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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의 세상풍경(10) ... 을미년 제주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글(1)

올해로 93세인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지금이야 내가 ‘모신다’고 할 수 있지만, 아흔이 되기 전까진 사실상 어머니가 우리를 돌보셨다.

 

어머닌 여느 제주도 할머니들처럼 과수원의 김을 매고, 마당을 가꾸고, 길가의 잡초도 뽑으셨다. 집안의 모든 식물들은 어머니 손길로 사철 꽃을 피워냈고, 물때가 되면 바다에 가서 보말까지 잡아오셨다. 가끔은 시장에선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자연산 오분작을 잡으실 때도 있었다. "어떵 이 귀헌 것들이 나 눈에 들려신고 이(어떻게 이 귀한 것들이 내 눈에 보였을까)? 어떵사 지꺼진지, 니 주잰 솔째기 곱정 놔뒀져(얼마나 기쁘던지, 너 주려고 살짝 숨겨 두었다). 아이덜 생각허지 말앙 싱싱헐 때 어서 먹어불라(아이들 생각하지 말고 싱싱할 때 빨리 먹어버려라). 닌 두린 때부터 안질이 안 조아부난 눈을 애껴사 헌다(넌 어려서부터 눈이 안 좋았으니 눈을 아껴야 한다)"

 

어머니는 50년간 대포 바다에서 물질을 하신 상군 잠수다. ‘숨비질 배왕 놈 주지 아녀’라는 제주특별자치도의 ‘제주해녀 생애사 조사보고서’에도 소개가 되었으니, 동네의 대표 해녀인 셈이다. 책에는 어머니의 얼굴 사진 위로 ‘조냥허곡 부지런허민 하늘이 도와’란 소제목이 붙어 있다. 왕년에는 남제주군에서 맥주보리 1등, 고구마 절간 2등을 기록한 농사의 달인이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돌과 바람에 견줄 만큼 억척스런 제주도 어머니의 전형이다.

 

 

그런 어머니가 작년부터는 몸과 마음이 눈에 띄게 약해지셨다. 보행기를 움켜잡고서 부지런히 해변 길을 걷는 대신에 망연자실 바다를 바라만 보고 계신다. 이제는 삶의 끈을 놓으시려는 것일까?

 

그 어머니 때문에 요즘 한창 스크린을 달구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보러 갔다. 조그만 강가의 외딴 집에 89세 할머니와 98세 할아버지가 원앙처럼 살아가는 사랑 이야기다. 가을 마당에서 낙엽을 마구 던지며 장난을 치고, 여름 개울가에선 신나게 물장구를 치고, 겨울에는 눈싸움을 하다가 서로의 눈사람을 만들어 주고, 봄에는 산등성이에 올라가 꽃을 꺾어 상대의 머리에 꽂아 준다. 매일을 신혼처럼 살아가는 노부부는 76년째 결혼을 이어가는 연인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디를 가든지 그 계절의 빛으로 커플 한복을 해 입고 두 손을 꼬옥 잡고서 사이좋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마치 소풍을 가는 유치원생처럼 천진스럽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식구처럼 키우던 강아지가 죽자 할아버지도 기력을 잃고 아프기 시작한다. 기침이 심해지고 다리가 약해지고 식욕이 떨어지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할머니는 다가올 이별을 예감한다. 할머니의 흐느끼는 눈물에 내 어머니의 아픈 이별이 되살아난다.

 

아버지를 장례하던 날은 마치 봄의 교향곡처럼 햇빛이 눈부시고, 꽃은 흐드러지고, 새는 포르릉 거리고, 바람은 녹색으로 살랑거렸다. 미국으로 이민간지 17년, 향년 82세로 눈을 감으신 아버지는 15시간을 비행기로 달려간 딸에게도 굳은 손을 펴지 않으셨다. 울면서 아버지를 부르고 얼굴을 쓰다듬고 손을 만져보는 내게, 어머니는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네 아버지는 이미 천국으로 가셨단다.” 미국의 장례 풍습에 따라 아버지는 단정하게 화장을 하고 깨끗한 정장을 입고 갖가지 꽃에 둘러싸여서 조용히 누워 계셨다. 이제라도 깨우면 금방 일어날 것 같은데,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온 몸은 굳어진 흙처럼 딱딱했다. 어머니 말씀대로 아버지는 이미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아버지가 미리 준비해 놓으신 묘지를 향해 운구행렬이 노래를 부르며 행진할 때는 마치 천상병 시인의 ‘귀천’처럼 한바탕 소풍을 가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관이 땅속으로 들어갈 즈음, 갑자기 어머니가 관을 붙잡으며 함께 묻힐 듯이 고꾸라졌다. 그동안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던 어머니가 통곡을 하며 ‘안 된다’고 비명까지 질렀다. 할아버지 혼자서 ‘그 강을 건너지 말라’며 흐느껴 우는 영화 속 할머니와 같은 빛깔의 슬픔이었다. 하기야 60여년을 함께 살아온 남편이 먼저 떠나는데, 잠잠이 이별의 손수건을 흔들며 서있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또한 그토록 눈물 흘리며 서럽게 매달리는 아내를 두고서, ‘떠날 때는 말없이’라며 담담하게 발길을 돌리는 영혼이 어디에 있을까.

