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4월부터 『제주신문』에 매주 2회씩 「4‧3의 증언」이 연재되고, 덩달아 김익렬 장군의 유고록까지 발표되자 4‧3에 대한 제주사회의 관심이 높아졌다. 발표 내용도 기존 자료의 왜곡사례를 지적하는 수준을 뛰어 넘어 미군정과 경찰의 조작사실까지 들추어내자 놀라움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예의 주시하는 분위기였다. 공안당국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제동을 걸고 싶었지만 연재되는 내용들마다 신뢰성 높은 근거가 제시되는 등 빈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고심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월간지 『사회와 사상』에 연재물 그대로 게재 그 무렵 도서출판 ‘한길사’ 김언호 대표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길사는 오랫동안 금기시돼 왔던 해방 직후의 한국현대사 관련 서적을 잇달아 출간함으로써 출판계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김 대표는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으로 대학가와 지식인 사회에서 잘 읽히는 도서를 만드는 출판사 사장으로 유명했다. 1980년대 대학생들의 필독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전 6권)도 그의 기획 작품이었다. 김 대표는 나에게 「4
미군정은 1948년 5‧10선거를 앞두고 딘 군정장관 주재로 제주에서 열린 ‘5‧5 최고 수뇌회의’에서 강경진압 방침을 확정했다. 그동안 온건정책을 폈던 김익렬 9연대장을 해임하고, 후임 연대장으로 박진경 중령을 임명했다. 그리고 미군과 경비대, 경찰, 향보단까지 총동원하여 선거를 치를 수 있도록 독려했다. 5‧10선거를 앞두고 이를 반대하는 시위는 비단 제주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요동쳤다. 딘 군정장관은 남한 땅 1만3800개소의 선거사무소를 3만5000명의 경찰력만으로는 도저히 지켜낼 수 없다는 조병옥 경무부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그해 4월 중순 민간인들을 동원한 향보단(나중에 ‘민보단’으로 변신)을 조직해 경찰을 지원하도록 했다. 5‧10선거 반대운동은 당시 좌파뿐만 아니라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던 김구 계열의 우파와 김규식 계열의 중도파들도 가세하고 있어서 만만치 않은 분위기였다. 그들은 5‧10선거가 한반도를 영구히 두 동강내는 단선‧단정 획책이라며 강력히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군정은 특히 제주도 사태를 매우 중시했다. 4‧3 무
1989년 8월 김익렬 장군의 유고록을 들고 신문사에 돌아오자 편집국이 갑자기 들뜬 분위기가 됐다. 원고를 전면 검토한 송상일 편집국장은 4‧3 초기 미군정의 토벌정책과 군‧경의 대응전략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자료라고 그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편집회의에서 취재반의 본 연재를 잠시 중단한 채 김익렬 유고를 매주 5회씩 연재하기로 결정했다. 1989년 8월 15일 『제주신문』에 「유언-4‧3의 진실」이란 이름으로 첫 회가 발표된 데 이어 그해 9월 23일까지 모두 26회가 연재됐다. ▲ [제주신문] 1989년 8월 15일자에 실린 김익렬 유고 제1회. 유족들과의 약속대로 친필 원문의 내용을 그대로 실었다. 다만 유족의 요구에 따라 조 아무개와 박 아무개 등 특정인을 심하게 힐난하는 두 문장을 뺐고, 한자를 한글 표기로 맞춤법에 맞게 고치는 등 기초 교정만 했다. 노인의 육필이라서 문장 하나가 200자 원고지 서너 장을 훌쩍 넘긴 후에야 비로소 마침표가 찍힐 정도로 장문이 많았다. 송 편집국장은 그 긴 문장을 일일이 잘라 단문으로 만드는 등 손수 수정할 정도로 적극성을 보였다. 예상했던 대로 유고 연재에
다시 4월을 맞는다. 무섭고 시렸고 한스러웠던 통한의 역사다. 목소리는 커녕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4·3은 지금으로부터 27년여 전 제주의 한 언론사 취재진들의 용기로 세상 밖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잔인무도였고 통곡이었다. 그 시절부터 20여년에 걸쳐 이뤄진 4·3 진상규명의 역사에 중심부에 있었던 양조훈 전 제주도 부지사의 육필 비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4‧3 발발 초기인 1948년 5월1일 민가 10여 채가 불타면서 시작된 이른바 ‘오라리 방화사건’. 하지만 그날의 피해규모는 미미한 것이었다. 4‧3의 진행과정을 볼 때, 큰 사건이 아니었음에도 주목 받는 사건이 된 것은 그 속에 숨겨진 비밀 때문이다. 의문투성이 미군 기록영화 “제주도 메이데이” 4‧3취재반이 오라리 방화사건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던 것은 무성기록영화 ‘제주도 메이데이(May Day in Korea : Cheju-do)’ 때문이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된 이 영화는 미군이 촬영한 유일한 4‧3 기록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 무대
