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명물 밭. 우리 집을 대표하는 재산 제1호에는 할머니의 산소가 자리해 있다. 아, 우리 할머니……. 아버지는 당신의 서럽고 야속한 어머니를 이 밭의 가장 전망 좋은 곳에다 모셨다. 좌청룡 우백호는 아니지만 중문 마을을 병풍 삼고, 대포 마을의 주상절리를 바라보는 위치다. 중문 마을은 할머니의 남편이 살던 곳이고, 주상절리 일대는 대포마을 사람들이 ‘너배기’라 부르는 들판이다. 비교적 넓고 평평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한다. 그곳에는 할아버지의 논이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서 아버지가 이웃의 논을 병작하고 있었다. 두 논 사이에는 제법 폭이 넓은 수로가 있어서 농로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동네 사람들도 이 지경에서는 지름길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들이 일하는 모습이 보이면 그 길을 에둘러서 먼 길을 돌았다. 중문마을과는 역방향인 성천포구로 내려가 배릿내오름을 올라서 산사람처럼 휘적거리면서 집으로 향했다. 아리랑 고개가 따로 없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러한 정황을 소문으로 듣는 할머니는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까.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할머니의 일생을 생각하면 가슴이 싸〜 하게 썰물처럼 밀려간다. 울퉁불퉁한 바위와
시월의 아침 10시. 하늘이 너무 높아서일까, 바람이 솔솔 불어서일까. 오늘은 ‘휴무’라면서 집에 들른 언니가, 불현듯 어머니를 보듬어안는다. 그리고는 전에 없는 애교를 부리면서 “어머니, 어디 가구정 헌 디 어수광?”이라고 묻는다. 물으나 마나, 어머니는 “가민 어디 가느니? 나 몸뚱아리에 구경이 드랑드랑 했져”라고 하실 터이다. 10년도 아니고 20년을 같이 살아온 어머니의 속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는 내가 아닌가. 그런데 어머니가 달라지셨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 할망 산에 데려다 도라”고 하신다. 순간, 나와 언니의 눈이 불안스레 마주쳤다. 어머니가 이상하시다. 전에 없는 말을 하시니...... 어른들이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전에 안 하던 일을 하시지 않는가. 그래도 어쩌랴. 모처럼 해 본 소리지만 어머니가 저렇게 말씀하시는 걸. 어머니는 마치 소풍 가는 어린 애 마냥 자동차 뒷좌석에 얼른 올라 앉았다. 100세 할머니 얼굴에 가을볕이 비쳐드니 잘 익은 감처럼 화사해졌다. ‘봄볕은 며느리 쪼이고, 가을볕은 딸을 쪼인다’ 했던가. 오늘은 어머니와 딸의 입장이 뒤바뀐 모양새다. 아이처럼 천진스런 어머니, 어머니처럼 염려스런 딸. 자동차만 타면
오늘은 교회에서 전교인 체육대회를 하는 날이다. 100세 어머니가 가실 수 있을까? 아니, 가도 좋을까? 아침부터 이 생각이 갈까와 말까 사이를 방황하게 한다. 어쩌면 어머니에게는 이 가을이 생애의 마지막 운동회가 될 수도 있겠지만, 소풍도 아니고 운동회인데.... 민폐가 되지는 않을까? 하지만 어머니는 ‘죽어도 교회에 가서 죽겠다’고 하신다. 언제나 일요일이 되면 교회로 앞장서시는 분이 아니신가. 반쯤 긍정의 문을 열고서 어머니에게 가을 코트를 입히려는 찰나, 핸드폰이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전한다. 각 구역별로 장소를 정해서 점심을 먹는데, 우리 구역은 돗자리가 없어서 불편하다고..., 그러니 집에 있는 비닐 깔판을 들고서 빨리 달려오란다. 구역(성도들의 주소지별로 적정 인원을 그룹지어서 편성된 구역의 책임자)의 장을 하는 아빠의 저음이 오늘은 높은 음자리의 테너 목소리다. ‘와아〜 잘 됐다. 명분이 생겼네!’ 하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매트리스를 찾았다. 혹시나 싶어서 담요도 챙겨 싣고서, 가벼운 마음으로 운동장으로 달린다. 어디 좋은 데 가나 보다 싶은 어머니의 얼굴이 아침햇살을 받고서 한 살 아기처럼 빛난다. 하기야 백 세 할머니는 한 살
