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눈을 감는데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당신을 사랑하세요.’ 규범은 ‘당신을 사랑합니다.’로 들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을 사랑할 줄 모른단다. 자식사랑도 마찬가지더라. 엄마가 너희들에게 그랬구나. 사랑이라고 확신했지만 너희들에게 보낸 엄마의 그것은 정성이었을지는 몰라도 사랑은 아니었다. 엄마의 독단이고 편견이며 아집이고 오만이었지. 미안하다. 규범아 그리고 귀희야. 용서해다오, 이 엄마를,’ 오빠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내가 엄마의 일기장에서 떨어진 하트모양의 작지만 두꺼운 종이를 집어 들어 읽고 있었다. 이제 엄마가 너희들 곁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늘 함께 있다할 수 있음은 여기 엄마가 남긴 흔적으로부터 일 게다. 엄마가 귀희·규범, 너희들에게 한 약속의 그 흔적. 우리가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함께 나눠보자꾸나. “오빠, 오빠가 네 살, 내가 한 살이었다니까 얼추 삼십 오년 전에 엄마가 쓴 일기잖아? 엄마는 우리와 헤어져야만 했을 때 우리를 다시는 영 못 만날 줄 알았나봐. 그래서인가? 지금 우리에게 하는 것
2 “오빠, 그래서 엄마의 무덤을 따로 마련해드리지 못한 거야?” 나는 오빠에게 물었다. 오빠가 앉은뱅이 책상의 서랍에서 노트 한 권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귀희의 우표첩과 같이 있던 거다. 엄마는 끝내 혼자 품고 계셨을 뿐 우리에게는 차마 보여줄 수 없었나보더라.” 펼쳐보니 십여 년이 지나도 눈에 익은 엄마의 글씨가 눈에 밟혔다. 노트의 첫 장에, 사랑하는 내 딸 귀희, 내 아들 규범에게, 이 엄마의 오래 전 일기를 귀희가 미국으로 떠나고 난 뒤 우연히 보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살던 때가 있었구나.’ 하며, 엄마가 무지 가슴 아파하던 시절이었고 너희들은 아직 어려 규범이는 네 살, 귀희는 한 살이었을 때의 그 지난 날들을 떠올린다. 우리 가족이 헤어져 있어야 했던 약 6개월, 너희들은 기억나지 않겠지. 어제 늦게까지 이 일기를 읽으면서 얼마나 엄마가 너희들에게 절절할 수밖에 없었는가, 다시 가슴이 쓰려온다. ‘미안하다’는 말과 ‘이렇게 잘 커줘서 고맙다.’라는 말을 지금 너희에게 한다. 들리니? 들리겠지. 비록 우리가 몸은 이렇게 떨어져 있어도 마
3 서울로 향하는 내내 다시 만나 더 깊이 만날 수 있을 것 같던 세종이와 더 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세종이는 어디엔가 살아있는 듯, 살아서 자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생각에 규범은 이별의 슬픔을 잊을 수 있었다. ‘또 기다리는 거야. 만날 날을 기다려왔듯이 또 그렇게 기다리는 거야.’ 기다림은 품은 과거로 맞을 미래를 더듬고 보듬는 당장의 현재이다. 기다림은 가슴이며 눈이며 감촉이다. 이런 기다림은 아프지만 슬프지 않았다. ‘기다림이 있는 한 우린 동행하고 있는 거야 그치, 세종아.’ 메마르기 마련인 감정은 그 깊이가 깊을수록 더 이성적으로 바뀌어갔다. 산다는 것을 생각한다. 산다는 것들로 생각이 잡다해지면 산다는 것, 그 하나로 집중하게 하며 이 또한 생각이다. 생각은 산다는 것이며 생각으로의 긴 여행 그리고 오랜 칩거는 나를 꿈틀되게 만든다. 생각을 움직이게 한다. 생각처럼 행동하라 한다. 고로, 그 집약된 하나의 생각, 즉 자기철학을 행동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맞다. 제대로란, 제자리를 말하며 제몫을 의미한다. 생각도, 행동도 수태보다는 잉태여
