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평화기념관에 유해 발굴 당시 모습을 그대로 재연한 다랑쉬굴 특별관. 1992년 발견된 ‘다랑쉬굴’ 유해 11구가 화장 후 서둘러 바다에 뿌려지는 과정은 의문투성이다. 그 의혹은 그 때나 지금이나 풀리지 않고 있다. 그 당시 사회분위기는 캄캄한 동굴 속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4‧3 유해들을 양지 바른 곳에 안식처를 마련해서 안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대세였다. 다랑쉬굴 유해들은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처참하게 희생된 상징이고, 유족들의 한과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도 도민적인 진혼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정언 제주도의회 의장이나 국회의원 당선자 신분인 양정규 의원 등도 공개적으로 “예의를 갖춰 영혼들을 안장시킬 수 있는 진혼의 절차를 밟아야 할 것”이라고 의견을 피력했다. 당시 도정 최고책임자도 처음에는 이에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4월 21일에는 종교계와 시민단체 등이 참여한 ‘다랑쉬굴 4‧3희생자 대책위원회’가 조직되어 범도민적인 장례절차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얼마 없어서 다랑쉬굴 유해들을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 흔적
1992년 4월 2일 구좌읍 중산간에 있는 ‘다랑쉬굴’ 4‧3 희생자 유해 11구 발견 사실이 언론에 의해 발표되었다. 44년 전 참혹하게 몰살당한 모습 그대로라는 소식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큰 충격을 주었다. 정밀조사 결과 이들은 초토화의 광풍이 몰아치던 1948년 12월 18일 당시 9연대에 의해 학살된 희생자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4‧3 학살의 잔혹성을 온 몸으로 보여준 이 유해들은 햇빛 속으로 나오자마자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에 의해 허겁지겁 화장이 된 후 바다에 뿌려졌다. 당시 공안당국은 그것을 ‘흔적 지우는 일’이라고 쾌재를 불렀을지 모른다. ▲ 다랑쉬굴 유해 발견 사실을 알린 『제민일보』 1992년 4월 2일자 1면 보도기사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유해 처리가 오히려 이 사건의 생명력을 더욱 북돋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랑쉬굴 참상은 지워진 것이 아니고 새롭게 부활한 것이다. 지난 역사가 그걸 말해주고 있다. 다랑쉬굴 사건은 결과적으로 4‧3의 총체적 모순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되고 말았다. 피난 입산 &rar
1992년 미 문화원에서 이례적인 제의 『제민일보』 1992년 4월 3일자에 “미국은 4‧3과 무관한가”란 제목의 칼럼을 쓰고 한 달 여가 지난 5월 말께 주한 미문화원 관계자가 나를 찾아왔다. 한국계인 그는 “양 선생의 글을 잘 보고 있다”면서 존 메릴 박사와의 토론 대담을 제안해왔다.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나는 제주도에서, 존 메릴은 워싱턴에서, 통역은 버지니아에 있으면서 위성중계 토론 대담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삼각 전화 위성 인터뷰를 할 수 있도록 미 문화원에서 신문사에다 장비를 설치해주겠다고 했다. ▲ 존 메릴 박사 매우 이례적인 제안이었다. 나는 이미 그 전에 제주도를 방문했던 존 메릴 박사와 두 차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미 문화원의 제안이 특이한데다 때마침 『제민일보』 창간 2주년 특집호를 준비하고 있을 때라 흔쾌히 응했다. 여기서 잠시 존 메릴(John Merrill) 박사를 소개해야겠다. 그는 1975년 미 하버드대학교에서 제주4‧3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논문 제목은 「제주도 반란」(The
▲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가 있던 중앙청에 걸렸던 일장기가 내려지고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게양되면서 미군정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4‧3의 진상을 조사하다보니 ‘불편한 진실’을 만나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국의 책임문제다. 나는 요즘 “4‧3의 발발 원인과 유혈 진압에 대해서 미국은 상당한 부분에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표현을 하게 된 내 스스로도 놀라운 일이다. 오해가 있을까봐 한마디 더 한다면, 그렇다고 ‘남로당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 역할은 서로 다르지만, 미국과 이승만 정권, 남로당 제주도당이 4‧3 발발과 유혈사태에 ‘더불어’ 책임이 있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1988년 4‧3취재반이 출범할 당시 젊은 기자들은 ‘민중항쟁론’을 주장했고, ‘미국의 책임’ 문제를 제기했다. 1987년 6월 항쟁이 몰고 온 들뜬 사회 분위기로 재야 진영에서는 당연시하던 담론이었다. 그러나 4‧3취재반장인 나의 입장은 달랐다. 그런 담론을 언론에서 당당
