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을 앞둔 나이, 그것도 7대 독자, 부모의 꿈은 대학교수였다. 하지만 그리 되지 못했다.
교사에서 학원강사, 그리고 파산-. 도피하듯 떠난 인도네시아. 앞서 그의 삶이지만 이제 그의 터전은 제주다.
제주시 연동에서 손선생 수학교실을 운영하는 손홍익(59) 원장. 자카르타에서 꿈꿔온 삶을 제주에서 펼치는 인물이다.
그는 어릴 적 죽 부산에서 자란 부산토박이다. 연을 날리며 하늘을 바라봤고, 새하얀 구름과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보낸 세월이기에 지금 제주는 그의 어린 시절 동경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유년시절 부모의 바람은 대학교수였다. “부자가 다가 아니라 남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어머니 역시 그런 그를 다독거리는 ‘신여성’이었다.
어릴 적 부모가 그렇게 말리던 자전거를 타다 죽을 뻔 한 적도 있다. 만류해도 끝내 페달을 밟더니 두어 번 사고도 겪었다. 어머님은 “너에게 실망했다. 하지만 죽을 운명이었으면 죽었을 것, 그래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끈기, 실패해도 일어서는 오뚝이 정신은 꼭 기억하렴.” 어머니가 노여움 속에 넌즈시 건넨 말이다.
그렇게 자라 부산대 수학교육과를 나왔다. 그리고 1981년 부산동아공고 교사로 발령받았다. 대학교수까진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희망인 ‘선생’은 된 것이다.
그러나 교사생활 11년만에 집이 무너졌다. 아버지의 사업은 곤두박질쳤고, 스스로도 빚을 갚아야 하는 ‘생활고 전선’으로 내몰렸다. 물론 그렇다고 좌절할 일은 아니었다. 그 시절 박봉 교사월급 보단 나은 학원강사의 길을 걸어갔다. ‘고액과외선생’이란 꼬리표가 따라 붙었고, 집안의 빚도 서서히 줄었다.
내친 김에 아예 학원을 차렸다. 3명의 강사로 시작했는데 입소문이 버져 30명의 강사를 뒀다. 인생의 빛이 보이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1997년 말 나라에 불어닥친 구제금융(IMF) 여파는 손 원장을 비켜가지 않았다. 물론 부모가 실직의 늪에 빠진 마당인데 수강생들이 버틸 리 만무. 속속 수강생들이 줄어들더니 무리해 차린 학원은 다시 빚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버틴 시간은 고작 1년. 결국 파산했다. 그 와중에 5살박이 아들을 잃었다. 교통사고였다. 풍비막산이 났다. 영혼은 한 없이 쪼그라들었고 정신적 방황을 거듭하는 사이 아내도 떠났다. 이혼의 시련을 겪는 와중에도 남은 건 빚 밖에 없었다.
떠났다.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 몇 권의 책을 담은 가방 두개를 들고 1999년 무작정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떠났다. “자카르타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주변의 수군거림에 귀가 솔깃했다. 생활비가 고작 한국의 10분의 1수준이라는 데 마음 속에 자명종이 울렸다. 그 즉시 떠났다.
모든 게 낯설었다. 고될 뿐이었지만 기회는 찾아왔다. 어쩌다 알게 된 이 소개로 현지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자녀를 맡았다. 과외수업이다. 열심히 가르쳤다. 열정을 알아주는 학부모가 생겨났다. 한 책상머리에 마주하는 아이들이 하나둘씩 늘기 시작했다. “자고 일어나니 유명인사가 됐다”고 했던가? 부지불식간에 자카르타에서 이름을 날리는 수학선생이 됐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한풀이하듯 다시 입시학원의 문을 열었다. 돈벌이도 쏠쏠했다. 마음 속에 가진 미안함을 덜어내듯 갚지 못한 돈을 한푼씩 갚아나갔다.
