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키나와, 홍콩·싱가폴, 말레이시아의 랑카위, 그리고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십수년여 제주를 떠나지 않은 제주도민이라면 여느 곳과 달리 낯익은 도시이름이다. 대략 앞서 나열한 5개 국가·도시가 낯설지 않다. 공통점은 하나다. 제주가 때론 ‘국제자유도시’나, 때론 ‘특별자치도’ 간판을 내걸며 이른바 ‘벤치마킹’이란 이름으로 주목했던 곳이다. 서로 성격이야 다르지만 오키나와는 ‘국제도시’란 측면에서, 홍콩과 싱가폴은 ‘홍가포르’ 프로젝트란 말까지 나오면서 ‘사람·상품.자본 이동이 자유로운 곳’이란 차원에서, 랑카위는 ‘특별한 면세제도’에 주목해, 마데이라는 ‘특별자치구’의 성격을 눈 여겨 본 데 따른 것이다. 모두 제주 안에서 자발적으로 살폈다기 보단 정부 안에서 먼저 이 도시 이름을 거명했다. 2002년 제주국제자유도시란 간판을 내건 제주도는 2006년 7월1일 ‘제주특별자치도’란 새 간판을 또 내걸었다. ▲ 2006년 7월1
▲ 양성철/ 발행.편집인 1994년 9월이었다. 22년 전이다. 뭍생활을 하다 중앙언론사 기자란 명함을 들고 고향 땅을 다시 밟았다. 대학진학 때문에 처음 서울 땅에 발을 들여놓은 뒤 참으로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이었다. 그 시절 제주는 모든 게 새로웠고, 사실 경이로웠다. 기껏해야 고교시절까지 집과 학교 등지만을 오가며 다람쥐 쳇바퀴 돌듯 세월을 보냈기에 고향 제주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당연히 수려한 자연경관은 물론이고 역사유적지도, 사회이슈현장도 도무지 ‘깡통’ 수준이었다. 그래서 기사를 쓸라치면 모든 게 새로 공부를 시작하는 마음으로 다가서야 했고, 다 새롭게 보이는 지라 배우는 재미도 쏠쏠했다. 주말이나 휴일이 되면 제주 곳곳을 누비며 익히는 재미가 지금과는 비견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 시절 제주는 기껏해야 제주KAL과 제주신라호텔 정도의 특급호텔을 둔 정도였고, 이른바 제대로 된 콘도미니엄은 서귀포 중문관광단지 딱 한곳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걸 바라보는 시각과 시야는 ‘제주인’이라기 보단 ‘서울인’의 그것이었다. 저렇게 아름다운 풍광 주위에 왜 호텔이 들어서지 않을까? 회원권을
▲ 제주돌문화공원 내 방사탑과 연자방아석 제주는 독특한 창조신화를 보유한 땅이다. 삼라만상이 만들어진 제주 형성사가 곧 천지창조의 이야기를 설파한다. 게다가 여느 곳과 달리 창조주는 여신이다. ‘설문대할망’이란 거대 여신(女神)이 제주도를 만들었다는 신화다. 모르는 이도 있을 것 같아 부언하면 ‘할망’은 ‘할머니’의 제주어다. 선문대할망, 설명두할망, 설명뒤할망, 세명뒤할망, 세명주할망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전해지는 설화다. 『탐라지(耽羅誌)』<담수계편>에는 설만두고(雪慢頭姑)라고도 표기돼 있다. 또 18세기 풍랑을 만나 저 멀리 지금의 오키나와인 류쿠(琉球)국까지 표류했던 장한철(張漢喆)이 지은 <표해록(漂海錄)>에는 사람들이 한라산을 보고 살려달라고 비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때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선마고(詵麻姑)다. 마고에 빌었다는 의미로 선문대할망이 한자 선마고로 표기된 것이다. 제주에서는 묻혀 죽은 노파라는 뜻에서 `매고(埋姑)할망'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설화와 함께 마고와 비교되는 할망으로 전해진다. ▲ 양성철/ 발행.편집인 제주 창조신화는 그저
▲ 녹고뫼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독자 김수오씨 제공> 어버이날이었던 8일 오랜만에 ‘오름’에 올랐다. 연휴의 마지막 날 산바람이나 쐬자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사실 주목적은 집안의 선묘를 합장(合葬)하기 위한 준비의 산행이었다. 다소 힘들게 장례지도사와 오른 ‘녹고뫼’ 정상은 장관이었다. 가는 빗방울 속에 서녘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국내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파노라마다. 절경이 따로 없다. “벌초 때지만 그래도 수시로 오른 내가 이런 감동을 느끼는데 뭍 관광객들은 이런 광경에 가슴이 벅차리라.” 잠시 숨을 고르며 그 녹고뫼 정상에서 상념에 잠겼다. 내 고향 땅 제주의 가치는 어느 지점에서 가장 빛나는가? 눈 앞에 제주의 오름 군락군이 펼쳐졌다. 제주가 그동안 유네스코(UNESCO)의 세계자연유산이자 지질공원으로 이름을 올린 그 한복판엔 어김 없이 기생화산, 즉 ‘오름’이 있다. 물론 제주 안에서 그 이름은 오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악(岳), 봉(峰), 뫼(메) 등 제각각의 이름이 따로 있기도 하다. 기생화산(parasitic volcano)이 아닌 측화산(側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2항으로 구성돼 있다. 