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조 킬러 ‘탠저린’과 ‘레몬’은 삼합회 조직에 납치당한 ‘하얀 사신’의 외아들을 구출하고 몸값으로 지불했던 1000만불 돈가방까지 회수하는 미션에 성공해 교토행 탄환열차에 탑승한다. 이제 교토역에서 ‘하얀 사신’에게 아들과 돈가방을 넘기기만 하면 된다. 모두 끝났다고 생각하는데 차츰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열차 안에서 ‘하얀 사신’의 아들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하고, 돈가방까지 사라진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열차 안에 누군가 만만치 않은 ‘나쁜 놈’이 타고 있다. 2인조 킬러는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직감한다. ‘탠저린’과 ‘레몬’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긴장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해결사의 행동요령을 다시금 확인한다. “먼저 쏘고 질문은 나중에 한다(shoot first, ask questions later).” ‘탠저린’과 ‘레몬’뿐만 아니다. 연인의 원수를 찾아 열차에 탑승한 ‘늑대’의 행동요령도 ‘먼저 쏘고 질문은 나중에 한다’이다. 늑대는 애인이 살해당한 피로연 연회장에서 ‘무당벌레’를 본 것 같다는 어슴푸레한 기억 하나만으로 다짜고짜 칼을 꺼내 먼저 찌르고 본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아수라장에서 살아가는 킬러들의 행동강령이자 생존
잠깐만 생각해보자. 희생과 참사엔 책임 소재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같은 사건을 사망이나 사고로 명명하면 책임 소재를 따지는 게 어려워진다. 권력자들은 이태원 참사를 대체 어떤 눈으로 보고 있을까. 이번 편에선 영화 불릿 트레인 속 주인공들의 ‘무책임론’부터 얘기해봐야겠다. 탄환열차 속에서 살인청부업자들이 좌충우돌한다. 그러던 중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나온다. 환상의 2인조 킬러 탠저린과 레몬은 삼합회에 납치된 ‘하얀 사신’의 아들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처치한 삼합회 조직원이 16명이었는지 17명이었는지를 놓고 다툰다. 급기야 둘은 한 장면 한 장면을 손가락 꼽아가며 복기한다. 그 결과, 레몬이 희생자 수에서 한명을 누락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17번째 희생자는 뒤집힌 차 안에서 사람을 구하려다 차가 폭발하는 바람에 어이없이 죽어버린 ‘착한 사마리아인’이었다. 탠저린이 레몬을 향해 “무고한 시민의 죽음에 책임지라”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레몬은 손사래를 친다. 레몬의 표정을 보면, 착한 사마리아인에게 조금 미안하긴 한 모양이다. 하지만 레몬은 하필 그 시각에 그 자리에 있다가 죽었으니 ‘자기 팔자’이거나 본인의 책임이지 자기 책임은 아니라고 주장한
도쿄에서 나고야로 향하는 ‘탄환열차’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분기탱천한 킬러들이 저마다의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 모인다. 야쿠자 보스 ‘하얀 사신’은 아내의 죽음에 책임 있다고 생각하는 모두에게 분노하고, 키무라는 아들을 해친 ‘왕자’에게 이를 갈고, ‘왕자’는 자신에게 무관심한 아버지 ‘하얀 사신’에게 독을 품고, ‘늑대’는 연인을 독살한 ‘말벌’을 쫓아 이를 갈며 탄환열차에 오른다. 모두가 분노에 치를 떨며 각자 분노의 대상을 처단하려는 독기로 차오른다. 그렇게 서로를 죽이고 그 과정에 엉뚱한 상대끼리 총질을 해대기도 한다. 그 사고들이 또 서로 이를 갈게 만드는 새로운 분노와 원수를만든다. 분노한 세계 최고의 킬러들이 모였으니 그들이 보여줄 액션은 기대해도 좋다. 한마디로 ‘탄환열차’는 아수라(阿修羅)장이 된다. ‘아수라’는 불가에서 전생의 업보에 따라 다음 생에 태어나는 육도(六道) 중 하나다. 육도는 천(天), 인간(人間), 아수라(阿修羅), 축생(畜生), 아귀(餓鬼), 지옥(地獄) 중 하나인데, 아수라는 인간계와 짐승계의 중간쯤 되는 곳인 모양이다. 짐승보다는 조금 낫지만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이 곧 아수라들이다. 불가에 전해지는 ‘아수라’의 특징은
