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출신 알마시는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고 구속하는 ‘국가와 민족’이란 집단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본다. 더 나아가 적개심까지 느낀다. 그래서인지 알마시의 꿈은 왜소하고 멸시당하는 헝가리 민족을 벗어나 세계인이 되는 거다. 알마시의 조국 헝가리의 역사는 우리와 닮은 구석이 있다. 근대 이후 헝가리는 주변 강대국 오스트리아, 독일, 러시아(옛 소련)의 세력 및 관계 변화에 따라 이리저리 찢겨나간다. 헝가리 역시 살아남으려 이쪽저쪽에 붙어보지만 약소국의 결과는 항상 참담하다. 헝가리 귀족가문 출신이자 엘리트인 알마시는 헝가리란 국적 때문에 이웃 강대국의 귀족가문이나 엘리트로부터도 무시당하는 자신의 처지에 분노하기도 한다. 자신의 ‘민족정체성’이 헝가리란 사실을 부정하려는 듯, 그는 헝가리어를 쓰지 않고 독일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그들과 어울린다. 알마시는 항공기 추락으로 처참한 화상을 입고 아무것도 기억 못하지만 신음 속에 구사하는 그의 영어만은 영국인이 들어도 틀림없는 영국인의 발음이었던 모양이다. 신원을 밝혀줄 아무런 증명서도 없는 상태에서 그렇게 그는 ‘잉글리쉬 페이션트’로 공인받는다. 그 정도면 알마시는 남루한 ‘헝가리인’에서 벗어나 진정한 ‘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오프닝 크리딧 배경화면은 조금 특별하다. 적갈색 물감을 묻힌 붓으로 종이 위에 무언가를 조심조심 그리는 누군가의 손을 계속 보여준다. 그 조심스러운 붓질이 완성한 그림은 팔다리의 관절을 꺾은 듯한 기묘한 사람의 형상이다. 그 그림은 영화 속에도 등장하는 ‘수영하는 사람들의 동굴(Cave of Swimmers)’ 속에 그려져 있는 신석기시대 동굴벽화 그림이다. 종이 위에 그 그림을 모사(模寫)하고 있는 손이 알마시인지 그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 캐서린인지는 불분명하다. ‘오프닝 크리딧’ 배경화면은 대개 영화의 가장 극적인 장면이나 영화 전편을 관통하는 의미를 담은 장면을 사용한다. 앤서니 밍겔라 감독은 아마 ‘수영하는 사람들의 동굴’ 속에 그려진 동굴벽화 한 컷으로 관객들에게 자신이 의도하는 영화의 주제를 전달하고 싶었던 듯하다. 캐서린은 그 동굴 속에서 알마시에게 편지를 쓰면서 숨을 거두고, 알마시는 그 동굴에서 숨을 거둔 캐서린의 시신을 안고 나오며 통곡한다. ‘수영하는 사람들의 동굴’은 실존인물 알마시가 1933년 이집트와 리비아 국경 사막지대에서 발견한 신석기 시대 동굴벽화다. 대단한 고고학적 발견이다. 불행하게도 1996년
알마시는 인간 자체로는 꽤나 훌륭한 인물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사막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막 탐사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SNS에 ‘인생 샷’ 하나 올리지 않는 걸 보면, 사막 탐사가 ‘공명심’인 것도 아니다. 알마시는 누군가에게서 돈을 받고 하기 싫은 노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위해서 홀로 사막을 떠도는 것도 아니다. 조국 헝가리를 위해서도 아니다. 나라를 위해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만들기에 매달린 김정호 선생과도 결이 다르다. 알마시를 매슬로(Maslow)의 ‘인간의 욕구 5단계설’에 적용하면 승화된 욕망의 마지막 단계인 ‘자아실현(self-realization)’에 도달한 인물이다. 모든 것을 초월해서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한다. 헝가리의 귀족 출신이니 호구지책 걱정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존경스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황량한 리비아의 사막을 혼자 떠돌며 자신이 사랑하는 사막을 관찰하고 그 사랑의 대상을 묘사하고 기록할 때 알마시는 완벽하게 자아를 실현하고 충만한 인간으로 보인다.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고, 갈등하지도 않고, 고통스럽지도 않아 보인다. 그랬던 ‘자유인’
