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부터 시작된 제주국제공항 4·3희생자 유해발굴사업은 충격 그 자체였다. 활주로 바로 옆에서 뒤엉켜져 압착된 유해들이 수없이 발굴됐다. 4·3 유해들은 당시 무차별적인 학살을 입증하듯 60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공항 확장공사에 휘말려 부서진 유해들이 나타났다. 공항 내 유해 발굴은 1, 2차로 진행됐다. 2007년에 유해 127구, 2008년부터 2009년까지 261구를 찾아냈다. 결국 공항 안에서 유해 383구를 발굴한 것이다. 시신없는 희생자 5천명 추산 4·3희생자 유해 발굴사업은 반세기 넘게 풀지 못한 숙제였다. 4·3 당시 희생자 중에는 ‘시신 없는 희생자들’이 많다. 그 숫자가 무려 4천~5천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불법적인 군법회의에 의해 징역형을 선고받고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끌려갔다가 6‧25전쟁 발발 직후 군‧경에 의해 집단 처형돼 묻힌 장소조차 모르는가하면, 제주도내 곳곳에 암매장된 사례도 있다. 그 중 일부는 유족들의 노력에 의해 유해를 수습하고 안장된 일이 있다. 1956년 6년 만에 132구의 시신을 거두었지
“희생자 결정 처분 근거법규는 제주4‧3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유족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으로, 이들 이외 사람들의 이익은 보호대상이 아니다.” 지난해 11월 서울행정법원이 이승만 전 대통령 양자 이인수 씨 등이 제기한 ‘4‧3희생자 결정 무효확인 청구’를 각하하면서 판시한 내용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2010년 11월 헌법재판소는 보수세력이 제기한 ‘일부 4‧3희생자 결정 위헌 확인’ 헌법소원 심판을 각하했고, 대법원도 2010년 11월, 2012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4‧3희생자 무효 확인’ 행정소송을 기각 판결한 바 있다. 각하 또는 기각 이유가 앞의 판시 내용과 비슷했다. 재심의 신청은 희생자와 유족으로 제한 지난 2000년에 제정‧공포된 4‧3특별법에는 4‧3희생자 결정에 따른 재심의 조항을 제12조에 담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희생자 및 유족 결정 등에 관해 이의가 있는 사람은 위원회의 결정을 통지받은 날로부터 30일 이내에 위원회에 재심의를 신청할 수 있다.&rdq
심사기준 결정부터 힘겨루기 제주4‧3특별법에 정의된 ‘희생자’의 범위는 “4‧3사건으로 인하여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자, 후유장애가 남아 있는 자로서 4‧3위원회에서 심의‧결정된 자”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희생자 심의‧결정 기준은 명시돼 있지 않았다. 따라서 희생자 심사를 어떤 기본원칙으로 할 것인지, 희생자 범위에서 제외될 대상은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구체적인 심의‧결정 방법은 어떻게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국무총리 소속의 4‧3위원회는 2001년 10월 11일 희생자심사소위원회(위원장 박재승 변호사)를 출범시켰다. 이 심사소위에 닥친 첫 과제가 바로 심사기준을 정하는 일이었다. 막상 심사기준을 만들려고 하니, 가장 예민한 문제로 대두된 것이 ‘희생자 제외대상 범위’였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심사소위 위원들을 곤혹스럽게 한 것이 있었다. 바로 헌법재판소(헌재)가 예시한 ‘희생자 명예회복 제외기준’이었다. 헌재는 2001년 9월 27일 성우회 등이 제기한 4‧3특별법의 위헌심
4·13 총선에서 제주지역 3곳 지역구 못지 않게 비례대표 배출 여부도 관심이다. 제주에서 배출한 비례대표 국회의원은 2004년 민주노동당 현애자 의원과 2012년 더 민주당 장하나 의원 등 여성 2명이 이름을 올렸다. 당시 현 의원은 7번을 배정받아 국회의원 배지를, 장 의원은 전국을 도는 선거전을 펼쳐 청년비례대표로 의원 배지를 달았다. 장하나 의원은 이번 총선에선 서울 노원 갑 지역구에 출마했다. 이번 총선에선 과연 누가 '제주'의 이름을 걸고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할 지가 관심사다. 지역구 3석에 한 석을 더해 제주출신 의석수가 4석 이상으로 늘어나면 그만큼 제주의 정치적 위상도 높아진다. 이번 총선에서 제주지역에선 5명이 비례대표로 도전장을 냈다. 새누리당은 제주시 갑 선거구 예비후보로 등록했다가 컷오프(공천배제)된 장정애 예비후보와 김미혜 제주도당 부위원장, 한정효 여성전국위원이다, 모두 여성이다. 더불어민주당은 고희범 전 제주도당 위원장, 김영동 제주도당 사무처장이다. 이들 외에 제주출신으로 새누리당 양종수 전 육군사관학교장(서귀포시 대정읍 영락리), 더불어민주당 문명순 금융경제연구소 상임이사(제주시 용담동), 정의당 이영석 장애인
