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와 B는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친구사이다. 그 둘은 청소년기에 이르러 제주시내 학교로 진학했다. 그리곤 제주의 명문사립고와 최강공립고를 대표하는 간판이 됐다. 그 명문사립고는 오현고, 최강공립고는 제주제일고다. 제주에선 꽤 알려진 ‘맞수’ 관계의 라이벌 학교다. 그 시절엔 그랬다. 그 둘이 고교 3년이 된 1981년 말 치른 대입 학력고사는 그 이전 예비고사와 본고사를 치르던 대입시험과 다른 전형이었다. 한 번의 시험으로 모든 걸 결판냈다. 그 시험에서 당시 고작 45만 인구였던 제주는 전국 수석과 7등 수험생을 배출했다. A가 수석이었고, B가 7등이었다. 소수인구의 작은 섬에서 내놓은 결과에 전국이 들썩였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시절 ‘전국수석’은 B가 되리란 예상이 더 우세했다. B는 수시로 치러지던 전국단위 모의고사에서 늘상 최상위권을 맴돌았다. 그래서 그 고교는 ‘학력고사 전국수석’을 배출한 전국 최고의 명문고가 될 것이란 기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판 결과는 뒤집혔다. 그래서 그의 7등은 빛이 바랬다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는 말이 있다. 인지심리학(認知心理學, Cognitive Psychology) 용어다. 마음이 반대하는 것에 맞닥뜨리는 걸 체계적으로 회피하는 방식을 나타내는 말이다. 우리가 이미 생각하거나 느끼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증거는 과대평가하고, 그것에 모순되는 증거는 과소평가하거나 그냥 깎아내리는 것이다. 미국의 원로 언론인 잭 풀러(Jack Fuller)가 2010년에 낸 <뉴스의 현재(What is Happening to News)>라는 책에서 소개된 내용이다. 신문을 읽지 않는 요즘 세대에 언론은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철학과 심리학을 동원해 풀어놓은 책이다. 확증편향에 빠지면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듣고 싶은 대로만 듣고, 믿고 싶은 대로만 믿게 된다. 자기에게 불리한 정보는 버리거나 애써 외면하고 유리한 정보만 찾아내 합리화시킨다. 자신의 견해에는 너무나 긍정적인 반면 다른 견해에는 너무나 배타적이다. 이른바 ‘색안경’을 쓰게 되기에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뭉치게 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번져간다. 20대 청년기
▲ 호주 브리즈번 공항청사 전경 해외여행 얘기를 꺼내면 진부해지지만 이해바란다. 오래 전 일이다. 때는 1999년 5월. 제주도가 광풍(狂風)같은 한라산 케이블카 논쟁에 휘말리던 시절이다. 1주일여간 그 케이블카 때문에 호주의 케언즈를 뒤지고 다녔던 적이 있다. 오해마시라! 케이블카 얘기는 여기서 다룰 소재가 아니다. 다른 장면이 있다. “Please care for the environment." 그랬다. 공항 청사에서도, 화장실에서도, 관광지에서도 틈만 나면 보이는 문구가 그것이었다. 거의 사정조로 “환경에 유의하라”는 그 대목은 한 번, 두 번, 세 번이상 만나게 되면서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반면 그 시절 우리 공공시설물-특히 화장실-의 벽면을 가득메우고 있는 것은 다르다. 지금은 꽤 달라졌지만 한번 기억을 더듬어봤으면 좋겠다. 다름아닌 간첩·좌익사범 신고전화 안내다. 우습겠지만 사실이다. 호주의 한 장면을 다시 떠올려 보겠다. 브리즈번 공항에서였다. 정 중앙부 천정이 뻥 뚫린 공항청사 건물은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관계자로부터 전해들은 이유는 한마디로 기가 찼다.