캐서린은 알마시와의 불륜관계가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튀니지의 허름한 천막 극장에서 알마시와 만나 이별을 통보한다. 도덕적 죄책감도 아니고 알마시에게 정이 떨어져서도 아니다. 결국은 남편이 눈치를 챌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다. 알마시는 캐서린의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캐서린은 도망치듯 극장을 빠져나온다. ‘어둠’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광명’의 세계로 빠져나간다. 어둠 속에 홀로 남은 알마시의 표정이 참담하다. 알마시가 캐서린으로부터 이별통보를 받은 날 저녁 호텔에서 ‘국제 사막클럽’의 연회가 열린다. 클리프턴을 비롯한 사막 탐사가들이 모두 멋진 연회복장으로 참석해 우아한 유럽식 파티를 즐기고 있다. 알마시는 극장에서 캐서린과 ‘접선’하느라 지각 참석한다. 캐서린에게 이별통보를 받고 어디서 ‘홧술’을 몇잔 했는지 이미 취한 듯하다. 알마시는 대뜸 자신도 속해 있는 ‘국제 사막클럽’이란 단체 명칭에서 ‘국제(international)’란 단어에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우아하게 차려입은 ‘국제 사막클럽’ 회원들을 향해 “세상에 국제라는 말처럼 더럽고 추악한 것은 없다”고 이죽거린다. 개별 국가는 자유롭지만 국가끼리 엮이고 관계를 맺으면 자신의 뜻대로
헝가리 출신의 사막 탐사가 알마시와 영국의 유부녀 캐서린은 황량한 리비아 사막 한가운데에서 ‘눈이 맞는다.’ 알마시는 헤로도투스의 「역사(Histories)」에 나오는 칸다울레스의 전설을 읊조리는 캐서린에 꽂히고, 캐서린은 아무런 수식어 없이 글쓰기를 고집하면서 사물의 본질에 충실하고 사막 같은 무공해의 알마시에 꽂힌다. 알마시가 시장 구경에 나선 캐서린의 뒤를 밟아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갖기 시작하고, 알마시와 캐서린 단둘이 사막에 고립돼 하룻밤을 지새우면서 서로에게 더욱 끌린다. 결국 유부녀 캐서린과 알마시는 넘어선 안 될 선을 넘고 만다. 여기까진 불륜 드라마의 정해진 수순을 밟는다. 그런데 알마시의 숙소에서 캐서린과 알마시가 욕조에 몸을 담그고 달달한 대화를 하던 중 무언가 꼬이기 시작한다. 알마시는 캐서린의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쇄골을 어루만지면서 그것을 ‘알마시의 협곡’이라고 명명한다. 자신이 아름다운 캐서린 쇄골의 최초의 발견자라고 한다. 미국 대륙에 인디언이란 본래 주인이 있었지만 콜럼버스나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들어가서 그곳에 자기들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은 장면이다. 캐서린의 쇄골에 굳이 주인이 있다면 법적인 남편 클리프턴(콜린 퍼스)일 텐
영화는 비행기 추락으로 전신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타버린 알마시(랄프 파인즈)의 회고를 따라간다. 폐허가 된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 간호사 해나(쥘리엣 비노슈)와 단둘이 남은 알마시는 자신을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간호사에게 고해성사하듯 자신의 ‘기막힌 사연’을 띄엄띄엄 털어놓는다. 죽음을 앞둔 알마시의 최후진술서다. 알마시의 회고는 리비아 사막에서 제프리와 캐서린 부부(콜린 퍼스,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와의 합류로 시작한다. 그날 밤 일행은 사막에서 간단한 술자리를 갖는다. 단합대회 성격인 듯하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새로운 팀을 만들면 ‘아이스 브레이킹’이 필요하다. 서로 간의 거리를 좁혀주고 경계선을 실선에서 점선으로 바꿔 그리는 데에 술과 노래만 한 것이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망가진 모습을 보여줘야 단합이 된다. 우리도 술집에서 1차로 망가지고 노래방에 가서 2차로 망가진다. 알마시 일행의 술자리도 돌아가면서 ‘막춤’과 ‘막 노래’로 이어진다. 제프리 아내인 캐서린의 차례가 돌아오자 캐서린은 참으로 분위기 깨지게 헤로도토스의 「역사(Historia)」에 기록된 이야기 한 토막을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나긋나긋하게 들려준다. 노래방에서 흥겹기론 첫손가락에