4·13총선 제주의 본선 대진표가 사실상 완성됐다. 여·야당이 14, 15일 여론조사 등의 경선으로 후보를 확정, 대결구도가 짜여졌다. 국민의당은 일찌감치 후보를 확정, 각 선거판마다 어떤 변수로 작동할 지 주목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선거관리위원회는 14일 밤, 13~14일 진행된 후보경선(ARS 투표)을 통해 제주시 갑 선거구에 3선 현역인 강창일(63) 의원, 제주시 을 선거구에 오영훈(47) 전 제주도의회 의원, 서귀포시 선거구에 위성곤(48) 전 제주도의회 의원을 공천했다. 새누리당도 여론조사 경선을 통해 제주시 갑 선거구에 양치석(58) 전 제주도 농축산식품국장, 제주시 을 선거구에 부상일(44) 변호사를 공천자로 확정했다. 서귀포시 선거구는 현재 강경필(52) 전 의정부 지검장과 강지용(63) 제주대 교수가 여론조사에서 경합중이다. 15일 결과가 나온다. 국민의당은 제주시 갑 선거구에 장성철(48) 전 제주도 정책기획관, 제주시 을 선거구에 오수용(53) 제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를 단수 공천했다. ◆ ‘야권 3인방’ 시대 ... 역사의 뒤안길로 = 여·야가 후보공천을 완료하자 제주정가
4‧3보고서 드디어 세상에 공개 2003년 12월, 우여곡절 끝에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됐다. 4‧3보고서의 최종본에는 수정된 보고서 본문과 고건 국무총리의 서문 이외에도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문이 실렸다. 또 미국 등에서 입수한 4‧3사건 관련사진, 4‧3사건 주요일지, 특별법 관련법령, 찾아보기, 위원회와 기획단 명단 등을 실었다. 그러다보니 4‧3진상조사보고서는 615쪽에 이르는 두툼한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 2003년 발간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4,000권을 발간해 정부기관, 국회, 전국 국‧공립 도서관, 대학, 언론기관, 현대사 연구자 등에게 배포했다. 진상조사보고서 발간의 실무 책임을 맡았던 나는 두 분에게 만큼은 이 책을 직접 전달하고 싶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추미애 국회의원이었다. 두 사람은 진상보고서 발간을 가능하게 한, 4‧3특별법을 제정하는데 혁혁한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간혹 그 시대에 김대중 대통령이나 추미애 의원이 없었더라면 과연 4‧3특별법이 가능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자서전에
유족대표 추도사가 첫 순서도 인상적 나는 지난 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2‧28사건 69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가 ‘변하는 2‧28’을 목격하게 되었다. 오는 5월 취임하는 총통 당선인은 2‧28사건의 재규명을 선언했고, 유족들은 이에 호응하는 분위기였다. 또한 기념식에 참석했던 현직 총통은 전격적으로 면담을 요구하는 유족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돌발적인 상황인데도 진지하게 경청하는 총통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문득 대한민국과 4‧3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제주4‧3과 흡사하다는 대만 2‧28사건이 69주년을 맞았다. 그 기념식이 2월 28일 오전 10시부터 2‧28국가기념관 야외정원에서 시작되었다. 한국 5‧18기념재단 이사인 나는 차명석 이사장과 함께 주최 측인 2‧28사건기념기금회 초청으로 이 행사에 참석했다. ▲5‧18기념재단 차명석 이사장(오른쪽)과 함께 기념식에 참석한 필자. 기념식은 유족 대표, 주최 측인 2‧28사건기념기금회 이사장, 총리 격인 장산정(張善政) 행정원장, 국가원수인 마잉주(馬英九
‘여론조사 무용론’이 제주정치권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4·13총선이 40여일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다. 각 정당별 컷오프와 경선에까지 사실상 ‘여론조사’가 최대 승부처로 등장하면서 제기되는 우려다. ‘과잉대표성’과 ‘표본오류’에 대한 심각한 문제점까지 노출, 전문가 그룹 등에서 “후보결정의 절대적 자료 활용은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며 경계하고 있다. ▶ARS 조사는 믿을 수 없다? = 예비후보 등록이 완료되고 설민심이 형성되기 직전 제주도내 대부분 언론사가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하지만 각 조사마다 그 결과가 달라 후보들은 물론 유권자들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 더욱이 설 이후에도 이어지는 조사에서 각 조사마다 모두 판이한 결과를 내놔 각 후보별 캠프 등은 “오히려 여론왜곡”이란 비판이 불거지고 있다. 대부분 상담원이 직접 전화를 거는 방식인 전화면접 조사와 자동응답장치를 이용한 ARS 조사에 대한 차이로 귀착되고 있다. 이 가운데 ARS 조사의 경우 그 신뢰도에 의구심을 사고 있다. 조사비용이 싸지만 기
