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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복수는 나의 것 (9)
조폭 닮은 모습의 영화 속 주인공들 ... 정치 집단 · 각종 단체들도 폭력적
이념에 문제 제기하면 이빨 드러내 ... 구성원 보호와 무조건적 결사옹위
폭력적 논리, 천륜으로 승화해 ... 잘못 알려진 히포크라테스 선서
히포크라테스 선서 대단히 폐쇄적 ... ‘내 새끼와 우리 밥그릇’ 논리로 무장

나름 성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흙수저’ 출신 중소기업 사장 동진(송강호 분)의 어린 외동딸이 유괴된 지 얼마 만에 시신으로 돌아온다. 동진이 복수의 광기에 사로잡힌 심정은 관객들도 공감한다. 동진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퍼부어서 유괴범인 영미(배두나 분)와 류(신하균 분)를 끈질기게 추적한다.

 

 

우선 영미를 붙잡아 전기고문 끝에 살해한다. 공범인 류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한 고문이 아니라 오로지 영미에게 최악의 고통을 가하기 위한 형벌이다. 결국 영미는 전기고문 끝에 숨을 거둔다.

영미에게 복수한 동진은 추적 끝에 마침내 류도 붙잡아 외동딸이 익사체로 발견된 강가로 끌고가 아킬레스건을 끊어 산 채로 피를 모두 뽑아낸다. 더 나아가 류의 사체를 잘게 조각내 여러 개의 검정 비닐봉지에 분리수거해 놓는다. 

그 순간 어디선가 낡은 지프차 한대가 흙먼지를 날리면서 다가온다. 지프차에서 남루한 차림의 사내 서너명이 내려 동진에게 다가온다. 새벽 인력시장에서 꾸역꾸역 봉고차에 실려 건설현장으로 가다가 시골길에서 잠깐 소변을 보러 내린 인력 같은 모습이다.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오광록 분)가 품에서 꺼낸 사진과 동진의 얼굴을 대조해보는가 싶더니 칼을 빼들고 냅다 달려들어 동진의 가슴을 찌른다. 다른 사내들도 아무 말 없이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쑤신다.

칼질을 당한 동진은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 자신의 가슴팍에 박아놓은 칼에 꽂혀있는 흰색 종이 ‘쪼가리’를 고개를 빼어 읽어본다. ‘혁명적 무정부주의 동맹’ 이름으로 ‘판결문’이라고 쓰여 있다. 그렇게 영화는 끝난다. 

그제야 영미가 전기고문 끝에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했던 ‘경고’가 떠오른다. “아저씨 딸 납치하고… 아저씨 딸 죽은 건 미안한데… 나 죽이지 마… 내 뒤에 무서운 사람들 있어… 나 죽으면 아저씨도 죽어… 정말이야.” 

동진은 영미의 마지막 ‘경고’를 ‘사악한 계집애’의 사악한 허세쯤으로 치부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동진도 황당했겠지만 관객들도 조금은 황당하다. 동진과 관객들이 황당한 이유는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 행동대원들의 동진을 향한 칼질에서 ‘무정부주의’라는 대의大義와의 연결고리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의 핵심강령이 ‘주한미군 철수’와 ‘재벌 해체’라면, 동진은 재벌 회장이 아니다. 주한미군시설 공사를 도맡아 하는 것도 아닌 다음에야 이렇게까지 할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영미가 ‘무정부주의자 동맹’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진의 딸을 납치하다 죽임을 당한 것도 아니다. 아무리 자신들의 조직원이라고 해도 영미는 그저 ‘잡범’일 뿐이고, 동진에게 응징을 당해도 할 말 없다.
 

 

어쩌면 그들은 동진에게 무정부주의 동맹 이름으로 사죄라도 해야 할 상황인데 사죄는커녕 칼질을 한다. 영화 속에서 소위 무정부주의 동맹이 하는 짓거리는 자기 조직원이 어디 가서 한 대 얻어맞고 돌아오면 불문곡직不問曲直하고 쇠파이프 들고 몰려나가는 조폭 집단과 다름없어 보인다.

그런데 혁명적 무정부주의자 동맹이라는 이념단체의 황당한 작태가 왠지 익숙하게 느껴진다. 우리 주변에서 일상처럼 보아온 장면들이어서 그런 듯하다. 그 표방하는 이념이 보수이든 진보이든, 평등이든 자유이든, 혹은 민족이든 상관없이 거룩하고 숭고한 이념을 내세운 거의 모든 정치 집단이나 단체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가히 조폭적이다.

자신들의 이념에 문제를 제기하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이빨부터 드러낸다. 자신들의 구성원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시시비비와 관계없이 결사옹위한다. 그래도 안 되면 쇠파이프 들고 우르르 몰려나가 집단폭행을 가하는 가장 ‘클래식’한 조폭집단의 모습을 보이곤 한다. 모두 이념의 탈을 쓴 폐쇄적인 조폭집단들의 모습이다. 

정치란 사회와 동떨어진 독립적인 것이 아니다. 사회가 만들어내는 사회현상의 결정체이자 압축판일 수밖에 없다. 정치(politic)라는 말의 어원은 그리스의 폴리스(polis·사회)다. 사회가 ‘조폭적’인데 정치만 ‘조폭 청정구역’이기를 요구한다면 어불성설이다.

‘내 새끼’가 학교에서 무슨 잘못을 해도 학교와 선생님이나 급우들에게 사과하기보다는 일단 학교로 쳐들어가 선생님 멱살을 잡거나 ‘아동학대’로 경찰에 신고부터 한다. 내 새끼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산책할 때 반려견 입마개 좀 해달라고 하면 ‘네 자식들이나 입마개 하고 데리고 다니라’고 개 주인이 개보다 더 으르렁댄다. 개보다 개 주인부터 입마개를 해야 할 판이다.

대학병원 어느 교수가 “전공의 한 명이라도 다치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 하더니 또 다른 어느 교수는 “자식 같은 전공의와 학생들이 밖에 나간 지 4개월이나 돼가는데 그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그까짓) 환자 치료나 계속하는 것은 천륜(天倫)을 저버린 것”이라고 한다.

조폭의 논리가 무려 천륜으로 승화된다. 많은 사람들이 의사들의 저항을 ‘집단 이기주의’와 ‘밥그릇 타령’이라고 비난하고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어디다 내던져 버렸냐고 몰아세우는데, 많은 이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다소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1948년 ‘제네바 선언’으로 개정된 선서이지 폐쇄적 집단이기주의와 ‘내 밥그릇’ 정신으로 무장하고 있는 그리스 시대 본래의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아니다. 수정본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는 원본에 들어있던 아래와 같은 핵심이 대폭 빠져있다.
 

 

“내 의술의 스승을 내 부모와 똑같다고 여기고 삶을 함께하며 그가 빈곤할 때에 나의 것을 나누고, 그의 자손들을 내 형제와 같이 생각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무보수로 전할 것이다… 내가 이 선서를 지키고 어기지 않는다면 내가 모든 이에게서 존경을 받으며 나의 삶과 의술을 누리길 기원하고, 내가 이 선서를 어기고 거짓 맹세를 한다면 이와 반대되는 일이 있기를 기원한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도 얼핏 보면 폭력조직 삼회합(三合會)나 야쿠자 입회선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폐쇄적인 ‘내 새끼와 우리 밥그릇’ 논리로 무장하고 있다. 어쩌면 폐쇄적인 조폭 근성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라서 그만큼 벗어나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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