헝가리 출신 사막 탐사가인 라즐로 알마시(랄프 파인스)는 리비아 사막에서 영국 출신 사막 탐사가 제프리 클리프턴(콜린 퍼스)과 합류한다. 두 탐사가의 협업은 원래 문제 될 게 전혀 없는데, 제프리가 아내인 캐서린(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을 사막까지 데려오면서 심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일반인’ 아내를 사막까지 데려온 남편도 어이없고, 따라온 아내도 딱하다. 알마시와 캐서린의 회복불능의 ‘잘못된 만남’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다. 서로가 찾던 짝을 그 사막에서 만난다. 캐서린은 알마시와의 첫 대면에서 그가 쓴 사막 탐사기를 읽어보았다면서 “아무런 수식어 없이 그렇게 긴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다”고 인사한다. 사실 형용사와 부사와 같은 수식어 없이 글을 쓴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캐서린은 사막을 향한 관심보다는 수식어 없이 글쓰기 작업을 해내는 알마시란 사람에게 호기심을 느껴 사막까지 따라왔는지 모르겠다. 흔히 글쓰기를 요리에 비유하면 형용사는 설탕이고 부사는 소금에 해당한다고 한다. 명사와 동사는 재료에 해당한다. 형용사와 부사를 쓰지 않는 글은 요리로 치면 ‘날것’이다. 조난을 당하지 않은 다음에야 날것을 먹기는 힘들다. 혹시 양념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잉글리시 페이션트(The English Patientㆍ1996)’는 6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2개 부문 후보에 올라 최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해서 9개 부문을 휩쓴 작품이다. 전 세계적으로 3000억원가량의 수익을 올렸다니 작품성과 흥행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확실히 잡은 영화임에 틀림없다. 1997년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인공이었던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한국에선 신통치 않은 성적표를 남겼다. 할리우드 영화문법에 익숙한 우리나라 관객들이 영국식 영화문법을 다소 낯설 게 느꼈을지 모른다. 같은 영어라도 미국식 영어와 영국식 영어가 조금 다르듯 미국 영화와 영국 영화는 같은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르다. 조금은 정적이다. ‘다이내믹 코리아’의 한국관객들은 정적인 영국풍보다는 할리우드의 ‘역동적’ 전개와 장면들에 더 끌리는 듯하다. 영화는 라즐로 알마시(Laszlo Almasy)라는 실존인물의 행적을 바탕으로 한다. 영화에서도 라즐로 알마시라는 실명으로 등장한다. 연기파 배우 랠프 파인즈(Ralph Finnes) 특유의 우울하고 권태로우면서도 짜증스러운 연기가 썩 잘 어울린다. 헝가리에서 태어난 라즐로 알마시는 1900년대 전반기를 살았던
세계 최고수 킬러들이 이런저런 사연으로 탄환열차에 동승한다.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발군의 킬러들은 ‘탠저린’과 ‘레몬’이라는 환상의 2인조 킬러다. 그들은 볼리비아에서는 ‘하얀 사신’의 야쿠자 조직을 박살내고, 홍콩에서는 중국의 삼합회를 초토화한다. 그들이 펼치는 사람 죽이는 환상적인 호흡은 거의 예술의 경지다. 영화 속에서 살벌한 영국 출신 킬러로 나오는 ‘탠저린’과 ‘레몬’의 코드네임은 조금 ‘깬다.’ 탄환열차에 모여든 다른 킬러들의 코드네임은 킬러답게 살벌하다. ‘하얀 사신(死神)’도 있고, ‘늑대’와 ‘말벌’도 있다. 그럴듯하다. 그런데 이 환상의 2인조 킬러들의 코드네임은 도저히 ‘킬러’라는 직업에 어울리지 않는 탠저린과 레몬이다. 이 살벌한 영국 출신 2인조 킬러들의 코드네임이 귀여운 과일들이라니 가당치 않다. 테스토스테론을 뿜어대며 쿵따리샤바라를 열창하는 남성듀오 ‘클론’이 ‘소녀시대’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오르는 꼴이다. 이들이 현장에서 자신들의 코드네임을 대면 상대들은 모두 당황하거나 비웃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오렌지과에 속하는 자신들의 코드네임이 썩 만족스러운 듯하다. 백인 탠저린은 스타일리시한 정장 차림의 말쑥한 신사형이라면 흑
