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정치는 어떠한 감정을 담고 있었을까?
중앙정부가 제주도에 목사를 파견한 것은 고려 1295년(충렬왕 21)부터인 것으로 가늠된다. 이때를 기해 정부가 간헐적으로 제주를 집권해 왔으며, 이전에는 제주가 탐라국으로서 독립된 주권을 행사하였다. 참고로 탐라국(耽羅國)은 기원전 57년(탐라국왕세기에 의하면 기원전 2337년) 경에 시조 고을라왕(髙乙那王)이 세운 고대왕국으로 1402년까지 유지되었다.
이후 백제, 신라, 고려에 복속되었다가, 15세기 초반 조선에 완전히 병합됐다.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제주를 주호(州胡)라 칭한다. 기록된 바, ‘주호는 마한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으로,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중(韓中)과 교역한’ 국가다. 조선이 건국된 후, 1397년(태조 6)에 제주목이 설치되었고, 이때부터 제주는 조선에 속한 영토로 중앙의 지속적인 관리를 받기 시작했다. 이로써 우리를 가슴 설레게 하는 ‘탐라국 천년’의 역사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문화재박물관).
홍순만의 ‘제주목사에 관한 서설’에 의하면, 조선시대(1392-1910)를 통틀어서 제주목사를 역임한 사람은 총 286명에 달하며, 평균 재임기간은 1년 10개월 정도다. 이는 미부임자를 제외한 숫자로, 약 10명 정도가 자신이나 가족의 질병 등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원백규의 경우는 미부임으로 파직이 되었으며, 김중희는 사표를 내고 부임하지 않아 유배를 당하였다. 참고로 당시 지방 수령의 임기는 통상 30개월(2년 6개월)이었다. 또한 재임 중 사망한 사람이 21명으로 7%,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거나 파직된 경우가 68명으로 23%를 차지한다.
게다가 부임 후 6개월을 넘기지 못한 경우가 28명으로 9.7%, 1년을 넘기지 못한 목사가 65명으로 22%다. 따라서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1년을 넘긴 경우는 채 40%가 되지 않는다. 이중에서 선정을 베푼 이들은 58명으로 20%, 학정을 행하거나(14명, 4.8%) 실정을 범한 자들(15명, 5%)은 10% 가량 된다. 나머지 10% 정도는 있으나 마나 했던 목사로 간주된다.
이상의 통계들은 제주목사에 제수된 것이 그다지 명예롭거나 가슴부푼 게 아니었음을 짐작케 한다. 오히려 심기가 불편하고 주저되는 자리로 보이는 면도 있다. 간혹은 유배보다 더 잔인하게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었다. 사실 제주는 본토와 멀리 떨어진 절해고도로, 비바람이 많고 열병이 있어 위험하니 유배지나 도피처가 되던 국토의 변방이다. 그러니 제주 목사로 부임해 오는 심정들이 오죽하였으랴.
하지만, 그 비장한 마음으로 멀고도 험한 길을 내려와서 목사직에 충실한 이들은 그만큼 백성들로부터 칭송과 기림을 받았다. 다음은 제주 도민들에게 선정을 베풂으로써 그 가슴 뜨거운 이야기가 지금까지 구전되어 내려오는 몇 가지 사례들이다.
우선 세종 때 부임한 기건 목사는 해녀들이 나라에 바치기 위해 바다에 맨 몸을 던져 전복 캐는 것을 보고 매우 가슴 아프게 여겼다. 하지만 세금의 징수와 관련된 것이니 그만두게 할 수도 없는 노릇. 그는 “백성들이 고통 받는 게 이와 같은데, 내가 차마 그것을 먹을 수 있겠는가?”라며 자신의 밥상에는 전복을 올리지 못하게 하였다(용재총화). 이는 다만 전복을 입에 대지 않는 행위에 그친 것이 아니라, 진상을 빙자해서 전복을 가로채는 이졸들의 비리를 사전에 엄금하기 위한 예고였다.
