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미천의 모습. 제주의 하천은 육지부의 강과는 전혀 다르다. 꽤 오래전 제주지방기상청장에게 들은 얘기다. 지금은 백록담에도 자동기상장비가 설치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없었다. 도대체 한라산 고지대에 얼마만큼의 비가 오는 것일까. 궁금하여 성판악코스 진달래밭 대피소에 수동 강우량 계를 설치해 보았단다. 어느 날 밤새 비가 왔는데 아침에 보니 하룻밤 사이에 1000㎖를 기록했다고 한다. 깜짝 놀랄만한 수치다. 우리나라 육지부의 연평균 강수량이 약 1100㎖이므로 거의 1년 치의 강우량이 하룻밤 사이에 내린 것이다. 다음날 아침에 건천은 ‘내가 터져서’ 흙탕물로 범람하며 세차게 바다로 흘러간다. 만약 한라산 남북사면에 건천이 없다면 해안가 마을은 모두 홍수로 사람이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제주에서 하천은 우선 한라산 고지대의 엄청난 강우량을 바다로 급속하게 이동시키는 배수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 사람들은 건천을 ‘냇창’이라고도 불렀다. 평상시에는 물이 없기 때문에 하천 바닥의 암반이 그대로 드러난다. 큰 왕바위들도 놓여 있다. 제주에서 하천 조사는 이런 암반으로 이루어진 하천 바
▲ 성읍저수지와 성읍마을 사이에 있는 천미천의 소(沼). 이러한 소가 전 구간에 걸쳐져있다. 벌써 이십 년이 지났다. 1999년 봄부터 초여름까지 천미천을 탐사했다. 한라일보사에서 강문규 기자가 기획한 하천 탐사에 동행하게 되었다. ‘한라산 학술 대탐사’라고 거창하게 이름 붙인 탐사의 제1부가 하천과 계곡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멤버가 아니었다. 어느 날 시청 앞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는데 강문규 팀장이 “시간 나면 언제 한번 같이 가게”라고 하여 그러겠다고 해두었다. 동행의 목적은 하천을 한번 걸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지않아도 당시 오름을 전수 조사한 후라서 야외조사에 불이 붙기 시작하던 때였다. 동굴도 따라가 보았다. 벵듸굴을 하루종일 기어서 그야말로 고생 직 싸게 했다. 하천과 한라산 계곡도 보고 싶었다. 마음속으로 나는 제주의 자연 전부를 단지 보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한라산과 오름은 물론 곶자왈, 하천, 해안선과 섬을 거의 다 둘러본 셈이다. 백문의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봐야 연구를 하던지, 생각을 할 것이 아닌가.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자연은 현장에 나가서 직접 보면
로맨스 소설가 멜빈 유달(잭 니콜슨 역)은 지독한 강박증과 결벽증을 지닌 채 뉴욕시의 고급 아파트에서 참으로 ‘싸가지’ 없고 별나게 살아간다. 그러던 중 멜빈 유달(잭 니콜슨)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게이 화가 비숍이 집안에 침입한 강도에게 거의 죽을 만큼 폭행을 당하고 병원에 실려간다. 사고를 수습하러 온 비숍의 에이전트는 능수능란하게 사고의 뒷수습을 한다. ▲ 반려견과 사는 이들은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개를 통해 치유받는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고 수습과정에서 비숍이 애지중지 키우던 강아지 베델의 처리가 실로 난감하다. 비숍의 에이전트는 궁리 끝에 옆집에 사는 유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비숍이 퇴원할 때까지 이웃으로서 강아지 베델을 돌봐줄 것을 부탁한다. 그 에이전트는 아마도 유달의 악명을 전달받지 못했던 모양이다. 알았다면 언감생심 유달이 혐오해 마지 않는 ‘게이’의 강아지를 당분간 맡아달라는 부탁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강아지를 아파트 창밖으로 내던지지만 않아도 감지덕지할 일이다. 그런데 사람을 기피하고 병적으로 청결에 강박증이 있는 유달은 자그마한 털뭉치 강아지
▲ 가계 빚의 증가속도가 너무 빠르다. 무분별한 카드 대출을 억제하고 다중 채무자를 관리하는 등 선제적 대응책을 마련해야 할 때다.[사진=연합뉴스] 가계부채가 빠른 속도로 과도하게 불어나고 있다. 개별 가계에 날아오는 총탄 단계를 벗어나 사회 전반을 위협하는 포탄 같아 보일 정도다. 은행과 보험사 등 금융회사 대출과 신용카드 사용액을 합친 가계신용 잔액은 3월말 현재 1765조원. 1년 새 153조6000억원 증가했다. 총 규모와 증가액 모두 사상 최대다.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며 생활고에 쪼들리는 데다, 특히 젊은층이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음)’ ‘빚투(빚 내 투자)’하기 때문이다. 숱한 부동산 대책에도 집값이 치솟자 더 오르기 전 어떻게든 집을 사려 든다. 주택담보대출이 72조8000억원 불어났다. 1분기 가상화폐 신규 투자자의 3분의 2가 2030세대다. 집값이 뛰어 내집 마련이 어려워지자 벼락거지 신세를 모면하고자 빚을 내서라도 주식이나 가상화폐 투자에 뛰어들며 일확천금을 노린다. 걱정을 더하는 것은 기록적인 가계 빚 속에 인플레이션 조짐을 보인다는 점이다. 4월 소비자물가가