머나먼 유럽 땅 스페인에서 한 가족이 한국 땅을 밟았다. 이들이 가장 먼저 선택한 행선지는 세계자연유산 등 유네스코 3관왕 타이틀의 제주도-.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스페인 출신 ‘산또르’ 가족의 한국, 그리고 제주도 여행기를 연재한다. 이 가족은 후회하지 않을 한국여행지로 제주도를 선택했다. ‘제주에서 한달나기’를 선택한 것이다. 딸 셋을 거느리고 온 산또르는 그가 가진 자연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한국·제주의 자연에 대한 색다른 관심과 이야기로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선보인다. / 편집자 주 "제주에서 한 달 살아보기"는 제 블로그 독자님이 어느 날 제안하신 부분이랍니다. 스페인 고산에서 한국에서 유행하는 이 프로젝트를 알 리는 없고, 그저 한 곳에 체류하며 느리게 평화롭게(?) 지역을 알 수 있겠다는 그 취지가 좋아서 마음속에 오래 품고 있었답니다. 사실 저희 부부는 아이 낳기 전에 언제나 여행하게 되면 이렇게 한곳에 오래 머무면서 여행을 즐겨왔던 탓에 이런 제주도 한 달 살기 방식의 여행이 낯설지는 않았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있으니 이런 가족 여행 방식은 우리에게 플러스가
머나먼 유럽 땅 스페인에서 한 가족이 한국 땅을 밟았다. 이들이 가장 먼저 선택한 행선지는 세계자연유산 등 유네스코 3관왕 타이틀의 제주도-.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스페인 출신 ‘산또르’ 가족의 한국, 그리고 제주도 여행기를 연재한다. 이 가족은 후회하지 않을 한국여행지로 제주도를 선택했다. ‘제주에서 한달나기’를 선택한 것이다. 딸 셋을 거느리고 온 산또르는 그가 가진 자연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한국·제주의 자연에 대한 색다른 관심과 이야기로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선보인다. / 편집자 주 하루하루 깨어날 때마다 느끼는 제주에서의 익사이팅한 여행, 매일 흥미로운 기대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한답니다. 우리가 가본 곳들, 진정으로 제주를 느낄 수 있었던 곳들...... 정말 아름답고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본 관광의 현실이 가끔은 불편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했답니다. 관광객 차원에서나 현지인 차원에서나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있었는데요, 제가 느낀 부분은 유동인구가 많은 제주에서 타지방에서 온 관광객의 에티켓도 제주를 어수선하게 하는 풍경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직 남을 배려하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는지 약
머나먼 유럽 땅 스페인에서 한 가족이 한국 땅을 밟았다. 이들이 가장 먼저 선택한 행선지는 세계자연유산 등 유네스코 3관왕 타이틀의 제주도-. 한국인 여성과 결혼한 스페인 출신 ‘산또르’ 가족의 한국, 그리고 제주도 여행기를 연재한다. 이 가족은 후회하지 않을 한국여행지로 제주도를 선택했다. ‘제주에서 한달나기’를 선택한 것이다. 딸 셋을 거느리고 온 산또르는 그가 가진 자연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한국·제주의 자연에 대한 색다른 관심과 이야기로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선보인다. / 편집자 주 제주에 도착한 한-서 참나무집 가족은 제주를 보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답니다. 그런데 솔직히 도착한 며칠 동안은 제주가 제주로 (어쩐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가족이 이곳저곳 기웃거렸던 제주도의 명소는 다름 아니라 테마파크들이었답니다. 아이들이 있어 일단은 근처의 테마파크를 선택하며 이동했는데요, 어쩐지 사람을 알아갈 때 겉모습만 훑어보고 생각은 모르는 느낌이 나는 낯선 곳으로 느껴졌답니다. 화려하게 입은 옷과 엑세서리로 제주가 제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죠. 그러다 점차 제주의 깊은 곳까지
4‧3의 진실을 추적하면서 절감한 사실은 4‧3의 진실규명은 중앙 정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중앙의 정치지형이 진보적인 판세냐, 아니면 보수적인 흐름을 타느냐에 따라서 4‧3 진실규명의 역사도 명암을 달리했다. 1987년 6월 항쟁의 민주화 바람, 1988년부터 시작된 국회 광주 청문회 등은 4‧3 진실찾기를 촉구하는 강력한 촉매가 되었다. 1988년 대선에서 승리한 노태우 정권도 이듬해 4월 총선 결과 ‘여소 야대’ 국회로 바뀌자 동력을 잃고 이런 흐름에 제동을 걸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판도를 일순간에 바꿔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1990년 1월 전격적으로 단행된 민정‧민주‧공화 3당의 합당이었다. 새로 탄생된 여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은 국회 전체 의석 299석 중 221석을 차지하는 ‘공룡’으로 변했다. 국민들이 투표로 정해준 정치 구도를 인위적으로 뒤엎은 것이다. 이로 인해 4‧3 진실찾기도 시련을 맞게 됐다. 공안정국이 다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경찰, 4‧3추모제 봉쇄하고 400명 연행 공안정국은 19
