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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박물관" 제주 주민들 훈련소 짓고 훈련병 빨래까지
"전쟁 아픔 치유하고 평화교육 등 활용방안 다각도로 모색"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김광석의 대표곡 '이등병의 편지'는 입대하는 까까머리 젊은이들과 연인, 가족의 심금을 꽤나 울렸던 노래다.

 

노래에 등장하는 훈련소로 논산훈련소('육군 제2훈련소'에서 '육군훈련소'로 개칭)를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만, 제주에 '원조' 훈련소가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과거 6·25 전쟁 당시 50만 장병을 양성했던 제주 '육군 제1훈련소'다.

 

◇ "제주서 강한 신병 양성 훈련소 초석 다져"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의 한 교차로.

 

차들이 오가는 도로 양옆으로 높이 3.7m, 가로·세로 2.5m 크기의 시멘트 기둥이 나란히 서 있다.

 

두 기둥의 간격은 17m 정도다.

 

갈라지고 금이 간 기둥과 현판을 걸어뒀던 것으로 보이는 녹슨 철근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기둥의 정체는 옛 제주 육군 제1훈련소 정문이다.

 

 

지난 2021년 11월 국가 등록문화유산으로 고시됐다.

 

2008년 국가 등록문화유산으로 기존 등록된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에 정문을 추가해 '제주 구 육군 제1훈련소 지휘소와 정문'이라는 명칭으로 새롭게 등록됐다.

 

도로 한복판에 덩그러니 남은 2개의 시멘트 기둥, 인근에 몇 안되는 낡은 건축물은 문화유산으로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 자취를 찾다보면 6·25 전쟁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빠른 시일 안에 청년을 모아 신병을 훈련해 전장에 투입할 훈련소 설치가 정부의 당면 과제로 떠올랐다.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육군 부대마다 자체적으로 훈련병을 양성했지만, 전쟁이 터진 뒤 전투를 치르기에 급급해 부대마다 신병을 훈련시킨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점점 더 치열해지는 전투 속에 정부는 대구, 김해, 구포, 제주, 진해 등 7곳에 훈련소를 연이어 창설했다.

 

당시 제주 훈련소에서 훈련받은 해병대 3·4기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돼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집는 역할을 한 일화는 유명하다.

 

정부는 이어 대구와 부산지역, 제주 등 일부 훈련소를 통합·이전하기로 결정, 1951년 3월 21일 제주 육군 제1훈련소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후방인 제주에서 보다 안전하게 신병을 훈련시킬 수 있고, 알뜨르비행장 등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군사시설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주 육군 제1훈련소는 강한 병사를 육성하는 곳이라는 뜻인 '강병대'(强兵臺)로 불리며 전쟁 이후인 1956년 1월까지 5년 간 신병 훈련 기능을 수행하며 50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양성했다.

 

훈련소 초기에는 하루에 신병 500명 정도가 입소했고, 전방의 전투가 한창 치열할 때는 약 8만명이 한꺼번에 입소하기도 했다.

 

제주도와 제주학연구센터의 구술조사에 따르면 제주에서의 초기 훈련기간은 16주였지만, 상황에 따라 3주 또는 3주도 못 채우고 바로 전방에 투입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초대 훈련소장이었던 고(故) 백인엽 중장은 과거 인터뷰에서 "부산까지 밀려온 임시정부를 제주도로 옮기는 문제까지 심각하게 거론되는 어려운 시기에 정예장병 육성은 발등의 불이요. 지상 과제이며 국가의 운명과 같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초대 훈련소장으로 부임해 온 제주도는 한마디로 '맨땅에 헤딩하는' 격으로 막막하기만 했다"면서도 "제주에서 강한 신병을 양성하는 훈련소의 초석을 다졌다"고 설명했다.

 

 

◇ "한국 근현대사 교육장…활용방안 모색"

 

"신병교육이 끝나면 마른 명태가 나온다고 할 정도로 먹지 못했다."