‘불릿 트레인(Bullet Trainㆍ2022)’은 데이비드 레이치 감독의 신작 액션 코미디 물이다. 제작비 1억 달러를 투자해서 전 세계적으로 2억4000만 달러를 거둬들였다면 흥행에 성공한 셈인데, 우리나라에선 흥행 보증수표라 일컬을 만한 브래드 피트가 주연임에도 흥행에 참패한 듯하다. 왜 일까. 우리나라에서 ‘불릿 트레인’이 실패한 까닭을 말하라고 한다면, 첫번째 ‘왜색(倭色)’을 꼬집을 수 있다. ‘왜색’을 향한 우리나라 관객의 거부감은 제아무리 브래드 피트라고 해도 ‘넘사벽’이다. 우리가 ‘불릿 트레인’의 ‘왜색’에 섭섭했다면, 정작 일본 관객들은 이 영화에 듬뿍 뿌려진 ‘표백제’에 섭섭했을지도 모르겠다. 원작이 일본 소설인데, 영화 속 배역은 대부분 백인 서양인들이다. 원작에 나오는 일본 킬러 대신 백인 킬러가 등장한다고 해서 영화가 산으로 가는 건 아니지만, 왠지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은 영화의 주제가 ‘운명’을 다루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운명’을 보는 시각은 동서양이 확연히 다른 편이다. 영화의 원작자는 동양적인 운명관을 배경에 깔고 있는 듯한데, 백인 배우들이 나와서 동양적 운명관을 이야기하고 연기하는 게 조금은 이질감이 든다. 설날 특집
영화 속 V의 캐릭터는 대단히 독특하다. 어두운 뒷골목에서 비밀경찰로부터 이비(Evey)를 구출하는 등장부터 남다르다. 16세기 복장으로 나타나 검 하나로 3명의 비밀경찰들의 총을 제압한다. V에게 구출된 이비가 깨어난 곳은 위치를 알 수 없는 V의 아지트다. 사방에는 온통 빛바랜 고전 서적들이 쌓여있다. 인사동 고서점 창고 같다. V는 슈틀러 일당을 때려잡는 업무 외 시간은 오직 그 고서를 읽으면서 보낸다. 벽에도 모두 고전 회화들이 걸려 있다. 중세 기사의 갑옷도 있다. V는 중세 기사의 갑옷을 상대로 검술을 연마하는 한편 흑백 브라운관 TV로 ‘몬테 크리스토 백작’을 다룬 영화를 보는 데 몰두한다. V는 대사를 모두 외울 정도로 ‘몬테 크리스토 백작’을 쓴 알렉상드르 뒤마의 덕후다. 그가 몰두하는 ‘몬테 크리스토 백작’은 영화사 박물관에나 소장돼 있을 법한 1930년대 작품이다. ‘몬테 크리스토 백작’의 최근 버전들은 모두 쓰레기로 치부한다. V의 ‘시그널 뮤직’은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1812년이다. V가 구사하는 모든 어휘와 문장들은 모두 뒤마나 블레이크, 셰익스피어의 고전적이고 어마어마한 어휘와 문장들이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원작을 저술한 앨런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주인공 V는 영국 형사재판소 폭파로 슈틀러 정권에 정식으로 선전 포고하고, 곧바로 정권 핵심 인사들을 처형한다. 슈틀러 정권의 나팔수 프로테로를 그의 저택 욕실에서 처형하고, 소아성애에 탐닉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릴리만 주교를 처단한다. 프로테로와 릴리만 주교는 “단결을 통한 힘, 믿음을 통한 단결(Power through Unity, Unity through Faith)”이라는 구호를 내건 슈틀러 정권의 핵심권력자들이다. 프로테로는 선전선동을 통한 ‘단결’의 핵심이고, 릴리만 주교는 정권구호에 등장하는 ‘믿음(faith)’의 중심축이다. 정권의 ‘단결 호소인’과 ‘믿음 호소인’인 셈이다. 이들은 신을 믿는 것처럼 슈틀러를 믿음으로써 대동단결해 강력한 국가를 유지하자고 한다. 그런데 프로테로는 수용소 생체실험의 총감독 출신이고, 릴리만 주교는 생체실험의 참담한 현장을 시찰하고 돌아와선 소아성애에 탐닉하는 인간이다. 악마의 탈을 쓴 인간들이다. 악마의 탈을 쓴 인간들이 떠받치고 있는 정권이라면 그 정권도 악마의 탈을 쓴 정권일 수밖에 없겠다. V는 소아성애의 현장을 급습해 릴리만 주교를 처단하면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차드 3세」의 유