4 아우라지 물가에 닿자 규범은 덥석 주저앉고 말았다. 버스 타고 오기 방금 전 세종의 큰 어머니와 나눈 말이 떠올랐다. “세종이는 어디로 갔어요?” 큰 어머니는 처음 질문의 뜻을 몰라 다시 물었다. “어디로라니?” “세종이를 떠나보낸 곳이 어디냐고요.” 그제야 알아차린 듯, “세종이가 틈만 나면 가곤 하던 여량 물 위에 뿌려졌단다.” 중학교 운동장에서 들었던 환청의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규범이가 왔구나.’ 이번에는 세종이의 얼굴을 물 위에서 볼 수 있었다. 둥실 떠 웃고 있었다. 하늘을 보고 누워 웃는 얼굴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이 들려왔다. ‘이 물을 따라 내려가면 규범이, 네가 있는 서울까지 갈 수 있단다.’ 규범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도 전에 입에서 탄성의 절규가 신음으로 터져 나왔다. 쏟아내는 신음이 가슴에 도로 쌓이며 폭발하듯 찢겨졌다. “이 바보야, 기다렸어야지. 기다리고 있어야지, 이 바보야.” 하지만 늦게 와서 미안하다며 규범이 엉엉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 따위 시험이 무어라고
5 하굣길이었다. 세종이가 교복 상의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규범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빠 만년필이야. 아빠가 남긴 유일한 물건이기도 해. 아니, 또 하나가 있구나. 이 만년필로 쓴 듯한 공책이 하나 더 있는데 일기 같았어. 아직 읽어보진 못했다. 먼 훗날로 미뤄놨거든. 내가 아빠 나이쯤 될 때 읽으면 더 좋겠단 생각이 들어서고, 지금 읽게 되면 아빠랑 엄마랑 더 많이 보고 싶어질 거니까. 나, 이젠 울기 싫거든. 이 만년필을 규범에게 주고 싶어.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네게 주고 싶거든.” 빨간색 도장에 금장 화살표 장식의 만년필을 받으면서 규범이가 물었다. “고마운데,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인 거니?” 세종이가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가 이내 세로로 끄덕였다. “특별한 날은 우리, 너와 내가 만드는 거라고 규범이가 그러지 않았니? 그러고 보니 오늘이 특별한 날이겠구나. 나, 내일부터 학교 안 간다. 나, 내일부터 널 볼 수 없게 돼. 정선에서 살기로 되었거든. 이모부님이 외국으로 장기 출장을 가시게 돼 내가 서울에 머물 곳이 없게 되었어. 그래서.” 세종은 말을 잠깐 멈췄다. 울먹이고 있었다.
6 여름방학이 끝나 이 학기의 첫 수업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방학과제물들이 책상 위에 쌓여 있었다. “서울에선 돌 구하기 힘들잖아.” 방학 동안에 정선에 있었다며 세종이, “그곳에서 모은 돌들이야. 암석을 채집해오라는 과학방학숙제를 난 시골집에서 손쉽게 해결했지. 같은 종류의 돌을 두 개씩 골랐어. 하나는 너 주려구. 서울과 같은 도시에선 암석을 채집하기 어려울 거 아냐. 자, 여기 규범이 니 꺼야.” 보고 있던 다른 학생들이 세종이 곁으로 몰려들었다. 뒤 끝자리에 앉은 덩치 큰 친구가 세종이가 규범에게 건넨 돌상자를 낚아챘다. “잘 됐네. 과학 꼰대, 워낙 성질이 더러워 숙제 안 해 오면 작살을 내고말 텐데.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고맙다, 꼬맹이 친구들.” 세종이 내놓으라며 달려들었다. 멱살까지 잡혔으나, “이건 규범이 꺼라구. 내놔!” “그래? 그럼 니 껄 바치지 그래.” 덩치 큰 뒤 끝자리가 다른 친구들을 합세시키며 세종의 돌상자까지 빼앗았다. “너희들, 이러는 거 아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이야. 강도짓이라고.
