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찾은 사람이라면 어디를 가든 쉽게 볼 수 있는 게 밭담이다.
밭을 따라 구불구불 길게 뻗어나간 검은 돌담은 철마다 형형색색의 옷을 갈아입고 맵시를 뽐내며 도민과 관광객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이면엔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제주 사람들의 고된 삶과 애환이 묻어있다.
◇ 자연이 그린 미술작품 '밭담'
제주행 비행기에 앉아 창밖 너머 제주 풍경을 바라보면 저절로 외마디 탄성을 지르게 된다.
섬 전체를 캔버스 삼아 검은 돌담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그 안을 유채꽃, 청보리 등으로 색칠한 제주는 그야말로 사람과 자연이 함께 그린 미술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군가는 할머니가 자투리 천 조각으로 정성스럽게 바느질해 만든 조각보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외국인들이 보면 '퀼트' 같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어린아이가 그린 듯 다소 엉성하게 모양도 색도 가지각색이지만, 하늘에서 전체를 바라보면 미술의 거장도 무시하지 못할 조화로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점, 선, 면의 조화다.
밭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과 돌로 경계를 가른 밭담, 그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농작물이 점·선·면으로 조화를 이룬다.
게다가 사시사철 끊이지 않고 제주의 색은 변화한다.
노란 유채꽃과 청보리의 푸른 청록색, 소금을 뿌려 놓은 듯한 하얀 메밀꽃, 수확을 마친 밭의 검붉은 흙, 그리고 온 섬을 순백으로 뒤덮은 눈….
같은 듯 다른 색감의 조화가 보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이 모든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속 밑바탕에 '밭담'이 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단순한 '돌담'으로 보이겠지만, 돌로 대부분의 생활용품을 만들어 사용했던 제주 사람들에게 돌담이라 해도 다 같은 돌담이 아니다.
제주 사람들은 집이나 밭, 무덤 등의 경계를 돌을 쌓아 만들었다. 집 울타리의 돌담을 '집담', 밭의 돌담을 '밭담', 무덤의 돌담을 '산담', 바닷고기를 잡기 위해 바다에 쌓은 돌담을 '원담'이라 일컬었다.
그중에서도 제주의 대표적 돌 문화인 밭담은 지난 2013년 1월 국가중요농어업유산으로 지정된 데 이어 2014년 4월 유엔 식량농업기구(FAO)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 Globally Important Agricultural Heritage Systems)에 등재되는 등 그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 척박한 환경 이겨낸 지혜의 산물
제주 밭담에는 흑룡만리(黑龍萬里)라는 별칭이 붙었다.
시커먼 현무암이 구불구불 끝도 없이 이어져 있어 마치 검은 용이 용틀임을 하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밭담의 길이는 얼마나 될까.
오랜 기간 제주 전역에 쌓인 밭담의 정확한 길이를 측정하기는 어렵지만 여러 시도가 이뤄졌다.
지난 2007년 일부 지역을 샘플링해 전체 길이를 추정해본 결과 총 길이는 2만2천108㎞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2019년 농촌계획 제25권 제3호에 실린 '지적 정보를 이용한 제주 밭담 길이 추정'(박종준·권윤구) 논문을 보면 제주 밭담의 길이는 최소 2만3938㎞로 추정했다.
지구 둘레가 대략 4만㎞이니 지구 반 바퀴를 돌고도 남는 길이다.
이 엄청난 길이의 밭담은 돌투성이인 척박한 환경을 딛고 이겨낸 제주 사람들의 의지와 노력, 지혜의 산물이다.
그저 땅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밭을 일구다 나오는 돌덩어리를 한쪽 편에 쌓다가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 밭담이다.
제주에서 농경을 제대로 시작한 시점부터 족히 1천 년은 넘게 이어왔다.
우연히 쌓은 밭담은 제주의 거센 바람으로부터 곡식을 지켜줬고, 방목해 키우던 말과 소가 애써 키운 작물을 뜯어먹지 못하도록 막았다.
또 농경이 발달하면서 토지의 경계를 명확히 해 농지를 둘러싼 다툼이 생겨나지 않도록 했다.