1980년대 말 4‧3 취재 초기에 가장 예민하면서도 어렵게 느껴졌던 것이 ‘4‧3과 남로당과의 관계’였다. 내 스스로도 현대사에 대한 지식이 모자랐기 때문에 ‘남로당’하면 왠지 부정적이고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4‧3과 남로당 관계를 연구한 박사학위 논문 등 객관적인 학술자료가 있지만, 4‧3취재반 출범 초기에는 ‘남로당은 악’으로 대변되는 관변자료들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도 4‧3 발발과 남로당은 밀접한 관계였고, 피할 수 없는 테마였기에 조심스럽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접한 관변자료에는 남로당 제주도당이 북한, 또는 중앙당의 지령을 받고 ‘4‧3폭동’을 일으킨 것으로 못 박아 놓고 있었다. 1980년대 말까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도 그런 표현이 있었다. 그런데 ‘남로당 제주도당의 독자적 행동’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의 글도 듬성듬성 보였다. 이 문제는 너무도 예민한 사안이었기에 처음에는 신문 연재물 제목도 ‘지령설’과 &lsq
1947년 3월 10일부터 경찰 발포에 항의하는 민관 합동 총파업이 시작됐다. 나는 이 총파업 관련 자료를 취재하면서 그 규모와 참여 폭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제주도청, 법원, 검찰 등 대부분의 관공서를 포함하여 166개 사업장들이 모두 문을 닫았다. 학생들도 동맹휴업에 들어갔다. 상점은 철시되었다. 심지어 제주출신 경찰관 66명이 파업에 동참했다. 제주신보사에서는 3‧1사건 희생자 유족 조의금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신문사는 사고(社告)를 통해 “희생자들은 독립의 영광도 얻지 못한 채 천고의 원한을 남기고 무참히도 쓰러졌다”고 표현했다. “경찰서를 습격하려 해서 불가피 발포했다”는 경찰의 성명과는 전혀 다른 뉘앙스의 글귀였다. ▲ 제주신보 1947년 3월 10일자에 실린 조의금 모금 사고 “좌우 공히 참가, 이념을 뛰어넘은 총파업” 당시 조선통신사가 발간한 『조선연감』에는 이 상황을 ‘조선에서 처음 보는 관공리의 총파업’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제민일보 4‧3취재반은 ‘세계사에서도 매우 드문 민관 총파업’이라고 평가했다. 지역민
“기마경찰이 어린이를 치어 부상을 입힌 사건을 좌익진영에서 역이용, 기마경찰대가 어린이를 치어 죽였다고 흑색 선전해 멋모르는 1만여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려고 해서 부득이 발포하게 됐다.” 이 글은 1982년 판 『제주도지』와 1990년 판 『제주경찰사』 등 공적 기록물에 기술된 ‘1947년 3‧1발포사건의 진상’이다. 14명의 사상자를 낸 이 사건의 진상은 과연 그랬을까? 이 발포사건은 제주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혹자는 이 사건은 4‧3으로 가는 도화선, 즉 불씨가 되었다고 했다. ▲ 도망가는 군중을 향해 조준 사격하는 응원경찰 <강요배 그림> 안개 속에 가려진 3‧1발포 진상 찾아 나섰다 연재 순서에 따라 1991년부터 이 사건에 대한 심층 취재에 나선 제민일보 4‧3취재반은 사건의 진실을 알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때까지도 이 사건은 뿌연 안개 속에 가려 있었다. 당시 미군정 정보보고서, 중앙지와 지방지를 포함한 신문기사, 관변자료 등을 입수해 분석했다. 또 사건 현장을 직접 본 목격자들을 찾아 나섰다. 행운이랄까, 수소문 끝에 발포 현장
1989년 4월부터 『제주신문』에 매주 2회씩 「4‧3의 증언」이 연재되고, 덩달아 김익렬 장군의 유고록까지 발표되자 4‧3에 대한 제주사회의 관심이 높아졌다. 발표 내용도 기존 자료의 왜곡사례를 지적하는 수준을 뛰어 넘어 미군정과 경찰의 조작사실까지 들추어내자 놀라움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예의 주시하는 분위기였다. 공안당국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제동을 걸고 싶었지만 연재되는 내용들마다 신뢰성 높은 근거가 제시되는 등 빈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고심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월간지 『사회와 사상』에 연재물 그대로 게재 그 무렵 도서출판 ‘한길사’ 김언호 대표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길사는 오랫동안 금기시돼 왔던 해방 직후의 한국현대사 관련 서적을 잇달아 출간함으로써 출판계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었다. 김 대표는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으로 대학가와 지식인 사회에서 잘 읽히는 도서를 만드는 출판사 사장으로 유명했다. 1980년대 대학생들의 필독서 『해방전후사의 인식』(전 6권)도 그의 기획 작품이었다. 김 대표는 나에게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