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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브이 포 벤데타 (14)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주인공 V는 영국 형사재판소 폭파로 슈틀러 정권에 정식으로 선전 포고하고, 곧바로 정권 핵심 인사들을 처형한다. 슈틀러 정권의 나팔수 프로테로를 그의 저택 욕실에서 처형하고, 소아성애에 탐닉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릴리만 주교를 처단한다. 

 

 

프로테로와 릴리만 주교는 “단결을 통한 힘, 믿음을 통한 단결(Power through Unity, Unity through Faith)”이라는 구호를 내건 슈틀러 정권의 핵심권력자들이다. 프로테로는 선전선동을 통한 ‘단결’의 핵심이고, 릴리만 주교는 정권구호에 등장하는 ‘믿음(faith)’의 중심축이다. 정권의 ‘단결 호소인’과 ‘믿음 호소인’인 셈이다.

이들은 신을 믿는 것처럼 슈틀러를 믿음으로써 대동단결해 강력한 국가를 유지하자고 한다. 그런데 프로테로는 수용소 생체실험의 총감독 출신이고, 릴리만 주교는 생체실험의 참담한 현장을 시찰하고 돌아와선 소아성애에 탐닉하는 인간이다. 악마의 탈을 쓴 인간들이다. 악마의 탈을 쓴 인간들이 떠받치고 있는 정권이라면 그 정권도 악마의 탈을 쓴 정권일 수밖에 없겠다.

V는 소아성애의 현장을 급습해 릴리만 주교를 처단하면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차드 3세」의 유명한 대사 한 구절을 읊는다. “나는 성스러운 말씀들의 부스러기를 훔쳐 나의 벌거벗은 사악함을 감추노라. 그리하여 악마의 짓을 하면서도 성자로 보이노라(And thus I clothe my naked villainy / With old odd ends stolen forth form holy writ. / And seem a saint when most I play the devil.)”

15세기 동시대를 살았던 영국의 리차드 3세와 조선의 세조(수양대군)는 기이하게도 닮았다. 세조는 형의 신하들과 형의 어린 아들 단종까지 도륙하고 왕위에 올랐다. 리차드 3세도 형과 조카를 차례로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인물로 영국사에서 ‘악의 화신’처럼 여겨진다. 한국의 역사소설가 박종화가 수양대군의 끔찍한 왕위찬탈을 「대수양」이라는 문학작품으로 남겼듯,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리차드 3세를 「리차드 3세」라는 문학으로 남겼다.
 

 

‘악의 화신’ 리차드 3세는 형과 조카를 죽인 자신의 사악함을 성경에 나오는 성스럽고 거룩한 말씀들을 모조리 끌어들여 ‘신의 뜻’으로 포장한다. 셰익스피어는 리차드 3세가 그런 자신의 모습을 자조(自嘲)하는 것으로 그린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 으레 ‘거룩하고 성스러운 말씀’들을 구호로 내세운다. ‘정의사회 구현’도 있었고,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란 말도 있었고, 아마 지금은 ‘자유, 공정, 상식’쯤 되는 것 같다.

하나같이 신의 말씀처럼 거룩하고 성스러운데 왠지 공허하고 몸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셰익스피어가 그린 리차드 3세의 자조처럼 모두 자신들의 사악함을 감추기 위해 긁어모은 성스러운 말씀들의 부스러기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대통령의 해외순방을 둘러싼 수군거림이 급기야 ‘국익’ 논쟁으로 비화했다. 대통령의 ‘말실수’를 보도한 언론사는 국익을 훼손하고 국민을 위험에 빠트렸다는 공격을 받고 고발당한다. ‘국익(national interest)’ 역시 아무도 부정하기 어려운 ‘성스러운 말씀(holy writ)’이다. 또한 자유나 정의, 그리고 공정처럼 성자로 둔갑하기에 좋은 말씀이다.

‘국익’이나 ‘국가안보’의 이름으로 권력자는 절대적인 ‘까방권’을 부여받는다. 여왕벌을 지키듯이 대통령을 결사옹위하는 것이 국익수호나 국가안전과 직결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짐이 곧 국가(L'Etat, c'est moi)’라는 루이 14세의 시대라면 혹시 모르겠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국익’을 절대화하지 않았다. 아무리 국익이라도 양심에 기반을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대통령으로서 해야 하는 일들이 나의 양심에 위배되거나 국익을 해치게 되는 일이라면 나의 직책을 버릴 것이다. 또한 양심적인 모든 공직자들도 그러하기를 희망한다.”
 

 

그렇다면 마지막 문제가 남는다. 국익을 위하는 일이지만 그것이 양심에 거슬리는 일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국익을 택할 것인가, 양심을 택할 것인가. 그 해답은 아마도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에게서 구해야 할 듯하다.

키신저는 닉슨 대통령을 ‘모시고’ 추악한 전쟁으로 기록된 베트남 전쟁을 극한까지 몰아갔던 인물이다. 키신저는 회고록에 다음과 같은 회한의 말을 남겼다. “베트남 전쟁은 우리들로 하여금 추상적인 원칙들보다는 국익을 강조하도록 했다. 국익을 위해서 닉슨 대통령과 내가 한 일들은 양심에 어긋난 일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국익도 지키지 못했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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