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제주에는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생성된 독특한 문화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세대가 바뀌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독특한 문화와 함께 제주의 정체성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고 불안합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후진적이고 변방의 문화에 불과하다며 천대받았던 제주문화.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속에서 피폐해진 정신을 치유하고 환경과 더불어 공존하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제주문화가 재조명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라는 우리말은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란 뜻 외에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 또는 '하다가 그친 것을 계속해서'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제주문화를 돌아보고 새롭게 계승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연합뉴스는 이번 기획 연재를 통해 제주문화가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계승해 나갈 방법을 고민합니다.]
과거 제주는 유배의 섬이었다.
죄질에 따라 유배길의 거리가 달랐던 만큼 제주는 중죄인만이 가는 '창살 없는 감옥'이자 '피하고 싶은 변방'이었다
임금도 신하도 피해갈 수 없었던 제주 유배.
하지만 오늘날 제주 유배문화는 유배인들의 발자취를 통해 그들의 학문적 성취와 고뇌, 깨달음을 엿볼 수 있는 문화·관광 자원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 광해 떠난 날 가뭄에도 비가 오더라
"임금이 덕을 쌓지 않으면 주중적국(舟中敵國)이란 사기(史記)의 글을 아시죠!"
병자호란이 끝나던 해인 1637년(인조 15년) 음력 6월 6일.
제주 동쪽의 작은 마을 어등포(제주시 구좌읍 행원포구 인근으로 추정)에 제주목사 성하종의 꾸짖는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친 바다를 건너 간신히 제주 섬에 첫발을 디딘 광해군은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강화도 교동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갑자기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른 채 도착한 곳이 제주였다.
'군주가 덕을 쌓지 않으면 자기편일지라도 모두 곧 적이 될 수 있다'는 주중적국이란 말의 뜻대로 주변에 광해군의 신하는 없고 사방이 출렁이는 바다뿐이었다.
강화도로 유배를 떠날 때는 아내와 아들·며느리와 함께였지만, 그들을 모두 잃고 홀로 남은 광해군이었다.
조선의 남쪽 끝 제주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을 짐작했을 것이다.
광해군은 이튿날 제주읍성 안으로 옮겨져 위리안치됐다.
죄인의 집 둘레에 가시투성이인 탱자나무를 심어 가두는 위리안치는 중죄인임을 알리는 일종의 상징적인 조치였다.
기후도, 음식도, 사람도 모든 것이 낯선 제주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그리고 4년 뒤인 1641년 음력 7월 1일 광해군은 67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광해군은 조선의 왕 중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왕이자 제주에 유배 온 유일한 왕이다.
후궁의 몸에서 서자로 태어나 일국의 왕이 됐다가 인조반정으로 한순간에 죄인의 몸이 됐다.
'승자의 기록'인 역사는 광해군을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현대에 들어 명청 교체기에 실리외교를 펼쳐 전쟁을 막은 '개혁 군주'로 재조명되고 있다.
제주에는 광해군이 세상을 뜬 날이면 가물다가도 비가 내렸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온다.
일명 '광해우'(光海雨)다.
제주 사람들은 삼복더위를 잠시 식혀주는 비가 고맙기도 했겠지만 죽은 왕을 떠올리며 노래를 지어 불렀다.
'칠월이라 초하룻날은, 임금대왕 관하신 날이여, 가물당도 비 오람서라(가물다가도 비가 오고 있더라). 이여∼ 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