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를 만난 건 어쩌면 나의 운명 같은 것이었다.”
무려 12년의 작업 끝에 만화 <조선왕조실록> 작업을 마친 그는 탈진 직전이었다. 2013년이었다. 무엇보다 그 지난했던 작업을 끝낸 건 다행이었다. 그때 심정을 물었을 때 그는 “흔히들 오랜 작업이 끝나면 시원섭섭하다고들 하지만 난 시원하기만 했다”고 말한다.
사실 무리한 시도였다. 단행본 작업 경험이 없는 사람이 처음부터 20권짜리 시리즈를 기획한 것 자체가 무모한 것이었다. 하지만 ‘무식하면 용감해진다’는 말이 시사하듯 앞뒤 재지 않는 열정과 무모함이 때론 대형사고(?)를 치는 게 세상사다. 책은 이후 300만부 이상이 팔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애장품이란 소식도 널리 알려졌다.
박시백 화백(54).
그는 그 무모한 작업을 해냈다. 피곤했지만 무모한 만큼이나 성과도 컸다. 덕분에 늘 품어왔던 소박한 꿈도 이룰 수 있게 됐다. 그의 꿈은 ‘만화가로 밥벌이를 하자’였다. 아내와 두 딸과 함께하는 서울 생활도 안정이 됐다.
그가 세상에 내놓은 20권 책은 방대하다.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은 국역된 분량만 따지면 320쪽짜리 책 413권에 해당한다. 그는 그 방대한 양을 온몸으로 그렸다. 잘못 알려진 부분을 철저히 고증하면서 역사가들이 하지 못한 그 일에 청춘을 쏟아부은 것이다. 만화가의 운명을 걸고.
가끔은 그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는 어릴 적 모습으로 환하게 웃는다. 이제는 화백이라는 호칭이 낯설지가 않을 정도로 그는 제법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서도 그렇다.
‘성공’이라는 단어에 그는 쑥스러워하지만 그의 성공비결이 궁금해졌다. 흔히 성공의 밑바닥엔 남과 다른 1%가 있다고들 한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1%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미 몸속 깊은 곳에 녹아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 사람의 내밀한 삶을 엿보게 된다. 긴 여정의 지난 서사에 담긴 치열함이 무엇인지 찾아보기 위해서다. 최강 한파와 폭설이 두 번이나 몰아친 제주의 겨울 한복판에서 그의 지난 얘기를 물어봤다. 조선왕조실록에 이은 5년 만의 신간 <35년> 소식도 함께 전했다.
박시백 화백은 옛 북제주군 한림읍 금악리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금악국민(초등)학교와 한림중을 다녔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는 밭에서 보리, 고구마를 억척스럽게 경작하며 자식들을 키웠던 어머니의 사랑과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 덕에 그는 제주시내로 유학해 오현고에서 수학했고 1984년엔 고려대 경제학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의 대학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그가 마주한 시대는 전두환 군부정권의 서슬 퍼런 칼날이 학원가를 유린하고 있을 때였다. 선배들이 경찰들에게 수없이 구타당하며 끌려갔고 분노의 함성은 참혹했던 시대의 잿빛 하늘에 서럽도록 울려퍼졌다. 최루탄이 무수히 난사돼 포물선을 그리며 고려대 캠퍼스를 연일 덮칠 때 그는 어느덧 그 현장을 지키는 투사가 되어 있었다.
깡촌 소년이 투사로 변신한 결과는 혹독했다. 그는 두 차례나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렇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당시 그가 다니던 고대는 85~87년 학생운동이 중심이었다. 전국 대학생운동조직인 전대협 1기 의장이었던 이인영 의원은 그의 동기다. 또 2기 의장 오영식 전 의원과 백원우 청와대 비서관은 그의 1년 후배다.
그랬다. 그는 87년 6월항쟁을 이끌었던 386(지금은 586이라 부르지만) 운동권 출신이다. 영화 <1987>에 나오는 박종철.이한열 열사와 함께 그 시대를 살았다. 학교는 달랐지만 박종철은 그의 동기이고 이한열은 2년 후배다.