 

영화 속 할아버지는 그토록 애절하게 우는 할머니를 놔두고 떠나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장례식을 마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유품을 정리하는 동안, 아직은 온기가 남아 있는 지갑과 수첩을 살펴보았다.

 

 

‘아버지는 내게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셨을까?’

 

나는 어머니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서 ‘이제는 우리랑 함께 살자’고 말했다. 자식의 초청으로 미국에 이민 가서 사는 동안, 낯설고 물 설은 미국 땅은 언제나 어머니를 이방인이게 하였다. 아들네가  ‘아이들을 돌봐 달라’고 매달리지 않았던들, 무슨 호사를 더 바라서 평생을 몸담아 준 고향을 등졌을까? 아버지와 달리 미국의 언어는 물론 음식도 풍경도 사람도 불편하게만 느껴지는 어머니에게 그곳의 삶은 그야말로 잃어버린 세월이었다.

 

아버지는 미국에 닿자마자 200년이 지나서 버려진 다운타운의 건물들을 재건축하고 싶어 하셨다. 햄버거를 좋아하고, 여행을 즐기며, 영어를 익히고, 시민권도 따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미국에서도 제주도 호박을 심고, 깻잎과 고추도 가꾸고, 된장국과 김치가 있어야 밥을 드셨다. 그런 어머니를 설득해서 다시 고향땅으로 발길을 돌리게 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선선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서귀포의 동홍동은 택지를 개발해서 새로 형성된 아파트와 상가, 학교, 도로 등이 끊임 없이 인구를 빨아들이는 신흥 주거지였다. 어머니는 그곳의 아파트에서 다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면서 아버지를 잃은 슬픔도 삭여내야 하였다. 세상과 담을 쌓기나 한 것처럼 두문불출 하는 어머니의 눈에는 쓸쓸함과 허망함이 출렁거렸다. 그렇게 새장 속의 새처럼 바깥세상을 관조하기만 하던 분이 어느 날 집을 나가서는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경찰에 가출 신고를 내고 경찰차의 서치라이트로 온 동네를 뒤진 끝에 공원 구석에 오도카니 앉아 있는 어머니를 발견했다.

 

어머니는 딴 사람처럼 생경스런 표정으로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여기에 이러고 있느냐’며 호들갑을 떠는 딸들에게 오히려 ‘무엇 땜에 그러냐?’는 얼굴이었다. 넋을 잃은 듯한 어머니의 눈에는 삶에 대한 애착도 욕망도 남아 있지 않았다.

 

드디어 보목동의 섶섬 앞으로 이사를 하던 날, 어머니는 마당처럼 펼쳐진 바다를 보고서 오랜만에 활~짝 웃으셨다. 마치 오영수의 소설 ‘갯마을’의 해순이가 고향 바다로 돌아와서 웃음을 되찾고 물질을 하려는 얼굴처럼 화안했다. 옥수수 밭을 보아도 바다처럼 느껴지고 들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양도 파도의 잔물결처럼 보였다던 해순이 마냥, 대포를 떠난 후 어머니는 한시도 그 바다를 잊을 수 없었으리라.

 

썰물이 지면 바다로 나가 밭일을 하듯 보말을 캐면서 어머니의 몸은 해녀 시절처럼 다시 날렵해지기 시작했다. ‘미국 할망’이라 불리던 뿌연 얼굴에 갯바람이 들어가 늙은 미역처럼 튼튼한 해녀 할망이 되었다.

 

아무리 ‘머무는 곳이 고향’이라고 하지만, 정작 고향은 부모님과 함께 어린 시절을 살았던 꿈속의 놀이터가 아닐까? 어머니와 나란히 누워서 옛날 얘기를 물으면, 어머니는 언제나 당신의 어머니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리 어멍은 내가 다섯 살 적에 갑자기 남편을 잃은 후 평생 동안 남의 장례행렬에 눈을 두지 않았다’며 한숨을 지었다.

 

나의 외조부 김광용씨는 함경환 사건의 희생자다. 함경환은 일제시대에 제주~시모노세키~오사카를 운항하던 부정기 여객선으로, 제주시 산지항을 출항해 조천·김녕~성산포~표선~서귀포~모슬포~고산~한림~애월 등 제주도를 한 바퀴 돌면서 승객을 태웠다. 접안시설이 부족한 경우에는 종선(거룻배)으로 승객을 실어 내렸는데, 중문에서는 대포 포구에서 멀리 떨어진 자장코지 앞바다에 정박해 승객을 기다렸다.