그 2항은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 대한민국 헌법 제1조, 그리고 '종이돌'(paper Stones) [제이누리 그래픽] 잠시 우리의 헌법 이야기를 논외로 하고 한 정치학자의 진술을 옮겨 본다. “민주주의는 적어도 정치적 자유를 유지하면서 갈등을 평화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방식이다. 이것은 갈등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내전(civil war)보다 더 나은 방법임이 분명하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회적·경제적·정치적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는다. 언제나 청렴하고, 공정하고, 투명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민중(people)들이 평화와 자유 속에서 살도록 한다.” ▲ 아담 쉐보르스키 교수 미국의 정치학자 아담 쉐보르스키(Adam Przeworski)가 한 말이다. 미국 뉴욕대 정치학과 교수다. 폴란드 출신으로 이제 만 76세다. 민주주의의 본질, 민주화 이행의 조건, 민주주의와 시장의 관계 등에 관한 주요저작을 냈다. 한국정치학계에서 이론가로 꼽는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네 개 본섬 중 가장 작은 섬이 시코쿠(四國)다. 이 섬에는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어져 온 순례길이 있어 불교성지로 유명하다. 순례 길에는 사찰 88곳이 터 잡고 있다. 전 구간은 1200~1400㎞다. 하루에 30㎞ 정도 부지런히 걸어야 45일 여 만에 완주할 수 있다. 그야말로 장대한 여정이다. 그럼에도 일본인들은 일생에 한 번 순례에 나서는 것이 소원일 정도라고 한다. 순례 길에서 '참 나'를 찾는 구도 행렬에는 일본인뿐 아니라 우리나라 등 외국 불자들도 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동행이인(同行二人)’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가방 등을 지니고 ‘길 위의 여정’에 나선다. 헤이안(平安)시대 승려 홍법대사와 마음 속으로 동행하며 성지순례를 완주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것이다. ‘옷 입은 원숭이’인 순례자들은 걸음걸음마다 ‘내 안의 나’를 성찰하며 하루하루를 매순간 모양을 달리하는 가아(假我)가 아닌 진아(眞我)로 살겠다고 다짐한다. ‘동행이인’은 초심을 잃지 말라는 채찍인 셈이다. 오늘부터 4·13총선 공식 선거
대학 캠퍼스는 꽃으로 물들었다. 온통 진홍·노랑 빛깔이 형형색색 앞다퉈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해 봄 한껏 꽃망울을 터뜨리던 진달래와 벚꽃의 향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죄다 생명의 기운을 한껏 틔우는데 책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교정 벤치에 앉아 한없는 낭만에 사로잡혔다. 청춘이었다.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1986년 새내기 대학생이 돼 들어선 캠퍼스의 풍경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혈기왕성한 스물의 나이에 ‘제주촌놈’이 만난 서울의 대학 캠퍼스 풍경은 한껏 마음을 부풀게 만들었다. 사실 20년 세월을 제주촌놈으로 살았던 지라 서울 땅을 밟아본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한강이 그리 긴지, 강폭이 그리 넓은 지 버스를 타고 한참을 걸려 한강대교를 건너서야 알았다. TV에서나 보던 기차 역시 그 시절 처음 눈으로 구경(?)했다. ‘촌놈’이었다. 하지만 따뜻한 봄바람에 일렁이던 가슴은 우리네 그 시절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입학하고 나서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다. 동창들 얼굴도 모르던 시점에 우린 일주일여간의 ‘학생중앙군사학교’ 입교와 훈련에 돌입했다. 고교시절 교련교육의 연장선이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2002년 9월의 일이다. 세계적 음료기업 미국 코카콜라의 아시아담당 사장이 은밀히 제주도지사 집무실을 찾았다. 그가 제주행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민선 2기에 이어 3기까지 연거푸 재선에 성공한 도지사의 의중을 떠보기 위한 것이었다. 먹는샘물 ‘제주삼다수’를 생산하는 기업 제주개발공사의 인수 가능성 타진이 목적이다. 지사로부터 명쾌한 답은 얻지 못했지만 그는 지사를 접견하고 난 뒤 곧바로 조천읍 교래리 제주개발공사로 달려갔다. 당시 지사의 측근이자 선거공신이었던 개발공사 사장을 만나 다양한 경로의 의견을 주고 받았다. 그가 내세운 논리는 “이왕 민영화 할 생각이면 세계적인 기업인 우리에게 넘겨 달라. 값은 후하게 쳐주겠다”는 것이었다. 일찌감치 제주삼다수의 가능성을 주목한 글로벌 기업다운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성사되지 않았다. 아무리 도지사로 당선됐다한들 ‘도민의 물’이자 ‘도민의 공기업’을 민간에 팔아치우겠다는 발상은 제주도민사회가 용납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삼다수를 제조하는 제주지방개발공사는 지금도 제주도가