V는 혈혈단신으로 영국 국영방송사에 난입해 방송실을 점거한다. 그곳에서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앉아 전국에 슈틀러 정권 타도의 격문을 생방송한다. “이 정권 아래에서 지금껏 여러분의 이성을 파괴하고 여러분의 상식을 파괴하는 많은 음모가 벌어져 왔다. 슈틀러는 여러분이 원하는 질서와 평화를 약속하고, 그 대가로 여러분들이 침묵하고 순종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다음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느닷없는 ‘방송사고’에 심드렁하게 슈틀러 정권의 홍보만 들어오던 시민들의 눈이 생기로 반짝인다. 시청자들은 자세를 고쳐 앉아 귀를 기울인다, ‘방송사고’가 끝나고 정규방송으로 돌아오고, 방송사를 점거했던 ‘테러범’이 현장에서 사살됐다는 속보를 자료화면과 함께 나온다. 이를 지켜보던 한 꼬맹이 소녀는 ‘아, 짜증 나…’ 하면서 일어나 제 방으로 가버린다. 시청자들 모두 테러범의 편이지 정부의 편이 아니다. 9·11 테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영화 속에서 ‘슈틀러 업무수행 지지도’ 여론조사 결과는 보여주지 않지만 시청자들의 반응을 보면 아마도 20%에도 못 미치는 모양이다. 통치에 대한 동의는 기본적으로 ‘계약관계’다. 슈틀러가 현재 영국시민의 ‘안전과 평화’를 확실히 지
영화 속 슈틀러 총통의 전위조직들은 전제적인 통치의 견마와 수족이 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모두 슈틀러와 똑같이 생각하고 슈틀러와 똑같이 말한다. 슈틀러의 복제인간들이다. 집권당 ‘노스파이어’는 슈틀러 총통과 ‘당정 일체’가 돼 돌아간다. 아무도 슈틀러의 시정施政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슈틀러 총통은 도미노가 쓰러지는 패턴을 구상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세워놓은 도미노의 첫 패에 해당하는 ‘노스파이어’당의 대표를 쓰러트리면 모든 패가 일사불란하게 같은 방향으로 어김없이 쓰러져야 한다. 모든 게 슈틀러 맘대로, 형식은 단일대오다.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는 북한 조선노동당의 구호가 이곳에서 실현되고 있다. 당정이 단일대오를 형성하고 최고지도자의 구상대로 일사불란하게 넘어진 도미노 패들은 파시즘의 거대한 ‘F’자를 만든다. 영화 주인공 V의 꿈은 일사불란한 슈틀러의 전제정치를 타도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의 꿈을 놀랍게도 도미노 붕괴의 일사불란함으로 설명한다. V가 촘촘히 세워놓은 도미노 패들은 첫번째 도미노 패를 쓰러트리자 도화선에 불을 댕긴 것처럼 정해진 길을 따라 무너지면서 ‘A’자를 만들어낸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도미노가 붕괴하는 모습을 동원해 극적인 결말을 극대화한다. 주인공 V는 영국 국회의사당을 폭파할 날로 정한 D-day에 그의 지하 아지트에서 도미노 패들을 쓰러뜨린다. 수만개에 달하는 듯한 도미노 패들이 쓰나미가 몰려오는 것 같은 장관을 연출하며 쓰러진다. 그 쓰나미가 지나간 자리에 무정부주의(anarchism)를 상징하는 이니셜 ‘A’가 신의 계시처럼 드러난다. 도미노 패를 쓰러뜨린 V는 자신의 승리를 예감하는 동시에 죽음도 예감하고 있다. 지하 아지트 바닥 가득 펼쳐져 완성된 ‘A’를 굽어보는 V가 쓰고 있는 가이 포크스 가면의 ‘미소’가 참으로 신비롭게 느껴지는 장면이다. 환희 같기도 하고 처연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부처님의 미소처럼 평온하기도 하다. 도미노 패들이 일사불란하게 쓰러진 후 통행금지령으로 인적이 끊긴 어두운 런던 밤거리에 V와 똑같이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망토를 걸친 시민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내 수십·수백명으로 불어나 런던의 밤거리를 점령한다. V의 아지트에서 도미노 붕괴가 완성된 것처럼, 런던 거리에서 시민들 하나하나가 기꺼이 한개의 도미노 패가 돼서 일사불란하게 하나의 그림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V는 마침내 필생의 사업으로 삼았던 영국 국회의사당 폭파를 마무리 짓는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장면이기도 하다. 