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예부터 축산업이 발달된 고장이다.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강우량, 그리고 넓은 중산간 토지는 축산업을 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게 경제적 풍요와 연결된 건 그리 오랜 세월이 아니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제주도 축산은 국가를 위한 군마나 황실을 위한 명마를 키우기 위한 공납기지였을 뿐이다. ▲ 밴플리트 장군 제주의 지역경제 수단으로 축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이후다. 맥그린치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의 목장을 지역경제와 연계시킨 최초의 창시자이며, 밴플리트(James Award Van Fleet, 1892~1992) 장군은 이를 연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을 이승만 대통령의 실패작을 리메이크 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맥그린치 신부는 관과는 따로 독립영화를 통해 제주의 목장개념을 새롭게 정리한 이다. 제주축산업을 대형화시키는 데 각자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두가 서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우선 이승만대통령의 사례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이전 미국유학을 경험한 이다. 1904년 귀국 이전까지 한국인 중 미국 체류기간이 가장 오랜 이도 바로 그다. 뿐만
▲ 맥그린치 신부가 청년기 동료들과 토론하던 장면이다 목초개발이 끝나자 맥그린치의 눈길은 목축용 소로 쏠렸다. 양돈도 좋지만 목초가 개발되었으니 소가 좀 더 경쟁력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맥그린치 신부의 부친은 수의사였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다 보니 소에 대해 좀 아는 편이었다. 10살 때는 감자가 목에 걸려 죽어가던 소를 치료, 동네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수의사가 될 것”이라고 칭찬을 받았던 적도 있다. 맥그린치 신부가 처음 제주에서 본 소는 볼품이 없었다. 반면 육지에서 본 한우는 매우 우수한 품종이라고 생각했다. 섬이기 때문에 다른 우수 품종과 교배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근친교배로 인한 열성유전 때문이었다. 밭갈이는 좋을지 모르지만 육식이나 비육용, 즉 경제용으로는 좋은 소가 아니었다. 게다가 목초도 없어서 먹이도 시원치 않으니 제주소가 육지에서 키우는 소보도 빈약할 수 밖에 없었다. 품종이 좋은 소를 수입하여 종자용 겸 식용으로 키울 마음을 먹었다. 당시 우수 비육소 품종은 뉴질랜드와 호주, 케나다, 미국 등이 정평이 나 있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가격·품종 등을 고려할 때 뉴질랜드가 적당하다고 보고 뉴질랜드
▲ 이시돌 목장에 동원된 1960년대의 트랙터 오랜만에 맥그린치 신부를 만났다. 원고를 쓰면서 확인할 일 때문이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홍차를 직접 대접해 주신다. 이시돌 목장에서 유기농으로 만든 우유가 곁들인 홍차 맛이 특별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예전 내가 연재를 하고 있는 내용과 책을 펴내고 싶다는 말을 건네자 이런 농담을 한 적이 있다. "아일랜드의 어느 신사 장례 미사 때 일이다. 장례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는 돌아가신 신사에 대하여 연이어 칭찬하면서 애석해 하는 강론을 하였다. 통상 장례미사에 있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칭찬이 너무 하다 싶은 미망인이 냉랭한 얼굴표정으로 옆에 있는 아들 보고 '야! 지금 장례미사를 하고 있는 분이 너의 아버지인지 다시 확인해 보아라!‘“ 돌아가신 자신의 남편이 전혀 칭찬 받을 일이라고는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미망인이 칭찬하는 신부에 대한 푸념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농담에는 또 다른 뜻이 있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자신이 한 일이 전혀 칭찬받을 일이 없는데 글을 쓰는 내가 너무 칭찬하고 있다는 것을 빗대어 농담한 것이다. 늘 만날 때마다 다시 이 일을 하면 이 보다 더 잘 할 수 있