다시 4월을 맞는다. 무섭고 시렸고 한스러웠던 통한의 역사다. 목소리는 커녕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4·3은 지금으로부터 27년여 전 제주의 한 언론사 취재진들의 용기로 세상 밖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잔인무도였고 통곡이었다. 그 시절부터 20여년에 걸쳐 이뤄진 4·3 진상규명의 역사에 중심부에 있었던 양조훈 전 제주도 부지사의 육필 비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을 때 미군정은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하여 경찰력과 서북청년회(서청) 단원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1948년 4월 5일 설치된 ‘제주비상경비사령부’도 경찰 조직이다. 그해 2월 남한만의 단독선거 윤곽이 드러나자 전국적으로 요동쳤다. 2월 26일 좌파세력에 의해 전라북도 경찰지서 26개소가 일시에 습격을 당했다. 쌍방 사망자는 25명에 이르렀다. 3월 1일에는 전라남도 경찰지서 10개소가 피습됐고, 16명이 사망했다. 이런 경찰관서 습격사건은 경상도에도 번졌다. 따라서 4월 3일 제주도에서 무장대 350명에 의해 경찰지서 12개소가 피습(쌍방 14명 사망)당
다시 4.3을 맞는다. 무섭고 시렸고 한스러웠던 통한의 역사다. 목소리는 커녕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4·3은 지금으로부터 27년여 전 제주의 한 언론사 취재진들의 용기로 세상 밖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잔인무도였고 통곡이었다. 그 시절부터 20여년에 걸쳐 이뤄진 4·3 진상규명의 역사에 중심부에 있었던 양조훈 전 제주도 부지사의 육필 비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역사적인 4‧3연구소 출범 1989년 5월 10일 제주4‧3연구소가 출범했다. 연구소 개소식은 제주시 용담동 쌀가게 2층 사무실에서 조촐하게 진행됐다. 4‧3연구소는 1987년 서울에서 결성된 제주사회문제협의회(제사협) 팀과 1988년부터 제주도에서 은밀하게 4‧3 체험자들을 대상으로 증언 채록을 벌이던 현지 팀과의 결합으로 태동됐다. 제사협은 출범 직후인 1988년 4월 3일 서울에서 4‧3 학술대회를 가진 이래, 이런 일을 지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연구소 설립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연구소 설립에 필요한 자금도, 연구에 필요한 기본적인 자료도, 연구소를 맡아 일할 사람도 없는 상태에서 연구소
다시 4.3을 맞는다. 무섭고 시렸고 한스러웠던 통한의 역사다. 목소리는 커녕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4·3은 지금으로부터 27년여 전 제주의 한 언론사 취재진들의 용기로 세상 밖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잔인무도였고 통곡이었다. 그 시절부터 20여년에 걸쳐 이뤄진 4·3 진상규명의 역사에 중심부에 있었던 양조훈 전 제주도 부지사의 육필 비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해를 넘기고 1989년에 접어들었다. 신문 연재를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41주년이 되는 4월 3일엔 어떤 형태든 기획기사를 실어야 했기 때문이다. 연재를 4‧3의 어느 시기부터 시작할 것인가? 연재의 제목은? 논란을 빚는 용어들을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입수된 자료들의 진위는? 체험자들의 증언을 어디까지 믿고 인용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계속 머리에 맴돌았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신문 4‧3취재반을 주시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공안당국은 “사회 안정을 해치는 일”이라며 여러 경로를 통해 연재를 막으려고 압박해 왔다. 취재반에게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불이익 수준
다시 4.3을 맞는다. 무섭고 시렸고 한스러웠던 통한의 역사다. 목소리는 커녕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4·3은 지금으로부터 27년여전 제주의 한 언론사의 용기와 취재진들에 의해 세상 밖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잔인무도였고 통곡이었다. 그 시절부터 20여년에 걸쳐 이뤄진 4·3 진상규명의 역사에 중심부에 있었던 양조훈 전 제주도 부지사의 육필 비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1988년 첫 4‧3 학술발표회 제주신문 4‧3취재반이 결성된 1988년은 4‧3 4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런 시대적 상징성을 반영하듯 이곳저곳에서 금기의 벽을 뚫어보려는 시도가 전개되었다. 5‧16쿠데타 이후 4‧3에 관련된 말조차 꺼낼 수 없었고, 시나 소설로 표현해도 범죄가 되던 세상에서 금줄을 걷어내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해 4월 3일 서울과 일본 도쿄에서 동시에 공개적인 4‧3 학술행사가 열렸다. 4‧3에 관한 첫 학술발표회였다. 서울 행사는 오후 2시 국회 앞 여의도 여성백인회관(가정법률상담소 소속)에서 열렸다. 서울에 사는 제주 출신 지식인들로 창립된 &lsquo