아침마다 기저귀를 갈면서 가만히 살펴보면, 어머니의 다리가 많이 가늘어진 듯 하다. 그래도 장딴지 만큼은 다른 어르신들보다 튼튼하시다 생각했는데, 이제는 가죽만 남아서 탄력 없이 헐렁거린다. 엉덩이 부분도 볼기의 두둑한 살이 많이 빠져서 마치 바람 빠진 공처럼 쭈글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어머니, 오래 사시느라 너무 수고가 많으셨다. 이 두 다리로 한라산 중산간과 오름을 누비면서 얼마나 많은 고사리를 캐셨던가. 물질하러 바다를 오갈 때는 산지동산을 오르내리고 고닥고닥 돌짝길을 걸으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2남7녀를 키워내시느라 동새벽에 일어나서 물항아리 가득 물길어 놓고, 아침밥을 먹는둥 마는둥 빌레왓으로 내달리실 때는 얼마나 마음이 다급하셨을까. 100년을 사시면서 얼마나 힘겹게 땅을 밟고 버텨내셨으면, 이렇게도 힘살들이 녹아들었을까. 깃털처럼 가볍게 말라버렸을까. 이게 어머니가 지나온 삶의 흔적이구나.... 아, 제주도 여인의 일생을 생각하니, 가슴 한 켠으로 서늘한 바람이 들어 온다. 코로나19의 격리기간이 닥치기 전에는 교회 여성들이 토요 봉사모임을 만들어서 독거노인을 방문하곤 하였다. 주로 말벗이 되어드리는 게 목적이지만, 혼자 사시는 분의 경우
아침이 되면 마당으로 나가서 대문을 지키듯 앉아 계시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대문 밖으로 나가서 집 주변의 길가를 살펴보아도 계시지 않는다. 이럴 수가.... 발끝을 올려서 시야를 더 넓혀 사방을 휘둘러보지만, 안 보인다. 이 정도면 어머니의 걸음으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의 최대치인데.... 덜컥 겁이 났다. 지난번에 어머니를 잃어버렸을 때 119가 가르쳐준 어머니의 가능한 동선을 훑어봐야 할까 싶다. 자동차를 끌고 그 당시 어머니가 쪼그려 앉아 계시던 동쪽으로 향했다. 세상에! 어머니가 한 집 건너 이웃해 있는 펜션 앞에 동그마니 앉아 계시지 않은가. 마치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초췌한 모습이다. “어머니! 무사 여기 왕 이추룩 앉안 이수광? 어머니 잃어부러시카부덴 막 걱정되연, 애가 타게 촞아댕겸수게!” 그러자 어머니 입에서 뜻밖의 말이 튀어 나왔다. “나, 이제는 죽어지민 조키여! 무사 나만 영 오래 살아점신고 이?” “어머니, 그게 무신 말이우까? 이제 백살이난 막 오래 살아진 거 닮아도, 요양원에 가민 백 다섯 난 할망도 이수다. 대포 부택이 어멍은 백두 살이라도 막 정광해영, 동네 이디저디 돌아댕기멍 재미나게 살지 안 햄수광? 경 허난, 어머니
‘오늘이 며칠이냐?’를 반복하여 묻는 것으로 시작된 어머니의 치매 증상은, 고구마나 감자·과일·떡 등 음식물을 종이에 싸서 이구석 저구석에 꽁꽁 숨겨두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어머니의 방을 대청소하다 보면, 언제 적 것인지 모르게 새까만 곰팡이를 뒤집어 쓴 것들이 발각되곤 한다. 어떤 것들은 도무지 정체를 알 수가 없어서, ‘요양원 주간보호에서 나눠준 음식물인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아마도 선생님이 빵이나 과자, 떡 등을 나눠주셨을 것이고, 어머니는 일부러 아껴 먹다가 슬며시 얼마쯤은 호주머니에 넣고 오셨으리라. 어머니의 어렸을 적 첫 기억이, 두 살 위 오라방의 손을 잡고서 이웃집 초상집에 밥 얻어 먹으러 갔던 것이라니...얼마나 음식에 대한 부족이나 염려가 일상적이었으랴. 또한 나의 달콤하고 비밀스런 기억 또한, 어머니께서 동네 아주머니들과 계를 하고 오셔서 살짜기 내 손에 쥐어주시던 사탕 두 알이 아니던가. 나만의 그 은밀한 비밀을 안고서, 하나 둘 곯아떨어지는 언니들을 바라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던 그 겨울밤의 독서라니... 사실 책이야 흉내에 불과했고, 끄덕끄덕 거리면서 책장을 넘기다가, 어머니의 발 기척에 용케도 눈을 부릅떠서