또한 당시 제주에는 사람이 죽으면 골짝의 구덩이에 버리는 경우(풍장)가 많아, 관을 만들고 염(殮)을 하여 장사하는 장례법을 가르쳤다. 그저 우민들의 풍속이거니 하고 내버려 두지 않고 인의(仁義)와 의례(儀禮)를 가르침은 백성을 사랑하는 심정의 발로였다. 이러한 애민정신은 나병환자들이 바닷가 바위틈에서 신음하다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벼랑에서 떨어져 생명을 끊는 현장을 목격하고는 바로 나병환자전문치료소 구질막(救疾幕)을 설치한 것으로 입증된다. 그는 환자들을 모두 구질막에 불러 모아 의복과 식량, 약물을 주고 바닷물에 목욕시켜 대부분을 완치시켰다. 2년간의 짧은 재임이었지만, 긍휼의 눈으로 도민들의 살림살이를 보살펴서 그 형편을 개선시킨 선정의 모범이다.
성종 1년에 부임한 이약동 목사는 도민들이 조세와 부역,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당장 공물과 세금에 관한 문서들을 점검했다. 검토 결과, 관아의 벼슬아치들이 상당량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게 확인됐다. 그는 조사해 놓은 자료에 기초해서, ‘공물을 가로챈 자들이 누구냐?’고 호통 쳤다. 처음에는 ‘쥐가 먹은 모양’이라고 둘러대던 아속들도 끝내는 머리를 조아리기에 이르렀다. 비로소 관아내의 ‘머리 검은 쥐’들이 모두 적발되고 비리가 척결되었다. 이렇게 만 3년을 재임하는 동안, 관료들의 부패와 민폐를 단속하고 세공을 감면해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또한 백성들이 한라산 정상에서 산신제를 지내느라 동사자가 속출하는 것을 보고 산 밑에다 산천단을 만들어 안전하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마침내 임기가 만료되어 떠날 때는 의복, 마필 등 관아에서 얻은 모든 물건들을 놔두고 떠났다. 가던 도중에 문득 자신을 살펴보니 손에 쥔 말채찍이 제주도의 관물 아닌가? 즉시 발길을 돌려서 그것을 성벽 바위에 걸어놓은 후, 다시 오던 길로 돌아갔다. 그동안 수령들이 잡다한 명목 하에 섬사람들을 착취하고 이임 시는 수많은 토산품을 배에 가득 싣고서 떠났다는 소리에 분노해 온 그였다. 그러니, ‘이참에 차기 목사들에게 이런 악폐를 금지시키자’ 싶어서 작심하여 행동한 일이리라. 말년에는 끼니조차 걱정할 정도로 청백하게 살아, 그 삶이 오늘의 관리들에게 윤리의 지침으로 비춰지고 있다(국민권익위원회, 부산시).
성종 21년에 부임한 이종윤 목사는 도민 교육과 바른 정사로 제주인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섬 안에 서책이 매우 부족함을 보고 임금께 아뢰어 사서와 소학 등을 하사받았으며, 그것을 향교에 비치하여 평생학습을 장려하였다. 또한 목사가 대민행정을 판관에게 일임하고 왜구의 방어 등 군사적 임무에만 전념하는 관례를 깨고, 판관과 함께 앉아 소송 등 주민들의 이해가 큰 민사에 직접 관여했다. 그리고 절기마다 목사에게 바치는 술과 안주, 선물 등을 일체 금지해 민폐를 삼갔다. 또한 제주의 농토가 메마르고 태풍이 잦아 흉작을 면키 어려울 때가 많으므로 농작물의 풍흉에 따라 적절히 과세토록 본토와 조세제도를 차별시켰다.
