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되면 마당으로 나가서 대문을 지키듯 앉아 계시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대문 밖으로 나가서 집 주변의 길가를 살펴보아도 계시지 않는다. 이럴 수가.... 발끝을 올려서 시야를 더 넓혀 사방을 휘둘러보지만, 안 보인다. 이 정도면 어머니의 걸음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의 최대치인데.... 덜컥 겁이 났다. 지난번에 어머니를 잃어버렸을 때 119가 가르쳐준 어머니의 가능한 동선을 훑어봐야 할까 싶다. 자동차를 끌고 그 당시 어머니가 쪼그려 앉아 계시던 동쪽으로 향했다. 세상에! 어머니가 한 집 건너 이웃해 있는 펜션 앞에 동그마니 앉아 계시지 않은가. 마치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초췌한 모습이다. “어머니! 무사 여기 왕 이추룩 앉안 이수광? 어머니 잃어부러시카부덴 막 걱정되연, 애가 타게 촞아댕겸수게!” 그러자 어머니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 나왔다. “나, 이제는 죽어지민 조키여! 무사 나만 영 오래 살아점신고 이?” “어머니, 그게 무신 말이우까? 이제 백살이난 막 오래 살아진 거 닮아도, 요양원에 가민 백 다섯 난 할망도 이수다. 대포 부택이 어멍은 백두 살이라도 막 정광해영, 동네 이디저디 돌아댕기멍 재미나게 살지 안 햄수광? 경 허난, 어머니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V는 마침내 필생의 사업으로 삼았던 영국 국회의사당 폭파를 마무리 짓는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장면이기도 하다.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홍보하는 국영방송사를 폭파하는 것까지는 수긍할 수 있지만 ‘자유민주주의’의 상징인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까지 날려버리는 장면은 뜻밖이다. V는 영국 국회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 사원 지하를 통과하는 지하철 열차에 화약을 가득 실어 출발시킨다. 영국 국회의사당이 폭발하는 순간 밤하늘을 덮은 폭죽은 그대로 아름다운 축제의 불꽃놀이가 된다. 런던의 밤거리에 모여 영국 국회의사당을 날려버린 불꽃놀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얼굴엔 기쁨의 미소가 번진다. ‘빅 벤(Big Ben)’ 시계탑으로 유명한 영국 국회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누가 뭐래도 워싱턴의 미국 국회의사당과 더불어 세계 자유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양대 기념물이다. 마블에 등장하는 최악의 빌런이 아니고서야 인류의 오랜 염원을 담은 숭고한 자유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저토록 증오하고 조롱할 수 있을까. 빌런이 아니라 ‘우리들의 영웅’으로 그려진 V가 자유민주주의의 상징을 날려버리고, 시민들은 그 모습에 비로소 안도하고 새 희망의 미소를 짓는 영화 속 장면은 자못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공포와 불안감을 나타내는 게 전부가 아니라 사랑의 시작이라고 말해주는 영화가 있다. 31분짜리 짧은 상영 시간이지만 완성도와 감동이 100% 충전된, 허진호 감독이 만든 독립영화 ‘두 개의 빛: 릴루미노(Two Lights: Relúmĭno, 2017)’다. 제목에서 말하는 두 개의 빛은 감독이 의도한 것도 있겠지만, 관람자 각자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어차피 예술 작품의 주제와 감동은 감상하는 자의 것이니까.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잘 쳤으나 점점 시력을 잃어 ‘저시력장애’를 가지게 된 서인수(박형식)는 현재 피아노 조율사로 일하는 청년이다. 그와 달리 장난기 넘치고 밝은 성격의 안수영(한지민)은 냄새로 일하는 조향사(아로마 테라피스트)다. 7살 때부터 안 보이기 시작해서 현재 한쪽 눈은 아예 안 보이고, 다른 쪽은 안개 낀 것처럼 뿌옇게 보일 뿐이다. 수영이 사진동호회에서 함께 출사(사진 찍으러 나가는 일)를 다니면서 좋아하는 감정을 표현해도 인수가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점점 잃어 가는 시력 때문에 걱정과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수는 동호회에서 만난 시각장애인들이 한결같이 밝은 척하는 것도 못마땅하다. 