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사실 ‘여전사’다. 지금껏 그렇게 거침없이 살았다.
노회한 정객(政客)으로 삶을 마무리하는 경우가 대다수건만 그는 그렇지 않다. 국제사회에 거침없이 목소리를 내는 ‘세계평화의 전도사’로 아시아와 세계를 누비고 있다.
“내 삶에서 피로와 피곤, 그리고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고 외친다. 줄곧 불가능의 영역이라고 여기던 이들에게 보란 듯 도전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대만 첫 여성부총통을 두 번이나 지낸 뤼슈렌(呂秀蓮·80).
여든의 나이에도 그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다. ‘평화’를 추구하는 그의 이상이 입으로 터져나올 땐 그저 달변이다.
“세계평화의 섬 제주가 한눈에 들어오더군요. 감동이었습니다.” 그가 제주도청을 잠시 들러 본 로비라운지 현판은 그렇게 그에게 다가왔다.
뤼슈렌 전 부총통은 여성으로서, 또 민진당 출신으로서 처음으로 대만 10·11대 부총통을 지냈다. 국민당 계엄 통치 시절인 1979년 ‘메이리다오’(美麗島) 사건으로 5년을 복역했고, 천수이벤 총통 시절엔 부총통으로 대선유세를 함께 치르던 중 괴한의 총격을 받기도 했다.
구사일생을 거듭하며 대만 민주화와 여성운동, 대만독립운동의 기수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퇴임 후에도 그는 ‘민주태평양연맹’(Democratic Pacific Union)을 만들어 차이잉원 총통의 남방외교를 거들고 있다.
태평양의 보석같은 아름다운 섬이란 의미의 포루투갈어 포르모사(Formosa), 쑨원과 장제스 국민당의 색채가 짙은 중화민국(中華民國), 그리고 아무런 정치적 의미가 없는 지명 대만(臺灣,Taiwan), 현재의 중국이 국제사회에 요구하는 중화대북(中華臺北, Chinese Taibei).
정체성의 혼돈을 낳을 법도 한 그의 나라의 운명을 헤치기 위해 그는 지금도 당당히 세계를 향해 부르짖고 있다. 한국여성경제인협회 제주지회가 그런 그를 제주로 불러들였다.
24일 제주 강연에 나서는 그의 생각을 하루 전에 만나 들어봤다. 다음은 그와의 <제이누리> 단독인터뷰 요약.
▶제주에 대한 인상이 어떤가
“2010년 처음 제주에 오고 나서 이번이 세 번째다. 눈부시게 변화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그렇기도 하지만 대만과 제주는 닮은 역사를 가진 곳이다. 제주4·3사건의 참상을 안다. 대만의 2·28사건은 더 참혹했다. 매스컴이 발달하지 않을 무렵 세계인들은 이 두 곳의 참혹한 학살의 역사를 알 수가 없었다.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아야 할 비극이다.”
▶여성운동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과의 인연도 있다던데···.
“1975년 한국에서 이화여대 기숙사에서 머물며 당시 한국의 첫 여성 변호사였던 이태영 박사의 사무실을 들락거렸다.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그 시절 한국의 여성상도 지켜봤다. 머물던 기숙사에서 본 대학생들은 부잣집 딸들이었지만 이 박사의 사무실엔 늘 고통받는 불쌍한 여성들만 보였다. 이 박사는 늘 그들의 편에 섰다. 깊은 감명을 받았다. 훗날 대통령이 되는 박근혜씨가 2001년 국회의원이던 시절 타이베이에서 열린 아시아 여성지도자 회의에 참석, 만남도 있었다. 그의 대통령 당선과 감옥행까지 쭉 지켜봤다. 안타까웠다.”
▶한국은 사실 대만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두가지 역사를 기억한다. 동학운동으로 촉발된 청·일전쟁의 결과 1894년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됐다. 청나라가 조선의 독립국 지위를 인정하고, 대만은 영원히 일본에 할양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대만의 운명이 조선반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청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면서 일본이 조선과 대만에 진출하는 길이 열렸다. 또 하나는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난 뒤 마오쩌뚱은 대만해협을 건너려 했다. 그러나 1950년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면서 스탈린이 반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찌 보면 그 틈에서 대만이 생존했다고 볼 수 있다. 두 나라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역사다. 두 나라를 나눠 생각할 수 없는 역사다. 결국 전쟁은 절대적으로 사악하고 잔인한 결과만 초래한다.”
▶한-대만 관계를 어찌 보는가?
“지도를 펼쳐보자. 한반도가 중국과 연접한 것으로만 보이지만 바다를 놓고 보면 대만과 한국, 일본은 하나의 벨트다. 과거 일본총리 아베가 ‘대만이 유사시 일본도 위험하다’는 말을 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이 대만을 침략할 경우엔 북한은 반드시 남한에 무력행위를 할 것이다. 미·일 동맹의 대응력을 분산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게 군사전략이자 판세다. 그래서 대만과 한국, 일본은 강력한 연대의 손을 잡아야 한다.”
▶한국과 대만, 일본이 어떻게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인지···.
“대만과 한국, 일본은 입술과 혀, 아니면 이와 입술의 관계다. 어느 것이 없으면 나머지도 없다. 그런 취지로 2018년부터 동아시아평화포럼을 열고 있다. 3개국이 협력하자는 취지다. 2018년 타이베이, 그해 서울에 이어 다시 2019년 타이베이서 하다 한동안 코로나로 열리지 못하던 포럼이 오는 9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다. 모두가 이기는 ‘윈-윈-윈(Win)’ 전략으로 맞서자는 것이다. 3개국이 민주금삼각(民主金三角·Golden Triangle)을 구축하자는 것이다. 마침 세 나라는 과학기술 선진국이자 공산권에 맞서고 있다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 유가(儒家)사상이란 문화도 공유하고 있으니 공자가 우리를 돕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지금의 국제정세를 어떻게 보나.
“올해 76개국이 새 지도자를 선출한다. 45억 인구가 새 지도자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난 내년 인류가 새로운 문명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그 반면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 결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만들어낼 것이란 우려다. 그는 장사꾼이다. 모두가 이길 방법을 모색하는 국제관계와 정치의 영역과 달리 장사의 영역에선 누군가 이득을 보고 누군가 손해를 본다. 그러나 그 역시도 그렇고, 시진핑도 우리가 추구하는 ‘윈-윈’을 거론한 적이 있다. 우리 인류는 이제 모두가 승리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정치문명을 만들어야 한다.”
▶제주와 제주여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세계평화의 섬, 제주’란 문구를 보고 옳다고 생각했다. 지정학적으로도 제주는 바로 3개국의 ‘윈-윈-윈’ 전략이 중요 교두보가 될 만한 곳이다. 군사적으로 맞서자는 소리가 아니다. 군함이 아닌 크루즈·여객선이 오가는 그 항해 루트의 요충지가 제주다. 아울러 제주의 여성들에겐 남성의 역사 ‘히스토리’(History)에 맞선 여성의 역사 ‘허스토리’(Herstory)에 머물게 아니라 인간문명사(Human Story)에 주목하라고 말하고 싶다. 오랜 세월 전쟁의 역사는 History였다. 우리 여성의 남편과 아이들이 죽어갔다. 생명을 낳은 건 여자다. 그렇기에 전쟁을 하기 전에 여자의 의견을 물어야 한다. 여성들이 일어나 전쟁을 막아야 한다. 평화와 안전을 지켜야 한다. 초현대문명의 시기에 고대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전쟁을 한다는게 말이 되는가?” [제이누리=양성철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