※저자의 사정으로 몇 주 연재가 중단돼 죄송합니다. 그간 저에게 좋은 의견과 격려를 보내주신 여러 분들에 지면을 통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지난 2월 21일 맥그린치 신부 기념사업회가 정식으로 발족하게 된 기쁨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필자 주 지난 회에 실린 ‘십시일반의 기적’은 보통 사람들이 일궈낸 기적이다. 오늘 거론할 사안은 ‘기관과 단체가 만들어낸 십시일반의 기적’이다. PL 480이 화두다. PL 480은 미국이 농업기술 발전으로 인해 농산물이 과잉생산되자 이를 식량이 절대 부족한 후진국 원조에 활용한 프로젝트이자 관계법이다. 과잉생산으로 폭락한 자국 농산물 가격안정에 기여함과 동시에 후진국의 기아를 탈출하게 해준 일석이조의 효과를 보았다. 우리나라도 1956년부터 1978년까지 PL 480에 의하여 원조를 받았다. 미국 곡물 원조를 받은 한국 정부는 이 곡물을 국민들에게 팔아서 식량난을 해결함과 동시에 이 판돈을 대충자금이라 하여 미국과 한국정부로 구성된 합동위원회에서 합의하에 이 자금을 쓰도록 했다. 1956년부터 1960년까지 PL 480에 의해서 우리나라가 원조 받은 금액은 미화로 약 2억3천만 달
▲ 맥그린치 신부가 미군부대 등으로부터 푼푼이 모은 성금을 받고 기념촬영한 사진이다. 열사람이 자기 밥그릇의 밥을 각각 한 숟가락씩 떠서 모으면 한 사람의 먹을 식량이 된다는 십시일반(十匙一飯)! 십시일반의 기적은 맥그린치가 가는 길에서, 이시돌 현장에서, 그의 염원이 맞닿은 곳곳마다 이뤄진다. 맥그린치 신부가 십시일반의 성공을 이룬 첫 작품은 한림성당 신축이다. 1954년 제주도 한림읍에 처음 부임한 맥그린치 신부는 한림우체국 옆 신순영 신자 집에 숙소 겸 성당으로 삼아 미사를 집전했다. 하지만 신자가 늘어가는 터에 두어칸 가정집은 한계였다. 그렇다고 6·25동란의 참화를 겪은 가난한 동네, 가난한 국가에서 신자들의 도움을 얻어 성당을 짓는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맥그린치와 신자들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꾸는 꿈은 꿈밖에 되지 않지만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이 사실로 돌변하는 일이 잇따라 벌어진다. 때마침 미국 선적 화물선이 한림읍 수산리 앞 바다를 항해하다 좌초되는 일이 벌어졌다. 레이더 고장으로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암초에 부딪치고 만 것이다. 썰물 때는 걸어서 갈 수 있는 수원리 용운동
▲ 이시돌 목장 개간에 나서던 그 시절의 4H클럽 청소년들이다 맥그린치 신부의 업적을 말하며 4H클럽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제주에서 가장 먼저 4H클럽을 조직한 것 역시 바로 맥그린치 신부의 역할이었다. 어떻게 흘러간 사정일까? 맥그린치 신부는 1957년 3월 제주에 4H클럽을 만들었다. 이시돌 개발만을 놓고 보더라도 4H클럽 조직을 만든 일이 가장 첫 번째 일이다. 이 4H클럽이 오늘날 이시돌 개발의 시금석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4H의 역사를 보면 1945년 해방직후 낙후된 농촌의 부흥과 실의에 빠진 청소년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당시 구자옥 경기도지사와 경기도 군정관인 앤더슨 중령, 이진묵 경기도 문정관 등이 미국의 4H활동을 도입, 그 불을 지폈다. 이후에 경기도 일원에 ‘농촌청소년구락부’를 결성하기 시작하여 1950년까지 1900여개 마을에 5만여 명의 회원이 참여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6ㆍ25전쟁으로 중단의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52년 12월 정부가 4H운동을 국가시책사업으로 채택함에 따라 전국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4H는 머리(Head), 가슴(Heart), 손(Hand),