제20대 총선이 60일 앞으로 다가왔다. 정치의 계절이다. 후보들의 움직임이 어느 때보다 바쁘다. 조금이라도 더 인지도를 올려야 할 정치신인이나 익히 알려져 있더라도 더 지지율을 끌어 올려야 할 경륜의 후보도 다 속이 타들어가는 시점이다. 그 모든 후보들이 지금 사활을 걸고 달려드는 격전장이 있다. 여론조사다. 본선에 가기도 전 각 당내 경선마저도 여론조사 결과로 판정이 날 상황이기에 더 그렇다. 하지만 설 직전 제주도내 여러 언론기관이 공동·합동여론조사의 이름으로 그 결과를 내놨지만 각기 달랐다. 헷갈릴 노릇이다. 여론조사는 처음에 시장조사에서 발전했다. 정치문제에 관한 여론의 반응을 조사하기 위해 시장조사기법을 이용한 실험을 시작한 건 1935년 미국의 통계학자 조지 갤럽에 의해서다. 미국의 당면한 정치·사회적 문제들에 관한 전국적인 의견조사를 실시하기 시작한 이후 미국에서는 영리단체와 학술기관에서 실시하는 여론조사가 가속화되었다. 후에 미국여론조사협회(일명 갤럽 조사)의 기관지가 된 〈계간 여론 Public Opinion Quarterly〉이 창간되면서 여론조사는 대세가 됐다. 한국의 경우 선거판에서 여론조사가 자리를 잡은 건
8만6960명 중 3명을 만났다. 오랜 만에 옛 정을 주고 받으며 어젯(25일) 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참고로 8만6960명은 23일부터 몰아친 폭설과 강풍으로 제주에 발이 묶였던 제주체류객 인원이다. 국토교통부가 공식 집계한 수치다. 대학시절 선·후배 사이인 그 네 명은 저녁을 같이 하며 아스라이 옛 추억으로 빠져 들었다. 감사의 마음도 잊지 않았다. “항공기를 타지 못한 덕(?)에 소중한 시간이 만들어졌다”며 함박 웃음꽃도 피웠다. 천재지변으로 가지 못한 상황이니 “오늘 자리는 하늘이 만들어줬다”며 천지신명에게 감사도 드렸다. 그 세 사람은 지난 22일 오후 제주로 왔다. 1박2일 일정이 4박5일 일정으로 뒤바뀌면서 세 사람은 애초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23일 밤께엔 월요일 출근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는 것이다. 너무도 초라한 인간이란 존재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음과 아울러 자연의 힘을 다시 깨달았다는 ‘득도’(?)의 언사가 서슴 없이 나왔다. 그 제주체류객 세 명은 그래서 “기왕 이렇게 된 것”이란 마음을 다잡고 렌터카
‘정치낭인’이란 말이 있다.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가 일본군대와 정치낭인들을 앞세워 대한제국 황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 이후 널리 알려진 말이다. ‘낭인(浪人)’이란 마땅한 일자리가 없거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놀고 있는 사람이다. 말 그대로 백수다. 정치판에서 이들은 한마디로 정치판을 유랑하는 인사들이다. 이 선거판 저 선거판을 기웃거린다. 지방선거든, 국회의원 총선이든, 대선이든 가리지 않는다. 어느 선거판이든 ‘이권’(利權)이 눈에 보이거나, 아니면 그 선거판에서 무언가 역할을 했을 때 지위 등의 자리를 보상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이 ‘정치낭인’들의 움직임은 민첩하고 부산하다. 특별한 신념이 있거나 아니면 공적인 목표를 갖고 선거에 임하는 것이 아니란 게 대체로 이들 정치낭인들의 공통된 특성이다. 물론 정치낭인들의 경우에도 두 부류가 있다. ‘정치브로커’ 역할을 하며 스스로의 안위를 보장받고 장차엔 ‘지위’까지 보상받을 것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는 ‘적극적 낭인’이 있는 반면 원하지 않지
▲ 양성철/ 발행.편집인 지금으로부터 13년여 전인 2002년 1월 중순. ‘일본의 제주도’로 불리는 일본 열도의 최남방 현 오키나와로 갔다. 그 때는 제주도가 ‘국제자유도시’ 간판을 내걸기 직전이었다. 1995년부터 같은 전략을 추진한 오키나와의 실태를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탐라국처럼 류쿠(琉球)란 독립국의 평화교류 전통을 부각, 한·중·일 동북아 3국의 요충지에 자리했던 지정학적 강점을 염두에 둔 오키나와의 전략이 ‘국제도시’였다. 일주일 여 현지 실태를 취재하며 얻은 결론은 결코 우리가 밀리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었다. 이유는 선점(先占)에 있었다. 그 시절 제주는 4년여 전인 1998년 세계섬문화축제를 연 지역이었다. 한 달간 25개국 27개섬이 참가한 ‘섬들의 문화올림픽’ 향연은 최소한 한·중·일 3개국 섬 지방정부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시아·미주·유럽 등 5대양 6대주 섬들을 모두 제주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획이었다. 오죽했으면 섬문화축제가 처음 열릴 무렵 일본 오키나와현의 오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