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이끈 김옥련, 부춘화, 부덕량 3인이 흉상이 세워진다.
제주도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의 경제적 수탈에 맞서 인간 존엄성 및 생존권 수호를 위해 저항했던 제주해녀들의 항일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주해녀항일운동 주요 3인 흉상 제작사업’을 본격 추진한다고 2일 밝혔다.
이번에 제작되는 해녀 흉상은 1931년부터 1932년까지 제주시 구좌읍 일대에서 1만7000여명의 해녀가 참여, 230여회에 걸쳐 일어난 해녀항일운동의 대표였던 부춘화(당시 25세), 김옥련(당시 23세), 부덕량(당시 22세) 등 3명이 모델이다.
흉상 제작사업은 이달부터 사업공모, 평가, 우선협상 대상자 선정 및 계약 등의 절차를 거친다. 이후 본격 시행 사업자를 선정하고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흉상은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해녀박물관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 옆에 설치될 계획이다. 도는 도내 해녀들을 초청, 오는 9월 제막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또 사업 추진과정에서 흉상의 형태, 제작기법, 등 중요 사안에 대해서는 유족대표, 해녀단체 및 해녀 항일운동기념사업회 등이 참여하는 ‘제주해녀항일운동 흉상 제작 추진위원회’를 구성, 자문을 구해 나갈 계획이다.
김창선 제주특별자치도 해양수산국장은 “일제 경제적 수탈에 의연하게 맞섰던 제주해녀들의 기개와 그들만의 독특한 공동체 정신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덕분에 제주해녀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될 수도 있었다. 그간 이어온 제주해녀항일기념사업위원회 등 관련 단체들의 노고에 고마움을 표한다”고 말했다.
해녀항일운동은 1931년 6월 하도리 해녀들이 해녀어업조합을 상대로 투쟁을 결의, 이후 1932년 1월12일 구좌읍 하도와 종달. 세화리 해녀 1000여명이 일제 경찰.관헌과 맞서 격렬한 시위로 번진 사건이다.
일본 관헌이 해녀가 채취한 해산물에 대해 수수료를 지나치게 많이 매긴 것이 시위의 발단이었다. 1932년 1월12일 시위가 확대되면서 같은달 23일에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주요인사들이 검속됐다. 그러자 다음날 해녀 1500여명이 검속자들의 탈환을 위해 지서를 습격, 격렬한 투쟁이 전개됐다.
1931년 말부터 3개월 동안 연인원 1만7000여 명의 해녀·제주도민이 참가하는 등 제주지역 3대 항일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 일제하 첫 여성 항일운동으로도 평가 받고 있다.
정부에서는 2003년부터 2008년까지 관련 심사 등을 통해 당시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주요 11명을 독립유공자로 추서한 바 있다. 김옥련・부춘화 여사 등 2명은 2003년에, 부덕량 여사는 2005년에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김옥련 열사는 1910년 구좌읍 하도리에서 태어났다. 1923년부터 해녀생활을 시작, 1931년 부춘화 열사와 함께 9개 항의 진정서를 만들어 일제 식민지 수탈에 항거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이후 일본경찰에 검거돼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2005년 94세로 운명했다.
부춘화 열사 역시 구좌읍 하도리 출신이다. 1908년 태어나 1925년 15세의 나이로 해녀생활을 시작했다. 1932년 1월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하다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33년 일본으로 갔다가 1946년 귀국했다. 1995년 88세로 운명했다.
부덕량 열사 역시 1911년 구좌읍 하도리에서 태어나 1928년부터 해녀생활을 시작했다. 1932년 1월 해녀항일운동을 주도하다 목포경찰서로 압송됐지만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 1937년 28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제이누리=고원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