안 보이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면하는 인간관계에서 갈등을 겪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오해나 이해 부족, 즉 상대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아닐까?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내가 살아가는 동안은 절대 무심해질수 없다. '내가 이만큼 내어줬으니 너는 나에게 이만큼 돌려줘야 해'라는 계산이 아니더라도 어느 순간 훅하고 들어올 때가 있다. 기대치가 큰 만큼 실망감도 큰 법. 주로 이렇게 서운한 일이 생기는 경우는 내가 마음을 준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잠시잠깐 스쳐지나가는 인연에는 내가 마음을 담아 준 것도 없고, 그 사람에게 기대도 없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예의만 지킨다면 보통의 관계에서는 문제가 없다. 남에게 줄 선물을 고를 때에도 그 사람의 선호가 아닌 내 선호가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관심의 초점이 다르면 편향된 정보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동일한 대상일지라도 해석 기준에 따라 달리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을 나누거나, 내가 마음을 열고 있는 사람에게는 잘해주고 싶은 마음과 관심 받고 싶은 마음에 겉으로는 아무 조건 없이 이해하고 참은 것 같은데 마음 깊이 들여다보면 사소한 대가라도 기대하고
미국의 고강도 긴축 여파로 국내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원화가치가 급락하면서 원ㆍ달러 환율이 1430원을 뚫었다. 1400원대 환율은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9년 이후 13년 만이다. 시장에는 1450원선에 이어 1500원에 이를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원화가치가 가파르게 떨어지자 외국인 투자자들이 주식 매도에 나서며 주가도 속락하고 있다. 급기야 국제 금융가에서 ‘아시아 외환위기’ 가능성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위험한 국가로 한국과 태국, 필리핀이 지목됐다. 아시아 경제의 양대 축인 중국 위안화와 일본 엔화의 가치 급락이 리스크 요인으로 꼽혔다. 두 화폐의 가치 하락이 지속되면 아시아에서 자본 이탈이 가속화해 1997년과 같은 외환위기가 재연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이 위험한 국가로 지목된 가장 큰 이유는 경상수지 적자 우려다. 무역수지 적자가 4~9월 여섯달 연속 이어져도 경상수지는 흑자를 유지해 왔는데 8월부턴 적자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아져서다. 상품수지와 서비스수지, 소득수지 등 외국에서 벌어들인 돈과 외국에 지불한 돈의 차이인 경상수지 적자는 국내 외환보유액을 감소시키는 쪽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가뜩이나 금융시장이 불안한 판에 실물
영화의 배경이 되는 ‘미래 어느날’ 영국은 극악한 ‘전체주의 국가’가 돼 있다고 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영화 속 영국 시민들의 일상은 일견 자유롭고 평화스러워 보인다. 시민들은 깨끗하고 질서 잡힌 런던 거리를 자유롭게 왕래한다. 어떻게 된 일일까. 독재자 ‘슈틀러’가 장악한 영국은 평온하다. 노숙자는 없고 쓰레기도 없다. 너절한 광고 전단도 없다. 시민들을 감시하기 위한 무장경찰이나 계엄령 치하와 같은 탱크도 보이지 않지만 질서정연하다. 시민들은 카페와 식당에서 자유롭게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눈다. 또한 자유롭게 TV를 시청한다. 히틀러나 스탈린이 그토록 꿈꿨던 ‘전체주의 지상낙원’이 마침내 슈틀러 총통이 지배하는 영국에서 실현된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면 다른 ‘그림’이 보인다. 평온해 보이는 거리 곳곳에는 ‘핑거맨(fingerman)’이라고 불리는 사복 비밀경찰들이 섞여 있다. 카페나 식당에도 어느 자리엔가 섞여서 태연하게 식사를 하면서 시민들을 감시하고 있을 터다. 언제든지 불온한 대화를 나누는 시민들을 발견하면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뽑아낼 준비가 돼 있다. 시민들이 ‘자유롭게’ 시청하는 TV는 정부가 보여주고