박 화백은 이젠 그 시절을 아득하게 기억할 뿐이라고 한다. 결코 잊을 수 없을 테지만 아마도 그 이후의 삶이 더욱 치열했고 또 고단했다는 얘기로 들렸다.
어렵사리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그의 고민이 깊어졌다. 현실이 녹록지 않아서다. 깡촌 시절 때부터 가슴 깊은 곳에 품어온 그의 꿈은 지극히 소박한 것이었다. “만화가로 평생 살면서 밥벌이 하자”는 것이었다. 만화가 그를 떠나지 않았고, 또 그가 만화를 온몸으로 붙잡고 있었다.학생운동을 같이 했던 동기나 선후배들이 정계, 사회운동, 언론계로 진출하거나 직장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을 때 그는 꽤 많은 시간 방황했다고 한다. 생활인으로서의 경제적인 문제도 큰 걱정거리였다.
그러던 중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그 기회가 자신의 차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1996년 한겨레신문에서 박재동 화백의 후임자를 공모했다. 제대로 된 만화 교육을 받지 못한 그가 쟁쟁한 실력을 갖춘 수많은 경쟁자들을 뿌리치고 박재동 화백의 낙점을 받게 된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4차례에 걸친 엄격한 심사 끝에 박재동 화백은 최종적으로 그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촌철살인의 언어와 기상천외한 발상으로 국민들을 열광케 했던 풍자의 ‘아이콘’ 박재동 화백의 후임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왜 박재동 화백이 자신을 선택했는 것 같냐”고 묻자 그는 “발전가능성을 보고서 그랬다고 박재동 화백께서 말해주었다”고 했다. 그 가능성을 그는 몸으로 증명해야 했다. 박재동 화백의 아류(亞流)가 아닌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했다. 그가 택한 것은 ‘이야기’이고 ‘내러티브(narrative)‘였다. 한겨레신문에서 1컷(cut) 짜리 만평을 1년간 연재하다 방향을 바꾸었다. 만화가 갖고 있는 ’단순함의 미학‘에 서사를 덧붙이는 시도였다. 그는 그렇게 ’박시백의 그림세상‘을 통해 따뜻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사만평을 4년간 연재하며 자신만의 색을 입혀갔다.
그는 4년 동안의 연재가 큰 자산이 되었다고 술회한다. “치열한 훈련과정이었고 그 덕분에 긴 호흡의 만화를 그릴 수 있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의 그를 있게 한 대작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 2013년에 완간됐다. 총 20권짜리다. 12년의 ‘대장정’이 마무리된 것이다. 장대한 역사를 만화에 녹인 이 책에 독자들은 열광적인 환호로 화답했다. 그리하여 300만부가 넘는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탄생했다.
긴 여정의 종착역에 다다랐을 그가 겪였던 그간의 시간들이 얼마나 혹독하고 고단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게 있었다. 바로 그가 직접 손으로 쓴 100여권의 노트였다. 거기엔 400권이 넘는 분량의 ‘조선왕조실록(CD) 국역본’ 전 내용을 빼곡이 기록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외롭고 긴 투쟁의 상처이기도 했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봤던 1년 선배 양영수(54)씨는 “(박 화백)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분명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균형감이 돋보였다”면서 “정사(正史)를 만화로 엮어내 독보적인 분야를 개척한 것이 너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의 여정과 신간 소식을 담은 ‘인터뷰 전문’을 싣는다.
▲ 새해 초에 신간 <35년>이 나왔다고 들었다. 간단히 소개해 달라.