임기가 만료되어 떠나게 되자 주민들이 유임을 진정해 임금의 허락을 받아냈다. 다음은 성종실록에 기록된 도민들의 청원이다. ‘이번에 온 목사 이종윤은 판관과 함께 소송 등 민사를 직접 판결하니, 송정에 남아 있는 송사가 없고 감옥에 억울한 백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민(流民)들이 스스로 돌아오며 생활이 안정되고 생업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임기가 다하여 떠나게 되니, 저희는 마치 어린아이가 유모를 잃는 것 같습니다’(조선왕조실록, 성종 267권, 23년). 그가 4년 4개월 동안 제주목사로 재임하던 중 병이 들어 그만 별세하자 온 도민들이 죽음을 애도하였다. 승정원의 연임 평가처럼 ‘그는 실로 어진 사람’이었음이 사후에 더 널리 알려지고 있다.
영조 때 부임한 김정 목사는 주민들의 풍속이 예절에 어둡고 학문에 둔감함을 보았다. 목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배움이었다. 그는 즉시 삼천서당을 창건하고 문화와 교육을 진흥시켰다. 뿐만 아니라 사비로 쌀과 무명 200필을 내놓아 삼천서당 학생들의 식량으로 삼았다. 그리고 유생들에게 서당 맞은편에 있는 바위를 가리켜 ‘지주암’이라 칭하며, ‘격한 여울 물살 속에도 우뚝이 홀로 서서 오랜 세월 견뎌내는 군자가 되라’고 당부했다. 동시에 대동미의 양을 감하여 주민들의 짐을 덜어주고, 어선을 축조하여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쳤다. 또한 육지와의 관문인 화북포가 협착하고 조수가 빨라 배들이 표류하거나 침몰하는 경우가 많음에, 포구를 확장해서 방파제와 선착장을 축조했다. 이를 위해 자신이 직접 돌덩이를 등에 져 나르며 역군들의 작업을 도왔다. 마침내 2년 4개월의 임기를 마치고 제주를 떠날 즈음, 그만 병환을 얻어 포구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을 고향으로 운구하기 위해 배 줄을 만들며 죽음을 슬퍼하던 동네 아낙네들이 삼단머리를 잘라서 줄에다 엮어 넣었다. 그리고 그의 대소상 때 도민들이 바다를 건너가 부조를 내놓아 비석을 세우고, ‘3년간 관직에 계셨지만 만세가 되어도 잊지 못한다’며 글을 새겨 울었다.
이상의 사례에 등장하는 제주 목사들의 공통점은 ‘위정자에게 규정된 업무 이상의 헌신과 사랑으로 도민들의 가슴속에 한없는 신뢰를 심어준 것’이다. ‘사랑의 정치’라고 할까? 아니면, ‘가슴이 따뜻한 리더십’이라고나 할까? 진정으로 도민을 생각하는 사랑을 품고, 그 삶의 현장을 직접 돌아보며 체험하고, 도민의 입장에서 개선, 개화, 개혁의 조치를 사심 없이 취한 도백들이다. 다만 목사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도민의 눈물을 닦아주고 아픔을 공감하며 더 나은 삶을 위해 어버이처럼 일하였다. 마치 백성을 울리기까지 하는 감동의 정치는 직무의 수준을 뛰어넘는 희생과 봉사로 이룩되는 경지임을 몸소 보여준다.
그야말로 정치란 사랑이 필요한 기술임을 역설하는 교훈들이다. 동시에 애민의 리더는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영원히 기억되고 전파되며 끊임없이 재생됨을 오늘의 도정 후보들에게도 기약하고 있다. 요컨대, 정치도 경영처럼 고객(도민)이 만족하면 그 제품(도지사)을 재구매하거나 입소문 냄으로써 충성도가 발현되는 원리의 장이다. 그러니, 바야흐로 사랑의 정치를 시작할 때가 아닌가? 도민의 아픔과 슬픔을 함께 하면서 자기 모두를 도민에게 되돌려 주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정치 말이다. 도민들로부터 선출된 정치인이 공익이 아니라 사욕을 추구하는 것은 범죄다. 나아가, 탐라국 천년의 기회를 다시 끊는 직무유기다. 지금 제주는 역사의 경계를 넘어 다음 사회(Next Society)로 나아가는 분수령에 멈춰 있다./ 전 제주국제컨벤션센터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