1961년의 일이다. 우리나라 인구는 약 2500만 명이었다. 제주도 인구는 고작 28만 명. 게다가 맥그린치가 머물렀던 한림마을의 인구는 약 2만 명이었다. 그 마을 사람들의 1인당 소득은 고작 8853원이었다. 무일푼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당시 한림 등 제주도 농촌의 거래는 물물교환이 주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형편일 때의 지역개발은 외부에서 돈을 들여와서 값싼 지역 노동력을 이용하여 어느 한 부분에 집중. 개발을 하고 돈을 벌고 난 뒤 소위 쓰레기(문제점)만 남기고 떠나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를 학문적으로 말하면 외생적, 노동집약적, 불균형 지역 개발이라고 한다. 미국·영국 등 대자본이 브라질의 커피농장을 매우 싼 값으로 사고 현지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때부자가 되는 사례가 이 경우다. 지역개발론에 자주 소개되는 사례다. ▲ 면양을 처음 한림지역으로 들여오던 장면이다. 흔히 "돈이 말을 한다"고 한다. 돈 가진 사람, 돈 투자 한 사람이 돈을 갖게 되는 이치가 자본주의의 기본이다. 지역개발도 외지 대기업이 주도를 하면 개발이익 역시 당연히 이들이 독점할 수밖에 없다. ‘착취적 지역개발’이다.
이달 21일 제주시 한림읍 한림체육관. 60년을 제주에서 살아온 맥그린치 신부를 기리고자 기념사업회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80여명이 한 자리에 앉았다. 필자도 맥그린치 신부를 오랫동안 연구한 사람으로 인정돼 발기인 공동대표로 추천됐다. 물론 그 자리에서 필자는 맥그린치 신부와 동고동락을 같이 한 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 지난 21일 열린 맥그린치 신부 기념사업회 발기인대회 현장 그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특히 그들 중 양돈 일을 하는 신부삼 삼축산업 대표와는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눌 기회를 얻었다. 초기 이시돌 목장의 양돈산업 실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분이었다. 신부삼 대표는 맥그린치 신부가 한림공소에 오면서 처음으로 신자로 입교하였고 곧 바로 4H 회원으로 활동하게 됐다. 이후 신 대표는 4H 연합회장까지 지낼 정도로 4H 활동을 열심히 하였다. 지금 그는 제주도에서 가장 큰 양돈 농장 두 곳을 운영하고 있고 자녀 셋 중 둘째 아들과 딸은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 큰 아들은 경영학과를 졸업하여 미국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여 외국회사에 다니다가 지금은 아버지 가업을 이어 받고 있다. 성공한 양돈 사업가다. 그러나 그의 성공 이면엔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
▲ 60년 대 초 이시돌 목장을 일군 4H 클럽 회원인 중고생들이다. 맥그린치의 이시돌 목장은 한국축산업의 역사를 새로 쓴 곳이다. 개량종 돼지를 들여오고, 미군부대에서나 봄직한 트랙터가 1950년대에 일찌감치 이시돌 목장에 자리잡았다. 한국기업농의 시초였다. 60년대 초 나라도 실패한 목초지 개발을 해낸 것도 맥그린치 신부의 손에 의해서다. 하지만 그런 전국 최초의 타이틀은 돼지 한 마리에서 시작됐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다. 돼지는 어느 나라에서도 흔한 동물이다. 키우기 쉽고 잘 자라주니 식용으로 딱이다. 궁핍한 살림인 당시 제주에서도 집안에 돼지 한 두 마리는 키우고 있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그 돼지에 눈독을 들였다. 제주사람에게 익숙한 가축이기 때문이다. 경제는 노동·자본·토지만 뒷받침되면 돌아간다. 맥그린치가 정착한 한림만 하더라도 노동력이 풍부했고, 땅도 얼마든지 있었다. 자본만 얹으면 될 판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 자본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다. 물물교환의 경제였던 시절이다. 맥그린치는 그 자본을 돼지에서 찾았다. ▲ 처음 막사를 다듬어 만든 돈사 ▲ 나중 개량화된 돈사로 개조, 새로 지었다. 유일한 자본인 그 돼
