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12년 8월 28일 제주성(濟州城)에 오래된 건물터가 발굴됐다.
제주고고학연구소가 제주성 동쪽 치성(雉城, 성 바깥으로 네모나게 돌출시켜 쌓은 성곽) 상부에서 문화재 시굴·발굴 조사 과정에 '凸'자형 기단석렬과 초석 6기를 확인한 것이다.
이 건물터는 고증을 거쳐 김상헌의 '남사록'(1601년)과 이원조의 '탐라지초본'(1841년) 등에 기록된 제이각(制夷閣)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제이각은 외적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제주성 동쪽 성곽 위에 세운 누각이다.
지형이 가파르고 험한 낭떠러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제이각에서 장수가 제주성을 내려다보면 성안은 물론 주변의 언덕과 하천, 해안까지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임진왜란 직후인 1599년(선조 32년) 제주 목사로 부임한 성윤문(成允文)이 제주성을 보강하는 과정에서 건립했다.
건물터가 발견된 지 3년여만인 지난 2015년 12월 복원됐지만, 이것이 1990년대부터 이어진 제주성 성곽 복원의 마지막 사업이었다.
과거 오랜 시간 증축과 개축이 이뤄진 제주성은 그 둘레가 3.2㎞에 달했다.
현재 문화재로 지정돼 복원된 부분은 원형의 10%에도 못 미치는 195m에 불과하다.
제주성은 왜 우리 곁에 온전히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일제강점기 경제적 수탈과 민족 말살 정책이라는 일관된 식민정책 탓이다.
제주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는 기록상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조선 태종실록(태종 8·11년, 1408·1411년)과 동국여지승람(성종 12년·1481)의 기록을 토대로 탐라국(耽羅國)시대에 축성돼 그 명맥을 이어왔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주의 젖줄 산지천 일대 정치·사회·경제·문화의 중심지인 조선시대 제주목(濟州牧) 관아와 민가를 보호하는 읍성으로서 기능을 했다.
제주성은 3문(동문·서문·남문), 2수구문(남수구·북수구), 간성 2문(소민문·중인문)을 축으로 제주 중심부를 에워싸며 연결됐다.
애초 탐라국 시대 제주성에는 3문만 있었으나 선인들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마을을 더 안전하게 보호하고, 마실 물인 산지천을 성안으로 들이기 위해 성곽의 둘레와 규모를 확장했다.
이때 남북으로 흐르는 산지천을 사이에 두고 서안과 동안을 연결하는 수구문이 새로 축조됐고 이어 산지천 범람으로 인한 홍수 예방을 위해 간성 2문이 만들어졌다.
제주성 초기 1㎞ 남짓하던 규모는 증·개축을 거듭해 3.2㎞까지 늘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던 제주성은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뒤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속절없이 헐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