 

1928년 1월 28일 50명의 중문면 주민을 태운 종선이 어렵사리 함경환에 도착할 즈음, 갑자기 돌풍이 불어 작은 배를 침몰시켰다. 외조부는 43세의 건장한 몸이라 헤엄을 쳐서 배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기를 업고 허우적대는 것을 보고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커다란 파도가 연속적으로 덮쳐들었고, 외조부는 그 아주머니와 함께 영원히 물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 사고로 32명이 한꺼번에 사망하는 바람에 대포동은 졸지에 마을 전체가 장례식장이 되고 말았다. 외조모는 빈상여로 장례를 치러야 했고, ‘어떤 사람은 복도 많아 시신 있는 장례를 치르는가?’며 울었다. 그 난리 중에 배고픈 어머니가 칭얼대자 7살이던 외삼촌이 손을 이끌고 이웃집 장례에 데리고 가서 밥을 얻어 먹였다. 그로부터 어머니의 인생은 고단하고 암울하게 펼쳐졌다. 열 살부터 언니가 만들어 준 태왁을 짚고 얕은 바다에서 소라를 잡는 갓잠수가 되었다. 17세가 되자 부산 근처 미포로 물질을 나가는 상군들을 따라 육지물질을 떠났다. 전주가 ‘어리다’며 데려가지 않으려 하자 해녀들의 아기를 봐주는 조건으로 따라붙었다.

 

아기업개로 출발했지만, 정작은 돈을 벌어야 했으므로 현지에 도착해서는 물질을 시작했다. 해녀들은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갈 때, 구슬픈 가락으로 노래를 불렀다. ‘칠성판을 등에 지고, 목숨 걸고 이 물질 해서, 어느 남편 먹여 살리자고, 이 먼 타향에 나왔는가?’ 대부분 남편을 잃고 물질로 자식을 키우는 해녀들의 곡조가 구슬퍼서 어머니도 함께 훌쩍이며 설움을 삭였다. 듣는 나도 목이 메는데 그 내용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이들의 아픔이야 오죽하였으랴. 그 당시 해녀들은 남편이 죽으면 장례식 절차가 거의 끝나고 봉분이 다져지는 동안 조문 온 동네 여자들이 장구 치고 노래하며 춤추는 것을 함께 하였다. 상주로 하여금 고인에 대한 슬픔에서 벗어나 어서 속히 삶으로 귀환하기를 촉구하는 의식이었다. 아, 제주 여인들에게는 슬픔을 삭일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원정물질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 어머니는 ‘육지 물질은 위험하다’는 오라버니의 강권에 의해 결혼의 길로 돌아섰다. ‘나는 열일곱, 너희 아버지는 열여덟, 한 동네 총각에게 시집을 갔다.’로 시작되는 어머니의 중반전 인생은 김종두 시인의 ‘제주여인 1’을 방불케 한다. ‘시집 왕 보난 돌랭이(작은 밭) 호나, 살아갈 일 생각허난 귀눈이 왁왁허여도(캄캄하여도), 우리 할망 살아온 시상 가슴에 새기멍 살아수게. 조냥호여사(아껴야) 밥 먹은다, 호다(부디) 맹심허영, 이실 때 애끼곡 젭저 놨당(끼워 두었다가), 어신 듯 존디멍(견디면서) 살라. 올레(집에서 동네 길까지 골목길) 밖까지, 좇아오멍 고라주던(말해주던) 우리 어멍의 혼 시상. 아명허믄(아무려면) 못사느냐, 조름(엉덩이) 붙이지 마랑, 탕근도 졸곡 물질도 허멍, 시집 어른 뜻받앙 살암시믄 살아진다. 아, 탐라 할망들의 삶이여 제주여인의 삶이여.’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65년을 살면서 10명의 자녀를 낳아 2남7녀를 키웠다. 돌랭이조차도 없었던 그녀에게 바다는 그야말로 무진장한 공짜밭이었다. 어머니는 한 번 눈으로 본 것은 남에게 주지 않는 상군잠수였다. 사실 물건을 많이 하는 것만으로 상군이 되지는 않는다. 잠수하는 바다가 다르고 그 깊이가 열 두발 넘게 깊다. 그러므로 상군이 잡은 소라는 크기도 크고 색깔도 벌겋다. 여름철에는 물에 들 때마다 한 망시리(소라 등을 넣는 그물망으로 된 자루) 가득 소라를 잡아 올려, 저녁이 되면 구덕을 채우고도 몇 망실이가 남았다. 그런 날은 아버지가 구루마를 끌고 와서 실어 가곤 하였다. <을미년 제주의 어머니 2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했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 2기를 수료했으며, 언젠가 해녀가 되어 서귀포바다를 얼싸안고 살아가고 싶은 게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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