 

"(물이 부족해) 한 수통이면 5명이 세수하는데 … (중략) … 하루라도 매를 맞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했다."

 

"제주도에서 훈련 받을 때는 눈병, 설사병 등에 걸리는데 특히 배탈이 많이 났다. 열사병으로 사망한 경우도 있었으며 야외 훈련받을 때 죽는 경우도 많았다."(제주 육군 제1훈련소 구술조사, 제주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 2017)

 

제주 육군 제1훈련소 훈련병들은 당시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열악한 환경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또 식량과 물마저 충분치 않아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전시에 많은 인원을 수용할 건물을 지을 겨를이 없어 훈련병들은 막사 등 부대시설을 직접 만들며 생활했다.

 

신병들이 계속해서 늘어나면서 훈련소 면적은 198만㎡(약 60만평)에 달했다.

 

지금의 모슬포 지역을 넘어 대정지역 전체 그리고 안덕면 화순과 서귀포까지 각개전투 교장과 신병 숙영지가 설치됐다.

 

 

공병대와 헌병대, 통신대, 하사관교육연대, 군악대 등이 조직됐고 육군 98병원과 신병들의 종교활동을 위한 강병대 교회 등이 들어서면서 훈련소의 면모를 갖췄고 일부는 지금까지 남아 당시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전쟁 후반기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가 포화하자 제주 대정읍에 중공군 포로 수용소도 들어섰다.

 

제주 대정 주민들은 훈련소 장병을 돕는 일에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훈련소 창설초기 대정지역 남성들은 훈련장 시설과 막사 신축 등에 나서 비지땀을 흘렸고, 부녀자들은 병사들의 밥을 해주고 훈련병들이 쏟아낸 엄청난 양의 군복을 빨래해주는 등 주민의 협조는 눈물겨웠다고 한다.

 

1952년 말에는 훈련소 입소생들이 해군수송선을 타고 인근 화순항을 통해 들어왔지만 초기에는 여객선 편으로 제주도 북부 제주항으로 들어온 뒤 모슬포까지 60여㎞를 걸어서 훈련소로 이동해야 했다.

 

이 때문에 도착하자마자 대부분 기진맥진 쓰러지곤 했는데 주민들은 이들을 위로하고 정성껏 뒷바라지하느라 전력을 기울였다.

 

 

피난민과 군인가족들이 훈련소 인근으로 내려와 살면서 70여년 전 모슬포 일대는 마치 '군사 도시'를 방불케했다.

 

1951년께 이 지역 인구는 현지주민 1만5000여명에 피난민 2만여명 등 3만5000명선이었으나 점차 불어나 한때 5만명을 넘어설 정도였다.

 

50여년이 지난 2007년 3월 훈련소가 있던 모슬포에 '평화의 터' 조형물이 세워졌다.

 

7m 높이의 조형물은 방향과 중심을 잃지 않고 평화로 인도하는 등대이자 돛을, 받침석은 영원한 평화의 이념을 세계로 실어나르는 배를 형상화했다.

 

'평화의 터' 조형물을 세운 대정역사문화연구회는 "뼈를 깎는 훈련을 받은 장병들은 구국의 일념으로 전장의 곳곳에서 애국혼을 불태웠으니 그분들의 애국충정을 기리고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이곳 모슬포에 비를 세운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정전 70주년인 2023년 5월에는 모슬포 일대 6·25 전쟁 유적지를 걸으며 호국보훈의 정신을 되새기는 도보길 '글라! 6·25길'('가자! 6·25길'을 뜻하는 제주어)이 개통됐다.

 

역사·건축·문화 전문가, 정치인들은 한목소리로 "대정읍 지역에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당시 유적은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산 교육장이자 박물관 자체"라며 "전쟁에 대한 기억과 아픔을 치유하면서 평화교육으로 이어갈 수 있는 활용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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