정치학자들이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기는 말이 있다. 정치학도들이 코흘리개 신입생 시절 <정치학개론>을 수강하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말이다. “정치는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란 개념규정이다. ‘정치’에 대한 다양한 개념정의가 있지만 정치학계에서 다수로부터 설득력과 타당성을 인정받는 진술이다. 캐나다 출신으로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시카고대에서 교수로 재직한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이 설파한 '정치'에 대한 개념정의다. ▲ 데이비드 이스턴 미국 시카고대 교수 그냥 문장으로만 놓고 보면 간단한 수사(修辭)로 보이지만 그 개념정의엔 어마어마한 가치와 철학이 내재돼 있다. 정치-. 우리나라에서 이 단어만큼이나 부정적 요소를 내포한 게 있을까? 부정·부패·담합·패거리·철새·편가르기·지역주의···. 순간 떠오르는 부정적 단어만 놓고 봐도 우리의 정치에서 풍기는 인상과
1995년 민선 1기 6·27 제주도지사 선거일 직전의 일이다. 어느 날 아침 제주의 한 유력일간지 신문을 받아든 취재기자들은 눈을 의심했다. 이 신문의 1면 사진때문이었다. 당시 선거는 무소속으로 출마한 신구범 후보와 집권여당이자 현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신한국당 후보로 나온 우근민 후보 간의 각축전이었다. 당시는 야외유세 군중의 규모로 각 후보간 지지세와 판도를 예측하던 시절이다. 그렇기에 취재기자들은 현장에 몰린 군중과 지지자들 규모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때였다. 선거일 직전 똑 같은 날 열린 두 후보의 대규모 마무리 유세에서 기자들은 이구동성 신구범 후보의 숫적 우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다음날 받아든 신문의 1면 사진은 그 반대였다. 아무리 봐도 우근민 후보 측의 군중수가 신 후보 측 유세군중보다 많아 보였다. 하지만 사진을 찬찬히 훑어보던 기자들은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우 후보 측 유세현장의 앞 자리를 차지한 특정 인물이 세 번이나 겹쳐 나왔기 때문이다. 사진을 합성, 지지군중이 더 많아보이도록 한 고의적 사진조작이었다. 민선 2기인 1998년 그 시절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의 제주지사 후보 경선은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경선이다. 도지사 후보
기가 찰 노릇이다. 도덕불감증이 이 정도 수준인지는 몰랐다. 해명은 더 가관이다. 이러고서 제주도 공익기관 최고의 수장이라는 ‘제주도지사’ 자리를 노렸다니 어이가 없다. 농락 당한 느낌이다. 모욕감마저 든다. 문대림 더불어민주당 제주지사 예비후보의 ‘명예 골프장 회원권’을 바라보는 유권자의 시선은 개운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경악 그 자체다. 18일 JIBS 공개홀에서 열린 후보자 합동토론회에서 나온 이 파문은 후보자간 공방과 논평으로 종결될 일이 아니다. 양측의 주장과 변명, 추가 공방이 이어지고 있지만 사실관계만 정리하면 사안은 사실 단순하다. 시점은 문대림 예비후보가 의장 재임시절인 2010년 이후란 주장이 있지만 문대림 예비후보의 해명대로라면 제주도의회 환경도시위원장으로 재임하던 2009년 5월 그는 타미우스골프장으로부터 이른바 ‘명예회원권’을 받았다. 당시 그 골프장은 경영난으로 기업회생절차를 밟고 있었다. 게다가 우근민 전 도지사 역시 이 ‘명예 회원권’을 받았다. 물론 골프장을 이용할 때마다 무료 또는 할인의 혜택을 문 후보는 누
낙인(烙印)은 불에 달구어 찍는 쇠붙이로 만든 도장이다. 과거 소와 말 등 가축이나 심지어 노예에게 이 낙인을 찍어 구별의 수단으로 삼았다. 현대에선 ‘씻기 어려운, 부끄럽고 욕된 평판’을 ‘낙인’이라고 비유적으로 이른다. 매도(罵倒)의 국어사전적 정의는 ‘심하게 나쁜 쪽으로 몰아세우는 것’이다. 일방적이며 긍정의 가치를 모두 훼손하고 말 그대로 ‘몰아 세우는 것’이다. 구호(口號)의 사전적 정의 역시 “집회나 시위 등에서 어떤 요구나 주장 따위를 나타내는 간결한 말”이다. 예전에는 “궁중 잔치 때 악인(樂人)이 풍류에 맞추어 올리는 찬양의 말을 이르던 말”이다. 2002년 6·13 지방선거에서 패한 한 후보는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 한 회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들의 인신매도와 낙인찍기, 덮어 씌우기 전술은 참으로 절묘하단 생각이 든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상대방의 지지그룹을 마치 ‘빨갱이’ 물감을 칠하듯 한 마디로 재단하는 걸 보면 다른 건 몰라도 그들의 음해·공작 방식은 지금도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그 때쯤 내 지지그룹을 통칭하던 말이 유행어처럼 나돌기 시작했다. 천기오축(天基五畜)! 천주교와 기독교 세력을 하나로 몰아 세워
