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12월 말 제주행 항공기에 몸을 실은 한 신사는 깊은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해 2월 군사정권을 끝장내고 출범한 김영삼(YS) 문민정부의 개혁정치가 정점에 이를 무렵이다. 그는 관선 제주도지사 임명장을 손에 쥐었다. 그의 나이 만 51세였다.
행정고시에 합격, 1967년 제주도청 사무관으로 첫 공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1976년 제주도를 떠났다. 그리고 중앙부처에서 활약하던 이였다. 그에게 지사 임명장을 주며 YS는 “개혁의 분신이 돼라”고 신신당부했다.
임명장을 손에 쥔 그는 곧바로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가 제주 공직생활 중 겪었던 악폐와 구습, 멀리 서울에서 지켜보던 고향의 적폐들이 떠올랐다. 뜻하지 않게 6공 정부의 황태자였던 박철언에게 맞섰다가 미국으로 쫓겨갔던 일화도 그의 머리를 스쳐갔다. 하지만 그보단 그 덕택에 미국생활에서 터득한 글로벌 마인드로 고향 제주를 번듯하게 세계시장 반열에 올려놓겠다는 포부가 더 컸다.
취임과 동시에 그는 개혁의 칼날을 손에 들었다. 비서수발을 받으며 독립 공간이란 호사를 누리던 실·국장들을 실무 과 단위 사무실 안으로 들여보냈다. 내무부 파견을 다녀오면 관행적으로 주어지던 승진의 혜택도 거둬들였다. 그보단 내무국·총무과 등 실세부서가 독식하던 승진의 기회를 현장·실무·기획중심의 부서에 더 많이 줬다. 원칙 없이 지사가 쫓아다니던 경조사 현장은 불요불급하거나 공공적 차원이 아니라면 아예 가지 않았다. 능력·실력을 중시한 인사를 하다 보니 어린 시절 한솥밥까지 먹었던 그의 사촌동생은 오히려 '물'을 먹었다. ‘든든한 빽’인 줄 알았던 지사의 ‘양해’ 한 마디로 승진 길이 가로막혀 6급 주사 신분으로 공직을 마감했다.
공직문화를 뒤바꾸는 시도를 지속했던 그는 언론과의 관계설정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지역언론은 구습과 악폐에 매몰돼 있었다. 토착·토호비리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결국 지역의 유력 신문·방송이 사안마다 곳곳에서 그와 마찰을 빚었다. 언론은 그를 향해 “오만·독선의 리더”란 표현을 서슴지 않았고 그는 사안마다 “사실은 이렇습니다”란 해명자료를 내며 맞섰다. 그러나 그의 이미지는 그렇게 고착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미국생활에서 꿈꿨던 제주지하수의 상품화 작업에 착수, ‘삼다수’란 국민생수를 만들었다. 관광복권과 컨벤션센터·세계섬문화축제란 역작을 1995년 민선 1기 6·27선거를 겪으며 도민 지지란 에너지로 일궈냈다. 숱한 논란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감귤유통명령제의 모태인 감귤생산조정제를 시도, 가격폭락 사태를 반복하던 감귤값 안정화의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오만·독선이란 낙인은 그를 승승장구의 길에 그대로 두지 않았다. 끝끝내 그의 발목을 잡았다. 1998년 민선 2기와 2002년 민선 3기 선거에서도 그를 옭아맸고, 탄탄한 카르텔을 형성한 제주의 지배권력은 그의 개혁성향을 거듭 물리쳤다. 그가 등장하면 잘 짜여진 질서가 일순간 무너지고, 재편됐기에 제주의 성장보단 특정 패거리의 기득권 유지가 더 소중했던 것이다.
지천명을 갓 넘긴 신구범 전 지사가 관선지사로 부임한 지 20여년이 지난 2014년 7월1일 역시 지천명을 갓 넘긴 원희룡 지사가 취임했다.
지사 임명·취임시점의 나이로만 본다면 원희룡·신구범 두 지사의 나이는 사실 같다. ‘천명’(天命)을 깨우친 지천명의 나이다. 물론 자·타가 공인하는 수재였던 것도 두 사람의 유사점이다.