제임스 브룩스 감독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7)’는 명배우 잭 니콜슨에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안긴 작품이다. 과연 잭 니콜슨의 ‘악당’ 연기는 발군이다. 영화의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지만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내용은 상당히 심각하다. 잭 니콜슨은 대단히 비사회적인 염세가이자 독설가이며 강박증세를 가진 소설가인 멜빈 유달을 연기한다. 이렇게 복잡한 ‘캐릭터’를 물 흐르듯 소화해내는 잭 니콜슨의 연기가 과연 일품이다. ▲ 유달은 관객들의 억눌린 욕망을 대리만족하게 해주는 또 다른 ‘영웅’으로 보인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멜빈 유달은 로맨스 소설 분야의 베스트셀러 작가다. 당연히 생활은 풍요롭다. 뉴욕의 고급 아파트에서 ‘고급지게’ 살아가지만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다. 세상과 인간을 향한 혐오로 짜증과 분노가 충만한다. 당연히 독신이다. 거기에 더해 유달은 강박증 환자이기도 하다. 집밖을 나서면 모든 문고리나 손잡이를 손수건으로 감싼 다음 잡아야 하고, 매일 들르는 단골식당에 갈 때도 집에서 식기를 챙
▲ 한국 경제가 지난 1분기에 1.6% 성장하면서 반등에 성공했지만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내년 최저임금 결정은 경제상황과 코로나 변수를 면밀하게 따져 신중히 다뤄야 한다.[사진=뉴시스] 내년 최저임금을 결정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노동계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인 시급 1만원에 맞춰 대폭 인상을 압박한다. 코로나19 경제위기가 가중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생활 개선을 위해 절실하다는 입장이다. 경영계는 최저임금 수준과 인상률이 아시아 최고라며 동결을 주장한다. 또한 지급능력이 떨어지는 음식숙박업 등을 배려해 업종별로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자는 입장이다. 역시 코로나 위기 극복과 경기 반등을 위해 최저임금은 안정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저임금 인상 문제는 현 정부 출범과 함께 뜨거운 이슈로 등장했다. 임기 내 1만원 목표 달성을 의식한 정부는 집권 초반 이태 연속 두자릿수 인상을 감행했다. 그러나 저소득 자영업자의 부담 증가와 저임금 일자리 감소라는 ‘을(乙)들 간의 갈등’을 초래했다. 소득분배 구조가 악화하며 빈부격차도 더 벌어졌다. 속도조절론이 힘을 받으며 2020년도 최저임금 인상률은 2.87%로
‘테넷’의 주인공과 요원들은 ‘현재’를 바꾸기 위해 ‘미래’로 들어간다. 미래를 조작해 인류의 운명을 통째로 바꿔버린다. ‘과거’로 돌아가 과거를 바꿔 현재를 바꾸는 주제들은 꽤나 익숙하지만, 미래를 바꿔 현재를 바꾸는 방식은 특히나 우리들에게는 조금은 신선하기도 하다. 그런데 왠지 마음에 와닿지는 않는다. 테넷의 우리나라 흥행 성적표가 썩 훌륭하지 않았던 이유일까. ▲ 동양의 미래관이 ‘운명론적’이라면 서양은 반대로 ‘의지론적’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미래에 관한 관점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첫째,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며, ‘정해진 미래’는 우리의 희망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오는 것(coming)’일 뿐이라는 관점이다. 지나간 과거를 바꿀 수 없듯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미래도 바꿀 수 없다. 운명론(fatalism)의 뿌리다. 둘째는 미래는 ‘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making)&r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들어낸 ‘시간여행’에는 이전의 시간여행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흥미로운 장면이 등장한다.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 혹은 ‘미래의 나’와 ‘현재의 나’가 충돌하고 뒤엉켜 싸우는 장면이다. 최신작 ‘테넷’에도 그런 장면이 등장한다. ▲ 나의 적은 ‘다른 시간대를 살았던 나’와 ‘다른 시간대를 살아갈 나’일지도 모른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인류의 미래를 구원하기 위해 미래로 출동했던 주인공은 현재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미래로 출동하던 자신과 맞닥뜨려 뒤엉켜 싸운다. 똑같은 주인공이지만 서로가 서로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현재의 주인공은 미래에서 오는 ‘나’를 알아보지 못한 채 저지하고, 미래에서 현재로 돌아가려던 주인공 또한 자신을 막아서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각자의 임무에만 충실한 채 뒤엉켜 죽기살기로 싸운다. 나의 적은 같은 시간대를 살아가는 타인들이 아니라 다른 시