파시즘과 전체주의를 홍보하는 국영방송사를 폭파하는 것까지는 수긍할 수 있지만 ‘자유민주주의’의 상징인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까지 날려버리는 장면은 뜻밖이다. V는 영국 국회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 사원 지하를 통과하는 지하철 열차에 화약을 가득 실어 출발시킨다. 영국 국회의사당이 폭발하는 순간 밤하늘을 덮은 폭죽은 그대로 아름다운 축제의 불꽃놀이가 된다. 런던의 밤거리에 모여 영국 국회의사당을 날려버린 불꽃놀이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얼굴엔 기쁨의 미소가 번진다. ‘빅 벤(Big Ben)’ 시계탑으로 유명한 영국 국회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누가 뭐래도 워싱턴의 미국 국회의사당과 더불어 세계 자유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양대 기념물이다. 마블에 등장하는 최악의 빌런이 아니고서야 인류의 오랜 염원을 담은 숭고한 자유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저토록 증오하고 조롱할 수 있을까. 빌런이 아니라 ‘우리들의 영웅’으로 그려진 V가 자유민주주의의 상징을 날려버리고, 시민들은 그 모습에 비로소 안도하고 새 희망의 미소를 짓는 영화 속 장면은 자못
영화의 배경이 되는 ‘미래 어느날’ 영국은 극악한 ‘전체주의 국가’가 돼 있다고 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영화 속 영국 시민들의 일상은 일견 자유롭고 평화스러워 보인다. 시민들은 깨끗하고 질서 잡힌 런던 거리를 자유롭게 왕래한다. 어떻게 된 일일까. 독재자 ‘슈틀러’가 장악한 영국은 평온하다. 노숙자는 없고 쓰레기도 없다. 너절한 광고 전단도 없다. 시민들을 감시하기 위한 무장경찰이나 계엄령 치하와 같은 탱크도 보이지 않지만 질서정연하다. 시민들은 카페와 식당에서 자유롭게 식사를 하고, 담소를 나눈다. 또한 자유롭게 TV를 시청한다. 히틀러나 스탈린이 그토록 꿈꿨던 ‘전체주의 지상낙원’이 마침내 슈틀러 총통이 지배하는 영국에서 실현된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면 다른 ‘그림’이 보인다. 평온해 보이는 거리 곳곳에는 ‘핑거맨(fingerman)’이라고 불리는 사복 비밀경찰들이 섞여 있다. 카페나 식당에도 어느 자리엔가 섞여서 태연하게 식사를 하면서 시민들을 감시하고 있을 터다. 언제든지 불온한 대화를 나누는 시민들을 발견하면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뽑아낼 준비가 돼 있다. 시민들이 ‘자유롭게’ 시청하는 TV는 정부가 보여주고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무정부주의를 전면에 내세운다. 영화의 공동제작사 이름이 아예 Anarchos Production Inc.이다. ‘anarchos’는 정부나 통치의 부재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다. 무정부 영화사가 작심하고 제작한 무정부주의 영화인 셈이다. 400년 전 영국 국회의사당 폭파를 시도했던 가이 포크스처럼 ‘미래 어느 날’의 V 역시 ‘무정부주의자’다. 인간들이 국가라는 제도를 발명한 이래 그 존재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는 뿌리가 깊다. 국가와 정부라는 건 사실 ‘필요악(必要惡)’이다. 수술의 고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수술대에 오르는 것과 같다. 국가와 정부의 간섭과 자유의 제약을 원하는 사람은 없지만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에 물리적 강제력을 맡기고 자신의 재산과 자유의 일부를 신탁(信託)한다. 그 ‘물리적 강제력’이 무서워서 내기 싫은 세금도 내고, 가기 싫은 군대도 가고, 지키기 싫은 법도 지킨다. 국민들은 국가에 신탁한 물리적 강제력을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사용해 주기를 바란다. 그 믿음이 깨지면 국가나 정부는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는 무정부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