복잡하고 허전한 마음을 접고 유럽의 정부를 방문하고 있다. 내가 소속한 대통령 위원회인 지방자치발전위원회로부터의 출장명령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지방자치와 분권을 성공시키기 위한 방안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 정부의 위원으로, 특히 자치경찰 도입을 위한 책임자로 줄기차게 유럽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를 찾아 다녔던 때가 근 10년이 다가 오니 실은 오랜만에 방문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번 방문은 유럽이 개혁으로 얼마나 변했을까 하는 기대보다도 얼마나 효과를 보고 있을까 하는데 더 관심이 간다. 그것은 유럽이 우리보다 더욱 개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는 점을 그 당시나 그 후에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이누리>에서 출장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럽의 지방자치와 지역정책에 대하여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통상 이러한 글은 괜히 여행기를 쓰면서 잘난 척하거나 훈계하는 느낌이 들어서 사양을 하였다. 그러나 각 지방자치단체를 방문하면서 많은 변화를 보면서 느낌은 공유해 볼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에 기고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를 지닌 내용을 지면관계상 3가지만 정리하고 싶다. ▲ 벨기에 수도 브뤼셀시 청사건물. 건축소요기간이 200년
맥그린치 신부가 제주에 당도할 무렵인 1954년 제주도는 처참했다. 가관이었다. 그 때의 모습은 지금 아프리카 국가 중 가장 후진국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구 28만 명에 지역총생산량은 고작 23억. 1인당 소득은 미화 50달러다. 식량부족으로 매년 배곯이를 하는 인구가 3만~4만명에 이르렀고, 대책은 없었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를 거쳐 4·3사건의 비극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6·25 전쟁으로 약 15만 명의 피난민이 제주로 밀려와 있었다. 그런 역사 탓에 제주도민들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에 매몰돼 있었다. 소극적이었고 주춤거렸다. 맥그린치 신부가 그 시절 제주도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안됩니다. 신부님은 여기 사정을 너무 몰람수다(모릅니다)"였다. 토종돼지 대신에 개량종 돼지를 키워 소득이 2~3배 높게 나오는 일을 겪으면서도 그것만은 막무가내였다. 도무지 변화가 없었다. 모두가 "진짜 안 될 것이다"고 장담하는 분위기에서 성공시킨 면양사업을 보면서도 그랬다. ▲ 1960년대 이시돌 목장 평원에서 면양을 방목하던 장면이다. [이시돌협회 제공] 면양
한림수직의 양모의류가 서울 명동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기 시작한 건 사실 꿈같은 일이었다. 제주 촌구석에서 만든 옷이 서울 한 복판, 그것도 조선호텔에 매장을 마련한 것도 그렇지만 서울의 유명 마나님이 딸을 데리고 와 사는 호사·혼수품으로 팔려나가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그게 맥그린치를 보는 제주사람들의 마음을 뒤바꿀 줄은 또 몰랐다. 너도 나도 한림수직에서 일하겠노라고 통사정을 하는 통에 오히려 난처할 지경이었다. 맥그린치로선 어리둥절하기도 했고, 까닭모를 서울 마나님들이 고맙기도 했다. 주한 외국인들에게 알음알음 팔려나갈 것이라 보았던 게 이런 유명 브랜드 취급을 받을 줄 꿈에라도 생각했겠는가? ▲ 이시돌 목장이 돼지 사육을 시작한 초기 돈사시설 그 쯤 이르자 이제 맥그린치의 눈엔 그저 달구지나 모는, 밭일이나 돕는 제주 외양간 소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양털을 생산하는 양떼들이 드넓은 초원에서 방목이 가능한데 못할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주민들은 아니었다. 한림수직의 성공으로 반신반의하던 그들이 마음이 풀리는 듯 했건만 이번엔 그들의 반대가 분명했다. 이유는 하나. “소를 들여오는 것도 그렇지만 그 많은 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