이외에 밭담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흙을 보호하는 것이기도 했다.
용암이 분출해 굳어 형성된 화산섬 제주에서 흙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바위가 부서져 돌이 되고, 돌가루가 동식물의 유기물과 함께 섞여 흙 1㎝ 정도의 표토를 이루는데 200년 이상의 긴 세월이 걸린다고 한다.
푸석푸석하고 바람에 날리기 쉬운 가벼운 화산회토로 이뤄진 제주의 토심은 깊은 곳이 대략 35㎝ 정도, 가장 얕은 곳은 7㎝에 불과하다.
한 줌의 흙도 애지중지 귀하게 여긴 곳이 제주다.
척박한 땅에서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한 번 경작하고 나면 지력이 떨어져 같은 땅에서 바로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새로운 땅을 경작해야 했고 자연스레 밭담은 끝도 없이 길게 이어졌다.
끝없이 길게 이어졌다는 의미를 담은 관용어구 '만리'(萬里).
'흑룡만리'라는 말속에는 제주 농민들의 이 같은 삶의 애환이 담겼다.
◇ 사라지고 훼손되는 밭담
제주 밭담의 가치는 무궁무진하다.
제주 사람들의 삶과 함께 이어온 오랜 역사는 물론 그 규모와 다양성, 경관적 가치 등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띤다.
무엇보다 제주의 돌 문화 중 그 기능을 유지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오는 거의 유일한 농업·문화 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사회·경제·농업 환경이 변화하면서 밭담 역시 변형 또는 훼손되고 있다.
지난 15일 국립제주박물관에서 열린 '제주 돌 문화 연구 성과와 과제' 심포지엄에서 제주 밭담을 연구해 온 강성기 제주도교육청 장학사는 '지리경관으로 본 제주 밭담' 주제발표를 통해 이 같은 밭담의 위기를 지적했다.
강 장학사는 "1970년대 전통농업사회까지만 해도 밭담은 오래전 경관을 유지해왔으나 이후 사회·경제적 영향으로 인해 그 형태와 주민 인식이 변화했다"고 말했다.
그는 "밭담의 변화 원인으로 크게 농업환경과 도시화가 있다"며 "작물의 변화, 농업의 기계화, 경지정리사업, 과학 영농, 농업인구 감소·고령화 등 농업환경 변화로 인해 밭담의 높낮이가 변화하고 직선화되거나 사라지는 밭담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임차농이 증가하면서 농기계 이용 등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밭담을 일부 헐어 출입구를 만들고, 밭담이 훼손되더라도 보수는커녕 그대로 방치한다는 것이다.
또한 도시개발 등 도시화로 인해 경작지와 함께 밭담이 사라지고, 도로 개설 등으로 인해 구불구불 이어진 밭담이 도로를 따라 직선화하는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강 장학사는 "특정 지역을 설정해서라도 밭담 친화적인 농업환경을 조성해 전통 밭담경관을 보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정효 전 제주민예총 이사장은 지난 5월 열린 '제주 돌담의 보전 및 전승 방안 세미나'에서 밭담의 문화재 지정 필요성을 역설했다.
강 전 이사장은 "한라산과 돌담이 갖는 공통점이 몇 가지 있다"며 그중 하나가 "동네 심방('무당'을 뜻하는 제주어) 알아주지 않는 것처럼 한라산이나 돌담도 흔하게 여겨 그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 전 이사장은 "흔히 돌담이라 하면 밭담이나 집 울타리 개념의 울담을 떠올리게 되는데, 문화재에 제주 돌담의 대표 격이라 할 밭담이나 울담은 빠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06년 10월 문화재청이 제주시 애월읍 하가리의 돌담을 등록문화재로 지정 예고까지 했지만, 마을 주민들의 반발로 문화재 지정이 무산된 바 있다"며 "당시 마을 주민들은 마을 안에 초가와 연자방아가 문화재로 지정돼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많은 상황에서 마을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되면 생활의 불편이 심하다며 반대했었다"고 설명했다.
강 전 이사장은 "지역 주민의 불편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또는 직접적으로 주민들과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은 곳을 찾아 (문화재 지정을) 추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