본보는 지난 2022년 8월 8일자 “<단독>말 많고 탈 많은 ‘제주자연체험파크’...현직 공무원-사업자도 유착의혹”이라는 제목으로 제주시 구좌읍 동복리에 조성되는 ‘제주자연체험파크’ 사업과정에서 현직 공무원과 사업자 사이에 유착의혹이 있다고 보도하면서 자연문화재(동굴유적) 분야 용역에서 책임조사원 직을 수행했던 한국지질다양성연구소 책임연구원 최돈원 씨를 지목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최돈원 씨는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며 현재까지의 조사결과 유착과 관련한 어떠한 사실도 밝혀진 바 없다고 알려 왔습니다. 또한 본보는 지난 2022년 8월 10일자 “<단독> 공무원-사업자 유착 의혹 제주자연체험파크, 환경영향평가서도 ‘엉터리’”라는 제목으로 제주자연체험파크 환경영향평가서가 부실·엉터리로 일관하고 있다고 보도하면서 지질·동굴분야 조사내용을 보면 참고문헌 내용의 짜깁기에 측량기사는 누구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실하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이에 대해 환경영향평가서 내 수록된 ‘동복 사파리 조성사업 부지 내 지질·동굴 분야 조사를 수행했던 한국지질다양성연구소와 책임연구원 최돈원 씨는 사업지 내 동굴존재 가능성에 관해서는 직접 조사를
지난 회차에 이어 시각 관련 영화 세 편을 준비했다. 모두 독특한 구성으로 만들어졌으며, 시사하는 바가 있는 영화, 스릴러, 액션 각각 골라보았다. 장애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사는 곳 2008년 제작되고 산드라 블럭이 주연한 ‘버드 박스(Bird box)’는 시력을 잃는 것으로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무언가를 보게 되면 자살충동을 일으키기 때문에 일부러 눈을 가려서 살아야 하는 상황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이 또한 엄청난 전염력을 지녀서 전 세계가 심각할 지경에 이르고, 말로리(산드라 블록)는 두 아이의 눈을 가린 채 보트를 타고 강물을 따라 도망을 친다. 이틀을 꼬박 극한의 공포와 위험을 겪으며 도착한 곳은 시각장애인 학교. 눈이 안 보이는 장애인들이 대부분이고, 그들은 무엇을 볼 염려가 없기 때문에 안전하다. 두 아이와 말로리는 평온을 찾고 시각장애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게 된다. 재미있는 설정이다. 장애인이 대부분인 사회에서는 주류가 그들이고, 비장애인들은 이방인이 되거나 비주류로 살게 되지만, 반대의 상황에서 비장애인이 안전하고 도움을 받으며 산다는 것..... 버드 박스는 새장을 뜻하는데, 제목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면 좋다. 어둠 속에서 보게 되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ㆍFed)가 21일(현지시간) 기준금리를 예고한 대로 0.75%포인트 인상했다. 3차례 연속 ‘자이언트스텝(금리 0.75%포인트 인상)’이다. 한국은행이 8월 기준금리를 올려 2.5% 기준금리 상한을 맞춰놨는데, 한달 만에 한국-미국(3.0~3.25%) 간 금리 격차가 0.75%포인트로 벌어졌다. 그 여파로 22일 원ㆍ달러 환율이 1400원을 뚫었다. 장중 한때 1410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이미 초강세인 미국 달러화를 찾는 손길은 더 많아질 것이다. 세계적으로 ‘킹(King) 달러’로 불리는 배경이다. 문제는 연준이 기준금리를 계속 줄기차게 올리겠다는 초매파적 방침을 예고했다는 점이다.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위원들의 금리인상 전망을 보여주는 점도표는 연말 금리 수준을 4.4%로 예상했다. 올해 2차례(11월, 12월) 남은 FOMC 회의도 자이언트스텝이나 빅스텝(0.5%포인트 인상)을 단행해야 그 수준에 이른다. 게다가 점도표는 내년 말 기대금리도 4.6%로 예상했다. 미 연준의 통화긴축 의지는 확고하다. 경제 위축을 감내하면서라도 더 큰 고통을 막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잡겠다는 것이다. 연준은 올해