가끔 어머니가 혼잣말처럼 하는 소리가 있다. “나, 어떵허난 백살꼬지 살아점신고, 이?” 곰곰이 어머니의 일생을 헤아려 보니, ‘쉬지 않고 일을 해서, 죽음의 위기를 넘겨서, 오래 사시라는 주위의 돌봄이 있어서’로 요약된다. ‘혼자 사는 게 좋다’고 독립을 선언하셨던 어머니가, 어느 날 밤 배게를 안고 우리 방으로 오셨다. ‘혼자 자는 게 무서워서…….’라는 게 이유였다. ‘제주도 할머니들처럼 혼자서 먹고 싶은 거 마음껏 해 먹으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한 지붕 두 살림으로 살아온 지 10년 만의 일이다. 그렇게 딸과 한 방을 쓰면서, 어머니는 10년 가까이를 거뜬히 살아내고 계신다. ‘80대 중반이 평균 수명’이라는 어머니 가계의 유전적 전통이, 막내에 이르러서 그만 깨져버린 셈이다. 목하 100세를 살고 계신 어머니의 장수 비결이, ‘사랑하는 딸과 같이 살아서’라는 형제들의 진단처럼, 나와 같이 살면서 ‘딸을 돌봐주고 딸로부터도 돌봄을 받는다!’는 생각이 어머니로 하여금 ‘더 오래 살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사실 ‘외로움이 장수의 적’이라는 연구들이 더러 있기는 하다. 한남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가 내놓은 ‘국내 90세 이상 장수사
다음은 2020년 9월 방송된 KBS 요양병원 고발 리포트의 한 장면이다.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해져서 요양병원에 입원하기로 한 날 아침, 할아버지는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가족들과 함께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 흐른다. 가족들이 노인을 돌보기 어려워 끝이 뻔히 보이는데도 어쩔 수 없이 요양병원을 선택하는 현대판 고려장’의 모습이다. “죽으러 가는 기분이야. 동네 사람들 중에 요양병원 갔다가 돌아온 사람, 아무도 없어.”라며 눈을 감는 할아버지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진다. 서울에 사는 이 모 할머니(82·여)는 6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회복하지 못했고, 요양병원에 입원을 하였다. 할머니는 병세가 악화되어 여기에서 5년 반 동안 지내다가 최근 들어 비용이 저렴한 다른 요양병원으로 옮겨졌다. 이제는 거동이 불가능하고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와상환자'가 되었다. 요양병원에서 퇴원해 집으로 갈 가능성이 거의 없다. 할머니는 이제 삶을 포기하신 듯, 밤이나 낮이나 주무시기만 하신다. 이 할머니처럼 요양병원이나 요양시설에서 5년 이상을 보내다 숨진 노인이 10년간(2007-2016)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20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나를 따라 한국행을 택하셨다. ‘아이들을 돌봐주시면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아버지의 꿈을 이루어 드리고 싶다’는 아들의 부탁으로 미국에 가신 지 17년만이었다. 비록 아들 때문에 부득이 가게 된 미국이지만, 아버지는 신기하게도 그곳을 참 좋아하셨다. ‘미국에서는 모든 것을 정반대로 하면 된다!’하시면서 문화충격에도 불편보다는 재미를 느끼셨다. 동서남북을 서동북남이라하면 되듯이, 미국에 대한 아버지의 이해는 그곳 생활에 적응해 나가는 윤활유가 되었다. 늘그막에는 아무것도 보탠 게 없는 나에게 ‘용돈까지 주는 나라’라면서, 부디 미국을 축복해 달라는 기도를 하셨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미국생활이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자식 때문에 그 가슴 뛰는 대포바당 물질도, 그 아까운 한라산 고사리도 다 뒤로 하고, 생판 모르는 이국땅에 강제로 옮겨진 보릿자루 같았다. 그럼에도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봉제공장, 건물청소 등에서 소일거리를 찾았다. 제주도 할망의 부지런으로, 길가의 공터에 호박을 심고 배추도 키워서는 이웃 할머니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셨다. 자식들이 걱정하거나 미안해할까 싶어서, 늘상 씩씩하고 담대하게 미국 생활을 지탱하셨다
