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절. 그냥 가족들 손을 잡고 산으로 바다로 이리저리 다니다가 가족들은 죽임을 당했다. 게다가 인생은 엉망진창이 됐다. 고아로, 거지로 살다가 어렵게 장사도 했지만 모두 거덜 났다. 연좌제로 인해 취직도 못하고 자식들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
어렵게 수습한 가족의 유골은 확인도 못하고 그냥 바다에 뿌려졌다. 그래도 보기 좋고 묘소를 꾸미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게 한이다.
다랑쉬굴에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그 유해조차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이들의 한이 지금도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28일 오후 제주문예회관 소극장. 어두컴컴한 무대에서 한줄기 빛 아래 주름이 가득한 얼굴의 두 노인이 차례로 앉아 나지막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하고 있다.
㈔제주4·3연구소가 주최한 4·3증언 본풀이마당 열한 번째 이야기 ‘그때 말 다 하지 못해수다’가 진행됐다.
이날 첫 번째로 자리에 앉은 고광치(72)씨. 그는 지금 경기도 성남시에 살고 있다. 그는 어렸을 적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부모님, 친척들이 모두 같이 정답게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4·3사건을 겪었다. 당시 나이 8살이었다. 가족들이 경찰에 끌려가는 것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며칠을 지내다가 식량이 떨어져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를 남겨두고 가족들은 먼저 마을로 내려왔다. 하지만 집으로 갈 수 없었다. 마을 근처 해변가에 땅을 파서 토굴을 짓고 살았다. 동생의 기저귀를 밖에 널었고, 아기였던 동생의 울음소리에 발각돼 경찰들에게 체포됐다.
세화지서로 끌려가던 중 동생과 자신은 경찰의 발길에 채여 기절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동생밖에 없었다. 나중에 마을분들에게 들어 알게 됐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길가에서 사살됐고, 시신은 마을 주민들이 수습해 마을 주변에 봉분 1개로 합장해 모셨다는 것. 어머니는 막내삼촌과 세화지서로 끌려갔다가 이듬해 1월 세화초등학교 근처에서 다른 주민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14살이었던 막내삼촌은 충청도 출신의 경찰이 양아들로 삼아 나중에 충청도로 데려갔다.
다랑쉬굴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르지만 나중에 언론보도를 통해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다랑쉬굴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남겨진 동생과 함께 같은 마을에 사는 외할머니를 찾아갔지만 외할머니도 삶의 의욕을 잃은 상태. 고모님댁에 맡겨졌지만 한 달 만에 다시 외할머니댁으로 쫓겨났다. 동생은 먼 친족집에 전답과 함께 맡겨졌다.
‘폭도새끼’, ‘빨갱이새끼’라는 말을 들으면서 더 이상 마을에서 살 수가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피난민들을 따라 무작정 부산으로 갔다. 하지만 의지할 사람도, 의지할 곳도 없었다. 다시 살길을 찾아 서울로 갔다. 전쟁고아로 가득한 서울역 주변에서 굶기도 하고, 쓰레기통을 뒤지고, 동냥을 하면서 겨우 연명했다. 14살 때였다.
그래도 세월은 흘렀다. 20살이 되면서 고향 땅을 팔아 장사를 했지만 얼마 못갔다. 강원도로 가서 원양어선을 타려 했지만, 연좌제에 걸려 타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철강업소에 다니게 됐고, 결혼도 해서 자식들도 낳았다.
다시 성남으로 돌아와 택시운전을 하면서 이혼과 재혼을 하면서 살았다. 연좌제 때문에 취직도 제대로 못해 자식들을 가르치기 힘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원망을 많이 듣는다.
1992년에 다랑쉬굴에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언론보도를 접했다. 각지에 있던 유족들이 제주에 도착해 수습에 대한 논의를 했고 봉분 1개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4.3을 왜곡하는 세력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 등이 제기돼 화장해 바다에 뿌리기로 했다.
하지만 차마 봉분을 만드는 걸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해를 바다에 뿌릴 때 조금만 담아서 봉분을 만들려고 했다. 유해를 수습하던 날 현장에 도착하자 나온 유해들은 이미 천으로 덮여 있었다. 누구의 유해라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유해는 곧바로 화장터로 갔고, 큰절 한번 올리고는 곧바로 화장됐다. 그리고 바다로 갔다.
유골이 뿌려지기 전 조금이라도 담아갈 생각에 빈 성냥갑을 준비했다. 그러나 막상 유골이 뿌려지기 시작하자 조금만 넣어가겠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유족들이 울고불고 슬퍼하는 상황에서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든 게 순식간에 이뤄졌다. 그때 봉분을 만들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된다. 이젠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이어 고종환(65)씨가 자리에 앉았다. 그는 지금 울산시 동구에 살고 있다. 그는 4·3사건이 일어 난지 8일 뒤에 태어났다.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는 갓난아기였다.
그 역시 구좌읍 종달리가 고향이다. 기억하는 4·3은 할머니로부터, 동네에 살고 있던 아버지 친구들로부터 들은 얘기가 전부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도피생활 한 것 때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14일 전 희생됐다. 어머니가 경찰차에 실려 가던 날 경찰이 아기는 필요없다며 어머니 품에서 날 차 밖으로 던져버렸다. 할머니가 주워다 날 키웠다. 같이 갔으면 나도 죽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집안의 대를 끊을 수 없다며 숨기려다보니 낮에는 돼지움막에 들어가서 숨어살다가 밤에는 나와서 살았다. 그러다가 차 소리만 나면 또 돼지움막으로 들어가 숨어야 했다. 공부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런 할머니가 13살 되던 해 돌아가셨다. 큰어머니와 같이 살다가 27살 때 결혼해 울산으로 올라가 살았다.
고향에 있던 6촌형이 아버지의 유해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제주로 내려와 직접 유해를 발굴했다. 그러나 유해를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하는 과정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제주로 내려왔을 때에는 이미 화장하는 것이 결정된 후였다.”
처참한 현대사를 살아가야 했던 그들의 가슴 아픈 통곡의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