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지방에서 호랑가시나무는 햇빛이 잘 들고 토심이 깊어 양분이 풍부한 비옥한 토지에서 잘 자란다. 이에 비하여 제주도의 호랑가시나무는 튼튼한 암반 사이로 뿌리를 내리면서 강한 생명력으로 어떠한 폭풍이나 눈보라가 치더라도 견디어 내면서 자란다.
제주도의 암반은 시멘트 콘크리트 바닥이나 다름이 없다. 흙 한줌도 보기 힘들고 양분도 없는 커다란 돌 덩어리 위에서 금방 흘러 내려 한 모금 남는 빗물에 의지하면서 자라나는 이 나무는 조상들의 강인함을 이어받은 듯하다.
그런데도 겨울에 하얀 눈이 쌓여 내려앉을 때에는 항상 빛나는 푸른 잎과 속이 알찬 빨간 열매는 도드라진다. 찬바람이 불 때에는 새들에게는 피난처가 되기도 하고, 늦은 가을에 맺는 빨간 열매는 겨울을 견디고 이듬해 봄날까지 버티면서 새들에게 먹이가 되기도 하지만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다.
나뭇잎의 가시가 호랑이 발톱과 같이 억세다고 하여 붙여진 '호랑가시나무'라고 이름과 '가정의 행복'이라는 꽃말을 가진 이 나무는 자신은 한 톨의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면서도 빨간 열매를 알차게 키워낸다. 자신을 희생하며 가정의 행복을 지켜낸 이 땅의 어머니들처럼 억척스럽다.
2월 중순이 지나면서 빨간 열매가 보이질 않아 사진을 찍으려 나무 속을 뒤졌으나 허탕을 쳤다. 이미 많은 새들에게 충분한 양식으로 제공되었을 것이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는 봄이 오는 소리처럼 경쾌하다. 이 열매로 지난 겨울을 건강하게 이겨 냈으니 그걸로 만족해야 할 듯 하다.
이 나무의 영어식 이름은 '성스러움(holy)'이다. 미국의 할리우드(Hollywood; 성스러운 나무라는 뜻)는 이 나무가 많이 발견되어 그 이름을 따서 붙여진 도시이다.
호랑가시나무 잎의 가시는 예수의 가시관을 상징하고, 빨간 열매는 이 때 흘린 핏방울을 상징한다고 한다. '로빈'이라는 작은 새 한마리가 가시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머리에서 가시를 뽑아내다가 자신도 가시에 찔려 죽게 되었다 한다.
이 새는 호랑가시나무 열매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이후부터 서양에서는 이 나무를 성스럽게 여기고,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하기 위한 장식품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밭 구석에 있는 나무를 살펴보는 사이에 한 농부가 찾아와 말을 건넸다. 이 나무의 짙은 그늘 때문에 농사가 약간은 지장이 있을 듯 하다.
“농사에 불편해서 잘라버릴까 하다가 내부런 마씨.” 라는 말에 잘은 모르지만 아는 척 대답을 해 주었다.
“잘 했수다 이 나무는 한 겨울에 아무런 먹잇감이 없을 때 새들에게 먹이를 제공하고 눈보라와 찬바람을 막아주는 안식처우다.”
농부들에게는 농사지을 땅 한 평이 아쉬울텐데도 조상 대대로 경작해 온 땅에서 자라는 이 나무를 무심코 베어내지 않고 오랜 기간을 같이 숨 쉬어 왔다. 순박한 농부에게는 이 나무가 아마도 성스럽게 보였거나 아니면 어머니 모습 같기도 하여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훨씬 넓어지는 듯하다.
이미 수확기가 지나간 양배추들이 밭에 그냥 남아있어 물어봤다.
“이 양배추들은 팔지 못 허연 그냥 내부렀수가?”
“일손도 모자라고 예.....가격도 안맞고 예......그냥 갈아 엎으젠 햄수다.”
항상 겪는 일이라서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지만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 시간에도 다른 나무들은 깊은 겨울잠을 자면서 봄을 꿈꾸고 있다. 그런데도 호랑가시나무는 잠들지 않고 거친 눈보라와 차가운 북풍에도 잎새 하나 흔들리지도 않는다.
어떤 시인은 말하기를 이 나무가 새들에게 "당신을 지켜 줄께요!"라고 약속하고 한결 같이 지킨다고 한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몰아치는 눈보라와 꽃샘 추위를 막아주면서 새들에게 편안한 만찬을 꼬박고박 챙겨준 이 나무는 포근한 어머니의 품같이 따뜻하다.
살다가 돌아보니 수많은 약속을 지키지도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호랑가시나무만큼도 못한 인생을 살았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조시중은? = 제주특별자치도의 사무관으로 장기간 근무하다가 은퇴하였다. 근무 기간 중 KDI 국제정책대학원에서 정책학 석사, 미국 캘리포니아주 웨스턴 로-스쿨에서 법학 석사, 제주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는 제이누리 논설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