돼 있다. 시민들이 ‘자유롭게’ 시청하는 TV는 정부가 보여주고
지난 회차에 이어 시각 관련 영화 세 편을 준비했다. 모두 독특한 구성으로 만들어졌으며, 시사하는 바가 있는 영화, 스릴러, 액션 각각 골라보았다. 장애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곳 2008년 제작되고 산드라 블럭이 주연한 ‘버드 박스(Bird box)’는 시력을 잃는 것으로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무언가를 보게 되면 자살충동을 일으키기 때문에 일부러 눈을 가려서 살아야 하는 상황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이 또한 엄청난 전염력을 지녀서 전 세계가 심각할 지경에 이르고, 말로리(산드라 블록)는 두 아이의 눈을 가린 채 보트를 타고 강물을 따라 도망을 친다. 이틀을 꼬박 극한의 공포와 위험을 겪으며 도착한 곳은 시각장애인 학교. 눈이 안 보이는 장애인들이 대부분이고, 그들은 무엇을 볼 염려가 없기 때문에 안전하다. 두 아이와 말로리는 평온을 찾고 시각장애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게 된다. 재미있는 설정이다. 장애인이 대부분인 사회에서는 주류가 그들이고, 비장애인들은 이방인이 되거나 비주류로 살게 되지만, 반대의 상황에서 비장애인이 안전하고 도움을 받으며 산다는 것..... 버드 박스는 새장을 뜻하는데, 제목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면 좋다. 어둠 속에서 보게 되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ㆍFed)가 21일(현지시간) 기준금리를 예고한 대로 0.75%포인트 인상했다. 3차례 연속 ‘자이언트스텝(금리 0.75%포인트 인상)’이다. 한국은행이 8월 기준금리를 올려 2.5% 기준금리 상한을 맞춰놨는데, 한달 만에 한국-미국(3.0~3.25%) 간 금리 격차가 0.75%포인트로 벌어졌다. 그 여파로 22일 원ㆍ달러 환율이 1400원을 뚫었다. 장중 한때 1410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이미 초강세인 미국 달러화를 찾는 손길은 더 많아질 것이다. 세계적으로 ‘킹(King) 달러’로 불리는 배경이다. 문제는 연준이 기준금리를 계속 줄기차게 올리겠다는 초매파적 방침을 예고했다는 점이다.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위원들의 금리인상 전망을 보여주는 점도표는 연말 금리 수준을 4.4%로 예상했다. 올해 2차례(11월, 12월) 남은 FOMC 회의도 자이언트스텝이나 빅스텝(0.5%포인트 인상)을 단행해야 그 수준에 이른다. 게다가 점도표는 내년 말 기대금리도 4.6%로 예상했다. 미 연준의 통화긴축 의지는 확고하다. 경제 위축을 감내하면서라도 더 큰 고통을 막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는 것이다. 연준은 올해
지난 겨울, 직장의 임기를 마칠 즈음, ‘앞으로 무슨 일을 할까?’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머리와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호랑이 장가가는 날에 햇빛 사이로 비가 쏟아지면, 집에 두고 온 우산을 잠깐 잠깐 떠올리는 것처럼. 그런데 같은 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는 이성이, 가슴을 스칠 때는 감성이 움직였다. 올해로 103세를 사시는 김형석 교수님께서 ‘백년을 살아보니 인생의 황금기는 60에서 75세까지’라고 하신 점에 비추어 보면, 실제로 나는 매우 심각하게 이성적인 고민을 해야 하는 지점에 있었다. 그런데 정작은 심도있게 생각하고 다양하게 살펴봐야 할 인생 3모작의 과제를, 마치 말을 타고 달리면서 먼 산을 바라보는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대응하고 말았으니...., 왜 그랬을까? 사실, 나는 이미 답을 정해 놓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가슴으로 결정해 두었던 답이, 현실적으로는 이성적인 판단이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그 답을 묵살하고 넘어간 듯 하다. 제 3자적 입장에서 나의 형편과 처지를 바라보면, 좌고우면 할 필요도 없이, ‘바보야, 직장이 우선이야!’가 답이 되어야 할 터다. 하지만 내 가슴은 ‘아니야, 새해가 되면 백세가 되시는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