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자들이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기는 말이 있다. 정치학도들이 코흘리개 신입생 시절 <정치학개론>을 수강하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말이다. “정치는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란 개념규정이다.
‘정치’에 대한 다양한 개념정의가 있지만 정치학계에서 다수로부터 설득력과 타당성을 인정받는 진술이다. 캐나다 출신으로 하버드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시카고대에서 교수로 재직한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이 설파한 '정치'에 대한 개념정의다.
그냥 문장으로만 놓고 보면 간단한 수사(修辭)로 보이지만 그 개념정의엔 어마어마한 가치와 철학이 내재돼 있다.
정치-. 우리나라에서 이 단어만큼이나 부정적 요소를 내포한 게 있을까? 부정·부패·담합·패거리·철새·편가르기·지역주의···. 순간 떠오르는 부정적 단어만 놓고 봐도 우리의 정치에서 풍기는 인상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흡사 토마스 홉스(T. Hobbs)가 말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처럼 무한 갈등과 분열, 정글의 냄새가 더 강한게 우리 정치현실이다.
치열하게 치고 받고 싸우는 약육강식만이 눈에 선하다. 하지만 그건 '정치'가 아니다. 지금껏 우리 국민들이 보아온 현실은 오히려 ‘패거리적 작당’의 성격이 더 강하다.
국가를 유지·존속하는데 필수적인 ‘정치’를 그런 방식으로 하면 필연코 그 국가는 존속하기 어렵다. 물론 데이비드 이스턴이 말하는 '정치' 역시 그런 혐오의 대상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 정치과정이 목표하는 바는 ‘배분’(Allocation)이다. ‘최소의 비용(cost)으로 최대의 효과(benefit)를 얻는 것’에 주목하는 ‘경제’와는 판이하게 다른 게 바로 ‘정치’다.
‘저비용 고효율’에 주목하는 게 아니라 ‘나눠줘야 한다’는 것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것도 권위(Authority)를 갖춰야만 가능한 것이다. 총·칼로 무장한 쿠테타와 같은 방법으로 권력을 침탈하는 방식은 그래서 그런 ‘권위’가 없다. ‘권위’란 누가 눈을 부라리며 '폼'(?)을 잡아서 생기는 게 아니다. 무릇 보통 사람들로부터 자연스레 ‘인정’을 받아야 생기는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의 권력은 더 그렇다.
그 점에서 민주적 선거(election)는 절차적 정통성(legitimacy)이다. '권위'는 한 마디로 정당성과 정통성을 갖춰야만 인정되는 것이다.
그렇게 얻은 ‘권위’가 나눠줄 대상도 ‘돈이나 재산’이 아니다. 엄연히 ‘가치’(value)다. 어떤 이는 그런 가치를 '돈'으로 생각할 테고, 어떤 이는 그걸 ‘정신적 유산’으로 볼 수도 있으며, 어떤 이는 그걸 사회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결국 정치인(statesman)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공감하는 가치를 판별할, 더 큰 공동체로 만들어갈 ‘가치’를 분별해낼 혜안과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구성원들이 원하는 가치를 제대로 나눠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정치인’이 '정치꾼'(politician)과 다른 점이다.
유권자들의 몫은 이 지점이다. ‘정치인’과 ‘정치꾼’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6·13 선거에 출마한 이들의 면면과 발언, 그동안의 행적으로 보면 사실 구별할 수 있다. 누구는 공동체의 먼 미래를 보고 있는 반면 누구는 당장의 이해관계에 따라 온갖 유혹의 언어를 설파한다. 누구는 책임질 미래를 생각하지만 누구는 책임지는 건 나중의 문제일 뿐 그저 지금 당장이 관심이다. 누구는 ‘그들만의 리그’를 꿈꾸지만 누구는 ‘우리 공동체의 번영’을 꿈꾼다.
그래서 ‘선거에서 투표란 누구를 뽑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를 뽑지 않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한다. '최악'의 출현을 저지하기 위한 '차악' 또는 '차선'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시카고 저널 Chicago Journal〉과 <헤럴드 트리뷴 Herald Tribune〉에서 이름을 날렸던 미국의 명칼럼니스트 프랭클린 P. 아담스의 말이다.
게다가 누구에게나 자유로운 이 투표권은 돌이켜보면 피와 눈물, 땀으로 우리의 부모·선배 세대가 일궈낸 역사다. 포기해선 안될 너무도 소중한 권리다. [제이누리=양성철 발행·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