“이번 책은 제목 그대로 일제강점기 35년사를 다룬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이 마무리된 시점인 1910년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진 기획이기도 하다. 일제강점사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다는 것이 계기가 됐다. 책을 준비하면서 35년의 역사가 부끄러운 식민지사만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수많은 애국자들이 끝없이 치열하게 싸운 자랑스런 민족해방투쟁사이기도 한 것을 새삼 확인했다. 그 수많은 애국자들을 모두 기억할 순 없겠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들의 정신과 투쟁을 기리고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3권이 나왔다. 1910년부터 1925년의 역사를 다룬 셈이다. 올해 말까지 2권을 낼 예정이고 내년 말까지 나머지 2권을 출간해 총 7권의 시리즈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 책을 세상에 내보내면서 독자들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역사를 그리다 보니 자연스레 사명감 같은 게 생겨났다. 후손으로서 역사를 안다는 것이 단순한 교양 차원이 아니라 선조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려운 시대에 일신의 안일이나 영화를 좇지 않고 시대의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분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 또 그로 인해 생명을 잃거나 고초를 겪은 분들을 후손인 우리가 기려줘야 그들의 삶이 가치있는 삶으로 남는 게 아니겠는가? 때문에 역사를 소개하는 나로서는 역사속 인물들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 그리하여 존경받아 마땅한 분들은 존경받도록 하고 비난받아 마땅한 이들은 비난받도록 하는 것이 도리라 생각한다.”
▲ 언제부터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또 어떤 계기로 역사물을 다루게 되었나?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다. 당시 제주 중산간에 살았기에 대도시에서 쉽게 보는 만화들을 제대로 구할 수는 없었다. 가끔씩 만화잡지가 동네에 돌면 이를 친구들과 함께 나누어보곤 했다. 그리고 이를 참고해서 혼자서 틈나는 대로 습작을 했다. 어릴 때부터의 꿈이 만화가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진로를 고민할 때도 ‘밥벌이로 만화가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한겨레신문에서 박재동 화백의 후임자 공모에 참여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운이 좋았다. 이후 한겨레신문사에서 5년간 시사만평을 연재했다. 이 과정에서 긴 호흡의 만화를 그려내는 엄청난 훈련을 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이디어가 고갈되어 간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여러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그때 내 눈에 조선의 역사가 들어왔다. 원래부터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은 편이었는데 당시 조선왕조실록이 국역되어 CD로 나온 걸 보고, 이걸 토대로 조선 정사를 구성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지금도 많이 팔리고 있다. 20권이나 되는 방대한 양인데 힘들진 않았나?
“이 일을 하기 위해 2001년 한겨레신문을 나왔다. 처음 하는 작업이라 시행착오도 많았다. 2003년 첫권이 나왔는데 부족한 점을 찾기 위해 박물관, 왕릉 등을 답사하면서 보완하고 또 수정하면서 그 다음 책들을 준비해갔다. 그 과정에서 실록 내용을 모두 노트에 필기했다. 그 결과 그 노트들이 100여권이 됐다. 처음에는 7~8년 정도면 완간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는데 계속 작업이 지연되면서 무척 힘이 들었다. 결국 20권을 완간하는 데 무려 12년이 걸렸다. 열정을 쏟아부은 책이 제법 많이 보람을 느꼈지만 마지막 권을 탈고하고 나서 든 느낌은 ‘시원하다’뿐이었다. 섭섭하지는 않았다. 이 책으로 부천만화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독자들에게 너무나 고마운 마음이 든다.”
▲ 제주 출신이다. 올해가 4.3 70주년이다. 제주를 보는 심정은?
“ 나 역시 중산간 출신이다 보니 4.3에 대해선 어릴 때부터 들은 얘기들이 많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한 후 책을 통해 상세히 알게 됐다. 아픔 많은 우리 현대사 중에서도 대표적인 사례다. 예전에 비해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실체적 진실이 상당히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아도 제주의 벗들이나 선배님들이 다음엔 4.3의 역사를 그려달란 얘기를 하신다.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아직까진 내 몫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예전에는 일년에 10번 정도는 제주를 방문해 누님과 친구, 선후배들을 만나 회포를 풀곤 했는데 최근 몇 년은 바빠서인지 많이 줄었다. 앞으로의 일을 예측할 순 없지만 고향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무척 즐거운 일이 될 것 같다. 새해에 고향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제이누리=권무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