7 규범은 엄마의 전화마저도 받지 않았다. 소연은 구치소에서 한 달 만에 나온 아들에게서 짧은 문자 메시지를 한참 후에 받았다. 찾지 마세요. 규범은 중학교 때의 친구를 찾아 나섰다. 1학년 겨울방학이 오기 며칠 전 고세종은 작은 아버지가 사는 정선으로 전학을 갔다. 그 후론 못 본 친구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다 잃은 세종은 언제나 혼자였다. 하교 때 앞에 걸어가는 세종에게 규범이 말을 걸었다. “집이 어디니?” 규범을 쳐다보면서도 세종은 대답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난 신당동에서 사는데. 우리 집 동네 쪽으로 가는 너를 본 적이 있다. 그 근처니?” 세종이 쳐다보지 않고 계속 걸었다. 규범도 더 묻지 않고 그의 곁을 따라 걸었다. 버스정류장에서 세종이 멈췄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가려나 보다, 하고 규범이 그가 탈 버스가 오기를 같이 기다렸다. “안 가니?” 비로소 세종이 입을 열었다. “너 타는 거 보고 갈게. 우리 집은 여기서 가까워.” 번호가 다른 버스들이 몇 대 멈췄다가 사람을 부리고 태우고 떠나는 동안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길 건너의 한 상점 앞에선 미
8 “고마워.” 아들이 석방되는 날, 한소연이 안수철에게 이 말을 하면서 두 눈을 적셨다. “갈취하기 위해 부부가 사전에 짜고 문 검사에게 접근한 사실을 확인하는 게 힘들었다. 당사자인 문 검사가 부인하니 어찌 해볼 도리가 있어야지. 소연이도 잘 알다시피 아주 애먹었다. 우리 법조계에서 다 아는 사실인데, 비슷한 경우를 당해 곤욕을 치룬 재판장이 이 사건을 맡은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지. 근데 소연이가 똑똑한 줄 알았더니 아들을 엄청 바보로 키워 놨더구만. 끝까지 그 꽃뱀 여자를 감싸며 사랑한다고 해대니. 하기야 이래서 언론들도 악의에서 선의의 기사로 돌아서긴 했지만. 언론은 순수한 검사를 현대판 이수일로 몰아 독자의 흥미를 끌어내고 있지만, 어떻게 그 사랑이 순수하달 수 있겠는가. 철딱서니 없는 짓이지. 문 검사는 사귀는 온전한 여자가 없나? 허우대도 멀쩡하더만.” 한소연은 듣고 싶지 않았다. 허우대? 안수철을 쳐다보았다. 비만한 몸에서 비대한 권위가 보였다. 가식적인 웃음을 섞은 그의 말이 가증스럽게 들렸다. 인사치레를 해야 했다. “내가 알아서 더 줘야겠지만, 이곳의 관례 정도로 끝내면 좋지 않을까
9 문규범은 변호사를 통해 변호 받기를 극구 거절했으나 한소연은 아들의 불행이 어머니인 자기 탓인 양 아들의 의사대로 내버려둘 순 없었다. 변호사 선임은 할 수 없어도 고소인과의 합의라든가 법정 밖에서의 수단을 원로 법조인인 안수철과 상의하기 위해 자주 만났다. “언론이 떠들어대니 문규범 검사에게 점점 불리해지고 있어. 고소인이 합의하려 들지 않고 뻗대고 있는 것도 다 언론 때문이지. 검찰에서도 이 사건을 하루 빨리 수습하고 적당히 처리해버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되었다고 해. 문 검사가 어수룩했어. 들켰을 때 그쪽에서 요구한 대로 따라만 줬더라도 지금처럼 문제가 커지진 않았을 거야. 내가 뒤에서 손을 써보곤 있지만 역시 언론을 많이 의식하고 있더라고. 그런데 밥은 먹고 다니니? 얼굴이 학창 때보다 무척 안 좋아졌군.” 변호사 안수철은 저녁을 같이 먹자고 했다. “소연이가 두부요리를 좋아하지 않았나? 맞을 걸? 남현동에 내가 잘 아는 두부요리전문식당이 있지.” “아니. 지금은 먹고 싶은 심정이 아냐. 그냥 집까지만 데려다줄 수 있겠니?” 한소연은 안수철이 자기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10 “싫다더니 이런 것 때문이었나? 검사라고 했지?” 선희와 규범이 옷을 다 챙겨 입기도 전에 황귀동이 열쇠로 문을 따고 카페 안으로 쳐들어왔다. 