2016년 4월 총선을 1년 앞두고 제주에서 현역 의원 교체를 요구하는 여론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원희룡 제주지사에 대해선 긍정평가가 56.9%로, 부정평가를 훨씬 웃돌았다. 전국적으론 차기 대선 주자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문재인·김무성 여·야당 대표가 ‘3강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와 종편채널 JTBC는 7일 '3월 전국 광역자치단체 평가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에서 ‘내년 4.13 총선에서 현역의원에게 투표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교체해야 한다’는 응답이 50.2%로 절반을 넘었다.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은 22.7%, 응답유보층은 22.8%였다. 현역 의원 교체여론은 제주도(61.0%)가 가장 높았다. 이어 인천(54.4%), 경남(53.1%), 광주(52.7%) 순이었다. 시·도정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긍정평가는 김관용 경북지사가 72.3%로 1위. 안희정 충남지사 68.2%로 2위, 이낙연 전남지사 63.4%, 최문순 강원지사 60.5%, 이시종 충북지사 59.93% 순이었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56.9%로
다시 4.3을 맞는다. 무섭고 시렸고 한스러웠던 통한의 역사다. 목소리는 커녕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4·3은 지금으로부터 27년여전 제주의 한 언론사의 용기와 취재진들에 의해 세상 밖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잔인무도였고 통곡이었다. 그 시절부터 20여년에 걸쳐 이뤄진 4·3 진상규명의 역사에 중심부에 있었던 양조훈 전 제주도 부지사의 육필 비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엊그제 67주년 4‧3희생자 추념식장은 참으로 안개가 자욱했다. 한 언론이 나에게 소감을 묻기에 “4‧3을 향한 해원이 아직도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영령들조차 안개 속을 헤매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대답했다. ▲ 안개가 자욱한 67주년 4‧3희생자 추념식장. <제이누리DB>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 추념식에도 참석하지 않아 아쉬움이 컸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겠지만, 나는 역사의 화해는 포용의 그릇을 크게 할 때, 비로소 융해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의 사례를 보면 더욱 그렇다. 중국 난징학살사건도 77주년이 되던 지난해 중국정부에 의해 비로소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다시 4.3을 맞는다. 무섭고 시렸고 한스러웠던 통한의 역사다. 목소리는 커녕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4·3은 지금으로부터 27년여전 제주의 한 언론사의 용기와 취재진들에 의해 세상 밖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잔인무도였고 통곡이었다. 그 시절부터 20여년에 걸쳐 이뤄진 4·3 진상규명의 역사에 중심부에 있었던 양조훈 전 제주도 부지사의 육필 비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한국 언론사에 남긴 진기록 요즘은 4‧3에 대해 누구나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잊기 쉽다. 4‧3이, 신상의 위험을 각오하지 않고는 입 밖에 내거나 글자로 적을 수 없는 금기의 숫자였던 시절을. 제주신문 4‧3취재반이 결성된 1988년 3월은 봄이었지만 4‧3은 여전히 딱딱하고 차가운 얼음처럼 동결된 상태였다. 6월 항쟁으로 달궈진 민주화 열기도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한풀 꺾였다. 야권 3김의 분열로 36.5%의 낮은 득표를 하고도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이다. 노태우 정권은 직선 대통령으로 뽑혔지만 군사정권의 연장처럼 느껴졌다. 그런 암울하던 시절에 출범한 4̷
제주로 제주로-. 제주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 귀촌인구 행렬이다. 그것도 단 한해만에 제주행 인구가 17배나 폭증했다. 2014년 제주에 둥지를 튼 귀촌가구가 직전해보다 17배나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최근 발표한 '2014 귀농.귀촌인 통계'에 따르면 2014년 귀촌가구는 3569가구로 직전 해에 비해 3365가구가 증가했다. 이는 2013년 204가구에 비해 17.5배가 늘어난 수치로 전국 최고의 증가율이다. ▲ 전국 시도별 귀촌가구수 귀촌증가율은 전남 3.7배, 강원 2.37배 등 증가한데 비해 제주의 귀촌은 폭발적인 증가세다. 2014년 시도별 귀촌가구는 경기(1만149가구), 충북(4238가구), 제주(3569가구)순이었다. 수도권과 가까운 생활여건이 좋은 지역과 자연경관이 좋은 지역을 선호한 것으로 풀이된다. 제주에 귀촌한 가구의 평균 연령은 귀농가구와 마찬가지로 40대가 가장 많았다. 다음으론 50대, 30대, 60대, 70대 순이었다. 귀촌가구의 전입가구원수별로 보면 1인 가구는 총 3569가구중 1702가구로 47.7%를 차지했다. 다음으로 4인이상 가구가 20.7%, 2인가구가 17.1%, 3인가구 14.5%를 차지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