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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욱의 [제주역사나들이](57) ... 14차 성읍리 탐방코스 (1)

 

"성읍리는 세종 5년 (1423)년에 정의현의 읍치(邑治)를 성산읍 고성에서 지금의 자리(예전의 진사리) 옮겨와 형성된 마을입니다. 복원된 대정현성과 제주특유의 초가로 이루어진 유명관광지이며 제주의 역사와 정취가 잘 묻어나 있는 곳입니다."

 

■정의현성(정의읍성)

 

 

정의현성(정의읍성)은 태종 16년(1416년) 제주를 1목 2현(제주목, 정의현,대정현)을 둘 때 지금의 성산읍 고성리에 축성한 읍성(옛 정의현성)을 7년만에 이곳으로 옮겨와 축성한 읍성이다. 그 후 1914년까지 약 500년간 정의현의 읍치(邑治)로서 그 기능을 하였다.

 

 

1984년 국가중요 민속자료 188호로 지정된 이후 성곽등의 보수 및 복원작업을 진행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성안에는 성읍민속마을이 들어서 있으며 읍성의 규모는 동서 약350m, 남북300m, 둘레 약 1200m이다.(※읍치-조선시대 지방 고을의 중심 공간)

 

 

1914년 지적도에 의하면 당시 치성을 포함한 성곽의 형태가 뚜렷이 나타나며, 동서남문의 위치와 성굽길, 옹성의 형태도 잘 보이고 있다. 또한 성 주변으로 해자가 있었으며 해자를 따라 난 해자길(필자가 임의로 명명한 이름)이 성곽 바깥을 감싸고 있다. 이 해자길은 지금도 도로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예전 성의 구조가 이렇게 온전히 남아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로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제주읍과 마찬가지로 이 길이 어떤 의미였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는 듯 하다. 성을 쌓고 성 외곽에 해자를 두었는데 제주에선 물을 채우는 대신 탱자나무와 같이 가시가 돋은 나무들로 둘러놓아 적의 접근을 어렵게 하는 것이 축성의 기본 구조이다.

 

 

문헌으로 성안에 두곳의 빗물을 가두는 우물이 있었다는데 위의 지적도 상에 연못(池)으로 표기된 곳이 두군데 보인다. 정의객사터 앞에 있는 못은 현재도 남아 있지만 성읍교회 앞에 있던 못은 지금은 매립되어 흔적을 찾을 길 없다.

 

 

 

일제는 성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신작로를 개설했고 이로 인해 정희현성내 북측에 위치했던 관청터가 관통되어 동서로 분리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94년 남제주군(현 서귀포시)에서 작성한 성읍민속마을 정비계획에 보면 예전의 성안 옛길과 주요 시설, 가옥등이 표기 되어 있다. 옛길은 1914년 지적도와는 조금 상이한 점은 있지만 관청의 자리는 잘 표기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제는 신작로를 내면서 의도적으로 관청자리를 관통시켰음을 짐작케 한다. 민족정기를 말살시키려는 일제의 치밀한 계획일 것이다. 아프지만 잊지 말아야할 우리의 역사이다.

 

□ 정의현성의 복원

 

 

 

 

현재 복원된 정의현성에 옛 지적도상 성곽자리를 입혀보았다. 현재 북동측의 치성 (윗 그림의 빨간원) 2군데가 제대로 복원되어 있지 않았다. 아쉽게도 앞서 언급한 남제주군의 성읍민속마을 정비계획의 가로체계 도면에도 북동측의 치성은 표기 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이 정비계획에 의해 성의 복원작업이 이루어진 듯 한데, 아쉬운 부분이다. 지금이라도 가급적 원형에 맞게 치성의 복원을 제안해본다. 

 

 

탐라순력도의 정의강사, 정의조점, 정의양노를 보면 남문에는 옹성이 그려져 있지 않다. 동서문에만 표현되어 있을 뿐이다. 1914년 지적도에도 동서문에만 옹성의 흔적이 보일 뿐 남문에는 지적상 옹성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필자기 판단하기엔 예전에는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남문에 옹성이 없었다는게 확실해 보인다. 그렇다면 지금의 웅장한 옹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문화재 복원의 기준이 무엇인지 문외한이라 잘 모르지만 필자의 눈에는 남문의 옹성이 거추장스런 악세사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자주 언급하는 말이지만 가급적 더함도 덜함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복원이 맞다고 본다. 정작 성곽 상단의 여장은 제대로 복원하지 않으면서 이럴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과하면 부족함보다 못한다고 했다. 괜한 시비거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니 오해 않기를 바란다.

 

 

 

정의조점과 정의양노 정의강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또 한가지 사실을 볼 수 있다. 동문과 서문의 지붕을 보면 여느 민가와 마찬가지로 노란색을 입혀놓았고, 남문에는 짙은 회색으로 현청 건물들과 같이 기와를 표현하였다. 즉 동문과 서문의 지붕은 초가지붕이고 남문은 기와 지붕이라는 의미이다. 

 

 

동문 서문 모두 기와지붕의 멋들어진 누각이 서 있다. 예전의 초가지붕을 대신해서.

 

■남문

 

 

정의현성 탐방은 남문에서 시작한다.

 

 

 

제주도내 유명관광지라 평일에도 꽤많은 방문객들이 보인다. 그 중 한무리 외국인들이 눈에 띈다. 가이드가 영어로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가이드도 동남아계 외국인이다. 제주관광 가이드를 외국인이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런데 웬지모를 아쉬움이 드는 이유는 뭘까. 그냥 그렇다는거다.

 

 

안내판에는 성의 규모를 동서 160m, 남북 140m로 표기해 놓았다. 규모가 이상해서 지도에서 거리를 확인해보니 동서 약 350m, 남북 약 300m가 나온다. 안내판이 잘못 되어있다. 근민헌 앞의 안내판도 마찬가지이다. 그동안 아무도 몰랐나보다. 수정이 필요하다.

 

 

 

제주읍성,대정읍성과 마찬가지로 성문 밖 입구에 돌하르방을 세워 놓았다. 다만 돌하르방의 형태와 크기, 숫자가 성마다 다르다. 정의현성에는 문마다 4기의 돌하르방이 서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승욱은?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오현고를 나와 서울대 공대 건축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육군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삼성물산 주택부문에서 일했다. 경영위치 건축사사무소에서 건축공부를 더 한 뒤 에이스케이 건축 대표이사를 거쳐 제주로 귀향, 현재 본향건축 대표를 맡고 있다. 제주대 건축공학과에서 건축시공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주말이면 고향 제주의 벗들과 제주의 역사공부를 곁들여 돌담·밭담·자연의 숨결을 더듬고자 ‘역사나들이’ 기행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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