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여전히 인사철이다. 6.4 지방선거 이후 제주시장이 아직 내정상태고 제주에너지공사 사장도 인사청문회 후 임명됐다. 인사청문회를 통해 내정자들은 전 지사의 측근이라는 딱지를 자의든 타의든 받게 됐다. 제주도정과 관련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전의 민선 지사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그 내용의 핵심은 이전 민선 지사들이 제주정치에 갖는 막강한 영향력이며 그것은 오늘날에도 진행중이라는 점이다. 이 때문인지 ‘제주판 3김’이라는 표현도 나오고 누구는 누구의 측근이라는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언급된다. 어느 조직이든 계파가 있고 노선도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지방정치의 중요한 인사들의 하마평을 논할 때 꼭 빠지지 않는 누구누구의 사람이라는 평가는 썩 달갑지 않은 게 사실이다. '3김 시대'가 공식 종결된지 10여년이 훨씬 넘었다. 하지만 그같은 구시대 정치의 후유증을 아직도 언급하고 있다면 제주정치는 중앙에 비해 한참 뒤쳐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 현상은 원희룡 도정을 평가할 때 상처와 위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인다. 청문회 과정에서 이성구 에너지공사 사장은 신구범 지사의 인맥이라는 것
▲ 양성철/ <제이누리> 발행.편집인 한 마디로 점입가경이다. 충돌과 갈등, 분열만이 있을 뿐 도무지 어떤 결론을 얻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제주의 공익과 미래를 향해 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감정과 핏대만 내세우고 있는 건 아닌지 솔직히 의문이 간다.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인사청문회가 민선 6기 원희룡 제주도정 출범 후 수차례 열리고 있다. 제주특별법은 물론 어떤 법규와 관계규정에도 없는 청문회다. 집행부 수장의 지명·임명직인 행정시장과 공기업, 출자·출연기관의 장을 상대로 한 청문회다. 공모·심사과정을 거치고 인사위원회의 추전을 받은 후보자를 다시 인사청문회 무대에 올려 또 검증하는 것이다. 국회 인사청문 대상인 정부 부처 장관 후보자도 공모.심사는 거치지 않는다. 대통령이 지명한 뒤 청문자리에 간다. 지난 7월 민선 6기 원희룡 도정 출범 후 4개월여가 지났지만 제주시장 후보자는 그 청문회를 거쳐 자진사퇴했고, 두 번째인 제주에너지공사 사장 후보자는 청문회에서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원 지사가 그래도 29일 임명을 강행했지만 다음날인 30일 제주도의회는 당일 예정된 제주발전연구원장 후보자의
▲ 에볼라 긴급대책을 논의하는 오바마행정부 전세계를 강타하며 4500여명의 사망자를 낸 에볼라 바이러스의 국내외 보도를 보고있노라면 1995년 방영된 영화 ‘아웃브레이크’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미국 전염병 예방 및 통제 센터(CDC)에 파견된 주인공(더스티 호프만)은 직속 지휘관으로부터 정체 불명의 치명적 전염병이 돌고 있는 자이르(현재의 콩고민주공화국) 우림 지대의 오지에 들어가 이를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열대 정글의 심장부까지 들어간 주인공은 치사율 100%의 무시무시한 바이러스균이 휩쓸고 간 마을을 발견한다. 마을 주민들은 절대 다수가 이미 숨진 상태. 장작더미처럼 시신은 켜켜이 쌓여있고 극소수의 생존자들마저 생존의 갈림길에 있었다. 주인공은 이 바이러스가 저지되긴 했어도 미국 전역에 퍼질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정부 각료에게 비상조치를 취해줄 것을 경고한다. 국내에서도 ‘연가시’와 ‘감기’라는 영화가 치사율 100%를 가진 변종 바이러스의 위협을 다룬 바 있다. 모든 영화가 우여곡절을 겪기는 하지만 극적인 해결책을 찾아 안도의 한숨을 쉬게 하는 것으로 끝맺음을 한다. 하지만
▲ 양성철/ <제이누리> 발행.편집인 바야흐로 ‘협치’(協治) 전성시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미 ‘인플레이션’ 상황으로 치달았다. 민선 6기 원희룡 도정이 출범하면서 핵심가치로 내세운 ‘협치’는 ‘협치정책실’이란 도정의 새 조직 등장과 더불어 그동안의 민선 1~5기 제주자치 시스템과 다른 ‘새로운 현상’이 등장할 것이란 예고였다. 하지만 원희룡 도정 출범 100일을 지나 ‘협치’는 제주사회 곳곳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 ‘협치정책실’은 등장도 하기 전에 ‘옥상옥’(屋上屋)이란 비판을 받았다. 도정을 비판하는 측은 “이것이 협치냐”고 따지고 있고, 심지어 도의회 마저도 의원당 20억원의 재량사업비를 요구하며 ‘협치 예산’이란 간판을 들이댔다. 원 도정이 이를 거부하자 의회는 “협치가 아닌 무단통치”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협치(協治, governance)는 정치학·행정학에서 거론되는 용어지만 사실 생소한
