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오키나와, 홍콩·싱가폴, 말레이시아의 랑카위, 그리고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십수년여 제주를 떠나지 않은 제주도민이라면 여느 곳과 달리 낯익은 도시이름이다. 대략 앞서 나열한 5개 국가·도시가 낯설지 않다.
공통점은 하나다. 제주가 때론 ‘국제자유도시’나, 때론 ‘특별자치도’ 간판을 내걸며 이른바 ‘벤치마킹’이란 이름으로 주목했던 곳이다.
서로 성격이야 다르지만 오키나와는 ‘국제도시’란 측면에서, 홍콩과 싱가폴은 ‘홍가포르’ 프로젝트란 말까지 나오면서 ‘사람·상품.자본 이동이 자유로운 곳’이란 차원에서, 랑카위는 ‘특별한 면세제도’에 주목해, 마데이라는 ‘특별자치구’의 성격을 눈 여겨 본 데 따른 것이다. 모두 제주 안에서 자발적으로 살폈다기 보단 정부 안에서 먼저 이 도시 이름을 거명했다.
2002년 제주국제자유도시란 간판을 내건 제주도는 2006년 7월1일 ‘제주특별자치도’란 새 간판을 또 내걸었다.
그런 간판이 등장하게 된 데엔 사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애초 정부는 1963년 건설부 차원에서 ‘제주도 자유지역 설정’ 구상을 내놨다. 외국인 투자유인 방안으로 제주도 전지역 또는 제주시(제주항)에 국한된 자유지역을 설정할 요량이었다. 그 구상은 다시 66년 ‘제주도 특정지역’ 지정으로 뒤바뀌고, 75년엔 특정자유지역 개발구상을 위한 기초조사를 도입하는 단계로 이동했다.
그게 다시 1980년엔 제주에 자유항을 설치하는 것으로 좁혀지더니 83년엔 제주에 국제자유지역을 조성하는 것으로 또 간판이 바뀌다 결국 1991년 제주 전역을 대상으로 한 제주도종합개발계획 수립과 제주개발특별법 제정으로 변모했다.
지금 제주를 규정하는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제주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은 사실 이미 25년 전인 이 제주개발특별법에 연원을 두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개발’에 방점을 두고 벌이던 일이 ‘국제자유도시’와 ‘특별자치도’ 등의 간판을 내걸며 다소 그럴 듯한 외투를 걸친 게 다르다.
사실 ‘특별도’ 구상은 연원이 있었다. 1997년 7월 민선 1기 도지사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중앙정부의 관점에서 제주개발을 위한 체계와 내용을 담고 있는 ‘제주개발특별법’을 전면 개정해 세계화·지방화 시대에 걸맞은 지역 종합발전 및 지원법의 체계와 내용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하겠다. 이에는 21세기 제주도의 위상과 역할, 지방행정체제의 실효성 확보와 시범자치지정 개념의 도입, 자율적인 조례제정권의 확보, 제반 경제규제 입법에 대한 특례의 설치, 교육·대학·경찰 등 국가권한의 시범적 재배분 등이 포함될 수 있으며···”라고 거론한 사안이다.
‘특별자치도’ 구상의 발원이자 민선 1기 제주도지사가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에게 “독립운동하느냐”고 타박을 들었던 이유다.
그러나 그 구상은 후임 도지사 시절 아무런 논의의 진전 없이 질질 시간만 끌다가 2003년 2월12일 당선자 신분으로 제주도를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급물살을 탔다.
그는 당시 제주도청에서 열린 ‘제주도민과의 대화’ 현장에서 “제주도가 먼저 분권과 자치권에 강한 의욕을 보인다면 제주도를 ‘분권의 시범도, 자치권의 시범도’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그해 10월31일 ‘4·3사건에 대한 대통령의 공식사과’를 하는 제주도민과의 대화 자리에서 “국방·외교 등의 문제를 제외, 1국 2체제에 버금가는 특별차지도로 지원하겠다”는 구상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4개 시·군 기초자치단체가 사라지고 제주도 단일 광역자치단체가 출범하며 제주특별자치도 돛을 올린 것이 딱 10년 전인 2006년 7월1일의 일이다.
그 시절 시행된 ‘제주특별법’의 1조(목적)은 ‘국제자유도시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행정체제로서의 특별자치도‘를 설파하고 있었다. 답답한 논란이 지속됐던 그 법의 1조는 지난해 개정됐다.
현행 제주특별법 1조는 “이 법은 종전의 제주도의 지역적·역사적·인문적 특성을 살리고 자율과 책임, 창의성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고도의 자치권이 보장되는 제주특별자치도를 설치하여 실질적인 지방분권을 보장하고, 행정규제의 폭넓은 완화 및 국제적 기준의 적용 등을 통하여 국제자유도시를 조성함으로써 국가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소 장황하게 가치를 더 부여했지만 사실 핵심은 여전히 특별자치도와 국제자유도시를 두 축으로 한다. “고도의 자치권을 갖는 자치시범도시 육성과 핵심산업 분야의 경쟁력을 갖춘 국제자유도시로 조성해 국가의 새로운 성장동력이 된다”는 논리가 핵심이다.
10년 전인 2006년과 달리 제주도는 지금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할 정도로 많이 변했다.