기존의 폭동, 토벌 정당성 그대로 답습 2004년 7월, 보수단체가 낸 헌법소원 못지않게 국방부가 발행한 『6‧25전쟁사』 파문도 논란거리였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편찬한 이 책에 제주4‧3을 ‘무장폭동’으로 기술하는가하면 오류와 왜곡사례도 수두룩해서 큰 파장이 일어난 것이다. 국방부는 6‧25전쟁에 관한 정부 공식 역사서로 1967년부터 13년간에 걸쳐 『한국전쟁사』(전 11권)를 발간한 바 있다. 국방부는 『한국전쟁사』 발간이 오래 전에 있었고, 미국과 구소련, 중국 등에서 새로 발굴한 문헌자료와 학계의 연구 성과, 참전용사 4,000명의 증언자료 등을 반영해서 모두 18권의 『6‧25전쟁사』를 새로운 각도로 쓴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그 첫 권으로 ‘전쟁의 배경과 원인’을 발간한 것이다. ▲ 2004년 ‘전쟁의 배경과 원인’이란 제목으로 발간된 『6‧25전쟁사』 제1권. 그런데 이 책에 제주4‧3을 ‘무장폭동’으로 표기했다는 문제 제기가 4‧3관련단체로부터 나왔다. 4‧3위원회
4‧3특별법부터 문제 삼기 시작 제주4‧3이 오늘의 위상을 갖게 되기까지 많은 수난과 시련, 도전과 응전이 있었다. 4‧3진영은 2000년 4‧3특별법 쟁취를 시작으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법정보고서를 통해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이란 새로운 규정 획득, 대통령의 사과, 국가기념일 지정, 화해와 상생이란 슬로건 개척 등 수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반해 일부 보수단체들은 이런 변화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면서 극렬한 반대운동을 벌였다. 수구적 냉전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력은 과거 ‘공산폭동’으로 규정되어 지하에 갇혀있던 4‧3이 새로운 햇살을 받고 재조명되는 데 대해 강한 불만을 갖고 온갖 훼방, 폄훼활동을 전개했다. 그 시발은 4‧3특별법의 제정부터였다. 극우 보수단체들은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목적인 4‧3특별법 제정자체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대 사건으로 간주했다. 2000년 4월 6일, 보수 인사와 예비역 장성 출신 등 15명이 제주4‧3특별법이 위헌이라면서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
꿈 같은 ‘대통령 사과’ 현실로 2003년 10월 15일 4‧3진상조사보고서가 최종 확정되자 그 다음 화두는 대통령의 사과로 모아졌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미 대선 과정에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결과 국가권력의 잘못이 드러나면 사죄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또 대통령 취임 직후에 청와대 참모들에게 정부 차원의 입장 표명 방안을 연구하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대통령 사과가 실현될 가능성은 높았다. 이 업무를 맡은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구체적인 작업을 하고 있음도 감지됐다. 제주4‧3에 대한 국가원수의 사과라는 꿈같은 목표가 현실로 다가서자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난날 유족들과 만났던 일들이 주마등같이 스쳐갔다. 1988년 4‧3취재반장을 맡은 이래 많은 유족들을 만났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 우리들에게 그들 유족들의 청원은 한결같이 억울한 누명을 벗겨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을 옥죄는, 붉은 색으로 칠해진 이념적 누명을 벗기는 방안은 무엇일까. 우리 취재반은 이심전심으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와 그 결과를 토대로 국가의 사과를 받아내는 것으로 목표를 설정하게 됐다.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은 1997년
6개월간 수정의견 376건 들어와 제주4‧3위원회는 진상조사보고서를 의결하면서 6개월 이내에 새로운 자료나 증언이 나타나면 추가 심의를 거쳐 보고서를 수정한다는 조건부를 달았기 때문에 수정의견 제출기간을 설정해서 공고했다. 즉 2003년 5월 1일부터 9월 28일까지를 의견 수렴기간으로 정한 것이다. 이에 앞서 4월 말에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5백부를 발간, 관련 기관‧단체 등에 배포했다. 본문만 실었음에도 보고서는 582쪽 분량으로 두툼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4‧3진상조사보고서는 모두 3차례 간행됐다. 2003년 2월말에 초안이 나왔고, 4월말에 조건부 진상보고서가 인쇄됐다. 그리고 수정의견을 반영한 최종본이 그해 12월에 발간된 것이다. ▲ 4‧3진상조사보고서는 모두 3차례 간행됐다. 초안과 조건부 진상보고서, 최종 보고서 등이다. 그해 9월 말까지 모두 20개 기관‧단체‧개인으로부터 376건의 수정의견이 접수됐다. 예상했던 대로 새로운 자료나 증언에 의한 수정의견은 별로 없었다. 기획단이나 위원회 회의에서 치열하게 논의됐던 성격 규정이나 용어에