요며칠 사이 제주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일은 단연 제주시장 내정자 인사청문회다. 25년 전 음주운전 여부를 비롯한 여타 이슈를 둘러싼 도의원들과 내정자 사이의 논박을 보면서 인사청문회의 원래 취지를 생각한다. 그동안 국내에선 수없이 많은 인사청문회가 이루어졌다. 2002년부터 국무총리 인사청문회가 진행됐고 2006년부터는 장관을 대상으로 그 범위가 확대됐다. 이로 인해 인사청문회는 각 정권의 인재풀을 검증하는 관문이 됐다. 인사청문회를 통해 검증 받은 후보들도 있지만 예상치 않은 암초를 만나 평생 쌓아올린 인생의 흠결이 철저히 까발려지면서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을 안고 쓸쓸히 퇴장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더욱이 우리는 검증과정을 통과하지 못해 사의를 표명한 국무총리를 재임명하는 보기 드문 경험을 하기도 했다. 문제는 인사청문회를 마치고 나면 그 과정에서 보여지는 행태다. 인사청문회의 과도함과 실효성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는 점이다. 우리보다 인사청문회가 발달한 미국의 경우 인사청문회 과정은 더욱 치열하고 혹독한 것으로 유명하다. 100여년이 넘는 청문회의 역사를 통해 정권이 바뀌면 총 6000여개에 달하는 자리가 청문회를 통해 인사
글을 쓸 때마다 고민을 거듭한다. 혹이라도 서투른 표현 하나가 애매한 이를 다치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괜한 오해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우려가 있다. 사실과 판단을 전하려 할 뿐인데 ‘유·불리’와 ‘편’의 문제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기에 괜히 온갖 공상을 거듭하게 된다. 그러다 결론을 내렸다. 혹이라도 의도하지도 않았고, 생각조차 않았던 방향으로 흐르더라도 “언론 본연의 소명은 입을 다무는 게 아니라 말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 지난 6일 이기승 제주시장 내정자 인사청문회 6일 이기승 제주시장 내정자에 대한 제주도의회의 인사청문회를 보고 든 생각이다. 7일 그가 사퇴했기에 이젠 전 내정자라 씀이 맞다. 인사청문회가 열리기 전 그동안의 논란을 보면 ‘진실의 윤곽’은 이미 다 밝혀진 것이나 진 배 없었다. 언론에서 나온 얘기와 법원 판결문, 의회에서 불거져 나온 얘기를 종합해 사실관계로 정리해보면 이렇다. 이기승 제주시장 전 내정자는 24년여 전 연합통신 기자이던 시절인 1990년 2월7일 밤 차량을 몰고 제주시
▲ 양성철/ 발행.편집인 중앙언론사에 재직하며 제주도청에 출입하던 시절이 있었다. 민선 2기 우근민 도정이 출범하고 나서 1년여가 지난 1999년 시점이었다. 어느 자리에서 얘기를 나누다보니 도청 출입기자를 놓고 일부 공무원들이 ‘파벌’을 분류하더란 말이 나왔다. 선거에서 경쟁한 후보를 기준으로 'A기자는 B후보 편, C기자는 D후보 편‘이란 식이다. 공무원들의 입에서만이 아니라 기자들의 입에서조차 아무렇지 않다는 듯 ’편‘으로 기자들을 나누고 있었다. 그 ‘편 가르기’에서 내가 ‘B후보 편’이란 사실을 처음 알았다. B후보는 전임 지사였고 1998년 6·4선거에서 우근민 후보와 경쟁하다 낙선한 이다. 그 편에 가담해 아무런 것도 한 적이 없고, 그 편과 ‘동지그룹’이란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지만 그리 분류돼 있었다. 이유를 알아보니 기가 차기도 하고 가관이기도 했다. B후보와 고교 동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민선 2기 시절 우근민 도정의 ‘막가파식’ 개발드라이브가 못 마땅했고, 심지어 세계적 이중화산
▲ 양성철/ 제이누리 발행.편집인 1993년 12월 말 제주행 항공기에 몸을 실은 한 신사는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해 2월 군사정권을 끝장내고 출범한 김영삼(YS) 문민정부의 개혁정치가 정점에 이를 무렵이다. 그는 관선 제주도지사 임명장을 손에 쥐었다. 그의 나이 만 51세였다. 행정고시에 합격, 1967년 제주도청 사무관으로 첫 공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1976년 제주도를 떠났다. 그리고 중앙부처에서 활약하던 이였다. 그에게 지사 임명장을 주며 YS는 “개혁의 분신이 돼라”고 신신당부했다. 임명장을 손에 쥔 그는 곧바로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가 제주 공직생활 중 겪었던 악폐와 구습, 멀리 서울에서 지켜보던 고향의 적폐들이 떠올랐다. 뜻하지 않게 6공 정부의 황태자였던 박철언에게 맞섰다가 미국으로 쫓겨갔던 일화도 그의 머리를 스쳐갔다. 하지만 그보단 그 덕택에 미국생활에서 터득한 글로벌 마인드로 고향 제주를 번듯하게 세계시장 반열에 올려놓겠다는 포부가 더 컸다. 취임과 동시에 그는 개혁의 칼날을 손에 들었다. 비서수발을 받으며 독립 공간이란 호사를 누리던 실·국장들을 실무 과 단위 사