규범은 선희가 열쇠를 주며 남편 말고는 당신이 처음이야, 라고 한 말을 떠올리며 그가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그녀의 남편임을 직감했다.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생각지 않나? 이 자와 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이 아냐. 당신의 처신에 달려있다는 거지. 처음처럼 돌아갈 건지 아님... 초심을 잊고 이 자에 붙어? 하지만 난 그런 따위엔 관심이 없으니, 사업인지 사랑인지 선택하라고. 사업을 선택하려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선택하려니 사업이 아쉽긴 하겠지?” 귀동이 그의 아내 선희를 어르고 있을 때 규범은 선입감과 서두름으로 그르치고만 일을 떠올렸다. 존속상해로 구속된 박 기자를 무혐의로도 처리할 수가 없었다. 사건 자체를 없던 것으로, 서류 모두를 남기지 않고 다 지워버려야 했다. 문 검사는 기자를 처음 조사한 서초경찰서의 형사계장을 검사실로 불러들였다. “문제 삼지 않겠다. 우리 쪽에서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정확한 사정만은 내가 납득할 수 있게 분명
11 장마로 전국이 물로 흠뻑 젖었다. 대륙의 찬 공기와 태평양의 습한 공기가 한반도 상공에 대립하며 연일 억수를 쏟아냈다. 장마전선은 반도의 위아래를 오가며 국지성 폭우를 쏟아 붓고 있었다. 어제는 전남지역이 홍수로 2000억 원의 재산피해를 입히더니 오늘은 영남지방으로 옮겨 모내기를 마친 농토를 휩쓸었다. 도시에선 산사태로 아파트 단지의 주민들을 위협했다. 후텁지근한 무더위도 함께 계속됐다. 카페 <The>의 주방 내실에는 작은 창이 하나 있다. 가슴 위로 문규범의 땀방울을 받아들이며 이선희는 창을 매섭게 때려대는 장대 빗소리를 평화롭게 듣고 있다. “장마가 다음 주엔 그친다는데...” 선희는 장마 내내 규범이 카페를 찾아왔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그녀가 부쳐주는 빈대떡을 좋아한다. “어머니가 비 오는 날이면 부추와 신김치 부침개를 종종 해주시곤 했는데.” 긴 가뭄으로 세상이 온통 타던 어느 날 규범은 비를 고대했다. “비 오면 내가 해줄게.” 장마가 시작되면서 카페는 문을 닫았다. 규범이 요구했다. “우리의 사랑을 어떠한 것으로도 방해 받고 싶지 않아.” 내
12 규범은 엉뚱하다 싶은 제안을 내놓으면서 ‘너하곤 다 벗고 있어도 아무 일이 없을 것 같다’고 한 방금 전 선희의 말을 떠올렸다. 제안이란, 하나, 다 벗고 마주앉아만 있기 둘, 다 벗은 그대로 등을 대고만 있기 셋, 다 벗은 그대로 포옹만 하기 이 모두를 각각 20분씩 하기. “인내를 시험하자는 거니? 어째 엽기 같기도 하고.” 선희가 벗은 몸을 규범의 앞에 앉혔다. 그는 손목에서 시계를 풀어 둘 사이의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왜 하필 이십 분이고 한 시간이어야 하는 거지? 줄여도 좋을 듯한데.” “이 분씩 육 분만 하려고 했어. 남녀의 성욕을 통제하기엔 이 시간으로도 충분할 것 같아서지. 육 분을 넘길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거든. 하지만 길어지면 감정이 다를 것 같아. 그러나 어떻게 달라질지는 나도 모르겠고 해서 그 시간을 무조건 연장해 보았는데, 통제가 자제로, 그리고 욕정이 진정으로 바뀔 것 같기도 하고. 즉흥을 조응케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 너무 많다. 설명적이야. 그냥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좋지 않겠니? 통제? 자제? 이게 넌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