눈물이 흘렀다. 70년 통한의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슬픔이었다. 한국현대사 최대의 ‘홀로코스트’였다. 이념의 굴레에 갇혀 숨죽이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하지만 2018년 4월3일-. 그래도 제주도민은 그나마 위로를 얻었다. 이를 악물고 참았던 감정을 그나마 추스를 수 있었다. 현직 대통령의 발언 한마디 한마디는 그 점에서 유족들의 마음을 관통했다. “저는 오늘 여러분께 제주의 봄을 알리고 싶습니다. 비극은 길었고,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날 만큼 아픔은 깊었지만 유채꽃처럼 만발하게 제주의 봄은 피어날 것입니다.” “이 땅에 봄은 있느냐?”는 제주도민들의 물음에 내민 문재인 대통령의 대답이다. 2018년 4월3일 국가추념일 지정 후 현직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추념식에 참석한 그의 말이었다. 그는 이어 말했다. “70년 전 이곳 제주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이념의 이름으로 희생당했습니다. 이념이란 것을 알지 못해도 도둑 없고, 거지 없고, 대문도 없이 함께 행복할 수 있었던 죄 없는 양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는 메시지를
연말연시는 결국 시작과 끝이다. 한해를 마무리하고 또 한해에 대한 기약과 희망을 가져본다. 그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안덕면 신화역사공원에서 맞았다. 물론 새로운 한해의 출발도 그곳에서였다. 지난해 마지막 날 저녁 9시 ‘도민무료입장’을 실감하듯 1만5000여명이 몰렸다. 3만5000원인 입장권이 무료였고, 그렇게 도민들은 쏟아졌다. ‘카운트다운 파티’란 이름으로 불꽃놀이와 환호가 이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리도 자괴감이 엄습해오는 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한참동안 과거를 더듬어봤다. 지금으로부터 15년여 전인 2002년 제주도는 ‘국제자유도시’란 간판을 내걸었다. 정부와 제주도가 의기투합하듯 선도·핵심프로젝트들이 속속 등장했다. 신화역사공원은 그중 하나다. 제주의 신화와 역사, 제주의 전설이 깃든 매력적인 제주의 대표적 테마파크를 조성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지금 그 자리엔 그런 ‘주제’가 없다. ‘J지구’란 공간에 그 내용이 후속개발의 형식으로 담길 것이라 하지만 전체 공간에 비해선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저 구색만 갖
우리는 1967년생이다. 양띠다. 우리는 1974년 지금의 초등학교라 부르는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코흘리개 시절이건만 그해 8월15일 터진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피격사건을 보며 곧 전쟁이 터질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새마을운동 정신의 뜻을 머리에 새겼고, 박정희 대통령이 제정·공포했다는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우는 교내경시대회까지 치렀다. 1977년 우리나라가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는 쾌거는 자부였다. 우리는 초등 6년 시절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은 부하가 쏜 총탄에 맞아 숨졌다. 머리를 깎고 중학생이 되던 해인 1980년엔 광주5·18이 터졌다. 한참 지난 성년이 되고 나서야 뒤늦게 실체를 알았지만 그건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학살이었다. 그래도 세월은 흘렀다. 중3 시절 두발 자율화란 정책으로 헤어스타일을 신경 쓰기 시작했고, 고교에 들어가자 교복도 자율화돼 어울리는 사복을 차려 입느라 부모에게 많이 졸라댔다. 팍팍한 형편인 부모의 속마음을 잘 몰랐다. 지금 세대는 모르지만 학교군사훈련 때 입던 교련복이 그래도 부모의 처지를 이해한 친구들이 즐겨 입던 ‘준교복’이었다. 우리
▲ 민선 5기 시절인 2011년 11월11일 우근민 지사가 세계7대자연경관 선정을 알리며 기뻐하고 있다. [제이누리DB] 애초엔 그저 심심풀이 수준의 제안이나 다름 없었다. 제주도청을 출입하던 한 기자의 제안이었다. 웹서핑을 즐기던 그가 “제주도 역시 한번 뛰어보는게 어떠냐”고 제주도 관광국장에게 건넨 아이디어였다. 은근히 압박으로 느낀 그 국장은 곧바로 손사래를 치기도 어려웠던지라 관광공사로 해당 업무를 넘겼다. 3000만원의 예산으로 “한번 해보라”고 한 게 고작이었다. 민선 4기 김태환 도정 말기의 일이다. 그랬던 게 어느 날 제주도 최대의 목표로 둔갑했다. 2010년 7월 취임한 민선 5기 우근민 도정은 이 문제에 한마디로 사활을 걸었다. ‘세계 7대 자연경관’ 이벤트를 향한 그의 도전이자 그 시절 제주도 전공무원이 악착같이 달라붙은 지상최고의 과제였다. 그리고 그 제주는 민선 5기 우근민 도정의 치열한(?) 노력 끝에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2011년 11월11일 제주는 ‘세계 7대 자연경관’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10년여 전인 2007년 5월로 기억한다. 서울과 제주를 오가던 중앙언론사 재직시절이다. 잠시나마의 서울근무를 마치고 다시 제주가 근무지가 된 무렵 친한 벗이었던 제주도의 한 간부공무원이 말을 건넸다. “어떤 언론인 출신이 지원을 요청하는데 무슨 제주도를 빙 둘러서 걷는 길을 만들겠다”며 도의 지원을 요청하더라는 것이다. 무릎을 쳤다. 기가 막힌 아이디어란 생각이 들었다. 제주도가 도와줄 돈 역시 고작 3000만원이었다. 물론 그 친구 역시 젊고, 관광분야에 전문가였기에 마음은 이미 도울 채비를 하고 있던 터였다. 이유가 있었다. 사실 2000년대 중반으로 접어들며 한국의 관광산업은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배운 이른바 ‘깃발관광’은 그 수명을 다했다. 전국 곳곳마다 관광객이 떼지어 다니는 풍경은 고루했다. 물론 제주 역시 ‘한국관광의 1번지’였지만 제주행 관광객 패턴은 해가 갈수록 가족·개별관광객 패턴으로 급속히 이전하던 때였다. 세상이 그렇게 변해갈 진대 ‘걷기’로 방향을 틀자는 생각은 당연히 신선할 수 밖에 없었다. ‘스피드&rsqu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