6·4선거가 끝나고 당선인 신분이던 시절 원 지사는 지사의 경조사 참석 문제를 놓고 “도지사의 시간은 도민의 시간”이라고 설파했다. 선거 등을 겨냥한 무분별한 인기몰이식 경조사 참석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드러냈다. 지사 취임 후엔 “인사청탁에 대해선 반드시 불이익을 주겠다. 청탁과 추천은 엄연히 다르다”며 “향후 인사는 시대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주겠다”는 말로 공직사회에 경고메시지를 보냈다.
압도적 지지세 덕(?)이기도 하겠지만 그는 6·4선거기간 중엔 캠프 내 인사들에게 “논공행상을 요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까지 받았다. 돈 안드는, 돈 안 쓰는 선거운동을 실현했다. 대규모 유세차량이 아닌 감귤 컨테이너 위에 올라서 즉석 유세를 벌이던 그의 모습은 제주도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결국 그는 넉넉한 득표로 제37대 제주도지사 자리에 올랐다.
물론 그는 지난 3월16일 관덕정 광장에서 출마기자회견을 할 때부터 “대한민국의 미래를 알려거든 제주를 보라”는 말로 그의 ‘그랜드디자인’을 꺼내 들었다. 신선하다 못해 타 후보를 압도했다. 학력고사 전국 수석, 서울법대 수석, 사법고시 수석이란 ‘수석’타이틀의 대명사인 그 다웠다.
그가 취임한 지 이제 한 달이다. “갓난애도 백일은 기다려봐야 생사를 가늠하듯 새 도정 출범도 100일은 두고 봐야 한다”는 마음으로 가능한 비판을 자제하고 있다. 그게 기다려줄줄 아는 언론의 최소한의 덕목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전 도정에서도 그 정도는 다른 언론도 다 했다. 그런데 <제이누리>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그에게 벌써부터 ‘오만·독선’이란 이미지가 형성되고 있다. 그런 말들이 들려오고 있다. 언론의 비판이 쉴 새 없다.
부동산 특혜의혹 논란에 휩싸인 이지훈 제주시장의 사례나 그가 도정 조직개편안에서 의욕을 보인 협치정책실의 위상과 내정된 책임자, 그가 지명한 정무부지사 내정자에 이르기까지 나올만한 의혹과 문제제기는 줄기차다.
“답답하다. 왜 진정성을 몰라주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원 지사의 고충과 토로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아니다. 그동안 제주사회를 쥐락펴락했던 기득권 그룹의 조직적 저항이란 의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백번을 양보한다하더라도 지금껏 언론이 지적한 내용이 그리 해괴망측하고 상식에서 어긋난 지적이라고 보기도 곤란하다. ‘인사가 만사’라고 했건만 최소한 지금까지는 만사를 그르친 인사의 성격이 더러 보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그의 변화의지를 지지하고 개혁을 기대했던 그의 지지층은 공감하고 수용할 수 있는 새 판짜기이자 신선한 인물 선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이제 중용의 가치가 등장해야 할 시점이다. 검소한 듯 보이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한 듯 보이나 사치스럽지 않아야 한다. 온갖 브랜드(슬로건)로 포장하더라도 재료(인물)가 시원찮으면 ‘그 밥의 그 나물’이란 소리가 자연 나올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평가는 각기 다르다. 두루 듣고 두루 살펴야 알아볼 여지가 생긴다. 전임 우근민 도정은 이 점에서 ‘편’의 굴레에 갇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고, 두루 쓰임새를 알아보지 못해 제주가 '공적 진화'가 아닌 '사적 퇴행'의 길에 파묻히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원 도정이 반드시 경계삼아야 할 일이다.
이 쯤에서 원희룡 도정이 슬로건 역시 어정쩡하게 넘겨받은 ‘세계가 찾는 제주, 세계로 가는 제주’란 겉치레적 현란함보단 ‘미래로 가는 제주의 새로운 전진’으로 방향타를 수정함이 옳을 것 같다.
‘오만·독선의 지도자’란 낙인이 지속된다면 우리 제주도와 제주도민 역시 손해다. 20여년 전 쉰 한살의 나이에 도지사 직무를 시작했던 전임 지사가 되새겨주는 교훈이다. [양성철=제이누리 발행·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