지난 겨울, 직장의 임기를 마칠 즈음, ‘앞으로 무슨 일을 할까?’하는 생각이 문득 문득 머리와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호랑이 장가가는 날에 햇빛 사이로 비가 쏟아지면, 집에 두고 온 우산을 잠깐 잠깐 떠올리는 것처럼. 그런데 같은 생각이 머리를 스칠 때는 이성이, 가슴을 스칠 때는 감성이 움직였다. 올해로 103세를 사시는 김형석 교수님께서 ‘백년을 살아보니 인생의 황금기는 60에서 75세까지’라고 하신 점에 비추어 보면, 실제로 나는 매우 심각하게 이성적인 고민을 해야 하는 지점에 있었다. 그런데 정작은 심도있게 생각하고 다양하게 살펴봐야 할 인생 3모작의 과제를, 마치 말을 타고 달리면서 먼 산을 바라보는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대응하고 말았으니...., 왜 그랬을까? 사실, 나는 이미 답을 정해 놓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오랫동안 가슴으로 결정해 두었던 답이, 현실적으로는 이성적인 판단이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그 답을 묵살하고 넘어간 듯 하다. 제 3자적 입장에서 나의 형편과 처지를 바라보면, 좌고우면 할 필요도 없이, ‘바보야, 직장이 우선이야!’가 답이 되어야 할 터다. 하지만 내 가슴은 ‘아니야, 새해가 되면 백세가 되시는 어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무정부주의를 전면에 내세운다. 영화의 공동제작사 이름이 아예 Anarchos Production Inc.이다. ‘anarchos’는 정부나 통치의 부재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다. 무정부 영화사가 작심하고 제작한 무정부주의 영화인 셈이다. 400년 전 영국 국회의사당 폭파를 시도했던 가이 포크스처럼 ‘미래 어느 날’의 V 역시 ‘무정부주의자’다. 인간들이 국가라는 제도를 발명한 이래 그 존재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는 뿌리가 깊다. 국가와 정부라는 건 사실 ‘필요악(必要惡)’이다. 수술의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수술대에 오르는 것과 같다. 국가와 정부의 간섭과 자유의 제약을 원하는 사람은 없지만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에 물리적 강제력을 맡기고 자신의 재산과 자유의 일부를 신탁(信託)한다. 그 ‘물리적 강제력’이 무서워서 내기 싫은 세금도 내고, 가기 싫은 군대도 가고, 지키기 싫은 법도 지킨다. 국민들은 국가에 신탁한 물리적 강제력을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사용해 주기를 바란다. 그 믿음이 깨지면 국가나 정부는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는 무정부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진
한 일본인이 미국의 도로 한복판에서 파란 신호등이 켜져도 차를 운전하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사람들이 차문을 열게 하고 들여다보니 그 사람은 갑자기 눈앞이 하얘지면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부르짖는다. 겨우 안과를 찾아가서 진료를 받는다. 의사(마크 러팔로)는 혈액검사나 눈 검사를 모두 해봐도 원인을 모르겠다고 한다. 다만 신경 이상으로 인한 실인증(Agnosia)이라고 추측할 뿐. 그 사람을 진료한 안과 의사도, 처음 일본인과 접촉한 사람들도 하나둘씩 같은 증상으로 시야가 '우윳빛'으로 하얘지면서 눈이 멀어져간다. 전염병처럼 번지는 ‘백색 질병(White diseases)’은 삽시간에 도시 전체를 뒤덮어버리고, 정부는 무기력하게 대응하다 강제 수용을 결정한다. 환자들을 잡아다가 과거 병동으로 쓰던 건물을 수용소로 쓰면서 가두고는 방치해버린다.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딱히 어떤 조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무장 군인들로 하여금 봉쇄를 하고 통제권을 벗어나면 사살하라는 명령까지 내린다. 수용된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 혼자 다닐 수 없어서 앞 사람 어깨에 손을 얹고 다녀야만 한다. 이런 모습은 1, 2차 세계대전 당시 포탄 파편이나 화학전 때문에 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