▲ 미국의 움직임에 맞춰 국내 금리가 오르면 당장 막대한 빚을 지고 있는 가계가 위험해진다. 정교한 물가관리와 세심한 금리인상 정책이 필요한 때다.[사진=뉴시스] 물가 오름세가 심상찮다. 4월 소비자물가가 2.3% 오르며 3년8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4월 물가상승률 2.3%는 한국은행의 물가관리 목표(2%)를 웃도는 수치다. 인플레이션(지속적 물가상승)이 현실화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인플레이션 경고음은 나라 안팎에서 울려댄다. 주식과 부동산에 이어 국제유가와 원자재, 농축산물까지 들썩이며 가격 상승폭이 커지고 범위도 넓어지고 있다. 미국에선 한국보다 한달 빠른 3월에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대로 올라섰다. 미국의 3월 물가상승률 2.6% 또한 미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의 통화정책 목표치(2%)를 넘어선 것이다. 제롬 파월 Fed 의장은 당시 “물가상승은 일시적 현상”이라며 통화긴축을 일축했다. 그런데 지난 4일 직전 Fed 의장이었던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경기 과열을 막기 위해 금리를 올릴 수 있다”고 말했고, 미 증시의 나스닥지수가 급락했다. 미국에선 코로
고대사회를 지배한 변수 중 하나는 ‘무당의 한마디’였다. 중세사회에선 ‘천국의 예언’이 사람들의 삶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현대에도 미래의 예언자들이 있다. 과학자, 기술기업, 그리고 언론이다. 이들의 예언은 통찰력이나 비전이란 이름으로 대체되곤 한다. ▲ 현재가 과거를 재구성하고 새로운 과거를 창조해 내기도 한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시간을 오가는 ‘타임머신’ 영화는 대개 과거로 돌아가 현재를 바꾸어버리는 상상을 담는데, ‘테넷’은 특이하게도 미래로 넘어가 현재를 바꾸는 상상을 담는다. 역사학자 E.H. 카(Carr)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정의한다. 과거에 일어난 ‘사실’은 박제처럼 영원히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역사가나 혹은 현재의 특정한 필요에 의해 현대인들의 생각과 관점으로 새로운 ‘사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중국의 거친 ‘동북공정(東北工程)’이 그렇고 말썽 많은 하버드대학 램지어 교수라는 사람의 일본
▲ 지금은 4‧7 서울‧부산시장 보선 참패에 자극받아 검토하는 정책을 가다듬고 보완할 때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수정 방향을 놓고 엇박자를 내고 있다.[사진=뉴시스] 1분기 한국 경제가 1.6% 성장하면서 경제 규모가 코로나19 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1분기 국내총생산(GDP)은 470조8460억원으로 코로나 사태 직전인 2019년 4분기 GDP(468조8143억원)를 넘어섰다. 소비ㆍ수출ㆍ설비투자 등 주요 지표가 모두 플러스 증가율을 나타냈다. 지난해 수출이 홀로 성장을 견인한 것과 달리 올해 1분기는 경제의 양축인 내수와 수출이 함께 이끈 것이어서 더욱 긍정적이다. 하지만 낙관하기는 이르다. 코로나 재확산 우려가 여전한 데다 반도체 공급 부족, 물류비용 급상승 등 수출에 부정적 요인이 적지 않다. 최대 변수는 코로나 백신 보급이다. 주요국 경제 상황을 보면 백신 접종 속도에 따라 경제활동 재개 시점이 달라지고 경기회복 전망도 엇갈린다. 한국경제연구원이 백신 보급률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비교분석한 결과, 백신이 경기 회복을 판가름하는 핵심 요소로 지목됐다. 국민 절반이
‘영웅’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항상 어마무시한 ‘악당’이 필요하다. 영웅과 악당의 크기는 정비례한다. 영웅과 악당은 그렇게 공존하고 어찌 보면 동업자 관계다. ‘테넷’에서도 이름 없는 영웅인 주인공의 존재는 사토르라는 최강의 악당이 있기에 더 빛나는지 모르겠다. ▲ 인간들에게 ‘열’을 제공하기 위해 지구상의 모든 것이 파괴되고 사라진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테넷’의 악당 사토르(Sator)는 수많은 ‘맨(man)자 돌림’ 히어로 영화들의 악당처럼 핵폭발로 지구와 인류를 끝장내려고 한다. 이유는 단순한 가학성이나 권력욕이 아니라 조금은 심오하다. 그래서 사토르를 단순히 또 하나의 황당한 악당으로 취급하기는 어렵다. 사토르는 인류를 몰살시켜야 하는 명분을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엔트로피(entropy)’라는 머리 아픈 열역학 이론에서 찾는다. 열에너지로 전환된 모든 것은 본래 상태로 환원될 수 없다. 열역학은 그야말로 ‘시간’처럼 불가역적(irre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