영화 속 ‘레몬’은 그 직업상 분명 빌런이어야 하는데 왠지 빌런스럽지 않은 독특한 해결사다. 영화 속에서 잠깐씩 보여주는 그의 킬러 경력은 화려하기 짝이 없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볼리비아, 홍콩 등에서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한다. 그런데 레몬의 내면은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킬러’ 레몬이 지금까지 몇명이나 죽였을지 가늠하기조차 쉽지 않다. 그러나 ‘직업’은 불문에 부치고 ‘인간 레몬’만을 떼놓고 보면 썩 괜찮은 인물이다. 문득 응원하고 싶어진다. 화면 속에 잠깐 스쳐가는 그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면 그다지 교육을 많이 받지는 않은 듯하다. 어쩌면 유치원이 최종학력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인지 레몬의 바이블은 다양한 기차를 의인화한 「토마스와 친구들(Thomas & Friends)」이란 영국 어린이 교육용 그림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유치원 원아들 필수교재에 해당한다. 레몬 스스로 자신은 세상의 모든 것을 ‘토마스’에게서 배웠으며 ‘토마스’의 가르침은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고 확신한다. 레몬은 야쿠자 보스인 아버지의 위력을 믿고 버르장머리 없이 구는 ‘하얀 사신’의 아들을 보고 「토마스와 친구들」 스티커 북을 꺼내어 ‘퍼시
일본 최대 야쿠자 조직의 보스로 등장하는 ‘하얀 사신’이 적을 제거하는 방식은 조금은 독특하다. 항상 상대의 무기로 상대를 처단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병법 36계에 나오는 ‘차도살인(借刀殺人)’이다. 남의 칼을 빌려서 죽인다는 뜻이다. 차도살인은 최고의 병법 중 하나다. 우선 비용이 덜 든다. 상대를 제거하지만 상대는 그가 누구의 칼에 죽었는지 헛갈려서 누구에게 복수해야 할지도 헛갈린다. 관전자들도 누가 범인인지 알쏭달쏭하다. 살인의 후폭풍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하얀 사신’은 마음에 안 드는 아들도 남의 손을 빌려 처단하고, 아내를 죽인 원수도 남의 손으로 죽인다. 하얀 사신은 자식을 죽인 ‘비정한 애비’란 비난에서 벗어나고, 교통사고로 죽었을 뿐인 아내의 죽음까지 피로 응징했다는 비난에서도 비켜선다. 하얀 사신은 자신을 겨눈 상대의 총이나 칼을 빼앗아 상대를 죽이는 것을 ‘종특’으로 한다. 자신을 겨눈 31번의 암살기도가 있었는데 31번 모두 자객의 무기를 빼앗아 자객을 죽였다는 야쿠자계의 살아있는 전설인 그는 ‘차도살인’의 달인이다. ‘장로’와의 마지막 결투에서도 하얀 사신은 벽에 박힌 장로의 칼날에 장로의 목을 밀어 32번째 차도살인의 전설을
1000만불이 든 돈가방을 노리고 세계 최고의 킬러들이 몰려든 ‘탄환열차’는 전쟁터가 된다. 전쟁은 목적 달성을 위해 다른 수단과 방법을 모두 배제하고 오직 무력에 호소하는 ‘마지막 수단(last resort)’이자 궁극적인 해법이다. 말이 필요 없다. 탠저린과 레몬, 늑대와 말벌들이 닥치는 대로 쏘아버리고 베어버리고, 두들겨 패고 독침을 찔러버리기도 한다. 이 살벌한 전쟁터에 조금 특이하고 생뚱맞은 킬러가 등장한다. 더 이상 살상(殺傷)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무당벌레(브래드 피트)’다. 무당벌레는 살상은 하지 않고 ‘도덕적’이고 옳은 방법으로 돈가방만 찾아오겠다는 신념으로 총도 없이 전투장비라곤 폭죽과 수면제 따위만 준비하고 전쟁에 나선다. 그 결과가 궁금해진다. 무당벌레는 자기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킬러들에게 ‘대화와 협상’을 제안하고, ‘분노가 빠르면 빠를수록 이해는 느려진다’는 둥, ‘상대에게 손가락질하면 나머지 세 손가락은 자신을 향한다’는 둥 참 좋은 말만 골라 한다. 모두들 ‘전쟁’을 하자는데 무당벌레 혼자 대화와 타협으로 정치적으로 문제를 풀자고 한다. 안타깝지만 당연하게도 상대들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은 ‘무슨 ×소리냐?’ 뿐이다. 기세등등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