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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다우트 (10)
첨예하게 맞선 보수와 진보 ... 이념 논쟁은 보이지 않고
시시콜콜한 가십거리에 ... 사생결단식 갑론을박만

영화는 뉴욕시 브롱크스 교구에 주임 신부로 새로 부임한 플린 신부의 첫 강론으로 시작한다. 모두 새로 부임한 주임 신부의 첫 강론에 귀를 기울인다. 플린 신부는 “하늘의 별자리를 의심하지 말아야 하듯 하나님의 말씀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연하면서도 훌륭한 말을 남긴다. 경청하고 있던 신도들 모두 고개를 끄덕이지만, 유독 한 사람만 다르게 행동한다. 다름 아닌 알로이시우스 수녀다.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플린 신부의 강론을 듣지 않는다. 그저 예배석을 돌아다니며 자세가 불량하거나 딴짓하는 학생들을 단속하고 쥐어박을 뿐이다. ‘진보적인’ 신부의 강론 따윈 듣고 싶지 않다는 ‘보수적인’ 수녀원장의 소극적인 저항인 듯하다.

거기까지는 심정적으로 이해가 된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되면서 플린 신부를 적대하는 알로이시우스 수녀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조금씩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플린 신부의 강론이 끝나고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자신의 심복인 제임스 수녀에게 ‘플린 신부의 강론이 어땠냐’고 묻는다.

편견 없는 젊은 제임스 수녀는 훌륭했다고 답한다. 알로이시우스 수녀가 듣기에도 플린 신부의 강론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진보적’인 신부라 해도 그 ‘진보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난 것은 없다.

플린 신부의 ‘사상 검증’에 실패한 알로이시우스 수녀는 곧바로 플린 신부의 ‘사생활 검증’으로 전선(戰線)을 옮긴다.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상대의 메시지를 공략하기 어려우면 그 메신저를 공략하라’는 전략이다. 여기서부턴 사실상 ‘인신공격’이다. 플린 신부의 ‘행태적인 문제점’들은 손쉽게 수집되고, 신비한 논리가 완성된다. 

“플린 신부는 신부답지 못하게 학생들 앞에서도 채신머리가 없고, 담배를 피워대고, 속된 농담을 하고 킬킬대기도 하고, ‘쾌락적’인 설탕을 좋아하고, 볼펜을 사용하면서 ‘편리’를 추구한다. 이런 모습은 ‘보통사람’들의 모습이지 적어도 성직자의 모습은 아니다. 그러므로 플린 신부가 믿는 ‘진보성’이라는 것도 성직자의 가치로는 부적절한 것이다.”
 

 

플린 신부만이 아니라 까마득한 옛날 고대 그리스 시대 소크라테스에게 벌어졌던 일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신성모독죄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죄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사약을 마시기 직전 소크라테스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이웃들에게 꿔다 먹고 갚지 못한 닭 한마리를 대신 갚아달라고 한다. 그의 사후(死後)에도 반(反)소크라테스파는 이 부분을 공격한다.

“이웃에게 꿔다 먹은 닭 한마리도 죽기 전까지 갚지 않고 제자들에게 대신 갚으라고 할 정도로 부도덕하고 무책임한 자가 말한 모든 가르침은 모두 위선과 거짓이며 파기해야 마땅하다”는 논리를 펼친다. 반(反)소크라테스파는 심지어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Xantipe)가 최악의 악처(惡妻)였다는 사실도 공격거리로 삼는다. 

“가장으로서 자기 가정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한 자가 어찌 도덕과 윤리를 논할 수 있겠는가”라고 공격한다. 전형적인 ‘인신공격’을 통한 본질의 오도 전략이다. 곁들여 소크라테스의 ‘철학자답지 않은’ 울퉁불퉁한 외모도 그의 가르침의 신뢰도를 저하시키는 용도로 동원된다.

아마 그렇게 진저리치게 인신공격을 당해서였는지 인류의 영원한 ‘사부(師父)’라 할 만한 소크라테스는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논하고, 보통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논하고, 아무 생각 없는 자들은 그중에서도 사람들의 시시콜콜한 가십거리를 두고 떠든다”고 정리한다.

성격과 개성이 유난히 강해서 동료들과 마찰을 빚고 자신의 학문적 성과까지 폄훼당하곤 했던 하버드 대학의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 Gould)는 한 맺힌 어록을 남겼다. “어떤 주장을 한 사람의 사생활이 비도덕적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주장이 틀렸다는 근거는 될 수 없다. 그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오직 그 주장 자체가 틀린 것임을 증명해야 한다.”

모두 알로이시우스 수녀에게 해당할 만한 말이지만, 사실 우리 모두 자유롭기 힘든 말이기도 하다. 우리사회가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한다고 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언젠가부터 이념 자체의 논쟁은 보이지 않는다. 
 

 

이념을 주장하는 ‘사람’과 ‘메신저’의 도덕성과 시시콜콜한 가십거리에 불과한 이야기들을 둘러싼 사생결단식의 갑론을박만 가득하다. ‘보수’와 ‘진보’가 정권을 놓고 싸우기는 싸워야겠는데 보수의 핵심가치인 ‘자유와 성장’이나, 진보의 핵심가치인 ‘평등과 분배’의 메시지를 논리적으로 비판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보니 서로 상대의 ‘메시지’ 대신 상대의 ‘메신저’를 두들겨 패고 욕설을 퍼붓는 모양이다. 18세기 프랑스에서 평생을 ‘광신과 배타성’에 맞서 싸웠던 사상가 볼테르(Voltaire)는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말문이 막히면 욕을 하기 시작한다”고 한숨을 쉰다. 그래서 그런가. ‘자유와 성장’도 놓치고 ‘평등과 분배’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딱한 모습이 반복되는 듯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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