여러 사회·경제지표로만 본다면 56만명이던 인구는 10만에 가까운 인구가 불어 65만명이고, 1.9%이던 경제성장률은 국내 어느 곳보다 높은 4.8%다. 8조5000억원이던 지역총생산(GRDP)도 2014년 말 기준으론 14조원에 이르고, 관광객은 531만명에서 무려 1366만명으로 급성장했다. 물론 고작 46만명이던 연간 외국인관광객은 지난해 262만명으로 불었다.
그런 호조세 속에 정부·지자체의 세입도 크게 늘었다. 2006년 고작 3736억원을 거둬들이던 국세는 지난해 1조1978억원에 이르고, 지방세 수입도 4337억원에서 1조1240억원이나 된다. 지방세의 경우는 특히 최근 5년간 연평균 증가율이 16.4%로 전국평균(8.9%)의 2배 수준이다. 게다가 재정자립도는 최근 4년간 연평균 증가율이 12.94%로 전국(2.66%)의 4배에 이를 정도로 크게 치솟았다.
특별자치도가 출범하면서 제주지방국토관리청 등 7개 특별지방행정기관이 제주도로 이관됐고, 전국 처음으로 감사위원회와 자치경찰단이 만들어졌다. 단 한 차례도 제도개선 결과를 내지 못했던 민선 5기 우근민 도정 시절을 제외, 그동안 5차례 제도개선 결과를 낳으면서 4537건의 중앙사무 권한도 제주도로 넘어왔다. 각종 대규모 개발사업이 추진됐고, 영어교육도시가 들어섰으며, 투자이민제에 따라 물밀듯이 중국자본이 제주로 들어왔다.
하지만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제주도 안에선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탄식의 목소리가 나온다. 국제자본 유치에만 혈안이 되다보니 토종자본이 설 자리를 잃었고, 제주의 자연은 개발로 처참히 무너져가고 있다. 공·항만 혼잡으로 도민들의 뭍나들이는 더 힘들고, 교통난과 쓰레기 처리난은 이제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외형적 성장과 대규모 개발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민은 중심에 없다는 볼 멘 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특별법 1조에서도 지적하듯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해 국가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우선일 뿐 제주도민은 '주체'라기 보단 '객체'로 취급받는 여건이다. 지난 4·13 총선에 나선 후보자들이 “도민의 삶의 질, 복리 향상”을 1조에 포함해야 한다며 법 개정을 공약한 이유가 또 여기에 있다.
더욱이 4개 시·군 기초지방정부의 문을 내리면서 ‘풀뿌리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불만은 여전히 거세다. 애초 ‘과도기적 시스템’으로 구상한 자치권 없는 행정시였지만 주민밀착형 읍·면·동 기능강화 논리로 시작한 특별자치도였는데도 불구하고 기묘한 ‘행정시 기능강화론’으로 흐르고 있다.
게다가 도지사가 유일한 선출직 집행부 권력으로 고착되면서 제주도는 ‘제왕적 도지사’의 출현을 우려하고 있고, 실제 지난 시절 폐해가 드러나기도 했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을 위한 준비가 정치학적 논의가 배제된 채 조직개편·행정체제 개편 등의 행정학적 분석에만 매몰된 결과다.
현재의 시스템은 다만 의회가 집행부인 제주도정을 견제할 수 있을 뿐 제주에 특례적으로 적용되는 정치권력 구조의 변화와 선거제도의 개선 등의 방안이 없다. 예컨대 현행 소선거구제인 도의원 선거구를 광대역으로 묶어 한 선거구에서 2~3명이 당선될 수 있는 중·대선거구제로 개편하려는 논의는 없다. 제주특별법에 이런 논의를 국회의원 선거구까지 확대해 볼 여지는 더 중요하다. 그만큼 정치신인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고, 승자독식에 의해 사표가 될 유권자의 선택권도 오롯이 의회에서 다시 대변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자치의 핵심은 말 그대로 ‘자치’다. 자기결정권이 핵심이다. 그리 본다면 현행 제주특별법 8조가 규정하는 “지방자치법의 지방의회와 집행기관에 관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따로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제주자치도의 지방의회 및 집행기관의 구성을 달리할 수 있다”는 조항은 우리에게 중요한 돌파구를 알려주고 있다.
세종시를 제외하고 전국 17개 광역 시·도 중에서 기초의회·기초자치단체가 없는 곳은 제주도가 유일하다.
과거 비리로 얼룩진 시·군의회로 불거진 무용론으로 인해 ‘구더기 무서워 장독을 깨부수듯’ 제주의 기초정부는 사라졌다. 그게 10년 전인 제주특별자치도 출범의 팡파르였다. 하지만 이젠 그 10년의 과도기 체제에 안주할 때가 아니다. 어정쩡한 행정시를 존속하는 것도, 아무런 법인격도 없는 행정시의 시장을 직선으로 뽑는 것도 ‘제주도민의 복리향상’과는 거리가 멀다.
홍콩은 물론 싱가폴도, 마데이라도, 랑카위도, 오키나와도 그들이 내놓은 방안은 결국은 스스로의 주민·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전략적 접근이었다.
이제는 우리만의 자치시스템을 제대로 만들어 내야 할 때다. 그 점에서 ‘국제자유도시’(Free International City)는 이제 더 이상 ‘전가(傳家)의 보도(寶刀)’가 될 수 없다.
전략적 궤도 수정의 시기가 이제 다가왔다. [제이누리=양성철 발행·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