미국에서는 노인이 아파서 병원에 들어갔는데 치료가 여의치 않으면, 그 다음 행선지가 대부분 요양원이 된다. 집으로 돌아올 경우 전적으로 돌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 생활이란 게 한국에서처럼 며느리나 딸이 가정에서 부모를 모시면서 병간호를 하는 게 여의치 않은 구조다. 낯선 이국땅에서 가족 구성원들이 저마다의 시간표에 따라 주어진 역할을 기계처럼 수행해 내야 하는, 그야말로 심신이 모두 예약되어 있는 긴장상태다. 나의 시간과 마음을 빼내어 다른 가족을 돌봐 줄 여유가 없다는 얘기다. 오죽하면 고향에서 친척이나 지인들이 방문 소식을 보내올 때, 처음에는 그렇게도 가슴 설레게 반가운 마음이, 차츰차츰 시간 내기조차 어려운 부담으로 변해 갈까. 아니, 돌아보면 어느새 우리나라도 미국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회가 되어 있기는 하다. 환갑을 넘기신 나이에 삶의 터전을 옮기신 아버지는, 의외로 미국 생활에 적응을 잘 하셨다. ‘1달러’면 살 수 있다는 볼티모어시 다운타운의 낡은 건물들을 돌아보면서,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드러내실 만큼 도전적이기도 하셨다. 드넓은 땅과 무한한 일거리들이 아버지의 가슴을 뛰게 하는 나라였다. 영어의 알파
▲ 허정옥/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 어머니가 편찮으시다. 요양원의 주간 보호 버스를 타러 나가다 넘어져서 다리를 크게 다치셨다. 대퇴부 골절이라니, 얼마나 아프셨을까? 올해 나이 95세. 올 겨울을 우리와 함께 무사히 보내게 해달라는 기도가 일상이 되었다. 오늘도 대문 앞에 나와서 망연자실 바다를 바라보시는 어머니. 수척해진 얼굴 위로 저물어가는 햇살이 슬그머니 내려앉는다. 오늘 따라 어머니의 안색이 몹시도 쓸쓸하다. “날이 볽암시냐, 어두웜시냐(밝고 있느냐, 어둡고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어머니의 음성이 파도소리에 묻혀서 사그라진다. “날 더 볽으민 이 고추, 종택이 어멍한테 갖다 주라이!” 하는 어머니 손바닥에서 붉은빛 도는 고추 대여섯 개가 시들거린다. 며칠 동안 손안에서 애지중지 주물러진 모양새다. 종택이 어멍은 어머니의 조카다. 갈치 잡으러 갔다가 태풍으로 사라진 남편의 시신을 한평생 가슴에다 끌어안고 살았다. 종택이 아방은 마을에서 일등 가는 인물이었다. 생김이나 배움 뿐 아니라 성격과 재주까지도. 세 살 된 딸과 유복자로 낳은 아들을 물질로 키우면서, 그녀는 남몰래 술을 홀짝
나이 50에 새로운 직장을 찾아 서울로 떠나야 했다. 그것은 어쩌면 17세에 육지로 원정물질을 떠났던 내 어머니와 비슷한 행로였다. 새로운 경험에 대한 호기심,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삶에 대한 책임감이 가슴을 짓누르는 여정이었으니까. 서울 생활은 좀처럼 친숙해지지가 않았다. 마치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하였다. 거미줄처럼 복잡한 지하철, 하늘을 가리는 마천루, 복잡한 명동과 화려한 강남 거리를 당당하게 헤쳐 가는 사람들이 그토록 생소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주 오래 전에 그 도시로부터 쫓겨난 내 할아버지의 심경이 나에게 투영되어 은밀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돌, 바람처럼 대자연에 익숙한 제주여자다. 나의 할아버지인 송암공 허손(許愻)은 고려말에 대제학의 자리에 있다가, 조선이 건국될 때 제주도로 귀양 오신 분이다. 그 바람에 나는 입도 24세 손, 제주에 들어온 지 600년을 훌쩍 넘긴 제주인이 되었다. 요컨대 제주의 DNA가 뼛속까지 녹아 있는 원주민이란 얘기다. 그 때문에 그렇게도 서울과 궁합이 맞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야 서울살이가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