“저를 도와준 분 가운데 1000만원을 보증섰다가 저 때문에 일순간에 날린 상황이 된 분이 있었죠. 돈 빌릴 때 아마 그 분 주변에서 수군거렸나봐요. 별 이야기 없이 자카르타로 떠나자 그 분 주변에서 ‘갚는다, 안 갚는다’ 수군대며 내기를 걸었나 봐요. 갚았으니 이젠 떳떳합니다.”
지금의 아내는 자카르타 입시학원을 운영하며 만났다. 이름은 데비 수잔나(Debbie Susana matik·37). 학원서 서무를 보던 직원이 추천으로 그를 뽑았는데 이제 아내가 됐다. “순수해 보이는 수잔나가 아무래도 더 일을 잘할 것 같다”고 해서 채용했는데 이제 평생의 반려자가 됐다.
하지만 매사 궂은 일을 도맡아 수잔나의 모습에 반했다. 결국 아들을 얻었다. 지금 10살이다.
그런 수잔나는 제주를 좋아했다. 물론 고교 선생 시절 다녀온 제주풍경은 손 원장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나이가 들면 꼭 살고 싶은 땅이었다. 게다가 자카르타에서 머물던 무렵에도 수잔나는 시댁인 경남 밀양에 다녀가면서도 꼭 제주를 찾았다.
목표를 정했다. 악착같이 돈을 벌어 제주살이의 꿈을 실현하겠다고-. 그러나 그게 맘처럼 되는게 아니었다. 7~8년의 자카르타 살이 동안 고령의 어머니는 점점 기력이 쇠해졌고, 혼자 기쁜 제주살이가 아니라 어머니를 잠시라도 곁에서 모셔야 할 판이었다.
자카르타와 인연도 거의 바닥이 났다. 인도네시아의 비자정책이 바뀌어 한국어를 제외하곤 외국인이 강사가 될 수 없었다. “떠나야 될 시가 온 거였죠.”
그렇게 밀양으로 찾아갔지만 수잔나의 가슴앓이가 시작됐다. 적응도 쉽지 않았다. 향수와도 같았다. 수시로 인도네시아 선배의 일을 돕느라 7, 8개월 밀양 집을 비울 때도 있다보니 아내의 고충은 말이 아니었다.
파란만장한 삶이 폭풍처럼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가했다. 제주행을 결행할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이제 밀양에 좀 살만하다”는 아내를 뿌리치고 제주로 갔다. 일종의 선발 수색대원 격이었다. 곳곳에 발품을 팔고 다녔고,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선택한 마을이 애월읍 소길리-. 그럴 뜻이 아니었다. 어찌어찌 알게 된 분이 제안으로 그 분이 짓는 집에 세를 얻었건만 우연찮게 유명 연예인(이효리)도 그 즈음 그 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이제 제주에 둥지를 튼 지 1년여 무엇보다 아들 동민(10)이가 제일 신났다. 수잔나 역시 그래도 그럴싸한 집을 보자 만족했다. 수잔나 역시 특유의 친화력을 보인다. 마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주말마다 안 빠지고 가족끼리 놀러가요. 공기도 좋고 풍경도 좋고, 조금만 나가도 갈 데도 많고 놀 데도 많은 곳이 어디 있겠어요.” 수잔나의 반문이다.
이제 그들에겐 또 다른 꿈이 익어가고 있다. 요즘 제주에 인도네시아 관광객이 늘어가서다. 인도네시아 자유여행객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를 만드는 것이 이 부부의 꿈이다.
수잔나는 한식 요리를 배우고, 손 원장은 목공을 익힐 생각이다. 본격적인 인도네시아 여행객 맞이 채비다.
“저희들의 역할요? 제주와 자카르타를 잇는 문화 다리가 돼 볼 생각입니다. 두 곳이 접목된 스토리 하우스를 만들게요. 꼭 다시 와서 구경해주세요-.”
생경한 땅 제주에서 새 꿈을 설계하는 ‘다문화가정’의 포부다. [제이누리=김동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