보고 싶었던 장면이 있다. 20년 전인 1994년 9월 서울살이를 접고 제주에 터 잡고 살게 된 뒤부터 줄곧 보고 싶었던 장면이다. 하지만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 1995년 민선 1기 6·27선거가 끝나고 나서도, 98년 6·4선거에서도, 2002년 6·13선거에서도, 2004년 6·5 재선거에서도, 2006년 5·31선거에서도, 2010년 6·2선거에서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2014년 6·4선거에서 그 장면을 봤다. 솔직히 잠시 가슴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느낌을 가졌다. 울컥했다. 개표가 마무리되고 제주도지사 당선인이 가려진 4일 자정을 지나 지난 5일 한낮 격전을 치렀지만 패장이 된 장수 신구범과 승자 원희룡 두 사람이 손을 잡았다. 패장인 신 후보가 원 당선인 캠프를 찾아갔고, 원 당선인은 그를 반갑게 맞았다. 두 손을 꼭 쥔 두 사람의 얼굴은 화색이었고 시종일관 두 사람은 덕담을 주고 받았다. 원 당선인은 “선배님”이라며 깎듯한 호칭을 잊지 않았고, 신 전 지사 역시 당선인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것은 물론 “이제 새 시대
긴 세월이 흘렀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따지고 보면 무수히 많은 말과 약속, 이벤트를 목도했지만 어쨌건 이젠 선택의 시간이다. 선택은 그동안 그렇게 흘러온 정치과정에 대한 판단이다. 결단이다. 물론 유권자의 몫이다. 선거판 얘기를 거론하자니 미국의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Adam Przeworski)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과거 거론한 적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 시점에서 재론할 만하다. 미국 뉴욕대 정치학과 교수다. 폴란드 출신으로 이제 만 74세다. 민주주의의 본질, 민주화 이행의 조건, 민주주의와 시장의 관계 등에 관한 주요저작을 냈다. 한국정치학계에서 이론가로 꼽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스승이기도 하다. 최 교수의 미국 유학시절 박사학위 논문을 지도한 이가 바로 그다. 그는 2010년 말 아프리카의 5개 신문과 인터넷 미디어 아프로온라인(Afronline)과 인터뷰 자리를 가졌다. 코트디부아르·튀니지·이집트·리비아 등 아프리카 지역에서 민중의 정치적 열망이 번지면서 정치적 위기와 대중혁명으로 나라마다 체제가 흔들리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선거’(election)와 &
그들은 뭉치는 걸 좋아한다. 이유불문이다. 조직엔 상명하복이 있고 조직에 충성을 다짐한다. 물론 그래야 일신의 안위와 영달이 보장된다. 문제를 지적하거나 맞서는 상대가 있다면 오로지 그건 제거의 대상이다. 철저한 응징만이 있을 뿐이다. 조직의 수장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행동하며, 조직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릴 수도 있다. 그것만이 비록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남은 가족의 안전과 안위를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선 그들을 ‘조직폭력배’의 줄임말인 ‘조폭’으로 부르지만 미국의 이방인이자 이주민이었던 이태리 종마들은 그들을 ‘마피아’라고 불렀다. 마피아(Mafia)는 전세계적으로 최대 범죄 조직으로 널리 알려진 범죄 단체다. 원래는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인 ‘시칠리아 마피아’만을 말했지만 ‘미국 마피아’, ‘러시아 마피아’로 영역을 확대했다. ▲ 영화 <대부>의 한 장면 마피아란 용어가 세계적으로 통용된 건 19세기 말이다. 그 기원은 1282년 프랑스의 시칠리 침공에 대한 항거조직이었다. &lsquo
▲ 양성철/ 제이누리 발행.편집인 수년 전의 일이다. 어리둥절한 적이 있다. 늘상 어떤 군중행사가 있게 되면 반드시 치러야 하는 대한민국의 의식이 있다. 국민의례다. 대부분 ‘국기에 대한 맹세’로 시작한다. 언제나 습관처럼 가슴에 손을 얹고 태극기를 쳐다봤다. 그런데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국기에 대한 맹세’는 그 시절 알고 있던 그 맹세문이 아니었다. 초등생 시절을 거쳐 불혹의 나이를 넘어서고서도 기억하는 국기의 대한 맹세는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혹여 현재 시행 중인 국기에 대한 맹세를 초등생 기억에 갇혀 모르는 분들을 위해 여기 다시 써본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그 시절 신문 한 켠에 조그맣게 자리한 박스기사에 불과한 지라 국기에 대한 맹세문이 바뀐 사연을 몰라 동그란 눈을 떴지만 그런 허둥댐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웅성거리는 소리, 수군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